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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참여 작가 인터뷰 – 제인 진 카이젠

posted 2019.06.25

이별의 공동체 – 제인 진 카이젠



제인 진 카이젠 작가. 사진ⓒ 김흥규

제인 진 카이젠 작가. 사진ⓒ 김흥규

제인 진 카이젠(Jane Jin Kaisen, 1980-) 작가는 한국에서 태어나 덴마크에 입양된 시각 예술가이자 영화감독이다. 영화, 영상, 설치, 사진, 퍼포먼스 등을 아우르는 작가의 예술 실천은 광범위한 학제 간 연구와 다양한 공동체들과의 교류를 기반으로 한다. 개인적인 것과 집단적인 역사의 교차점에서 기억과 이주, 번역에 대한 주제를 탐구한다. 덴마크 왕립 예술학교와 UCLA에서 공부했고, 《모두를 위한 세계》(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2019), 《개성공단》(문화역서울284, 2018), 제주비엔날레 (2017), 《2 or 3 Tigers》(HKW, 2017), 《아시아 디바》(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2017) 등의 전시에 참여한 바 있다.


제인 진 카이젠, 〈이별의 공동체〉, 2019. 2채널 비디오 설치. ©Jane Jin Kaisen.

제인 진 카이젠, 〈이별의 공동체〉, 2019. 2채널 비디오 설치. ©Jane Jin Kaisen.

이번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의 새로운 작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합니다. 한국관 전시 기획에 맞추어 작업을 시작하신 건가요?


제 작업은 지속적인 리서치를 기반으로 자료 수집과 촬영, 아카이브 푸티지(footage)를 모으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것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계속됩니다. 이번에도 구체적인 방법은 한국관 전시 맥락을 고려하면서 결정되었지만, 작업에서 다뤄지는 주제들은 2015년 이후로 계속 연구하고 있던 것들입니다. 이번 작업의 경우에는 특히 세계 곳곳의 사람들과 함께 작업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흥미로웠습니다. 신작을 준비하면서 제주에 1년 정도 머물렀고, 지난 여름부터는 베를린에 살고 있습니다.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작업을 만들었죠. 포스트 프로덕션 단계에서도 스튜디오는 베를린에 있었지만, 그곳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독일인이 아니었어요. 작업에 관계된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각의 시차를 가지고 함께 작업했습니다. 작업 과정 자체가 디아스포라적인 셈이죠(웃음).


〈이별의 공동체(Community of Parting)〉라는 제목에 드러난 개념부터 차근히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공동체’라는 말을 쓴 것이 인상적인데요. ‘공동체’라는 것은 하나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에 디아스포라, 타자 등에 대한 사유에서는 지양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요?


‘이별의 공동체’라는 것은 김혜순 시인의 『여성, 시하다』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입니다. 김혜순 시인은 이번 작업에 등장하는 여러 화자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이별의 공동체’를 제목으로 꺼낸 것은 그 말이 작업이 만들어내는 감각들을 아우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여성, 시하다』는 2017년에 출판된 김혜순이 쓴 시학에 대한 텍스트들을 엮은 책인데, 이번 신작의 핵심적인 테마인 ‘바리’ 신화에 대한 영감을 그곳에서 얻기도 했습니다. 이전 작업들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예전부터 샤머니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바리는 한국의 샤먼인 무당의 조상과 같은 존재입니다. 바리 신화와 무당들의 제의를 살펴보면 ‘이별의 공동체’라는 개념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드러납니다. 한국 샤먼들의 제의, 그러니까 굿은 산 자들의 공동체적 공간에 죽은 자인 귀신들을 불러 모으는 행위입니다. 그렇게 펼쳐진 장(場)에서 산 것들과 죽은 것들,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들이 뒤섞입니다. 그렇게 무당의 제의를 통해 서로 다른 것들이 섞이는 일종의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것이죠. 그러나 그것은 순간적인 공동체, 즉 잠깐 모였다가 흩어질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별의 공동체라는 것은 이중의 의미를 가집니다. 만나는 것과 동시에 헤어지는 것 말입니다. ‘이별(parting)’이라는 말 자체를 보아도 그것은 단순히 헤어지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누군가 죽어서 저세상으로 간다고 할 때에도 우리는 ‘part’한다고 말합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표현을 쓰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른 세상 사이의 관계와 경계의 문제가 이 말에 또 겹쳐져있는 것이죠. ‘이별’이라는 것에도 여러 의미의 층위가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제인 진 카이젠, 〈이별의 공동체〉 설치 전경. ⓒKorean Pavilion, Venice Biennale 2019.

제인 진 카이젠, 〈이별의 공동체〉 설치 전경. ⓒKorean Pavilion, Venice Biennale 2019.

굿과 일시적인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한국의 굿은 마을잔치처럼 치러지기도 하잖아요.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가 한국에 왔을 때 김금화 무당의 굿을 직접 보고, 한국의 샤머니즘 의식은 아주 사회적인 점이 흥미롭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번 신작은 굿이 중심적인 구조를 만듭니다. 제주도의 고순안 심방(제주에서 무당을 이르는 말)이 직접 등장하시기도 합니다. 〈이별의 공동체〉 자체가 굿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여러 목소리들을 불러 모으고, 다양한 목소리들로 이별의 공동체를 만든다는 점에서 말이죠. 그리고 그것은 바리 신화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하는 행위가 됩니다. 모두 각기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이, 다른 목소리를 가지고, 다른 믿음으로 그 나름대로 바리 신화를 다시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 작업에서 이야기되는 바리는 하나의 인물(figure)이 아닙니다. 바리라는 존재는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로 말해지는 것 그 자체입니다. 나의 목소리, 김혜순의 목소리, 또 다른 시인의 목소리, 샤먼의 목소리, 고려인의 목소리, 재일조선인의 목소리, 인류학자의 목소리 등을 통해 말입니다. 이러한 디아스포라들의 목소리로 문자로 쓰인 역사 이전의 신화를 다시 말하는 것이 〈이별의 공동체〉의 핵심적인 줄기입니다.


바리 신화에 대한 재해석이 눈에 띕니다. 왜 바리 신화이고 그것을 어떻게 다시 읽어내신 것인가요?


제 작업에서 바리는 하나의 인물이 아니라 어떠한 감성(sentiment)입니다. 바리라는 말 자체에서부터 생각하면 그것은 사실 이름이 아니라 ‘버려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리 자체가 버려진, 지워진, 배제 같은 의미와 통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버린다는 것은 어떤 것이 전체 공동체에 속할 수 있고, 속할 수 없는지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리는 배제의 메커니즘에 대한 문제이고, 경계를 만드는 것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지정학적 경계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분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젠더 분할 같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바리 신화는 보통 그녀가 아버지에게 다시 생명을 가져주었다는 점에서 효녀 이야기로 해석되곤 합니다. 그러나 페미니즘적으로 그것을 다시 번역하면, 그녀는 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고 샤먼이 되기를 택하는 사람입니다. 바리는 쫓겨나고 죽기까지 하지만, 다시 부활하여 왕국의 후계자가 될 것을 제안 받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거부하지요. 왕이 되기보다는 이 세계와 저 세계 사이의 매개자가 되겠다는 선택을 주체적으로 하는 사람으로서의 바리를 다시 보아야 합니다. 또한, 바리 신화는 단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양한 시간과 공간을 품은 다른 기억들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인식의 윤리학, 혹은 감성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여성의 샤먼적 제의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제인 진 카이젠, 〈이별의 공동체〉, 2019. 2채널 비디오 설치. ©Jane Jin Kaisen.

제인 진 카이젠, 〈이별의 공동체〉, 2019. 2채널 비디오 설치. ©Jane Jin Kaisen.

샤머니즘과 여성, 디아스포라가 만나는 지점을 짚어내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것들 사이의 경계와 그 관계는 제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산 것과 죽은 것, 화자와 청자의 관계가 있고, 그러한 상황을 매개하는 위치가 존재합니다. 지금 우리 대화의 맥락에서는 샤먼이 그 위치에 있겠죠. 샤먼이라는 매개는 제의를 통해 서로 다른 것들을 연결합니다. 일시적인 공동체적 결속을 만드는 것이 바로 샤먼의 역할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은 헤어져야만 하는 이별의 공동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샤먼의 제의로 만들어지는 공동체는 그렇기에 고정되지 않고 계속 바뀌는 것이 됩니다. 굿이라는 제의는 그래서 항상 다시 창조됩니다. 굿이 치러질 때마다 또 다른 공동체가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바리 신화는 여성적 창조 신화 같은 것입니다. 거기에서부터 여성적 창조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의 문제를 던질 수 있습니다. 남성적인 창조, 그러니까 한명의 저자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모더니즘적 서사와 그 반대편에 있는 샤먼적인 창조가 있습니다. 샤먼적인 접근은 관계를 말합니다. 여기에서 바리 신화 자체가 설화이기에 하나의 원전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바리는 하나의 신화가 아닙니다. 수많은 변주가 존재하죠. 그래서 바리 신화로부터 출발한 저의 작업은 창조라는 남성적이고 모더니즘적인 신화를 깨뜨립니다. 저 말고도 수많은 예술가들과 시인들이 이미 바리 신화를 말한 바 있습니다. 저는 창조하지 않고, 그들의 목소리를 매개하고 담아냅니다. 여성적이고 샤먼적인 창조는 그래서 상호 간의 접촉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이는 예술의 창조라는 것 자체에 급진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이 됩니다. 더불어 영상 작업이 근본적으로 집단적인 창작의 과정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샤먼을 강조하는 것과 작가님의 근원적인 관심사이신 ‘번역’의 문제가 연결되는 점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샤먼도 일종의 번역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겠죠.


반가운 해석이에요. 저도 통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해주셨듯이 번역의 문제는 제가 2015년부터 박사 학위를 두고 연구하고 있을 정도로 저의 리서치의 중심에 있는 주제입니다. 샤먼은 산 것과 죽은 것 사이를, 성(聖)과 속(俗) 사이를 번역하는 사람입니다. 바리와 같이 그 두 세계를 오갈 수 있는 인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쓰인 역사 이전에 말해진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샤먼은 그러한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번역자였죠. 그 유산을 다시 ‘기억(recall)’해내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translation(번역)’이라는 말뜻을 파헤쳐보면 ‘carry across’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떠한 것을 가지고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공간적입니다. 여기에서 저기로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샤먼적인 것에서 생각하면 단순히 공간적인 것을 넘어 시간적인 것으로서의 번역까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때를 지금으로 가지고 오는 것이죠. 샤먼은 시간적인 번역자이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샤먼의 번역은 ‘기억’이라는 것과 다시 연결됩니다. 샤먼은 기억의 보관자이면서 전달자, 그리고 번역자인 것입니다. 또한, 기억 자체가 어떠한 방식의 번역입니다. 샤먼은 결코 역사에 쓰인 적 없는 기억의 파편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기억하기는 일종의 실천입니다. 그것은 글로 쓰인 논리에 반하는 말의 논리와 몸의 논리를 담아냅니다. 쓰인 역사에 대별되는 것으로서의 말해진 역사와 샤먼이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이것은 페미니즘적인 실천과도 연결되는데, 글과 논리의 역사가 아니라, 몸과 기억을 다시 되돌려 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인 진 카이젠, 〈이별의 공동체〉, 2019. 2채널 비디오 설치. ©Jane Jin Kaisen.

제인 진 카이젠, 〈이별의 공동체〉, 2019. 2채널 비디오 설치. ©Jane Jin Kaisen.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작업도 바리신화에 대한 동시대적 번역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비판적으로 생각하면 번역의 식민주의적 속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제국의 언어인 영어로 이야기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죠. 2011년 오르후스(Århus)에서의 개인전 《반역의 번역들(Dissident Translations)》에서 파생되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번역은 다양한 층위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말씀하셨듯이 번역이라는 것은 식민주의적 프로젝트이기도 합니다. 타자의 것들을 번역하는 일은 그 자체로 안과 밖을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하고, 배제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번역에는 식민주의적이고 폭력적인 차원 또한 포함됩니다. 하지만, 제가 번역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그것이 다른 것으로 번역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다른 번역은 제국의 중심지가 아닌, 변방에서 일어나는 행위입니다. 제국의 중심지에서는 번역이 필요가 없거나, 다른 번역이 잘 이루어지지 않겠지요. 변두리의 것들에서 다르게 번역될 가능성이 열립니다. 제가 예술적으로 번역에 가지는 관심은 그러한 것에서 비롯됩니다.


〈이별의 공동체〉에 어떤 목소리들이 등장하는지도 궁금합니다. 그리고 목소리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제주도가 중요한 지역으로 나오기 때문에 고순안 심방의 목소리가 중요한 분량을 차지합니다. 심방의 목소리와 제주 4·3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겹쳐지고, 거기에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이 함께 다뤄집니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여성들도 등장합니다. 그들은 러시아말로 이야기를 하죠. 일본에 있는 조선인 여성들도 등장하는데, 그들은 일본어로 이야기를 합니다. 이처럼 다양한 세대에 걸쳐, 다양한 언어로 말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목소리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 바리 신화로부터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데요. 바리 신화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당연히 국가(nation)라는 것이 형성되기 이전의 것이고, 그러니 식민주의와도, 근대와도 아주 먼 거리를 가지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면, 그것은 쓰인 대문자 역사 이전에 말해진 것들에 대한 것입니다. 또한 바리 신화가 지역별로 다른 버전이 존재한다는 점이 저에게는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이번 제 작업에는 제주의 고순안 심방뿐 아니라, 탈북자인 북한 무당도 등장합니다. 그는 두만강 근처에 살던 무당인데, 브로커를 통해 중국을 거쳐 한국에 왔다고 합니다. 그러한 디아스포라적 존재를 통해 지금의 지역적, 국가적 경계를 뛰어넘는 것으로서의 구술과 설화, 신화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상이 1시간이 넘는다는 점을 짚어야 할 것 같습니다. 미술 전시라는 맥락, 특히 비엔날레에서 1시간짜리 영상을 관객들에게 모두 전달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물론 다 보면 좋지만, 중간부터 봐도 상관없도록 편집했습니다. 관객들이 중간에 전시장에 들어와 몇 부분을 보지 못해도 어떠한 경험을 가져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면 어떤 흐름에 몸을 던지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파동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몰라도 그 흐름 속에서 어떠한 경험을 할 수 있듯 말입니다. 또한 영상의 구성이 굿의 형식을 따르고 있기도 합니다. 제주에서 고순안 심방을 만나 다양한 굿을 보았습니다. 그중에서는 며칠에 걸쳐 진행되는 것도 있었습니다. 하루에 10시간도 넘게 의식이 치러지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정말 ‘트랜스’한 순간이 찾아오곤 합니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오가는 것 말이죠. 또한 굿에는 계속 제의적인 순간의 연속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속적이고 사회적인 부분도 있지요. 제 영상에도 섬세하고, 감각적이고, 제의적인 장면들만 이어지지 않고 건조하고 덤덤하게 정보를 주는 장면들이 함께 있습니다. 이러한 식으로 영상의 형식이 굿의 형식을 따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문제라 조심스러울 수도 있는 질문을 드립니다. 한국에 다시 돌아와 작업을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태어나 생후 3개월 때 입양되었습니다. 그리고 2011년에 한국에 처음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사실 한국을 보고 싶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방문은 저에게 개인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던 것들을 모두 재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거든요. 그것은 저의 정체성과 관련된 근원적인 질문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제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그 자체로 저의 정체성에 균열을 내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문들에 대한 답을 작업을 통해 조금씩 찾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마침 국제적으로 디아스포라 커뮤니티가 활성화되기 시작할 때였어요. 그곳에서 다른 입양아 출신의 활동가들, 작가들을 만났습니다. 그때의 경험이 작업으로 구체화된 것이 〈여자, 고아 그리고 호랑이(The Woman, the Orphan, and the Tiger)〉였습니다. 제주 4·3사건과 관련된 프로젝트들은 개인적인 트라우마와 역사적인 트라우마를 교차시키며 제주도라는 공간을 다시 보는 작업이었습니다. 이러한 작업들이 근원적인 질문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답은 주지만,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바리 신화를 탈식민적인 비전에서 재고하는 새로운 작업이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또 다른 대답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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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원고는 미술세계 2019년 6월호에 수록된 것으로,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미술세계와 콘텐츠 협약을 맺고 게재하는 글입니다.

권태현

미술세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