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박미나 : 지그재그로 관통하는 여러 단면들

posted 2020.05.28


인터뷰/정리 현시원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모든 것이 멈추거나 변화한 2020년 3월 27일, 연희동에 있는 박미나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다. 전시를 한 달 앞둔 시점이기에 작업들은 이미 완성된 단계였다. 1998년 시작된 작가의 ‘색칠 공부 드로잉’ 시리즈는 시중에서 구입할 수 있는 색칠 공부 도안을 수집하는 일에서 시작한다. 작가는 레디메이드 도안 위에 색, 선, 또 다른 도안 등을 통해 다양한 재료로 드로잉을 행한다. 드로잉 위에서 작가의 ‘스크림’ 연작의 이미지 일부가 보이기도 한다. 법칙을 세우고 이를 지키며 변주하는 작가가 이번 드로잉들에 관해 들려주었다.


Left Scream 1, 2019, Inkjet print, sticker, colored pencil 잉크젯 인쇄, 스티커, 색연필, 33.5 x 25.5cm Right Swirl, 2020, Sticker 스티커, 33.5 x 25.5 cm. Image provided by AVP

왼쪽 〈Scream 1〉, 2019, 잉크젯 인쇄, 스티커, 색연필, 33.5 x 25.5cm 오른쪽 〈Swirl〉, 2020, Sticker 스티커, 33.5 x 25.5 cm. 사진제공 시청각

시청각: 이번 전시처럼 긴 제목은 처음이지 않나?


박미나: 늘 하던 방식에 이야기 하나 얹고 싶었다. 드로잉이 정리된 드롭박스 폴더를 열면 이름들이 쭉 나열된다. A에서 하나 선택하고, B에서 선택하고 밑으로 쭉쭉 내려가면서 알파벳 하나당 하나의 제목을 선택했다. 그중에서 뭘 해야지 문장이 만들어질까를 보았다. 어떤 장소를 표현하는 것은 ‘At the Circus’라는 제목밖에 없었다. 서커스에서 뭘 할까? 그다음은 주어, 목적어. 그다음은 동사를 찾아야 했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며 하나씩 결정하고 전체가 된 것이다.


시청각: 색칠 공부 시리즈는 1998년에 시작됐다. 시작하게 된 이유가 뭐였나?


박미나: 대학원 2학년 때 시작했다. 대학원 때가 내가 배운 것이 뭐였는지 또 미술이 근본적으로 무엇인지 테스트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을 했다. 처음부터 고민해보자는 생각에 드로잉만 엄청 많이 했다. 드로잉 설치로 연구 발표를 통과했는데 그때 시작했던 계열 중 하나가 색칠 공부 드로잉이다. 초기 드로잉은 구조를 다루는 컨스트럭티브(constructive)한 드로잉이었다. 초기에는 아이들에게 숫자의 체계를 알려주거나 사각형, 원을 점선으로 따라 그어가며 알려주는 학습지 계열의 종이를 재료로 한 작업이 많았다. 도안에 있는 과정을 비트는 것이 재밌었다. 색칠 공부 종이의 서사에 내가 서사를 하나 만들어서, 그 두 개가 어떻게 관계하는지 살펴보면, 세 번째 서사가 만들어질 거라 생각했다. 최소한 다른 서사 세 개가 중첩될 것이라고 보았다.


시청각: 드로잉들이 변화하는 과정들이 흥미롭다. 학습지, 스티커, 도상, 작가의 선택과 법칙이라는 다양한 것들을 배우게 된다.


박미나: 회화 작업을 하면서는 직관을 발동시키는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이성으로 가기 전에 튀어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드로잉 작업을 할 때 모토는 ‘첫 번째 생각나는 것을 하자’였다. 재료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최대한 날것(raw) 상태의 무엇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계속하게 됐다.
색칠 공부의 생태계가 바뀌는 것도 보게 된다. 바깥세상, 환경에 맞춰서 바뀌어 간다. 스티커, 테이프의 제작 재료들도 계속 바뀐다. 이 작업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기록하게 되는 것이 있다. 바깥 세계 일부를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색칠 놀이라는 게 미취학 학생을 타깃으로 한다. 가장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한테 무언가를 하게 만든다는 점도 재밌다. 알파벳, 숫자, 도형같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어린아이들에게 알려주는 일에 시각체계가 동원되는 것이니까. 요즘에는 말(horse)을 모으고 있다. 백설 공주, 신데렐라, 라푼젤 등을 보면 말이 너무 기괴하게 등장하더라. 어떻게 쓸지 모르겠지만 일단 모은다. 한참 보다 보니까 만든 회사에서도 의도하지 않았던 다른 상징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Left MON, 2020, Colored pen, sticker 사인펜, 스티커, 33.5 x 25.5 cm Right Rain Drop, 2020, Sticker 스티커, 33.5 x 25.5 cm. Image provided by AVP

왼쪽 〈MON〉, 2020, 사인펜, 스티커, 33.5 x 25.5 cm 오른쪽 〈Rain Drop〉, 2020, 스티커, 33.5 x 25.5 cm. Image provided by AVP

시청각: 다른 회화 작업도 그렇듯 작업인 동시에 개인이 하기엔 방대한 외부의 데이터베이스를 수집하는 일이 되는 셈이다.


박미나: 작가로서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텅 빈 창구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한다. 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모두가 그렇게 보는 창으로서의 역할이 있을 텐데 말이다. 그 창의 하나로서 고고학자처럼, 어떤 사건을 기록하는 방식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술로서의 기록이라는 게 객관화되지 못하고 살짝 왜곡된 상태가 많다. 하지만 동시에 미술은 경제, 사회, 살아가고 있는 일상의 일부라는 여러 ‘다면’을 보여 준다는 게 다르다. 정확하게 한 단면이 아니라 지그재그로 여러 개를 관통하면서 단면을 만들어 낸다. 그 여러 개를 관통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흥미롭다. 나는 그중 몇 개를 관통시키고, 어떤 부분의 단절을 만들어 비가시적인 어떤 상태를 시각화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눈앞에 쫙 펼쳐 보이는 경험이 회화다.


시청각: 오랜 시간 드로잉을 하며 회화와는 어떤 관계를 맺게 했나?


박미나: 드로잉은 명도를 다루는 일이기도 하다. 명암을 다루는 다양한 것들을 스케치가 아닌 완성된 형태로서 다루는 것이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스크림’의 일부를 넣어보기도 했다. 내가 지키려고 했던 법칙을 깨 보기도 한 거다. 모두가 각자 경험하는데, 그것을 시각화해서, 눈앞에 펼쳐놓는 게 회화다. 회화가 재미난 게 시간이라는 걸 계속 같은 시간 안에 놓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보고 행하는 모션은 시각화와 기억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회화는 (경험한 순간들을) 계속 똑같은 시간, 한 장면으로 만드는 것 아닌가. 만약 어느 회화를 세 시간 동안 본다면, 그건 세 시간짜리 현상인 것 아닌가. 그런 차원에서 회화가 재밌다. 모든 건 시간대로 흘러가는데 시간을 멈추게 만든다. 3차원을 단절시키는 이차원이기 때문에 재밌다. 좀 다른 차원의 이야기 같지만, 영상은 ‘시간’이 더해지면서 우리 일상과 가깝게 되기는 하는 건데 그러면 일상하고 비슷해진다. 여러 차원을 억지로 회화라는 2차원 평면으로 만들면 흥미로운 지점들이 생겨나는 것 같다.


시청각: 〈12 Colors〉도 색칠 공부 드로잉 시리즈에 들어가나?


박미나: 맞다. 처음에 시작했던 게 해, 달, 별을 색칠하지 않고 남기는 거였다. 어느 순간부터 해가 나오면 폴더에 그것들만 다 모아두기 시작했다. 달이 나오면 달만 모으고, 별도 그랬다. 나비, 물고기, 작은 새, 작은 동물, 구름 등 모은 게 몇 개 더 있다. 일단은 다양한 종류의 연필로 해만 빼고 그렸다. 그때가 일본 쓰나미로 바다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고, 너무 어두울 때였다. 해를 생각하며 밝은 태양을 그리고, 나머지는 너무 어두워서 노아의 방주를 그리듯이 했다. 해는 연필로 했고, 달은 회색 크레용, 회색 색연필이었다. 이번에 전시되는 별이 12 색깔로 한 거다. 색칠 공부를 할 때 12색 색연필로 하지 않나. 지금 30개 정도 사두었는데 20개 정도를 해온 것 같다. 2013년, 2015년, 2019년, 2020년 이런 식으로 해오고 있다.


12 Colors Drawings, color crayon on coloring page, 33.5 x 25.5 cm (framed) Left 12 Colors Drawings IX 2019, Barunson Komatorae Right 12 Colors Drawings XII 2020, Toyo Fruit Rabbit Color Pencil. Image provided by AVP

〈12색 드로잉〉, 색칠 공부 위에 색연필, 33.5 x 25.5 cm 왼쪽 〈12 색 드로잉 9〉, 2019, 바른손 꼬마또래 오른쪽 〈12 색 드로잉 12〉, 2020, 서흥 토요 샤프식 색연필. 사진제공 시청각

시청각: 12가지의 색깔을 종이와는 어떻게 매칭시키나?


박미나: 색깔을 쥐고 어떤 종이를 칠할지를 정한다. 일반적으로 핑크라고 생각했을 때 이 색과 잘 어울리는 종이를 매칭한다. 어떤 경우는 정치적인 올바름이 작동하기도 해서 ‘핑크는 남자지’ 하고 일부러 안 맞춘다. ‘그런 게 어딨어’ 하면서, 일부러 더 안 맞추는 경우가 있다. 색과 종이 사이에 미묘하게 서사가 있다. 소위 일반적인 것을 매칭하거나, 비틀거나 반항을 하는 건데 그 정도를 매번 다르게 맞춘다.


**시청각: 모두 국내에서 생산된 색연필들로 작업했나? 색연필의 퀄리티가 평가될 것 같다. **


박미나: 질이 바로 평가되긴 한다. 지구화학이 최고다. 가장 진하게 잘 나온다. 어떤 것은 너무 연하고 왁스만 나와서 색이 안 입혀지는 경우도 있다. 어떻게 칠해도 흐리멍덩하게 색이 안 입혀지는 것이다. 회사마다 색을 배치하는 순서도 재밌다. 본인들이 순서를 정해놓는데 그 순서를 만드는 메커니즘이 회사마다 다르다. 색깔 순서가 어떤 회사는 검은색, 어떤 곳은 보라색이 맨 끝에 온다. 보통 까만색이 맨 마지막에 오기는 한다. 맨 앞에는 노란색이 주로 배치된다. 순서들을 어떤 식으로 나열하는지 보는 게 다르다. 〈12 Colors〉는 나열된 12색의 순서가 한눈에 정확하게 보이는 게 중요하다.


시청각: 2016년 시청각과 나눈 인터뷰에서 “캔버스를 직구하는 것을 고민하게 된다”고 말했다. 지금은 어떤가?


박미나: 지금도 웬만하면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을 구입한다. 그게 재밌다. 못 구하는 것을 구하는 것보다 우리나라 무역을 통과해서 들어오는 그 시스템을 보는 게 재밌다. 시스템 안에서 이 시스템과 저 시스템이 어떤 방식으로 충돌하고, 통과하는지를 볼 수 있다. 색칠 공부, 색채도 하나의 시스템 안에서 작동을 한다. 그 최저치와 최고치가 재미있다. 최고 최저를 만들어 낸 원인이 작동하고 쓰고 볼 수 있는 ‘범위’를 보게 된다. 이전의 펜 (pen) 작업하고도 비슷한 점이다. 당연히 가장 좋은 재료로 희열을 찾아내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가장 좋은 것보다 ‘일반적으로 쓴다’고 하는 그 일반에 관심이 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할 수 있고 그 베리에이션이 어디까지 될 수 있는지 어떻게 그것이 눈앞에서 펼쳐지는지를 보여 주는지가 흥미롭다. 가장 중요한 것이나 좋은 것은 그렇기 때문에 기록이 된다. 일반적인 것들은 유통기한이 지나면 사라지기 때문에 절대로 두 번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상품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들이 많다. ‘지금 2020년에 우리는 무엇을 얼마만큼 어떻게 보여 주고 있는가’에 관심이 있다. 평균적으로 많이 쓰는 밥그릇 같은 토기를 캐는 게 재미있다. 좋은 백자를 만드는 사람도 있겠지만, 제일 많이 사용했던 토기의 베리에이션을 보는 게 내 관심사다. 항상 지금을 살면서 고고학을 생각하게 된다.


Installation View, Photo by Sangtae Kim, Image provided by AVP

전시 전경 사진촬영 김상태, 사진제공 시청각

현시원 / 독립큐레이터

독립 큐레이터. 전시를 기획하고 이미지나 미술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