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현시원 큐레이터, 시청각 대표
남화연 작가가 2012년부터 무용가 최승희와 함께해 온 작업의 여정을 정리하는 전시가 아트선재센터에서 진행 중이다. 최승희의 안무와 동명인 《마음의 흐름》이란 제목으로 열린 이번 개인전에서 작가는 여섯 점의 영상작업 외에 오브제, 설치, 아카이브 자료, 퍼포먼스 등 신작 다수를 선보인다. 특히 작가는 그간 수집해 온 아카이브 자료를 자신만의 관점으로 풀어내어 작품과 어우러지게 전시장을 직조해 놓았는데, 그의 궤적을 따라 가다 보면 어느새 전시의 또 다른 주체로 존재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남화연과 최승희 그리고 ‘내’ 마음의 흐름에도 집중해보자. 전시는 5월 10일까지.
“루벤스 같은 대가 역시 어린이들을 그리거나 심지어 자기 자녀들을 그리는 데, 어린 시절에 습득했던 비례의 도식에 영향을 받았던 게 아닐까 하고 자문해 볼 때이다.”
-E.H 곰브리치 『예술과 환영』-
‘움직인다’는 것은 작가에게 언제나 논의의 대상이었다. 2009년의 《오퍼레이셔널 플레이》, 2015년 아르코미술관에서 연 개인전 《시간의 기술》, 2017년 개인전 《임진가와》(시청각)에 이르기까지 두 개 이상의 대상이 구조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화학적 변형이 작가의 개념적, 실행적 방법론을 이뤄왔다. 《마음의 흐름》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움직임 자체로서 여러 형태의 안무와 여러 주체의 동작이 각자의 살아있는 표본으로서 배치된다. 하얀 종이 위에 직접 X, Y축의 그래프를 그리면서, 평평한 땅에 화살표와 동선의 위치를 포획하면서 작가가 만들어낸 땅은 뮤지엄으로도, 아카이브로도, 가변적 무대로도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어떤 제도적 장치나 미디엄과 완벽하게 닮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움직임’의 흔적은 작가의 코레오그래피와 영상작업에 강력하게 남아있다. 이러한 흔적들은 작가 특유의 궤적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반드시 공간적 문제만이 아니라 시간, 역사적 자료와 질문, 과거의 작업과 현재 작가 눈앞에 놓인 화면 등의 주격을 치환한다는 점에서 위상학적이다. 작가의 초기 작업에서부터 움직이는 것은 안무의 무보(舞譜)이자 퍼포먼스의 스크립트였다. 이는 과거의 이미지를 낯선 시공간에서 다시 보는 행위를 추동해왔다. 그것은 도식(schema), 구조(structure), 묘사(portrayal)의 예술적 전통을 새롭게 쓰려는 작가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전시장 2층에서 상영되는 〈사물보다 큰〉에 등장하는 어느 화가의 이야기를 관객이 지켜보게 된다면, 그가 휘어잡으려고 하는 것이 붓(그리기의 야심)이 아니라 공기를 포함한 자연 자체의 리얼리티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남화연이 포착하는 움직임은 벗어나며, 따라서 완벽하게 잡을 수 없고(1), 순환 왕복 운동(2)을 하기 때문에 꼬리에 꼬리를 물 듯 다른 형식을 입어 나간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오랜 시간 탐구한 최승희의 안무/인물 리서치를 보여주는 동시에, 탐사 과정에 깃든 여정이 드러난다. 작업의 시점에서는 ‘습작’과 훈련으로, 관객의 시점에서는 투어(여정)와 다른 이의 행보를 참조해 새로 짜는 관찰 - 지도가 된다. 전시는 움직이는 행위자들을 화이트큐브 전시장에 배치하는 방법론을 보여준다. 이때 행위자는 작가 자신을 포함해 시청각적 사운드, 문서와 영상 아카이브, 신작 비디오, 설치물 모두를 포함한다.
남화연의 개인전 《마음의 흐름》은 움직이는 대상을 따라잡거나 구경하는 여러 ‘시점’을 등장시킨다. 이 시점들을 따라가고 또 잠깐 멈춰서 보기 때문에 전시장에서 좌우 시선을 돌리고 멈춰 서는 감각은 안무적이다. 정면으로 작업을 보거나 수직수평의 온라인적 스크롤 대신에, 몸을 움직여가며 여러 번의 시간대 앞에 멈춰 설 수 있는 경험은 요즘 같은 시간대에 더욱 특별하다. 이번 전시에서 무용가 최승희라는 존재(인물)는 전시의 주요 뼈대인 것이 맞지만, 전시장에서 남화연이 만들어놓은 시공간의 좌표는 때로 사람보다 사물을 더 큰 존재로 형상화한다. 그러니까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의 시점뿐만이 아니라, 작가가 사채널 비디오로 잡은 바다(들), 바다의 파도, 파도와 함께 뒹구는 작은 사물들, 손에 쥔 스마트폰의 평평함 그 자체 등이 각자의 시점으로, 함께 살아있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T.J 미첼이 그림(picture)을 논하며 찾아본, 헬레나 커티스(Helena Curtis)의 생물학 교과서를 참고해도 좋겠다. “’살아있다‘는 것이 항상성을 유지하고자 하며, 환경으로부터 에너지를 얻고, 에너지를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바꾸며, 자극에 반응하고 스스로 재생산한다.”
이러한 사물, 사람, 남아있는 운동의 흔적을 다루는 남화연의 이번 전시에서 ‘형상화’의 방식은 중요한 문제로 내게 다가온다. 작가는 그간 대상을 시각화하는 것, 움직이는 현실을 붙잡아서 다른 형태로 전환시키는 것에 대해 질문하며 안무와 아카이브, 다이어그램과 실행의 관계를 여러 작업으로 다뤄왔다. 남화연은 ‘다른 무엇인가로 변화하는 것’을 묘사하고 매개하는 행위를 오늘날의 시각 환경 속에서 질문한다. 작가가 숨겨놓은 여러 단서 속에서 이 작업들의 단서와 총체적인 형상화에의 시도 모두가 ‘변화하고 있는 상태’임을 여러 몸과 사운드를 통해 경험한다. 핵심은 변화한다는 사실보다 속도와 (살아있거나 죽은) 몸의 해상도다. 이때 작가의 기술(技術)은 기승전결이나 원인-결과의 이분법적인 구조가 아니라 서로 개입하고 흔들며 함께 이동한다. ‘형상화’하고자 하는 시각예술의 재현과 움직이는 몸으로 순간을 발동시키는 시간예술 혹은 퍼포머티비티(수행성)가 《마음의 흐름》에 다층적으로 움직인다.
형상화 × 움직임
그렇다면 전시장에서 움직이는 것은 누구이며 또 무엇일까. 먼저 전시장에서 움직이는 자는 최승희다.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작가의 연구 주제는 최승희인 동시에 ‘아카이브와 퍼포먼스’의 관계로 작가가 2012년부터 머릿속에서 질문했던 매체적 상관관계는 최승희의 시청각적 자료를 통해 작가를 움직이도록 해왔다. 최승희의 연대기가 아닌 공기 중에 떠다니는 사후 영향(힘)을 미치는 행위와 시청각적 자료들로 남은 아카이브-물질들은 남화연에게 그의 방식대로 안무를 짜게 하는 단서들이다. 이 단서가 최종적으로 향하는 방향은 이번 전시에서 하나의 답으로 귀결되지는 않지만, 여성의 몸이다. 두 번째로 최승희와 더불어 움직이는 것은 전시장에 등장하는 신체로, 영상작업 〈습작〉에서 볼 수 있듯이 운동과 멈춤, 그리고 그 중간 단계로 살아있는 2020년의 몸들이다. 작가 자신을 움직이도록 하고 또 전시장 영상 속에 등장하는 여러 비디오와 아카이브, 사진들에서 춤추는 몸을 가진 여성들의 몸은 움직인다. 기존의 룰과 새로운 자신의 몸에 맞는 규칙을 따라 움직이는 것은 비단 최승희의 문제만이 아니라, 작가가 관찰한 결과물들 속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듯이 ‘다른 상태’가 되어가는 ‘주체들’이다.
전시장에서 관객은 파도 이미지와 만난다. 세 번째 움직이는 대상으로서의 등장이다. 가장 해상도가 높은 주체로서 파도는 전시장 2층에 영사되는 〈사물보다 큰〉을 통해 관객을 바라본다. 카메라 코앞에서 탁 멈추는 어떤 순간을 포함하여, 4채널 영상에서 각각의 화면은 움직이거나(동), 멈춰있거나(지) 하면서 각자의 안무를 수행하며 함께 추는 순간을 병행한다. 네 번째로 파도와 함께 등장하는 사물로서 나는 남화연 편지를 꼽고자 한다. 작가의 이전 작업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편지라는 사물은, 목소리를 담은 요체로서 다른 시공간을 질주한다. 이 편지는 먼저 사물이다. 문자로 된 이 사물은 A에서 B라는 다른 세계로 전달되는 물질이다. 아주 작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기존 세계에 감정과 사건을 전달하는 균열을 일으키는 새로운 문장들을 담아낸다. 천천히 움직이든 아니면 쾌속으로 배달되든 무관하게 다른 세계의 공기를 담아 이동하는 편지의 목소리는 여러 개의 파도를, 어느 고전적인 화가가 그려낸 파도까지를 특정 시점에서 바라본다.
다음 번 움직이는 것은 소리다. 발자국 소리부터 밤의 소리까지, 안무를 하고 또 기억하는 목소리까지, 문장으로 살아남아 ‘뿌리치는 동작’을 예의 가르치는 정언 명령까지 살아있는 물질들은 각자의 속도를 가진다. 여섯 번째 움직이는 것은 관객이다. 남화연 개인전의 특이점은 관객이 계속하여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움직인다는 것, 작가가 만들어놓은 좌표 위에서 하나씩 움직여보는 시공간은 작품과 함께 관객도 움직여보는 ‘안무’의 정신이다. 남화연이 새로 쓰는 코레오그래피는 그 어원에서 알 수 있듯 ‘쓰기’의 정신이다. 움직이는 방법론과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축을 재구조화한다. 운동의 영역과 형상화의 문제를 배치하는 이 전시장에서 움직이는 리스트를 몇 개 더 쓸 수 있을 것이다. (추신 : 현실보다 생생하다는 것, 그렇다면 무엇이 더 생생한가? 변형의 이슈와 물질의 변화가 있다. 발자국 소리가 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