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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예술의 근원과 폭발력 (1)

posted 2020.09.17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이승조(1941~90)는 한국 기하학적 추상회화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앵포르멜의 ‘뜨거운 추상’에 뒤이어 출현한 ‘차가운 추상’을 ‘동시대의 양식’으로 삼았다. 일생 동안 기하학적 추상의 자기화에 몰입해 이 방면에 일가를 이뤘다. 이승조는 붓자국이 넘실대는 회화적(painterly) 조형에서 완전히 벗어나 명료한 선적(linear) 조형으로 일관했다. 그 활동 무대는 ‘오리진’과 AG 동인이었다. 그에게는 ‘파이프 화가’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승조 예술의 요체는 ‘핵(核, nucleus)’이다. 자신이 마주한 혼란스러운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미술의 중흥을 위해 핵이 갖고 있는 근원성과 폭발적 에너지에 주목했다. 명료한 형태와 원색으로 순수 조형 질서를 강조한 초기 양식을 거쳐, 파이프 형상의 반복과 변주로 2차원의 평면성과 3차원의 착시가 기묘하게 공존하는 〈핵〉에 천착했다. 이승조의 작고 30주기를 맞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대규모 회고전 《도열하는 기둥》(7. 1~10. 4)이 열리고 있다. 원기둥 형상의 모티프가 되었던 1968년작 〈핵 10〈을 비롯해 말년의 대작까지 총 90여 점이 대거 출품되었다. 필자 최정주는 한국 모노크롬회화, 옵아트의 환영적 효과와의 관계에서 논의되어왔던 이승조 예술의 비평 스펙트럼을 넓혀, 당대 서구 전위적 미술과 담론의 직간접적 체험이 그의 회화 양식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다. 특히 그가 현상학적 개념을 도입해 ‘보는 것의 문제’를 두고 어떻게 재현과 추상의 이분법을 벗어나 회화의 자율성을 획득했으며, ‘근원적이고도 순수한 회화 공간’에 도달했는지 추적한다. 논고에 이어 이승조의 생애를 회고하는 아카이브를 싣는다. 그가 국내외 미술계를 종횡무진하며 기성의 질서를 뛰어넘어 시대를 앞서가는 예술가로 거듭날 수 있었는지, 그 시간을 불러낸다.


파이프 형상의 병렬이 필경 고정된 것임에도 역학적인 구조미를 느낄 수 있는 까닭은 충만한 볼륨의 연속에서 비롯된 일종의 환시 작용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파이프 나열이라는 단순성을 극복하는 역삼각형, 다이아몬드형 등 기하학적 구도를 암시한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보다 적극적인 역동감이다.

  • 신항섭, 「이승조」, 『현대미술의 위상: 한국현대미술 12인의 작품론』, 화성문화사, 1982.

전체적으로 그의 화면 표정도 (...) 재현, 모방을 포기하는 대신 순수 조형 형식의 요소들로 회화의 결핍된 내적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는 셈이다. 무미건조하게 보이는 도형이지만 그것은 농축된 화면 형성력과 밀도 높은 표면감, 그리고 형태적 완료성에 힘입어 평면의 정화된 상황을 제시해주고 또 회화의 본질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는 것이다.

  • 서성록, 「기하학적 평면과 구축적 공간」, 『월간미술』, 1991년 3월호.

그의 회화는 하나의 음양적 ‘장(場)’으로서 의미를 갖게 되었고, 이러한 의미에서 자연의 ‘내재율’의 표현이자 당당한 구조적 사물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 그의 화면은흑과백,명과암,충과허,장과단,동과정,강과약등일체의대립요소가서로 마주보고 버티는, 요컨대 ‘대치’의 관계를 유추해내고자 했다.

  • 김복영, 「<核> 25년사, 음양 대치적 환원의 시대」, cat. <이승조 특별전>(부산시립미술관, 2000).


최정주


차가운 금속성의 매끈하고 명징한 파이프 형태가 질서정연하게 자리한 그림. 명치끝이 저리는 강렬한 시각적 자극과 잔상, 파이프의 반복과 도열이 자아내는 낮고 깊은 진동의 울림. 보는 이의 시지각을 단숨에 지배하는 이승조의 〈핵〉 연작의 마력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한다.


‘파이프 작가’로 알려진 이승조가 타계한 지 꼭 30년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의 기억에 그의 이름과 족적이 적잖이 휘발되기도 했다. 이승조는 1960년대 말 그야말로 혜성같이 나타나 전통에 없던 옵티컬한 기하추상으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서 수차례 수상하며, 한국 추상화단의 흐름을 전복하고 새로운 부표를 만들어낸 선구자였다. 1970년대 전위미술과 모노크롬 회화의 미학을 자기화해 1980년대까지 독보적인 추상회화의 세계를 구축해 나간 이례적인 존재였다.


이승조의 예술 활동은 25년 남짓에 불과했으나, 치열한 자기 고뇌와 분석을 바탕으로 아방가르드의 개척 정신을 추구하는 여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승조의 삶 자체가 생존과 존립 의지로의 강박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태어나보니 일제강점기였고, 10살 남짓한 나이에 한국전쟁을 겪어야 했으며, 20대 청년기에는 4·19 혁명과 5·16 군사 쿠데타로 이어지는 한국 사회의 굴곡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살아남는 것의 의미와 가치를 뼈저리게 통감한 세대였다. 먹고살기 힘든 시대에 예술가의 길을 선택했고, 한국전쟁의 여파로 황폐해진 미술계 재건을 위해 목숨을 걸고 뭐라도 해내야 했던 척박한 시절을 살았다. 이승조에게 예술은 철저히 생존의 언어였으며, 쟁취의 위력과 앞서가는 속도를 지닌 것이어야 했다.


Photo by 황정욱,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Photo by 황정욱,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학생 화가, 진취적 예술가로 거듭나다


‘핵’은 이승조의 예술 의지를 세상에 알린 그만의 언어였다. “아폴로 우주선 발사로 우주의 공간 의식에 새롭게 눈뜨고부터 내가 살고있는 시대를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예술적 메타포로 추출한 ‘핵’은 ‘核’과 ‘Nucleus’를 병기한 점에서 ‘기원, 근원, 본질, 핵심’과 ‘폭발적 힘’을 연계한 것으로, ‘예술의 근원성과 폭발력’을 함의하는 명제였다. 평생 ‘파이프’를 그렸고, 이를 모두 ‘핵’이라 명명한 그의 의도는 보는 것의 근원적 의미를 파헤쳤던 예술적 행보를 가감 없이 적시한다. 그렇게 이승조의 〈핵〉 연작은 작가 자신이자, 예술의 본질 그 자체였기에 시대를 관통하는 ‘눈’이 될 수 있었다.


〈핵〉 연작에서 드러나는 섬세하고 탄탄한 표현 방식은 이승조가 중·고등학교의 학습기에 일찍이 단련해뒀던 손의 감각에서 비롯한다. 194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해방 공간기에 직계 가족과 함께 남하한 이승조는 한국전쟁으로 부산 피란을 거쳐 서울에 정착했고, 오산중학교 2학년 때인 1955년에 미술교사 김창복(1918~2010)의 눈에 띄어 미술반 활동을 시작했다. 김창복은 평안북도 정주 시절의 오산학교 출신으로, 이중섭의 2년 후배이며 임용련과 백남순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 일본 도쿄문화학원과 제국미술대학교에서 다양한 선진 미술을 체득한 엘리트 모더니스트였다. 그는 그리는 대상을 포착하는 회화적 시선부터 캔버스 바탕을 만드는 방식, 대상의 정확한 형태묘사,안정감있는구도설정,양감과밀도있는표현방법등에 이르는 아카데믹한 작화의 총체적 원리를 가르쳤고, 틈틈이 예술가의 진취적인 창작 의욕과 낭만적인 기질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전위의 중요성, 예술가로서의 가치관과 같은 기초 교양 들 을 전수했다. 이승조는 이러한 가르침 속에서 수채화와 유화에 두각을 나타냈고 굴비, 와당, 고서를 소재로 한 정물화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특히 스푸마토(sfumato) 기법이 뛰어나 스승에게 늘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의 탁월한 실력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은 그가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59년 제8회 국전 서양화 부문에서 첫 입선을 수상한 <굴비>이다. 한눈에 봐도 안정감 있는 오브제 배치, 마른 굴비의 자연스러운 형태감, 상 표면의 거친 반사 효과와 같은 생생한 물질감 등이 정갈하고 군더더기 없이 표현되었다. 이러한 표현법은 손응성의 <굴비>등을 범본 삼아 따라 그리며 예리한 손맛을 익혀나간 결과이기도 했다.


능숙한 재현적 표현 감각이 예술 신경의 DNA에 축적된 이후, 이승조는 1960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입학과 동시에 일어난 4·19 혁명, 연이어 5·16 군사 쿠데타를 겪으며 기성 사회의 변혁을 외치는 문화적 기류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대학교 2학년 때까지는 학과에서 요구하는 사실적 표현에 머물러 있었는데, 1961년 제10회 국전 입선작 〈고토의 와(古土의 瓦)〉는 흔들리는 사회 구조를 은유한 양 어둡고 묵직한 톤의 배경에 깨진 와당과 도자기를 여기저기 흩어놓은 재현적 형상을 담았다. 3학년 때인 1962년부터는 사뭇 달라져 학교 밖 미술현장에 동서양화단을 막론하고 휘몰아친 앵포르멜 열풍을 인지하며, 1962년 제11회 국전에서 앵포르멜 화풍의 〈기력 A〉로 입선을 이어갔다. 그러나 당시 앵포르멜은 과포화 상태를 넘어 매너리즘적 타성이 서서히 드러나던 때였고 진취적 기상으로 가득했던 청년 작가들에게는 넘어서야 할 기성 미술이었다.


이승조는 서승원, 최명영, 권영우, 이상락, 김수익, 김택화, 신기옥, 최창홍의 8명 동기생과 의기투합해 “기성 미술계의 고루함과 무기력함을 극복하고 전위미술의 향방을 구체화”하고자 ‘오리진(Origin)’ 동인의 발족에 앞장섰다. 서승원, 최명영의 회고처럼 이들은 당시 “앵포르멜의 시효가 다해갔고, 군사 정권의 통제와 질서로 심리적 중압감과 빈곤, 소외 등의 정신적 공황 상태에서 가치관의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서양화과 59학번 선배들이 그해 6월에 ‘무동인(無同人, Zero Group)’ 창립전을 개최하는 것을 목도하며 자신들도 “무엇이라도 해야 하겠다는 소명감”으로 평론가 김영주, 방근택, 오광수의 자문을 거쳐 전위 의지를 실현한 것이다.


오리진은 ‘근원, 기원’이라는 뜻을 명패로 내세웠듯 창립 선언문에서 “모든 근원적인 것에 대한 모색”부터 “유전자의 순수성”과 “삶을 구출하는 심화된 평범”, “우주적인 시점에서 응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확산되는 새로운 창조 정신의 발휘를 주창했다. 이는 이전의 앵포르멜 계열이 추구하던 격정과 울분의 어두운 표현, 과거를 부정하는 미학과는 확연히 달라진 태도였다. 이처럼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울러 예술 본연의 질서로 환원하고자 했던 이들의 전위적 예술 의지는 1년 뒤인 1963년 창립전 《제1회 ORIGIN 회화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최창홍이 빠진 8명의 작품 27점은 오광수의 언급처럼 캔버스를 검은색으로 메운 최명영의 반(反) 색채 회화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앵포르멜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이승조의 〈고(古) 1〉, 〈고 2〉, 〈고 3〉도 “원시적 애니미즘의 미정형의 풍정을 골법에서 구축하고, 타성에 시달린 듯 뉘앙스가 없다”는 언급에서 앞선 〈기력 A〉와 크게 다르지 않은 앵포르멜 계열의 작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리진의 첫 도전은 앵포르멜 경향의 침체 속에서 새로운 미학적 동력을 찾지 못한 채 아쉬움을 남겼으나, 기성 미술계에 대한 반성과 전위미술의 도래를 향한 신세대 작가들의 용기 있는 결집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또한 오리진과 무동인 결성 이후, 1964년 ‘신전동인’, 65년 ‘논꼴’, 67년 《한국청년작가연립전》(이하 《연립전》), 68년 ‘회화68’, 70년 ‘한국아방가르드협회(이하 AG)’, 71년 ‘Space Time(ST)’ 등이 연달아 창립되어, 새로운 창작 실험을 지향하는 소그룹 형태의 동인회 발족에 하나의 범례를 제시한 결과로 이어졌다. 이승조와 오리진 동인은 졸업과 군 입대, 사회 진출의 문제로 4년간의 공백기를 보냈고, 각자의 방식대로 도전과 실험을 지속해 나갔다.


Photo by 황정욱,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Photo by 황정욱,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모든 근원적인 것에 대한 모색


이승조의 신작은 1967년 12월 11일부터 16일까지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개최된 《연립전》에 다시 등장했다. 그가 동대문상업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방과 후 치열하게 캔버스와 사투를 벌인 결과물이었다. 《연립전》은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출신인 무동인(1963년 졸업)과 오리진(1964년 졸업), 신전동인(1965년 졸업)의 선후배 동문 연합 전시였는데, 한 국 현대미술계의 재도약 을 위한 전위미술의 실험 무대와도 같았다. 이들의 작품은 누보레알리즘, 옵아트, 키네틱아트, 색면추상, 팝아트, 환경미술 및 퍼포먼스 등의 특성이 혼재되어 나타나 당시 미술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이들 연합의 성사는 1967년의 제5회 파리청년비엔날레에 오리진 멤버 최명영이 참가하며 느꼈던 국제 미술계의 변화에 대한 실감과 자극이 동년배 작가들에게 공유되면서 전위 의식이 급속히 타오른 것이 주요 요인이었다. 전시 폐막 후인 1968년 오광수와 최봉현 등이 경북공보관 화랑의 지방 순례 강좌에서 “국제 미술계는 앵포르멜을 지나 오브제, 일렉트릭아트, 옵티컬, 미니멀아트, 해프닝 등의 추세를 보인다”고 강조점을 둔 것은 앵포르멜의 빈자리를 동시대 신경향과의 호흡 속에서 추출해내고자 했던 이들의 사명감과 연대 의식을 드러낸다.


《연립전》에서 오리진 동인 모두 회화만을 출품한 가운데, 이승조는 〈핵-1〉, 〈핵-2〉, 〈핵-3〉, 〈핵-4〉로 새로운 조형 태도를 제시하고자 했다. 이는 점, 선, 면, 원형, 삼각형, 사각형의 형상을 상하좌우 대칭으로 구성하고, 노란색, 붉은색, 녹색 등의 원색을 적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하학적 색면추상화였다. 자를 대고 그린 명료한 형태와 선명한 색채의 순수한 조형 질서만으로 이뤄진 기하 추상의 등장은 동인과 함께 어떻게든 앵포르멜 경향에서 벗어나려는 과제 속에서 맹렬히 토론하고 고심했던 결과였고, 오리진이 추구했던 ‘모든 근원적인 것에 대한 모색’의 최초의 가시적 실현이었다. 오리진의 조형적 선회에 대해 비평가 이일은 “한 사람의 몬드리안, 말레비치도 갖지 못하고 바우하우스를 통한 구성주의적 조형의 체험도 없는” 한국 화단에서 매우 이례적인 시도임을 지목하면서도, 이는 “우리 나름의 역사적 맥락과 개념의 특성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채 (서양의 신경향들을) 거의 감각적으로 동시에 받아들인” 사례라는 점에서 “자기 투사의 한 표현에 그치는 것이며, 시각적 명료성에 대한 갈증이 만들어낸 요청”이라는 자조적 평가를 내렸다.


이일의 언급처럼 한국 미술계의 새로운 지형 수립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자기화의 과정을 거쳐 이뤄져야 한다는 시각은 당연한 논리였지만, 압축적 근대화에 과몰입된 사회 분위기에서 미학적 안목을 차분히 성찰할 기회나 새로운 자극제, 안티테제를 찾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미술인들에게 국제 미술계와 직접적인 교류 체계가 거의 없던 상황에서 해외 미술계 동향을 접할 수 있는 루트는 일본의 『미술수첩(美術手帖)』, 『미즈에(みずえ)』, 『아틀리에(アトリエ)』, 서구의 『타임(TIME)』, 『라이프(LIFE)』, 『아트뉴스(Art News)』 등의 해외 미술전문지뿐이었다. 이승조도 『미술수첩』, 『이데아(アイデア)』 등을 탐독하면서 해외 미술계 및 디자인계 정보를 습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조형 요소들이 『미술수첩』 1960년 6월호의 「워크숍-조형의 기본5 기하학적인 동기(WORK SHOP-造型の基本5 幾何學的な動機)」와 같은 해 11월호의 「워크숍-조형의 기본10 충전과 분할(WORK SHOP- 造型の基本10 充塡と分割)」에 수록된 참고 도판의 원형과 사각형의 중첩, 치형 돌기 형태가 유사하고, 조셉 알버스(Josef Albers)의 〈푸가(Fugue)〉(1925)의 가로 배열과도 연관성을 보이는 것은 그러한 정황을 가늠하게 한다. 미술전문지에 수록된 이미지나 양식을 참조한 사례는 이 시기의 작품에서 종종 발견되는데, 이는 당시 한국 미술계의 한계에서 비롯된 선진 미술 수용 패턴의 아픈 현실이기도 했다.


오리진의 작품은 그간 기하학적 추상회화와 옵아트의 뚜렷한 구분 없이 혼용되어 평가되었다. 이유는 미술계에 기하학적 추상회화의 토대가 미약했고, 옵아트는 이식된 미술 현상으로 인식되면서 적극적인 분석이 뒤따르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옵아트는 1965년을 기점으로 파리청년비엔날레, 상파울루비엔날레 등의 국제 미술계에서 팝아트, 누보레알리즘 등과 함께 두각을 나타냈고, 국내외 여러 지면에서 소개되고 있었다. 1965년 『경향신문』만 해도 「미국의 새로운 운동인 옵아트」(3월 13일) 같은 기사나 “과학에 가까운 예술인 옵아트가 미국에서 한창 기세를 보이고 있다”(7월 28일)는 김환기의 인터뷰가 실렸고, 『미술수첩』 5월호에는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옵아트 전시인 <반응하는 눈(The Responsive Eye)>이 다뤄지기도 했다. 국내 미술계에서는 1966년 『조선일보』가 주최한 <제10회 현대작가초대미술전>에서 하종현이 <탄생 A>, <탄생 B>를, 전성우가 <색동만다라>를 출품해 기하학적 요소와 옵아트적 경향을 선보였으며, 박서보는 1968년 <유전질> 연작으로 이러한 흐름을 이어갔다. 그러나 평단에서는 유독 옵아트에 대해서 ‘돌연변이’, ‘남의 나라 유(流)스러운 아이디어’ 등 서먹한 반응을 보였고, 작가들은 ‘전통적인 오방색’의 토착 정서를 구현했다고 우회적으로 토로하며 옵아트와 거리를 두기도 했다. 오리진도 평단에서 자신들의 작품을 옵아트 계열로 구분하는 것에 “반대하고, 다만 밝고 분명한 형태만을 추구”했다고 강조했다.


이승조가 《연립전》에서 얻은 성과는 화단에도 자신에게도 성공적인 터닝 포인트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는 화단에 뜨거운 추상회화의 종언을 알리고 차가운 기하추상의 미학을 새로 등극시켰으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이자 지향점인 ‘핵’을 처음 제시하여 출발부터 분명하고도 확고한 첫 걸음을 내디뎠다.


이어지는 기사

핵, 예술의 근원과 폭발력 (2)


  • 본 논고는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 「이승조의 ‘핵’ 연작 : 기하학적 추상의 다면성」(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2018)을 바탕으로 재구성했으며, 논문에 수록된 선행 연구 및 인용 각주는 생략되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논문 전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이 원고는 아트인컬처 2020년 9월호에 수록된 것으로,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아트인컬처와 콘텐츠 협약을 맺고 게재하는 글입니다.

최정주

제주도립미술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