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권혁규(전시기획자)
강호연은 일상 오브제의 정서적, 기능적 속성을 직관적으로 독해하며 시감각 위주로 편성되어온 미술의 감각과 경험을 입체적으로 확장하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작가는 2017년 12월 인사미술공간에서 열린 개인전을 프롤로그로 시작된 중장기 프로젝트 〈Encyclopedia〉를 기점으로 작업의 변곡점을 그려낸다. 이 글은 〈Encyclopedia〉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된 세 개의 개인전, 《planet 72.82㎡》(인사미술공간, 2017), 《Encyclopedia》(금호미술관, 2018), 《About Ground, Water, Light and Air》(아웃사이트, 2019)를 중심으로 최근 작업의 변화와 세계를 인지하는 주체와의 관계를 고찰한다.
먼저 데스크 램프와 가습기로 모닥불의 형상과 분위기를 환영적으로 재현하는 등, 주변 사물과 간단한 과학 원리를 이용해 대상의 새로운 인지와 경험을 제시해온 작가가 왜 자신의 중장기 프로젝트로 ‘Encyclopedia-백과사전’을 지시하게 되었는지 질문해볼 수 있다. 백과사전은 인간의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정의하는, 그리고 그것을 명시적 문자와 이미지로 공표하는 근대적 지식체계의 상징물처럼 여겨지곤 한다. 여기서 말하는 근대적 지식체계는 결국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에 기인한, ‘사고하는 존재’, 혹은 ‘사고하는 존재의 인지’로 지탱되는 세계일 것이다. ‘생각하는 자아’는 철학은 물론 예술, 과학, 종교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준 근대의 위대한 발명이었다. 하지만 근대를 지탱해온 이 ‘생각하는 나’는 내가 의식함으로써 비로소 세계가 존재한다는 자기중심적 사고로 외부를 인지하고 자신만의 논리로 파악하기에 이른다. 심지어는 세계를 통제와 위력을 가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며 그 사유의 극단에 전쟁과 식민지 등과 같은 근대의 오작동을 남기기도 한다.
강호연의 〈Encyclopedia〉 프로젝트는 근대적 지식체계의 상징물인 백과사전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해보려는 시도를 보인다. 그리고 이는 주변 사물, 아는 것들의 직관적 인식 행위를 중심에 둔 작가의 이전 작업이 보다 넓은 맥락으로 확장된 것은 아닌지 유추해볼 수 있다. 작가는 작업의 확장 과정을 어린 아기가 장난감을 인지하는 모습, 특히 모빌을 보는 아기의 모습과 등치시켜 설명하곤 한다. 여기서 우리는 벤야민의 장난감과 아감벤의 유아기에 대한 사유를 빌리지 않아도 작가가 아이의 인지과정을 상상적으로 가설하며, 또 여러 맥락이 압축되고 옮겨진 대상으로 일상 오브제를 독해하며 작업을 진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백과사전을 자기식으로 재구성해 ‘현실, 인간, 신화, 우주를 아우르는 감각의 오디세이아를 풀어나간다’(작가노트 중)는 프로젝트는 주변 대상의 인지를 고정되지 않은 가변적인 상태로 설정하며, 또 주변을 잘 모르는 상태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애매함을 직접 체험하며 지속하는 것이다. 여기서 외부를 연결하는 일종의 매듭으로 설정된 ‘나’는 유일무이한 절대자가 아니라 감각으로 세계를 드러내고 다양한 ‘나’의 유사성과 차별성을 수긍하는 일종의 매개자라는 점에서 근대적 지식체계 속 백과사전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드러낸다.
이미 아는 것들과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는 〈Encyclopedia〉 프로젝트에서 언어는 그 자체로 기존 사고를 전환하고 건너뛰는 직관적이고 개인화된 도구로 존재한다. 대부분의 경우, 언어는 백과사전 속 단어와 문장들처럼 특정 아이디어와 가설, 사고와 논리를 전달하게 된다. 하지만 정보를 소유하고 때로는 생각을 지배하는 언어는 작가의 작업에서 언제든 자의적으로 조작, 재맥락화할 수 있는 대상으로, 주어진 영역에서 탈주해 보다 넓은 세계를 지시할 수 있는 매체로 받아들여진다. 일례로, 금호미술관에서 진행한 《Encyclopedia》에서 작가는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이름을 태양계 행성, 그리고 일상용품의 이름들과 연결해 토성의 위성 중 하나인 타이탄을 테팔-티타늄 코티드-후라이팬으로 제시한다. 또 지구 멸망 이후를 상상하며 전시장 각 층에 새로운 감각의 시공을 구현한 개인전, 《planet 72.82㎡》에서 작가는 경작하다의 cultivate와 문화를 뜻하는 라틴어 cultura와 culture를 조합하고 플라스틱, 비닐, 상자 등으로 온실을 만들어 비슷한 듯 이질적인 경작-문화를 한 공간에서 감각하게 한다. 그리고 아웃사이트에서 진행한 《About Ground, Water, Light and Air》에서는 전시장 이름에서 태양계(site) 외곽(out)의 카이퍼 벨트(Kuiper Belt)를 떠올리고 그 안에서 인간이 생존 가능한 행성의 조건을 일상의 감각과 경험으로 연출한다. 이처럼 프로젝트에서 지시 대상이 분명한 언어-단어들은 원래의 위치에서 벗어나 다른 곳을 향하기도, 또 다른 단어와 섞여 공동의 거주지를 형성하기도 한다. 그렇게 작가는 규정된 의미와 지시체 사이를 건너뛰고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며 제도화된 백과사전식 언어를 수정하고 다시 배치하는 역설의 과정을 수행한다.
앞서 언급한 언어의 자의적 재구성은 강호연의 작업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일면 신체적인 감각 행위에 기대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끊임없이 주변 대상과 세계를 인지하고 새로운 감각으로 변환하는 프로젝트의 과정은 언어의 재구성과 마찬가지로 불분명하고 자의적인 해석의 과정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프로젝트는 결국 세계를 인지하는, 누락될 수 없는 주체를 드러냄과 동시에 무언가를 감각하는 행위는 늘 비규정의 영역에서 이뤄지는 것임을, 그래서 상황에 따라 언제든 새롭게 재탄생할 수 있음을 지시한다. 《planet 72.82㎡》에서 작가는 카페인 과다 복용 시 나타나는 신체 반응에서 지구 멸망의 기운을 감지하고 에너지 드링크 캔과 소리 증폭 앱을 이용해 어둡고 불길한 공간을 연출한다. 금호미술관 개인전에서는 일상 오브제의 빛, 소리, 온도 등을 태양계 행성들의 성질과 포개며 모빌 설치와 사진 작업을 진행한다. 그리고 아웃사이트 전시에서는 샤워기의 물, 따뜻한 온돌 바닥, 누워서 바라본 형광등 불빛의 감각을 암석과 얼음만으로 가득한 카이퍼 벨트에서 필요한 생존 조건으로 제안한다. 이 밖에도 작가의 전시를 채우는 색, 바람, 온도, 진동 등의 감각은 모두 경험 주체에 따라 다르게 인지될 수 있는 미규정적 대상으로 관객들에게 각기 다른 지각을 발동케 한다. 따라서 인사미술공간 2층에 설치된 가짜 하늘, 를 보며 관객은 맑은 하늘의 상쾌함을, 동시에 납작하고 조악한 스크린 속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강호연의 프로젝트가 전시장에 구현하는 감각은 절대불변의 대응 관계에서 강압적으로 전달되고 규정되는 대상이 아니라 통제되지 않는 감각 행위 그 자체를 강조하는 초월적 언어와 체험의 혼합물로 볼 수 있다.
〈Encyclopedia〉 프로젝트는 대상의 즉각적 인지를 경험 가능한 상태로 발화하고 공유하려는 시도로 이해해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근대적 지식체계 안에서 제도화된 지식과 정보들, 관련 감각과 경험을 비판적으로 재고하며 비규정적 언어의 사용과 감각의 재구성을 지속한다. 고정불변의 절대자이기를 거부하며 주변을 인지하는 주체-작가는 절대적 진리나 정보가 아닌 감각하고 감각당하는 실존의 삶을 생성하며 현재와 관계를 맺는다. 세계는 통제와 지배의 법칙이 아니라 경험과 감각의 거절할 수 없는 관계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독립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