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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식의 두 번째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과 그 명암

posted 2019.10.23



곽인식 탄생 100주년을 맞아 국내 및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곽인식 작품과 자료들을 모은 대규모 회고전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6월 13일부터 9월 15일까지 열렸다. 그는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하면서 사물 논의가 본격화되기 이전부터 물성을 탐구하고 후기에 보여준 회화에서도 독자적 성취를 한 중요한 작가로,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작품들이 대거 복원되어 선보였다는 점에서도 괄목할 만한 전시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작품세계를 담아내기에는 국내 전문가의 이해가 부족해 보인다는 지적이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는 대구미술관으로 넘어가 10월 15일부터 12월 25일까지 열린다. 계속되는 전시와 폭넓은 연구를 통해 곽인식이 타자로서가 아닌 ‘곽인식’ 그 자체로 인식되길 바란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전경 중 ‘균열과 봉합’(1960년대~1975년) 섹션 전시전경 〈작품 62-302〉 패널에 유리 73×103cm 1962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컬렉션 소장. 사진제공 월간미술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전경 중 ‘균열과 봉합’(1960년대~1975년) 섹션 전시전경 〈작품 62-302〉 패널에 유리 73×103cm 1962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컬렉션 소장. 사진제공 월간미술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재일작가 곽인식(1919~1988) 탄생 100주년 기념 회고전이 열렸다. 1985년 국립현대미술관 (당시 덕수궁)에서 ‘해외원로작가 초대전’의 일환으로 열린 회고전 이래 최대 규모다. 작가 사후 개최된 뮤지엄 급 전시가 2002년 광주시립미술관에서의 개인전 이후 17년 만인 만큼 이번 전시는 곽인식 예술의 실체와 그 성격을 확인해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곽인식은 충분히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작가다. 먼저 그 역시 대부분의 근대 작가들처럼 초기 행적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리고 모더니즘이나 추상이라고 하는 서구의 거대 서사에 묶여,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작품을 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그 측면이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또한 후배 작가인 이우환과 얽혀 모노하(もの派)로 읽히면서 그의 예술을 그 자체로 보지 못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모노하의 선구’ 또는 모노하의 일익을 담당한 작가’ 정도로 그의 의미가 축소되고 말았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 전시는 그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더 나아가 기존 미술사에 대한 재고를 요청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과연 충족될 수 있을까? 필자는 다소 회의적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곽인식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두 가지 논점을 제시하고 이번 전시의 가능성과 한계를 점검해 보고자 한다.


논점 1. 인간을 둘러싼 이야기


곽인식은 동년배 한국 작가들이 그러했듯 1930년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미술을 배웠다. 그러나 곽인식의 작품 활동은 광복 후에도 도쿄를 중심으로 펼쳐졌다는 점에서 그들과 다르다. 더욱이 그에게는 한국전쟁의 원체험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곽인식이 1950년대 도쿄에서 같이 활동했던 조양규1)처럼 사회 비판적인 성격의 구상작품을 추구했던 것도 아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전자가 모더니즘 계열이라면 후자는 리얼리즘 계열이라고 구분하기도 한다.2)


〈무리〉 1954년 제39회 〈이과전〉 출품작. 사진제공 월간미술

〈무리〉 1954년 제39회 〈이과전〉 출품작. 사진제공 월간미술

〈어디로 가?〉 1955년 제40회 〈이과전〉 출품작 사진제공 박순홍

〈어디로 가?〉 1955년 제40회 〈이과전〉 출품작 사진제공 박순홍

곽인식은 모더니스트일까? 모더니즘의 정의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겠지만 그의 초기 구상화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인간형상이 완전히 사라지고 추상화로 발전해 나갔다는 점에서 그렇게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화풍의 변화는 1950년대에 들어서 보다 두드러지는 경향을 보인다. 곽인식의 1954년 작 〈무리(群)〉와 1955년 작 〈어디로가?〉를 비교해 보면 불과 1년 사이에 작품의 양식이 확연히 달라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전후 일본 미술계의 흐름과 그 맥을 같이한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당시 일본에서 피카소의 예술적 유산을 둘러싸고 ‘입체파의 창시자’라는 관점보다 전쟁에 저항한 ‘휴머니스트’로서 그의 실천이 더 부각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3) 반성적 지평 위에서 예술의 본질 및 본연의 역할에 대한 재고는 지상 명령과도 같은 시대적 요청이었기 때문이다.


위의 연장 선상에서 1954년 당시 일본 미술계를 선도하고 있던 쓰루오카 마사오(鶴岡政男)는 젊은 작가들에게 서사성을 띤 어느 사건(事)을 그릴 것이 아니라 사물(物)로부터 기인한 ‘현실’을 다룰 것을 주문했다.4) 그가 말하는 ‘현실’은 넓은 의미에서 전쟁에 희생된 이들에 대한 살아남은 인간의 원죄 의식이다. 쓰루오카와 곽인식 사이의 직접적인 교류는 확인되지 않지만 이 둘의 작품에서 보이는 양식적 유사성은 분명하다. 이후 곽인식의 작품은 과격한 행위를 수반하는 앵포르멜을 거쳐 화면 위에 일상의 물건들을 부착하는 단계로 이행한다. 이때 그가 작품의 소재로 택한 사물은 철사, 너트, 바둑돌, 거울, 전구, 깨진 유리 등이었다. 언뜻 보아도 특별하지 않은 사물들은 그에게 도대체 무엇을 의미했던 것일까?


곽인식이 처음 유리를 깨뜨리기 시작한 시점은 1961년으로 올림픽을 앞두고 도쿄 일대가 대대적으로 재개발되고 있었을 때다. 각종 도시 폐기물들이 화면에 부착된 그의 작품에 대해 “소재 자체가 이야기하는 말”(요시다 요시에)5), “‘깨진 사물의 미학’을 제출하려는 상태”(나카하라 유스케)6) 등의 평가가 내려졌다. 하지만 이 무렵 그가 제작한 작품과 출품 내역을 꼼꼼히 살펴보면 몇몇 사건과 보다 밀접히 연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1960년 일본에서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던 북송사업7)과 한국의 4·19혁명이 그것이다. 1961년 상반기 곽인식은 월북 문제로 뒤숭숭한 재일 동포 사회를 결속시키기 위해 조국 통일운동을 전개한다.8) 그러나 5·16군사정변 이후 제정된 반공법으로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한번 깨지고 나면 원상태로 복구할 수 없는 유리를 어떻게든 다시 ‘하나’로 만들고자 한 곽인식의 시도는 조국의 현실에 직접 개입하지 못하고 부채 의식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그의 자화상이다. 그가 예술을 통해 마주하고 긍정하고자 한 현실은 조셉 러브(Joseph Love)의 다음과 같은 해석에서도 잘 드러난다. “파괴와 재건의 과정이 (…) 다른 재료로 만든 그의 작품에서도 계속되었다. 이 모든 작품은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 일본 미술계에서 흔했던 반예술의 공격성은 띠지 않고, 새로운 질서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였다.”9)


〈작품〉(사진 왼쪽) 캔버스에 유채 92×182cm 1958 유족 소장. 곽인식 초기 회화를 볼 수 있는 ‘현실 인식과 모색’ (1937~1950년대 말) 섹션 전시전경. 사진제공 월간미술

〈작품〉(사진 왼쪽) 캔버스에 유채 92×182cm 1958 유족 소장. 곽인식 초기 회화를 볼 수 있는 ‘현실 인식과 모색’ (1937~1950년대 말) 섹션 전시전경. 사진제공 월간미술


논점 2. 사물이 말하는 이야기


곽인식의 예술을 둘러싸고 가장 쟁점이 되는 이슈는 단연 모노하를 대표하는 작가 이우환과의 관계다. 이 둘의 관계는 한일 미술계 인사들 사이에서 꾸준히 문제시돼왔다. 1975년 미네무라 도시아키(峯村敏明)가 “곽인식이 자연발생적으로 밟아온 ‘사물’ 논리의 길을 이우환은 이 작품(〈관계항〉-필자)에서 매우 의식적으로 구조화한 것”10)이라고 정의를 내린 것이 그 발단이다. 이러한 해석은 이후 오광수를 필두로 여러 논자 사이에서 인용되며 곽인식과 이우환을 일종의 ‘선후 관계’로 파악하는 시각이 형성되었다.11) 그렇다면 이 비교의 당사자인 이우환의 곽인식에 대한 입장은 어떠할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곽인식 씨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를 ‘모노하’의 선조로 치켜세우지 않을 것이다. 그는 사물을 깨뜨리고 상처를 입혀서 훌륭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 내적인 전체성에 의해 지탱된 미적 완전체로 조금도 관계성과 외계성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아니다.”12) 그의 비평은 타당하다. 왜냐하면 곽인식 또한 이우환의 작품은 ‘설명’을 필요로하는 ‘조작’이라고 평한 뒤 자신의 작업은 그러한 조작 없이 깨진 유리를 다시 하나로 만드는 것이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13) 이처럼 이 둘은 서로 간의 차이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 둘의 접점을 찾기 위해서는 모노하가 태동하기 이전의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67년 이우환은 갤러리 신주쿠에서 그룹 겐쇼쿠(幻觸)14)의 전시를 관람하고 이 그룹의 리더 이시코 준조(石子順造)와 만나게 된다. 갤러리 신주쿠는 조선장학회 산하 갤러리로 당시 곽인식은 이곳에서 전시 기획을 담당하고 있었다.15) 곽인식과 이우환의 예술을 논하는 데 겐쇼쿠의 미술사적 의의는 크다. 먼저 전자의 경우, 현재 한일 논자들의 평가와는 다르게 모노하보다 겐쇼쿠와의 교류가 더 빈번했다. 실제로 그는 훗날 몇몇 겐쇼쿠 작가들과 함께 동인지 《사구루(さぐる)》를 창간하고 꾸려나가는 등 말년까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후자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이시코 준조는 훗날 그가 동경해 마다하지 않았던 〈트릭스 앤드 비전〉(1968, 도쿄화랑·무라마쓰화랑)의 공동 기획자이자 자신이 〈사물에서 존재로〉(1969)를 발표해 평단에 등단할 때 힘을 보탠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본 미술계에서 겐쇼쿠는 모노하에 앞서 활동한 중요한 그룹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겐쇼쿠 작가들은 착시를 통해 인지되는 대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작업을 추구했다. 그 조형상의 특징은 이면과 표면, 본체와 모사, 입체와 평면, 환상과 현실, 오브제와 회화 등 이항대립 도식이다. 같은 시기에 제작된 곽인식의 〈샘〉 연작에서도 이질적인 두 요소의 병치가 나타난다. 흑과 백, 합판과 놋쇠, 화면의 중앙부에 창문처럼 열린 공간의 이면과 표면 등. 이러한 그의 작품에 대해 이우환은 “고요함과 움직임, 존재와 무, 삶과 죽음 등이 동거하는 모순율이 가득한 형용하기 어려운 신체로서 보는 자 앞에 돌출된 느낌”16)이라고 평한 바 있다. 그가 겐쇼쿠와 곽인식의 작업을 동일한 지평에서 이해한 뒤 자신의 조형 논리를 심화시켜 나간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미니멀아트의 등장 이래 날로 작가의 역할이 의문에 부쳐지고 있던 1969년, 곽인식은 〈사물과 말〉(1975년 〈무제〉로 제목 변경) 연작을 발표한다. 이 연작은 창호지를 팽팽하게 만들기 위해 물을 바르는 원리에 의해 완성된다. 즉 수분기가 남아 있는 종이의 표면에 뾰족한 도구로 원을 그으면 물이 증발하면서 테두리 쪽으로 종이가 잡아당겨지는 것이다. 이때 완전히 떨어지지 않은 원의 아슬아슬한 상태를 두고 그는 “일체의 어떤 표현 행위를 멈추고 사물이 발하는 말을 듣고자 하는 것이다”17)라고 말한다. 이 발언은 그의 앞선 작품들이 지닌 무거운 시대성으로부터 한결 자유로워 보인다. 게다가 환영에 기대지 않고 지극히 단순하고 무상한 행위만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동시대 모노하와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그가 모노하 작가들과 다르게 퍼포먼스라든가 작품이 놓이는 공간의 문제에 무관심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후 긴 슬럼프에 빠져 작품 제작을 중단한 곽인식의 작품세계가 재조명되기 시작한 시점은 1975년이다. 한일 작가들이 모노하적인 설치작품에서 회화로 그 관심사를 옮겨가고 있던 그때 말이다.


1967~68년에 제작된 작품 전시전경 중 〈샘〉 연작. 〈샘(돌)〉(사진 왼쪽)패널에 동판 각 162×130cm 1968 유족 소장)과 〈샘(하늘)〉(오른쪽 벽면 왼쪽)패널에 동판 182×183cm 1968 도쿄갤러리Q 소장 〈샘(별)〉(오른쪽 벽면 오른쪽)패널에 동판 지름 130cm 1968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제공 월간미술

1967~68년에 제작된 작품 전시전경 중 〈샘〉 연작. 〈샘(돌)〉(사진 왼쪽)패널에 동판 각 162×130cm 1968 유족 소장)과 〈샘(하늘)〉(오른쪽 벽면 왼쪽)패널에 동판 182×183cm 1968 도쿄갤러리Q 소장 〈샘(별)〉(오른쪽 벽면 오른쪽)패널에 동판 지름 130cm 1968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제공 월간미술


‘의문’에서 출발해야 하는 회고전


그러면 전시 구성을 통해 곽인식 예술의 면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첫 번째 섹션 ‘현실 인식과 모색: 1937년~1950년대 말’이다. 굴곡진 근현대사를 거친 우리나라의 근대 작가들 중에 한국전쟁 이전의 작품이 온전히 보존된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곽인식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당대를 살아간 작가에게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사이 혹은 남과 북이 각각 정부를 수립하는 1948년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알아보는 일은 그 작가의 성향을 일차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척도다. 이 때문에 1940년대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콘텍스트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시에서는 곽인식 예술의 초기가 매우 거칠게 다뤄지고 있다. 설령 남아 있는 작품 수가 적더라도 그가 재도일(渡日)하는 1949년 이전과 이후의 작품 활동은 분리해서 다루는 것이 적절했다.


두 번째 섹션 ‘균열과 봉합: 1960년대~1975년’도 위와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전시 기획의 성격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이 섹션의 중심 화두는 위에서 짧게 다루었듯 곽인식의 실천가로서의 면모다. 하지만 그가 펼친 조국통일운동과 깨진 유리를 집중적으로 작품화하는 시기는 1961년을 기점으로 이후 3, 4년 동안이다. 그러므로 ‘균열과 봉합’은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전반을 모두 포괄하는 키워드로 보기 힘들다. 더군다나 그는 1970년부터 1974년까지 작품 제작을 중단했다. 오히려 이 섹션에서는 곽인식의 작품세계를 논하는 데 논란을 낳고 있는 모노하와의 관련성을 정리하는 시도가 필요했다고 생각된다. 작가 사후 계속 반복되고 있는 그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사물에서 표면으로: 1976년대~1988년’ 섹션이다. 이 시기는 앞선 두 섹션에 비해 연도별로 작품이 고르게 전시되어 있다. 돌, 종이, 점토, 나무 등 여러 소재의 표면에 관심을 쏟은 곽인식의 말년 작품이 지닌 특징을 효과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특히 중앙홀에 전시된 밝은 색조의 대형 회화와 점토작품은 옆 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젊은모색 2019: 액체 유리 바다〉의 출품작들과 견주어 보아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필시 1980년대 곽인식이 ‘포스트모던’이라고 일컬어지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특정한 매체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작품세계를 선보였기 때문이리라. 그 어느 때보다 다작을 한 시기인 만큼 훗날 그의 작품이 다른 작가들의 것과 함께 고찰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다면 곽인식 예술에 관한 담론은 보다 풍부해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고로 회고전이란 어느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역사적인 시각에서 되돌아보는 형식의 전시다. 그리고 새로운 담론이 생겨날 수 있도록 뮤지엄의 주된 역할이기도 한 ‘소장품 연구’가 이를 뒷받침해 대중에게 그 연구 성과를 발표하는 전시를 일컬을 테다. 그러한 점에서 이번 전시는 과거에 열린 곽인식 관련 전시와 차별화하기 위해 그 무엇보다도 작품과 작품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는 일이 중요했다. 세상의 진리를 탐구하는 일이 모두 그러하듯 그 출발점은 기존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는 힘이다. 이 전시를 계기로 곽인식의 작품세계가 향후 한일 미술사학계에 조용한 반향을 낳기를 기대해 본다.


〈무제〉 종이 85×85cm 1969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제공 월간미술

〈무제〉 종이 85×85cm 1969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제공 월간미술


1)조양규는 광복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한 작가다. 1950년대 노동자의 궁핍한 삶과 재일동포들의 현실을 다룬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1960년 북송선을 타고 월북했다.
2)고성준, 〈재일 한국인의 미술—일본현대미술사 속에서〉, 최재혁 옮김, 《아리랑 꽃씨: 아시아 이주 작가》(국립현대미술관, 2009), p. 66.
3)오타니 쇼고, 〈큐비즘과 일본〉, 《아시아의 큐비즘—경계 없는 대화》(도쿄국립근대미술관, 005),p. 145.
4)오야마다 지로 외 4인, 〈좌담회 ‘사건(事)’이 아닌 ‘사물(物)’을 그린다는 것〉, 《미술비평》 제26호, 1954년 2월, pp. 17, 21-22.
5)요시다 요시에, 〈어느 재일한국인 화가〉, 《사상의 과학》 제78호, 1961년 10월, p. 80.
6)나카하라 유스케, 〈화랑 전시평〉, 《삼채》 제149호, 1962년 4월, p. 77.
7)북송사업은 적십자국제위원회가 재일동포들의 귀국에 대한 자유의지를 확인하고 시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약 10만 명이 일본에서 북한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이 사업은 외국인을 방출하고자 했던 일본과 대규모 인력 수급이 필요했던 북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이뤄진 것 임이 밝혀졌다. 테사 스즈키-모리스, 《북한행 엑서더스: 그들은 왜 ‘북송선’에 타야만 했는가?》, 한철호 옮김(책과함께, 2008) 참조.
8)1961년 곽인식은 4·19혁명 1주년을 맞아 도쿄에서 개최된 〈조국평화통일 남북문화교류촉진 문화제〉의 준비위원을 맡았다. 남한을 따르는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과 북한을 따르는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계통의 미술인들이 의기투합해 두 차례 개최한 〈연립미술전〉도 이 문화제 행사의 일환이었다.
9)조셉 러브, 〈곽인식의 예술세계〉, 백승길 옮김, 《곽인식 작품전》(현대화랑, 1982), n.p. 이 인용문은 필자가 전시도록에 같이 게재된 원문을 참조해가면서 번역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10)미네무라 도시아키, 〈어느 원점〉, 《곽인식전》(오사카포름화랑, 1975), n.p.
11)미네무라의 곽인식 해석을 인용한 글로는 오광수, 〈곽인식 物(모노)과 표면의 문제—그의 최초의 국내전을 계기로—〉, 《화랑》 제35호, 1982년, 21-26; 강태희, 〈곽인식 론: 한일 현대미술교류사의 초석을 위한 연구〉, 《한국근대미술사학》 제13집, 2004년, pp. 197-231이 있다.
12)이우환, 〈기원 또는 모노하에 관해〉, 《미술수첩》 제706호, 1995년 5월, pp. 256-257.
13)곽인식, 〈표면을 추구하면서 표면을 초극한다—재일화가 곽인식 씨와의 대담—〉, 대담자 이일, 《공간》 제180호, 1982년 6월, p. 30.
14)1966년 시즈오카에서 결성되어 1971년까지 활동했다. 미술평론가 이시코 준조(石子順造)를 중심으로 고이케 가즈시게(小池一誠), 니와 가쓰지(丹羽 勝次), 마에다 모리카즈(前田守一), 스즈키 요시노리(鈴木慶則), 이다 쇼지(飯田昭二) 등이 그룹을 이루었다.
15)1967년부터 1968년까지 운영된 갤러리. 당시 이우환은 조선장학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현재 갤러리신주쿠에 대한 정보는 조선장학회에서도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다. 예컨대 교토의 곽덕준은 “1967년 갤러리신주쿠에서 곽인식 선생님을 통해 도쿄의 미술계 인사들을 소개받았다”고 말했다. 곽덕준과의 인터뷰, 일본 교토 시조역 카페 피에몬테(ピエモンテ), 2018년 4월 21일.
16)이우환, 〈피가 통하는 도망갈 곳 없는 예술, 곽인식의 작품에서 생각나는 것들〉, 《판화예술》 제24호, 1979년(겨울), p. 140.
17)곽인식, 〈사물의 말을 듣는다〉, 《미술수첩》 제314호, 1969년 7월, p. 45.



※ 이 원고는 월간미술 2019년 10월호에 수록된 것으로,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월간미술과 콘텐츠 협약을 통해 게재하는 글입니다.

박순홍

미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