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여다함의 퍼포먼스〈내일 부서지는 무덤〉상세 내역

posted 2020.07.20


안소현(아트 스페이스 풀 디렉터)


언젠가 캘빈 톰킨스(Calvin Tomkins)가 쓴 백남준의 퍼포먼스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글은 비평문이라기보다는 퍼포먼스의 모든 순간을 언어화하려는 불가능한 욕망에 사로잡힌 자의 편집증적 기록에 가까웠다. 사진이 아닌 텍스트로 기록된 퍼포먼스의 장면들은 당연히 저화질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글은 읽을 수록 기묘했다. 한 장면도 놓치지 않으려는 톰킨스의 시선이 느껴졌고 완벽히 언어화되지 않기에 더욱 상상력을 자극했다. 관객들의 긴장감, 불안, 공기의 느낌까지 묘사된 그 기록은 어쩐지 백남준이 의도한 감각적 폭력에 가장 기꺼이 사로잡힌 자의 오마주 같았다. 여다함의 퍼포먼스 〈내일 부서지는 무덤〉에 대해 나도 그래 보고 싶었다. 여다함은 퍼포먼스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구성하는 모든 물질들이 실은 퍼포먼스의 스코어처럼 기능했으면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공간, 빛, 소리, 온도, 사람들까지 모두 스코어라면 아래 상세내역은 퍼포먼스의 스코어이자 후기가 될 것이다.


길이 솔아 주차 다툼깨나 일어날 것 같은 구기동 주택가 골목에 위치한 아트 스페이스 풀에 늦여름 선득한 어둠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지붕 위 사각기둥 모양의 초록색 갤러리 간판에 불이 들어오면 뒷마당 여기저기 매캐한 나선형 모기향 근처로 빨간 담뱃불이 몰려들었다. 1980년쯤 지어졌다는 기역 자 모양의 낡은 단층 양옥은 시작점을 알 수 없는 담쟁이로 뒤덮여 있었다. 경복궁역 근처에서 보수단체의 집회가 열려 버스가 안 다닌다는 이야기가 수군수군 돌고, 누군가 예정보다 조금 늦게 8시 정각에 입장을 시작하겠다는 말을 손나팔을 한 채 가볍게 공기 중에 스프레이 했다.


관객들이 건물의 윤곽을 따라 줄지어 서기 시작하고, 뒷마당을 향해 난 낡은 문 앞에 신발을 벗어놓고 하얀 천을 깐 댓돌을 밟고 방으로 들어섰다. 평소에는 전시장으로 사용되는 낡은 양옥으로 들어서면 고스란히 드러난 시멘트 내벽에는 숱한 못 자국과 거뭇한 곰팡이 자국이 그대로 보였다. 천장은 낮고 지붕을 받치는 구조들이 하얀 뼈처럼 드러나 있었다. 긴 방의 맨 끝에 난 창문은 요즘도 저런 게 있나 싶은 촌스러운 무늬의 간유리로 되어 있었다.


먼지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약간의 화학약품 냄새가 나는 실내에는 방을 가득 채운 거대한 상아색 누비이불이 깔려 있고, 그 한쪽 끝에는 그 이불을 무릎까지 덮고 그 무릎을 세워 양팔로 끌어안은 피부가 가무잡잡한 사람이 앉아있다. 눈을 마주치면 눈으로 슬쩍 웃는 것 같다가 착각인가 싶게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상아색 누비이불의 한 가운데에는 좀 더 폭신해 보이는 작은 하얀 솜이불이 놓여 있다. 사람들이 하나씩 차례로 들어와 마주 보는 긴 벽에 등을 대고 앉기 시작하고 서로 인사를 나누거나 손뜨개질한 모자를 쓴 수염을 길게 기른 작가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다 같이 하나의 이불을 덮고 어색한 침묵이 적당히 공기를 가라앉힐 때쯤 건물 밖과 건넌방의 조명이 꺼진다. 작가는 가만히 무릎을 꿇고 앉더니 “공연 시작하겠습니다. 보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는 일어서서 불을 껐다. 감사합니다의 ‘다’는 백화점 직원들이 연습한다는 ‘솔’보다 높은 ‘라’ 음계 정도 되는 것 같아 이상한 여운을 남겼다.


여다함, 〈내일 부서지는 무덤〉, 2019, 퍼포먼스

여다함, 〈내일 부서지는 무덤〉, 2019, 퍼포먼스

불이 꺼지자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렸는데, 처음에는 소리의 존재감이 약해서 건물 밖에서 새어 들어온 구기동의 소음처럼 들렸다. 맨 처음 방안에 앉아있던 가무잡잡한 사람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평범한 속도로 일어서더니 이불 한 귀퉁이를 잡고 펄럭거렸다. 방안의 해묵은 먼지들이 풀썩거렸다. 이불은 파도처럼 너울을 만들며 나머지 세 귀퉁이까지 퍼져나갔고 이불을 덮은 사람들은 얕은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파도를 맞듯 가만히 있었다. 파도는 높으면 높은 대로 낮으면 낮은 대로 맞아들여야 했다. 몇 번의 파도가 치고 나서 파도를 일으킨 사람은 이불을 밟고 천천히 한가운데로 걸어가 작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양옆에서 그것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누군가가 그렇게 누워 있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본 것은 아마 어느 가까운 이의 입관 때 말고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가끔 뒤척이거나 몸을 옆으로 누이다가 이불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불이 솟아올랐다 꺼지고, 마치 두더지나 돌고래처럼 빠른 속도로 이불 속에 길을 내기도 했다. 그 움직임의 여파는 고스란히 이불을 나눠 덮은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어느 순간 이불은 사람 크기 정도의 직사각형 모양으로 솟아올라 마치 긴 천을 덮은 관을 높이 들어 올린, 하관 직전의 모습 같더니, 직사각형은 점점 더 높이 솟아 마치 상자 속 사람이 사라지는 마술에서 천을 걷어내기 직전과 같은 모양이 되었다. 어쨌거나 사각형으로 솟아오른 이불은 사라짐을 읊조리게 했고, 이불을 나눠 덮은 사람들은 마치 무덤에 떼가 잘 퍼지도록 곱게 입히듯 이불을 조금씩 당겨 덮었다. 이불 더미 안에서 불이 켜지자 그것은 반투명한 알처럼 되었다. 불빛이 빠르게 깜박거릴 때는 사망 직전의 호흡인지 출생 직전의 격동인지 알 수 없는 긴장이 고조되지만, 더미는 이내 푹 꺼져버렸다.


그리고 거울을 든 그가 이불 가운데에서 역아(逆兒)의 난산(難産)처럼 힘겹게 발부터 밖으로 조금씩 나온다. 곧이어 갓 태어난 네발짐승처럼 힘을 모아 일어서서 거울의 윗부분을 양손으로 잡고 아랫부분은 몸 어딘가에 기대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때 천정에 달린 스피커에서는 음악과 소음의 중간쯤인 듯한 규칙적인 소리가 반복되고 등대처럼 빙글빙글 도는 조명이 천천히 방 안 구석구석을 비춘다. 그는 보는 이들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거울 위쪽을 앞으로 숙이고, 그렇게 어쩔 수 없이 거울 안으로 들어간 이들은 자신이 하얀 뼈 같은 서까래와 들보 사이에 묻혀 있는 것을 본다. 그는 양손으로 거울을 들고 발등에 얹어 마치 키가 작은 왈츠 파트너를 이끌듯 조심스럽게 천천히 이동한다. 처음의 자리로 돌아온 그는 다시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표정을 탁 풀어버리고, 그 풀린 표정에서 비로소 이불을 나눠 덮은 사람들이 손뼉을 쳤다.


직유가 남용된 이 상세내역이 어떠한 의미로도 건너뛰지 않기를 희망한다. 모든 언어는 내일 사라지고 그 이상한 저녁의 느낌만 고스란히 남기를. 잘 입힌 봉분의 떼처럼 가장 낮은 세포에 달라붙기를.


※ 이 원고는 『2019 국립현대미술관 고양 레지던시 입주작가 비평모음집』에 수록된 것으로, 저작권자의 동의 아래 게재하는 글입니다

안소현

아트 스페이스 풀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