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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동희 - 현대미술도 우리 민족이었어

posted 2019.09.19


구동희 작가 ⓒ김흥규, 이미지 제공 아트선재센터

구동희 작가. 사진ⓒ 김흥규, 아트선재센터.

구동희의 개인전 《딜리버리》(7.20~9.1)가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렸다. 일상적인 것들에서 파생되는 감각들을 가지고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작업을 펼쳐온 그가 이번에 주목한 주제는 바로 ‘배달’이다. 피자와 치킨, 혹은 짜장면이 정석이지만, 이제 사실 거의 모든 것을 배달할 수 있다. 배달은 일상이 되었다. 무엇이든 스마트폰에서 이미지를 보고 누르면 금방 현관문 벨이 울린다. 우리의 생활을 바꾸고 있는 배달과 운송, 그리고 그것에 대한 감각들을 변주하며 구동희는 아트선재센터의 공간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그의 작업은 우리 삶에 가까이 있는 것들을 그러모아 농담처럼 비틀어 내지만, 그로부터 촉발된 사유는 시공간의 감각에 대한 첨예한 문제까지 나아가곤 한다. 새로운 작업을 중심으로, 이전 작업들에 대한 고민들, 작업 과정, 전시장의 디테일들까지, 구동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그의 작업을 톺아본다.


≪딜리버리≫ 전시 전경, 이미지 제공 아트선재센터

《딜리버리》 전시 전경. ⓒ아트선재센터.

이번 전시 준비 단계부터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서문에서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14》 전시의 〈재생길〉(2014)과 《샤르자비엔날레》에서의 〈재생길Ⅱ- 비수기〉(2017)가 언급되는데, 신작을 준비하며 이전 작업들을 염두에 두셨던 것인가요?


《딜리버리》와 이전의 작업들이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간 전체에 개입하는 대규모 설치 작업이라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재생길〉을 참조한 부분은 거의 없습니다. 특히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작업은 ‘올해의 작가상’이라는 미술 제도에 대한 코멘터리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다른 작업들과 연결시키기 어려워요. 물론 물리적인 공간이 먼저 주어져 있는 상황에서 작업을 펼쳐야 하는 상황 자체를 작업의 요소로 생각하는 방식은 통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해주신 것처럼 전시를 위해 주어진 공간의 조형이나, 건축적 요소들, 혹은 장소적 맥락을 특정한 방식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작업에 뒤섞는 것은 작가님의 설치 작업에서 중요한 측면으로 보입니다. 예컨대 〈재생길〉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의 공간과 근처 어린이 대공원의 롤러코스터를 연결하는 식으로 탈맥락화된 화이트큐브와 과천이라는 장소적 맥락을 교차시키는 방식이 그랬죠. 이런 연결이 만들어지는 작업 과정이 궁금합니다.


저는 스튜디오에서 작업한 것들을 전시할 공간에 옮겨 놓는 방식으로 작업하지 않습니다. 그런 규모의 스튜디오를 운영할 형편이 안 되기도 하고요. 규모 있는 공간에서 설치 작업을 하게 되면 컴퓨터를 앞에 두고 상상을 펼칩니다. 보통 가장 먼저 주어지는 것이 전시할 공간의 도면이기 때문에 그것이 작업의 첫 번째 단서가 되는 경우가 많아요. 도면을 두고서 이 공간에서 어떻게, 무엇을 보여줄지 계속 시뮬레이션합니다. 아주 비물질적인 과정이죠. 그렇기에 실제 공간에 작업을 설치하기 전에 물리적인 문제이든, 장소적 문제이든 상상한 것을 구현할 조건에 대해서 따지는 것이 중요한 과정이 됩니다. 설치 작업은 단순히 벽에 작품을 거는 것과 전혀 다르기에 모든 건축적 구조들 자체가 작업의 재료이자 조건이 된다고 할 수 있어요. 그 밖에도 실내와 바깥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비상구는 어디인지, 심지어 화장실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등 공간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조건들을 살펴봅니다. 작업의 구성에서는 기존 공간에 어떤 변화를 주어야 사람들이 다르게 감각할 수 있을지를 주로 생각하는 편이에요. 당연히 작업할 공간의 주변 장소를 사전 조사하는 과정도 거칩니다. 그러나 장소특정성을 절대적으로 염두에 둔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작업 과정에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강조하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전시장에 펼쳐낼 것들을 모두 모델링해보는 것인가요? 어떤 툴을 쓰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전시라는 제도와 여건이 가진 여러 가지 제약이 있기에 실제 프로덕션에서 제대로 구현될 수 있도록 하려면 모델링을 꼼꼼히 해야 합니다. 컴퓨터 기반 프리 프로덕션이 결과물의 조형성 자체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최근에 많이 느끼고 있어요. 물론 컴퓨터에서 구현한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방식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번 작업처럼 임시적 구조를 만들 때는 컴퓨터에서 먼저 상상했던 드로잉을 물리적인 현실로 꺼내면서 단순화 과정을 거치기도 합니다. 모델링 툴의 경우, 관객이 관람할 자리나 직선 체계 구성은 ‘스케치업’을, 곡면이나 축 변화가 발생하는 대상은 ‘라이노’를 주로 사용하고 있어요. 손에 쥘 수 있는 정교한 오브제를 만들 때는 라이노가 적합하고, 공간을 구성하고 배치를 할 때는 스케치업이 알맞습니다. 두 툴을 오가는 과정도 있죠. 공간적이고 건축적인 스케일과 손에 쥘 수 있는 것의 스케일은 각각 속해있는 시각적 체계 자체가 다르지만, 작업을 하다 보면 양측 전체를 마치 흙 주무르듯이 만들어 보고 싶은 욕망이 생기기도 합니다.


≪딜리버리≫ 전시 전경, 이미지 제공 아트선재센터

《딜리버리》 전시 전경. ⓒ아트선재센터.

토탈미술관의 《장르 알레고리-조각적》전시의 〈더블〉(2018) 같은 경우 ‘스튜디오 없는 조각가’라는 정체성(?)이 형식적으로도 드러나 흥미로웠습니다. 그런 태도 자체가 서울의 맥락이나 당대적 제작 형식에 대한 코멘터리라고 할 수도 있을까요?


그렇게 거창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작업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죠. 그보다는 전시라는 제도와 물리적 조건, 나아가 작품이 전시 전과 후에 존재 가능한 생태적 시간들을 생각합니다. 지정된 장소를 통해 작품이 공식화되는 물리적인 기간이 통상 한 달에서 길면 석 달 정도로 형성된 문화적 배경도 이젠 어디까지 유효한지 궁금하기도 해요. 이렇게 조성된 환경에 부합하게끔 일정한 질량과 부피를 지닌 대상을 보존하는 포장재, 물류 배송, 보험과 같이 부가적인 것들과 영구적 구조와의 관계 자체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영구적인 것을 만들기보다는 잠시 공간에 서식하며 시점이나 감각들을 비틀어내는 구조나 그 전후의 경로가 제 작업에서는 중요한 동인이기도 합니다.


이번 작업에서 아트선재센터를 피자와 연결시키는 것은 이전의 작업들과 또 다른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딜리버리》에서는 공간 구성에 있어 어떤 요소들이 고려되었나요?


《딜리버리》의 경우 아트선재센터의 전시장 도면이 피자와 닮았다는 형태적 유사성도 하나의 요소로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을 파생시킨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배달, 운송이에요. 저는 일상적인 것에서 작업의 동기나 관련 형상들을 찾아봅니다. 물건을 주고받는 배달은 이제 일상이 되었지만, 배달의 사이 공간은 우리에게 잘 보이지 않죠. 배달 과정에서의 움직임과 경로, 속도와 같은 감각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서 파생되는 감각들의 변주가 일어나는 공간을 구상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공간의 동선을 구획하는 작업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전시장에 들어선 사람들은 갈림길 앞에 놓이게 되고, 입구뿐만 아니라 전체 동선이 정체되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쉽게 훑어보고 나오는 것이 불가능한 구조를 만들고 싶었어요. 동선이 선형적이지 않으니 관객들이 제각각 다른 기억을 구성하게 되는 것도 고려한 부분입니다. 건축적 높낮이도 흥미롭고, 공간 구성과 작은 오브제들 사이 스케일의 낙차가 강조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몸을 움직여 지나다니는 건축적 스케일의 경로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스케일의 오브제들을 발견할 수 있게 하거나, 이 두 가지 요소가 혼성된 과장된 입체물들도 있습니다. 신체의 운동은 지나가는 공간에 놓인 물체들을 통해 상대적으로 지각되곤 합니다. 그 과정에서 무엇을 본다는 감각과 무언가를 한다는 감각의 교차를 생각했던 것이죠. 전시를 통해 환경 자체를 체험하는 것과 무언가를 들여다보는 것의 중간 지점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체험하는 것과 보는 것의 관계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저는 그 둘이 부지불식간에 변환되는 순간에 관심이 있습니다. 사실, 체험과 관찰은 시점의 이동과 같이 상대적인 문제라고 봐요. 대상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인지, 내가 대상에게 다가가는 것인지의 관계와도 연결될 것입니다. 전시를 보는 것을 둘러싼 관습이 있잖아요. 그림이나 조각 같은 전통적인 매체들은 보통 관조적 대상이 됩니다. 이때 전시 감상은 공간 자체보다는 그곳에서 특정 대상을 바라보는 것의 감각과 결부됩니다. 제 작업에서는 그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환경을 체험하는 것과 무엇을 바라보는 것을 뒤섞어 놓으려고 시도했습니다. 몸을 움직이는 과정에서 우연히 뭔가 보게 만드는 형식은 그런 고민들과 연결됩니다. 나아가 유사 건축, 조각, 구조 같은 것들을 생각했어요. 어떤 부분은 그냥 지각되고, 그 안의 어떤 부분은 더 들여다봐야 하는 식으로 격차를 만들곤 합니다. 공간을 구획하던 임의의 벽이나 길이 어떤 지점에서 무언가를 대상화하는 좌대나 유사 조리대처럼 전환되거나, 다시 높아진 위상의 시점에서 지표면 가까이 있는 오브제를 상체를 숙여서 봐야 하는 지점들도 있습니다. 때로는 아주 별것 아닌 것을 의도적으로 신줏단지처럼 보이게끔 하기도 합니다.


전시장 입구 쪽 벽에 삽입되어있는 영상이나, 가장 안쪽 비상구에 프로젝션된 영상 역시 말씀하신 방식과 연동되는 것인가요?


이번 전시에 포함된 영상들은 제가 단채널 영상만 보여주는 맥락과는 조금 결이 다릅니다. 기존의 영상 작업들은 화면 안에서 이미지가 작동하는 방식을 좀 더 반영하는 것에 비해 설치 내부에 배치되어 있는 이번 작업의 영상들은 전체 풍경의 일부처럼 작동합니다. 입구 쪽의 영상은 배달물이 손에서 손으로 왕래되는 찰나와 배달에 의해 이동당하는 사물의 입장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배달물의 관점에서 저장을 위한 작은 집 같은 냉장고, 이동되는 배달 박스의 내부시점을 찍은 것이죠. 그 작은 실내 공간들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이 실제 전시장으로 연결되게끔 이미지를 전시장 출입구에 배치하고자 한 것이에요. 영상은 서사보다는 문을 가진 다른 공간들이 열렸다 닫혔다하며 이어지고, 음식들이 들어갔다 나왔다, 보였다 안 보였다 반복하면서 리듬을 만듭니다. 그러한 리듬이 배달 오토바이의 시동 같다는 생각에 전시의 시작점이 되는 출입구 쪽에 영상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안쪽의 비상구에는 배달을 하는 라이더와 달리는 오토바이 시점의 영상이 재생됩니다. 전시장의 비상구는 원래 직원들만 출입하는 닫힌 통로인데, 문에 영상을 투사하여 전시장 밖 현실로의 확장된 경로를 상상한 것이죠.


≪딜리버리≫ 전시 설치 중 영상 스틸 이미지, 이미지 제공 아트선재센터

《딜리버리》 전시 설치 중 영상 스틸 이미지. ⓒ아트선재센터.

배달이라는 주제에서 파생되는 속도와 시공간에 관련한 이야기도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가 속도를 지각하는 것은 상대적인 문제입니다. 시계를 고안하기 이전의 시간에 대한 감각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실 시각 정보 없이는 시간의 추이를 알 수 없게끔 부추기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제 작업에서도 시간성과 공간성을 엮어내곤 하는데, 이미지로 접근해보면 제가 만들어내는 것들은 임의의 타임 트랙 위에 대상을 놓는 것으로 상정된 것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작동되려면 작업이 움직이거나 관객이 움직이거나 둘 중 하나는 해야 하죠. 한편으로는 기준으로 삼는 관념적인 주기성이 있다면, 그것을 반대로 뒤틀곤 합니다. 예컨대 빠른 속도를 가지고 있다면 느리게 지연시키거나 하는 식이죠. 《딜리버리》의 경우 배달 문화로 상징되는 속도 사회를 표상화한 것으로 오해받기도 하는데, 오히려 저는 전시의 문법으로 속도를 늘어뜨리는 것을 상상했습니다. 형태적으로는 유비될 수 있지만, 속도 등 상대적인 감각은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딜리버리≫ 전시 세부, 이미지 제공 아트선재센터

《딜리버리》 전시 세부 전경. ⓒ아트선재센터.

전시장 입구 쪽에 있는 캣 스크래쳐(cat scratcher)를 이용한 구조물들은 전체의 건축적 구조에서 유리되어 있습니다. 왜 그런 것인가요?


저는 그것은 ‘토핑 타워’라는 별명으로 부릅니다. ‘토핑 타워’들이 전시장에서 자연광을 받는 유일한 대상들입니다. 고양이들이 발톱을 긁거나 비비는 용도의 물건인데, 레디메이드 제품들이 다양한 곡면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봤는데, 고양이의 신체적 특수성에서 파생된 것이라 짐작했습니다. 고양이들이 꾹꾹 누르거나, 몸을 비비거나, 발톱을 긁는 것에 특화된 형태인 것이죠. 이것을 조합하면 재미있는 형태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 피자 위에 올라가는 재료들의 형태로 쌓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카드보드 박스와 동일한 재료를 축적했지만 다른 단위를 가진 파편적 형태를 띤다는 점이 이번 전시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빈 전시장을 처음 마주했을 때 거대한 피자 슬라이스 박스 내부에 갇힌 군상들이나 기념비적 음식들을 상상하기도 했고, 따라서 공간 전체를 카드보드 박스를 연상시키는 색으로 도색할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규모를 감안해서 그보다는 좀 더 밝은 색을 선택했더니 지금은 마치 신부화장용 21호 파운데이션 같은 색이 되어버렸습니다(일동 웃음). 전체 구조가 어쩌다 보니 인간 스케일의 캣 타워를 닮아버린 점도 있습니다.


≪딜리버리≫ 전시 세부, 이미지 제공 아트선재센터

《딜리버리》 전시 세부 전경. ⓒ아트선재센터.

저는 시계와 거울과 도면이 뒤섞인 장치를 올려다보는 구간이 이전 작업들이 생각나기도 하고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그 바로 앞에 한쪽으로만 투과되는 거울을 설치하기도 하셨고요. 저는 그 공간이 전체 전시의 누빔점처럼 보였습니다.


한쪽만 투과되는 거울을 쓴 것은 공간의 구조를 쉽게 파악할 수 없도록 하면서도 폐쇄적인 점을 상쇄하기 위함이었어요. 통로 코너벽의 아래 반쪽에만 거울을 설치해 부분만 보고 전체를 감각하는 것에 대한 시차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전시장 어디에서도 전체 구조를 볼 수 없어요. 가장 높은 곳인 오줌싸개와 전화번호의 위치로 올라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시장 구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올려다봐야 하는 지도이자 관객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이 있는 그 위치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실제와 달리 방위나 호로 되어 있죠. 저는 작업에서 안과 밖을 뒤집어 보거나, 일반적으로 내용물 없는 외피로 작동하는 미심쩍은 효과, 혹은 상대적으로 보이게 하는 환경의 일부분을 떼어와 다루기도 합니다. 시계 같은 경우는 도면 위에서 공간을 인식할 수 있는 프레임을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시계의 무브먼트에서 전시를 영위했던 공간의 시간을 상기할 수도 있고, 소화 시간,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 같은 것들을 생각할 수도 있어요. 시계 회전축이 전시 공간에서 지금 그것을 보고 있는 사람의 상대 위치를 나타냅니다. 〈재생길〉에서의 바둑판과 유사한 장치라고 할 수 있죠. 도면은 관객들이 봤던 시야나 지나간 경로들을 다시 상기시키기도 합니다. 숨겨놓거나 꼬아놓은 공간들이 있기 때문에 못 가본 곳을 발견할 수도 있고요. 조망자 관점에서 새롭게 보이는 것도 생깁니다. 커다란 피자 구조물을 직접 봤을 때는 보이지 않지만, 여인상이 놓인 위치가 피자조각을 한 입 베어 문 부분이라는 것을 보게 되는 식입니다.


숨겨놓았다는 이야기를 하시니 전시장 곳곳에서 사탕을 발견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긴가민가하며 열어보니 ‘증정용’이라며 사탕들이 들어있더군요.


사탕을 가져가는 것을 작품의 일환으로 생각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냥 제가 전시장에 계속 있을 수 없으니까 무례한 관객들을 위한 일종의 ‘찬스 기프트’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다른 전시에서도 가끔씩 뭔가 숨겨놓곤 합니다. 비가시적인 곳에 달콤한 것들을 숨겨 넣는 행위는 저에게 마치 미지의 관객과 조우를 기다리는 행위와 같습니다. 열어봐도 되는가 하고 헷갈리는 지점을 일부러 만들기도 합니다. 피자 구조물과도 통하는 점이 있어요. 올려다봐야 하는 감상용 작품과 신체가 유입되는 유사 계단을 섞어 관객들에게 스스로 선택할 여지를 주는 것입니다.


≪딜리버리≫ 전시 세부, 이미지 제공 아트선재센터

《딜리버리》 전시 전경. ⓒ아트선재센터.

그것뿐만 아니라 곳곳에 작은 계란 오브제들이 놓여있습니다. 대표적인 배달 음식인 치킨과 연결되기도 하지만, 게임에서 개발자들이 몰래 숨겨놓는 이스터에그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스터에그를 숨겨놓으면 이게 뭔가 잘못된 버그인지, 일부러 숨겨놓은 요소인지 헷갈리게 하는 재미도 있잖아요.


분명히 디스플레이 되어 있지만 작동하지 않는 공간을 만드는 것을 좋아합니다. 쓸모없는 계단을 만들어 오르락내리락하게 만드는 것도 그렇습니다. 아무것도 올라가 있지 않은 뒤집어진 좌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품의 식별을 유보하게 하는 지점을 만들기도 합니다. 일부러 기능적인 것을 거세해버리는 것이죠. 계단에서 물체를 감지할 때 울리는 “부재 시 문 앞에 놓아주세요.” 알림은 누구에게, 왜 하는 말인지, 무엇이 부재중인지, 뭘 놓아야 하는지 맥락이 전혀 없어요. 그 위치에서 알림은 오히려 발을 헛디디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안전용 경고가 되기도 합니다. 수신과 발신 행위의 주체가 전시 안에서 모호하게 중첩된 신호가 되도록 한 것이죠. 실제 공간 맥락에 의해 호출 대상이 불특정함에 따라 더 다양한 여지가 생기기도 합니다. 달걀 오브제들은 대표적인 배달 메뉴인 치킨과 인과 관계로 상징될 수 있는 닭의 앞뒤 시간, 혹은 남몰래 모아둔 ‘한 마리 더’ 같은 일종의 쟁취 욕망을 생각하게도 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이스터에그와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을 거예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너무 고칼로리 전시를 만들었습니다(웃음). 굳이 안 먹어도 되는데 또 먹게 되는 이상한 것이 있잖아요. 사실 너무 현학적이고 지적인 것 말고 일차적인 욕망을 다루어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입을 통해 왕복하는 보편적인 욕망의 대상을 멀면서도 가까이 다루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딜리버리》를 준비하면서 배달음식을 자주 많이 먹어서 살이 엄청 쪘습니다. 개강하기 전에 살이나 좀 빼야겠네요(일동 웃음).



※ 이 원고는 미술세계 2019년 9월호에 수록된 것으로,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미술세계와 콘텐츠 협약을 통해 게재하는 글입니다.

권태현

미술세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