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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으로의 여행: 박이소의 움직이는 기호

posted 2020.05.29


윤난지


〈추수감사절 이후 박모의 단식〉(사진 왼쪽) 퍼포먼스 1984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추수감사절 이후 박모의 단식〉(사진 왼쪽) 퍼포먼스 1984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내게 있어 미술작품 제작이란... 기존의 의미와 영역들 사이에 펼쳐있는 광대하고도 끝없는 ‘틈’을 거꾸로 여행하려는 것과도 같다.1)


자주 인용되는 박이소(1957~2004)의 이 말은 그의 작업을 요약해 정의한다. 특정한 의미에 정착하지 않고 의미들 사이, 즉 ‘틈’을 끊임없이 드러내고 또한 열어 놓는 그의 작업은 의미화의 메커니즘 자체를 다르게 제안한다. 1990년대 한국미술에 그가 남긴 족적은 바로 이러한 전혀 다른 기호학을 제안한 점에 있다.


물론, 그가 1980년대 중엽부터 1990년대 중엽까지는 뉴욕 체류 작가로서 현대미술 중심지의 현황과 이론, 특히 모더니즘 비판이론을 한국에 소개하는 역할을 하였고 1995년 귀국 이후에는 광범위한 사회의식을 기저에 둔 소위 후기 개념미술(post conceptualism)을 통해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통상적인 평가는 사실이다. 그러나 박이소의 작업에서 이보다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의미를 전달하는 ‘방법’의 다름이다. 그는 시각기호의 내적 일관성을 추구한 모더니즘 추상회화와도 다르고 외적 세계와의 부합성을 추구한 민중미술과도 다른 이른바 ‘열린’ 기호학을 구사한 것인데, 이를 통해 그는 시각기호가 의미로 발현되는 또 다른 길을 보여주었다. 즉 기표와 기의의 일대일 대응관계를 전제로 한 기존 미술의 닫힌 기호학의 문을 열어 무한한 기호의 세계를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이것이기도 저것이기도 한 이중성과 모호함.”2) 그가 1995년 개인전 서문에서 밝힌 작업의 주제다. 박이소의 작업은 기호의 자기동일성을 부정하고 끊임없이 떠도는 기표들의 세계를 탐구하는 과정인데, 이런 그의 기호학은 ‘예술가’라는 기호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철호(~1984), 모(1984~1998), 이소(1998~2004) 등 세 개의 이름을 거쳐 간 예술가로서 그의 정체는 헛소문처럼 날아든 그의 죽음만큼이나 가볍고 유연한 기호였다. ‘모’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직후 이루어진 퍼포먼스 〈추수감사절 이후 박모의 단식〉(1984)은 이런 예술가 정체를 말하는 행위였다. 그는 미국인 가정에서 초대한 추수감사절 만찬에서 식사한 이후 단식을 시작하여 3일째 되는 날 정오에 긴줄을 목에 걸고 그 끝에 직접 만든 밥솥을 매달아 이를 끌면서 브루클린 다리를 건넜다. 밥벌이하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예술가, 그러나 빈 밥솥과 단식이 상징하듯 밥벌이를 못 하거나 그것을 부정하는 예술가 혹은 ‘모’라는 이름처럼 익명적인 존재로서의 예술가를 연기한 것이다. 바이올린을 끌고 걸은 백남준을 연상하게 하는 그의 행위는 또한 창작과 모방 사이에서 서성이는 예술가 정체를 환기한다. 그는 서로 다른 의미의 영역들을 넘나들면서 당대에 회자된 포스트모던 주체 개념을 수행한 셈이다.


그 스스로의 삶 또한 이런 다중적 주체로서의 예술가 개념의 표본이다.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를졸업한 1985년 이후 그는 작가이자 이론가, 대안공간 운영자, 전시기획자, 교육자로 활동했는데, 이 모든 역할을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수행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요제프 보이스를 떠올린다. “창의력=자본”이라는 보이스 말의 순서만 바꾼 〈자본=창의력〉(1986)에서 작가 자신도 보이스의 예술관에 동의했음을 알 수 있다. 보이스 말을 차용한 이 작품은 또한 창작자가 아닌 차용자로서의 예술가 개념을 시연한 예이기도 하다. 자본이 곧 창의력이라는 말은 자본주의 시대의 예술가상(像)을 냉소적으로 비꼬는 것인지 그 현실을 인정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금색으로 쓰인 ‘자본’은 검은색으로 쓰인 ‘창의력’과 대비되면서 돈과 예술의 다름을 드러내지만 둘을 잇는 ‘=’ 표시는 결국 둘이 같은 것임을 말한다. 서툰 서체로 쓰인 글씨는 이 작품을 서예로 읽히게 하면서도 문인의 전통과 그 허구를 동시에 환기한다.


이처럼 서양 당대 개념미술과 동양 전통서예가 만나는 또 다른 예로 〈비전통적〉 (1988)을 들 수 있다. 글씨체 자체와 ‘비전통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통해 전통의 허구를 말하는 이 작품은 그 글씨가 당대 개념미술이라는 서양 문화의 맥락에서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이질적인 문화 간 만남의 한계와 그 안에서 작동되는 힘의 논리를 환기한다. 서양 당대인들에게 그 서체는 단순히 추상적인 선으로, 즉 ‘비전통적’인 것이자 서구 현대미술의 영토에 편입된 동양의 전통으로 읽힐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전통이 아니라 전통의 껍질일 뿐인데, 〈그냥 풀〉(1988) 또한 껍질로서의 전통을 냉소적으로 말하는 예다. 서툰 붓질로 난을 흉내만 낸 그 그림은 제목처럼 ‘그냥’ 붓질 즉 문인화의 껍질인 것이다.


왼쪽 위 〈자본=창의력〉 종이에 혼합재료 50×86cm 1986아래 〈비전통적〉 캔버스에 아크릴, 페인트 90×175cm 1988오른쪽 〈이그조틱-마이노리티-오리엔탈〉 컬러 사진, 에나멜페인트 76×61㎝ 1990.사진제공 월간미술

왼쪽 위 〈자본=창의력〉, 1986, 종이에 혼합재료, 50×86cm 아래 〈비전통적〉, 1988, 캔버스에 아크릴, 페인트, 90×175cm 오른쪽 〈이그조틱-마이노리티-오리엔탈〉, 1990, 컬러 사진, 에나멜페인트 76×61㎝ 사진제공 월간미술

〈이그조틱-마이노리티-오리엔탈〉(1990)은 이런 정체성 문제를 더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어색한 서체와 인물사진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서 그는 글씨에 상응하는 스테레오타입 이미지를 병치했다. 한국인에게는 글씨와 사진이미지가 상응하는 의미로 읽히지만 다른 문화권에서는 추상적 형상과 구체적 이미지의 단순한 구성으로 보일 것이다. 서로 다른 문화 간 소통의 한계가 드러나는 것인데, 더하여 글씨와 이미지의 상관관계에서 그 안에서 작동하는 역학관계를 읽을 수 있다. 한국말로 쓰인 영어 단어들과 병치된 이미지들은 사실상 한국인이 아닌 서구 주류의 입장에서 선택된 것들이다. 작가는 주체의 위치에 따라 기호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음을, 즉 모든 기호에 힘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1995년 귀국하기까지 그의 관심사는 이처럼 정체성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민자 작가들을 위한 대안공간 마이너 인저리(Minor Injury,1985~1989)를 운영한 것도, 한국 동시대미술을 현지에 소개한 〈태평양을 건너서〉(1993)를 기획한 것도 이 시기인데, 이는 제3세계 유학생 출신 작가로서의 자연스러운 행보이기도 하다. 수많은 이민자가 왕래하는 뉴욕이라는 환경이 그에게 정체 의식, 특히 다음의 말처럼, 디아스포라(diaspora) 정체 의식을 독려하는 토양이 되었던 것이다.


“점점 더 이주자들의 장소가 되어 가는 세계 속에서, 나는 내가 있던 곳을 떠난 것처럼 느끼지도 않고 내가 있는 곳에 있는 것처럼 느끼지도 않는다.”3)


그에게 정체성은 절대적인 존재의 뿌리가 아니라 상대적인 위치의 드러남이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역학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었다. 영어를 소리 나는 대로 한국어로 옮긴 〈미국말 하기〉(1990), 떠나고자 하는 욕망의 상징이자 떠날 수 없는 콘크리트 배 〈무제〉(1994) 등 이 시기의 작품들은 이런 그의 정체성 찾기 여정의 소산이다. 그 여정의 마지막 작품으로 일컬어지는 〈호모 아이덴트로푸스〉(1994)는 정체성을 찾아 떠도는 인간존재의 초상이다. 탁구대의 중앙 분리대 위에 앉아 있는 인물은 이곳에도 저곳에도 속하지 못 하는 경계의 인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인간, 그 부조리함의 상징이자 작가자신의 자화상이다.


왼쪽 〈호모 아이덴트로푸스〉 종이에 아크릴 콜라주 76×56cm 1994 오른쪽 〈유엔탑〉 합판, 나무, 종이박스, 아연 도금 철판, 건축자재 쓰레기, 스티로폼, 드로잉 1997. 사진제공 월간미술

왼쪽 〈호모 아이덴트로푸스〉, 1994, 종이에 아크릴 콜라주, 76×56cm 오른쪽 〈유엔탑〉, 1997, 합판, 나무, 종이박스, 아연 도금 철판, 건축자재 쓰레기, 스티로폼, 드로잉 사진제공 월간미술

이 작업을 분기점으로 그의 관심사는 보다 넓은 영역으로 확산되는데, 기념비를 둘러싼 인간 욕망의 헛됨을 말하는 〈유엔탑〉(1997)이 그 한 예다. 제2회 광주비엔날레에 전시된 이 작품은 동명의 성냥갑에 그려진 탑을 네거티브 형상으로 확대한 설치물이다. 관람자가 탑 모양을 통과해 들어가면 그 형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잘라낸 쓰레기들이 담긴 상자들과 평면으로 펼친 상자들을 쌓아 만든 육면체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오벨리스크 형상을 닮은 텅 빈 유엔탑은 거대 역사를 실현하려는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의 헛됨을 말한다. 박스로 된 탑은, 작가 말을 빌리자면, “‘표시 나는 큰일’을 하려는 남성적 의지에 대한 썰렁하고 삐딱한 발언”이다. 그는 “이긴 자의 역사쓰기의 상징 같은 기념비가 있음과 없음 사이에 있는 넓은 틈”4) 을, 그 기호학적 여백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기념비 주제는 2003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작 〈2010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 1위-10위〉로 이어졌다. 이는 7년 후 세계에서 가장 높게 지어질 건물 10채를 조사하여 1위는 원통형 PVC로 크게 만들고 나머지는 백색 유토로 작게 만들어 좌대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허술하고 값싼 재료로 대충 만든 그 형상들은 수평의 대지를 딛고 수직으로 상승하려는 남근적 욕망의 끝없는 연쇄, 그것이 만들어온 역사의 허망함을 말한다.


그의 이런 회의주의는 예술 그 자체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닌 어떤 것〉(1998)은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박이소다운 대답이다. 공사장에서 쓰는 허술한 나무받침대 양 끝에 큰 고무 대야를 하나씩 놓고 그중 한쪽에 콘크리트를 쌓은 후 그 표면에 흰 제소를 띠처럼 대충 바른 이 작품은 예술행위와 그 결과로서의 예술작품에 대한 패러디다. 모양만 달리하면서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옮겨졌을 뿐인 그 물질은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욕망은 결국 낭비이고 허망한 일일지도 모른다”5) 는 작가 말의 구현물이다.


한편, 그의 시야는 자연과 전 우주를 포괄하는 방향으로도 확장되었다. 검은색 포장용 스펀지에 별 스티커를 붙여 밤하늘을 연출한 〈북두팔성〉(1997~1999)이 그 예로, 여기서 별은 영원, 소망, 이상 등 일반적인 의미들과 함께 작가자신을 표상한다. 자신의 별이, 즉 자신의 소원성취와 희망이 북두칠성에 끼어들었다6) 는 작가의 설명처럼, 이 작품은 범우주적 공간 속에 있는 작가자신, 그리고 그가 그 공간에 부여한 의미의 표상이다. 별 모티프는 이후 작업에서도 다양하게 변환되는데, 북두팔성을 확대한 화면을 통해 “창작의 의미, 전시의 의미를 묻는”7) 〈팔방미인〉(2002), 별빛이라는 모티프가 인공조명으로 환원되어 사회적 메시지의 통로가 된 〈당신의 밝은 미래〉(2002)와 〈광명쇼핑센터〉(2003) 등이 그 예들이다.


박이소의 마지막 시기 작업에서 자연과 우주 모티프는 무엇보다도 삶의 존재론적 차원을 묻는 계기가 되었다. 블랙홀로 들어가는 순간을 환기하는 〈블랙홀 의자〉(2001)는 찰나 같은 삶을, 옥외 카메라가 보내는 하늘 이미지를 실시간으로 영사한 〈샌안토니오의 하늘〉(2001)은 범자연적 시간 속의 인간존재를 일깨운다. 작가 사후(死後)인 2006년에 실현된 〈팔라야바다(Fallayavada)〉(2003 기획)는 낙하산에 달린 비디오카메라를 경비행기에서 떨어뜨려 지면을 향한 렌즈에 잡힌 줌인 이미지를 콜로세움 형태의 전시장 바닥에 반복 영사한 작품이다. “삶의 무상함은 낙하의 속도와 관계가 있는 듯하다”8) 는 작가 말처럼, 이는 수직으로 가르는 너비 없는 순간으로서의 우주, 그 순간을 살다 가는 광막한 우주 속의 한 점인 인간 존재에 대한 강력한 상징이다.


‘삶의 무상함’은 사실 박이소의 평생 작업을 요약하는 말이다. 일종의 노장적 허무주의가 그의 작업을 꿰뚫는 축인데, 이는 작품의 내용뿐 아니라 인위적인 측면을 최대한 배제하는 작업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각목, 콘크리트, 비닐, 종이박스, 폐품 등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재료를 선택하고 공정 또한 최소한으로 아끼면서 완벽한 마무리를 의도적으로 기피하였다. 이런 ‘가난한’ 재료와 공정은 아르테 포베라를 환기하는데, 그는 더하여 냉소와 유머를 오가는 특유의 화법을 통해 의미 또한 ‘가난하게’ 만들었다.


왼쪽 〈호모 아이덴트로푸스〉 종이에 아크릴 콜라주 76×56cm 1994 오른쪽 〈유엔탑〉 합판, 나무, 종이박스, 아연 도금 철판, 건축자재 쓰레기, 스티로폼, 드로잉 1997. 사진제공 월간미술

왼쪽 〈아무것도 아닌 어떤 것〉, 1998,콘크리트, 고무용기, 제소, 나무, 120×70×400cm 가운데 〈북두팔성〉, 1997~1999, 스펀지, 벽돌, 스티커, 알루미늄 호일, 바늘, 210×117×39cm 개인 소장.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오른쪽 위 〈팔방미인〉(사진 오른쪽), 2002, 캔버스에 아크릴, 130×210cm 아래 〈우리는 행복해요〉, 2004, 7×42m 사진제공 월간미술

“나는 미술작품의 비효율성과 소통이 잘 되지 않는 취약함에 더 관심이 있는데, 그것은 나에게 투명한 의사소통이나 표현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9)


이 말처럼 박이소는 ‘개념’의 의미화 과정을 의심한 개념미술가다. 작업과 글쓰기, 사회활동이 하나였던 그의 작업은 보이스의 ‘사회 조각(social sculpture)’을 환기한다. 그러나 개념을 전달하는 그의 어법은 보이스 것과 다르다. 결론을 향한 직진어법을 구사한 보이스와 달리 박이소는 결론을 끝없이 유보하는 순환어법을 구사했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허무주의가 그의 어법을 관통하는데, 그것이 의미화의 과정을 닫기보다 열어놓는다는 점이 그의 허무주의가 함축한 긍정적 계기다. 단일 의미에 정착하려는 기호의 닻을 분산시키면서 다양한 의미들 사이의 ‘틈’을 열어 놓는 그의 어법은 소통불가능성을 ‘열린 기호학’으로 변환한다. 이는 또한 모든 것을 회의함으로써 모든 것을 포용하는 노장적 태도와의 교차점을 드러낸다. 박이소의 작업은 해체주의가 노장사상과 닿아 있는 지점을 보여주며 이런 점에서 개념미술의 동양적 버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갑작스러운 비보를 들은 2004년 가을, 부산비엔날레에는 그의 또 하나의 사후작 〈우리는 행복해요〉(2004)가 설치되어 마치 그가 되살아난 듯 그의 전형적인 어법을 떠올리게 하였다. 북한의대형 선전 간판을 그대로 재연한, 동시에 대도시의 대형광고판과도 같았던 이 설치물은 편향적 이데올로기, 후기산업사회, 그 속에서의 인간의 삶 등을 환기하면서 우리가 정말 행복한지를 물었다.


“행복에 대한 다양한 가치관과 오해의 접점과 겹침과 빈틈을 관객의 가슴 안에 한순간 스치게 하면서, 그래도 어쨌든 행복이 어딘가 있기는 있음을 심란한 희망의 메시지로서 광대 막막하게 보여주려는 것이다.”10)


유언 같은 이 작업노트에서 우리는 행복이라는 개념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노장적 해체주의자 박이소를 만난다.


“강한 바람이 되고 싶다”11) 던 박이소는 진짜 바람이 되어 우주로, ‘광대 막막’한 기호들의 세계로 날아가 버린 것일까? 그는 바람처럼 순식간에 우리 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유산은 바람처럼 오늘의 미술에 출몰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음 세대들은 그의 존재를 한국 현대미술에 있어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할 것”12) 이라는 이영철의 말은 옳았다. 1990년대에 사건처럼 왔다 간 박이소는 아직도 우리들의 뇌리에, 작가들의 작업 속에 살아 있다.


1)박이소 〈작품에 대하여〉 2000 n.p.
2)박모 〈서문〉 《박모》(전시도록) 1995 금호화랑/샘터화랑 p.7
3)Mo Bahc, In Plural America(exhibition brochure) Hudson River Mueum 1992 p.11
4)박모 〈유엔탑에 대한 친절한 작품설명〉 1997 n.p.
5)박이소의 미완성 원고: 정헌이, 〈박이소의 즐거운 바캉스〉 《탈속의 코미디-박이소 유작전》(전시도록) 로댕
     갤러 리 2006 p.28
6 ) 《박이소: 기록과 기억》(전시도록) 국립현대미술관 2018 p.303
7 ) 작가노트 20권 2002.7~2003 p.65 앞 책 p.166
8 ) 박이소 《Fallayavada》 2003 p.2
9 ) 박이소의 원고 《탈속의 코미디 - 박이소 유작전》 (전시도록) 로댕갤러리 2006 p.133
10 ) 박이소 〈우리는 행복해요〉 작품계획서: 정헌이 (2006) p.28
11 ) Yiso Bahc “On ‘To be Creative’” n.d., n.p.
12 ) 이영철 〈정오의 예술가 - 탈속의 코미디〉 《탈속의 코미디 - 박이소 유작전》(전시도록) 로댕갤러리 2006
       p.13.



※ 이 원고는 월간미술 2020년 5월호에 수록된 것으로,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월간미술과 콘텐츠 협약을 맺고 게재하는 글입니다.

윤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