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덕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작가 권하윤을 소개한다. 그는 역사 혹은 타인의 경험, 기억을 3D 애니메이션이나 VR 영상, 사운드 설치 등으로 재구성하여 관객에게 새롭게 창조된 픽션을 전달한다. 현실과 가상, 실제와 허구의 영역이 혼재하는 권하윤의 픽션은 관객에게 기억의 기억이면서도 경험의 경험으로 존재한다. 첫 화자에서 시작된 기억과 경험은 무한히 확장되어 간다.
권하윤 1981년 출생했다. 프랑스 보자르 낭트에서 조형예술과 학사와 시각예술 석사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현대미술 스튜디오 르 프레누아에서 석사과정을 밟았다. 2013년에 열린 《The Fictional Line》을 포함해 7차례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주요 기획전에 다수 참여했다. 프랑스 팔레 드 도쿄 신인작가상(2015), 제62회 오버하우젠 국제 단편영화제 금상 수상(2016), 제8회 두산연강예술상(2017), Prix Arts Electronica(2018) 컴퓨터애니메이션 특별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프랑스에서 작업 중이다.
작가 권하윤은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활동하는 영화감독이자 미디어 아티스트이다. 그는 역사와 개인의 기억, 현실과 허구의 양가적 관계를 묻고 영토와 경계의 관계를 탐구하는 영상을 제작하여 이를 가상현실,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해왔다. 프랑스 파리의 팔레 드 도쿄(2017)와 서울의 두산갤러리(2018)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파리 퐁피두센터의 다큐멘터리 영화제(Cinéma du Réel Festival, 2014), 독일의 제62회 오버하우젠 국제단편영화제(International Short Film Festival, 2016), 뉴욕 현대미술관의 닥포트나이트 영화제(Doc Fortnight, 2017) 등 다양한 영화제에 초대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 및 서울시립미술관의 기획전과 한반도 비무장지대와 접경지역 연구를 바탕으로 한 동시대미술 프로젝트인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Real DMZ Project)’에도 참여했다.
파트리크 모디아노의 소설을 읽다 보면 등장인물들은 파리의 골목길을 헤매며 지나간 기억들을 추적한다. 실제로 존재했던 거리의 옛 이름, 지금은 사라지거나 변형된 건물들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과거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주인공의 공간에 대한 생생한 기억의 서술과 더불어 일기, 사진 수첩, 전화번호부처럼 아카이브적 소품을 자주 등장시킴으로써 자신의 기억에 진정성을 부여하고 기억의 불확실성에 관한 공간적인 보상을 뒷받침한다. 사실, 소설을 읽는 누군가는 파리의 골목 구석구석을 잘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경험해 본 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 주인공이 하는 구체적인 장소에 관한 집요할 정도의 설명은 나를 타인의 과거로 인도한다. 독자는 현재와 과거, 현실과 허구에 의문을 품으면서 시간의 배경을 착각할 수는 있어도 적어도 그 공간만큼은 생생하게 실감한다.
권하윤의 작품 〈489년〉(2015-2016)은 분단된 남한과 북한 사이에 설정된 비무장지대(DMZ)에 매설된 지뢰를 모두 제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의미한다. DMZ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VR 헤드마운트를 통해 감상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애니메이션’ 혹은 가상현실 영상작품으로 분류된다. DMZ라는 약어는 수도 없이 많이 들어봤지만, 사실은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분명 존재하지만 절대 접근할 수 없는 비현실적 공간이다. 한국전쟁 이후, 무장을 가속했던 공간이면서 역설적이게도 사람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에게 유례없는 생태낙원이 된 공간이다. 이 특별한 공간에서 오랜 시간 근무한 전직 군인의 기억을 바탕으로 권하윤은 DMZ의 실사 이미지를 배제한 채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흐릿하고 불안하면서도 아름다운 공간으로 그려냈다. “일단 DMZ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라는 군인의 내레이션을 따라 과거로 거슬러가는 기억 행위는 시간의 불가역성에 반하는 일이지만 VR을 착용한 관객은 군인의 시선을 따라 물리적 철칙을 거스를 수 있다. 가상현실을 통해 생생하게 경험하는 이 상상적 공간은 집단의 역사가 축적된 공간이면서 동시에 한 개인의 기억이 담긴 주관적 공간이다. 이곳을 경험한 사적 기억과 역사적 기억이 만나 다층적인 의미를 발생시키며 결국 개인과 국가를 넘어선 인간의 기억을 예술로 환기시킨다.
현실과 환상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자신의 영역을 넓힌다. 세계는 끊임없이 연장된다. 기억 또는 환상이 그저 한 개인에게 귀속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환상은 다수의 믿음으로 연장되어 현실과 충돌한다. 영토 위에는 국가 간의 경계를 알리는 어떠한 선도 실재하지 않는다. DMZ의 경우, 기념품이 되어버린 낡고 녹슨 철조망만이 남과 북이 서로 약속한 금단의 땅임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과의 분단을 ‘실체’라고 생각하기보다 허구적으로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환상의 경계는 현실에 영향을 준다. 만약 그 경계를 침범하려 한다면 현실의 총알이 날아와 실질적 영향을 줄 것이다. 가상의 경계 넘기를 시도한 〈489년〉은 우리가 그 환상의 경계를 경험할 수 있게 한다. DMZ 근무자의 기억과 권하윤의 작업으로 만들어진 상상의 DMZ는 실제의 그 지역과 완벽히 같은 공간은 아니지만, 현실에 덮어씌워진 그 가상의 선을 가시적 현실로 끌어내린다. 또는 현실세계를 가상의 시공간으로 연장시킨다.
북한의 프로파간다 마을인 기정동을 재구성한 〈모델 빌리지〉(2014)역시 우리에게 상상 속 존재일 수밖에 없는 북한의 허구적 측면이 강조된다. 북한 기정동의 모습을 무빙이미지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조경순 감독이 연출한 북한 영화 〈도라지꽃〉(1987)에서 대사를 빌려와 영화적이고 공허한 유토피아를 더욱 강조했다. 파주의 도라전망대에서 관찰할 수 있는 기정동은 휴전협정 이후 북한이 남한에 보여주기 위해 조성한 선전용 유령 마을로 실제 거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작가는 기정동 실사 촬영 허가를 받기 위해 2년이라는 시간을 소요했지만, 촬영 허가는 이미 기정동의 모습을 상상해 투명 플라스틱 모형 빈집을 제작해 촬영작업이 다 끝난 뒤에야 이루어졌다. 이 작업을 완성하고 나서 수개월 후 남한 측 최북단 지역에서 기정동을 촬영할 수 있게 되었지만, 실제로 촬영한 기정동의 이미지는 작가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모형 작업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보르헤스의 단편에 등장하는 이른바 ‘틀뢴주의자’들이 가상으로 만들어낸 국가 ‘우크바르’라는 개념이 후세 사람들에 의해 우연히 백과사전에서 발견되면서 실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허구의 존재가 끝내 현실과 충돌하고 현실을 붕괴시킨 것처럼 상상에만 의존해 재구성한 〈모델 빌리지〉는 오히려 기정동의 본질을 꿰뚫는다고 볼 수 있다. 사실상 영화의 세트와도 같은 허상 마을인 기정동의 실사는 마을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허구성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모델 빌리지〉는 실재하는 기정동보다 본질적 측면에서 더욱 기정동답다. 현실이 허구에 밀려 붕괴되는 것이다.
권하윤의 영상작업에 등장하는 공간은 마치 부유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허공에 떠있는 듯한 이미지들은 실질적 경계를 더욱 모호하게 한다. 혹은 의도적으로 대상을 모호하게 한다. 〈판문점〉(2013)은 공동경비구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높이 7cm, 너비 40cm의 시멘트로 그려진 군사분계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의 군인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곳. 작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실사 촬영 대신 애니메이션으로 이곳의 모습을 재구성했다. 마주보는 4명의 군사는 ‘4인을 위한 발레’라고도 불리는 사뮈엘 베케트의 〈쿼드〉 안무를 행하며 정사각형의 도형 안에서 서로간의 대화나 사건 없이 오직 정해진 궤도를 따라 반복적인 움직임을 지속한다. 마치 적외선 열감지카메라로 촬영한 듯한 이미지는 붉은색 열만 감지할 뿐 군인의 소속은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꿈속에선 명확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잠에서 깨어나면 안개처럼 흩어져 버리지만 〈판문점〉에선 오히려 반대의 작용이 일어난다. 현실에선 명확해 보이던 남과 북의 경계가 서로의 공간을 이동하며 빙글빙글 춤추는 인간의 체온에 의해 지워지고 이데올로기마저 모호해진다. 〈증거부족〉(2011)에서 모형 마을 자체가 투명하고 가벼운 소재로 제작되고 이 모형들 자체도 흑백 배경 안에서 마치 떠다니는 형상처럼 보이게 한다거나, 〈489년〉에서 DMZ의 철문이 열리면서 입장하는 순간 시공간 자체가 부유해버리는 모습, 모호한 이미지의 의도적인 사용은 현실과 이상, 존재와 부재, 실제와 환영의 경계를 넘나들게 한다.
권하윤은 타인의 경험을 디지털 기술로 재구성한다. 특히 VR의 경우, 단순한 이미지를 넘어 공간성을 포함하는 장치로 몰입형 가상현실을 가능하게 하고 이미지와 관객의 거리감을 좁혀 밀접하게 한다. 타인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전달되는 내레이션은 관객과 화자 사이에 공동의 공간을 형성하는 데에 일조한다. 작가의 초기작 〈증거부족〉은 VR 작품은 아니지만 조국 나이지리아를 탈출해 프랑스에 망명을 신청한 ‘오스카’라는 인물의 시선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제작한 3D 이미지의 애니메이션이다. 개인의 기억을 작가의 상상력에 입각해 재구성하고 정치적 상황과 개인적 서사를 탐구하며 경계와 국적에 대해 묻는 방식은 그의 초기작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관객은 영상이 보여주는 시선에 따라 오스카의 불안정한 상황에 몰입한다. 프랑스에 망명을 신청하기 위해 작성한 서류가 물질적인 증거 부족을 이유로 불허되는 과정을 관객은 오스카와 공통의 시선과 공간을 통해 경험한다. 기존의 작업과는 달리 경계가 이주, 국가적 관념들을 완전히 배제한 채 개인적 경험에 더 집중한 〈새(鳥) 여인〉(2017)은 타인의 젊은 시절 기억을 재구성하여 리얼리티와 픽션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가상현실 설치작품이다. 권하윤의 드로잉 선생이 경험한 과거의 환상적인 기억을 좇아 관객은 몸의 움직임에 따라 시공간을 만들어 나간다. 〈489년〉이 360도 회전의자 위에 앉아 의자나 시선의 움직임에만 의존해서 가상의 공간이 열리던 것과 달리 불과 1-2년 사이에 더욱 진보된 VR 기술은 사용자가 가상의 공간을 걸어 다닐 수 있게 했다. 작가의 의도처럼 가상의 공간에서 보이는 2m 밖의 시야는 흐리게 처리되고 관객이 걸어가야만 이미지는 점차 선명해진다. 관객은 VR을 통해 타인의 기억 속을 걷고 있지만, 자신이 경험의 주체가 되는 경험을 한다. 매 순간 관객의 상호작용으로 결정되는 경험의 흐름으로 인해 관객 스스로의 걸음은 현실과 가상공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