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공’에서 ‘무’로, ‘무’에서 ‘회귀’로

posted 2021.03.08


심은록


천자문에 물방울이 영롱히 맺힌 〈회귀〉 연작. 미술비평가 심은록은 이를 ‘유불도(儒佛道)’의 정신으로 분석한다. 김창열의 회귀는 ‘무위’로 돌아오는 ‘도’의 움직임, 곧 인간의 고귀한 심성과 자연 만물의 근원으로의 회귀다.


1969년 도불하여 그곳에서 살며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창열은 재불 작가이다. 그는 한국에 앵포르멜운동을 정립시킨 선구적인 작가 중의 한명이다. “소우주의 반영, 허(虛) 혹은 무(無), 플라톤의 실재와 현상을 동시에 포용하는 개념, 명상, 승화·카타르시스, 우주생명의 기원 등등.” 동서양의 문화와 종교를 어우르는 물방울에 대한 해석이 다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 같다. 이러한 다양한 해석에 대해 그는 “물방울이 가지고 있는 속성은 보는 사람에게 달려있고, 그들의 자유이며, 또한 각자 그러할 권리가 있다”라고 대답했다. 작가는 “물방울이 도교의 무(無)나 불교의 공(空)과 관련된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또한 그에게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는 농담반 진담반처럼 “유불선”이라고 한다. 사실 특정 종교가 없는 그에게 종교적 의미가 강한 유불선‘교(敎)’ 보다는 문화, 철학적 측면이 좀 더 부각되는 유불도‘학(學)’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유학(儒學)시대, 조부의 예(禮)와 덕(德)


김창열의 4~5세 시절 평안남도 맹산 생가에서 촬영한 가족사진.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김창열의 4~5세 시절 평안남도 맹산 생가에서 촬영한 가족사진.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천자문(千字文)을 배경으로 하는 그의 최근 물방울 연작의 제목은 〈회귀〉로, 조부 밑에서 천자문을 배우며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향수를 그리고 있다. 〈회귀〉 연작에서 보이듯, 김창열은 천자문으로 표상될 수 있는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다. 그는 일제 치하, 1929년 12월 평안남도 맹산이라는 작은 강촌에서 태어났다. 생가 뒤편 산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천연기념물 맹산 흑송림은 그 기상이 하늘을 찌를 듯하며, 마을 앞으로는 고구려의 기상을 싣고 흐르는 대동강물이 맑고 여유로웠다. 창열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조부 김찬규는 유교를 신봉하는 선비이자 지역에서 알아주는 명필가로 학식과 품성으로 존경을 받았다. 조부가 지우들과 한시(漢詩)를 읊으시던 모습, 나지막하면서 낭랑한 목소리, 그 분의 사시는 모습의 귀감 등이 담겨 있다.


불학(佛學)시대, 공(空)으로


이후 해방, 6·25전쟁과 더불어 한국 근대사의 가장 격동기를 겪고, 또한 1966년부터의 약 3년간 미국 체류 기간 동안 그는 아트스튜던트리그(Art Students League)에서 판화 공부 및 작품 활동을 한다. 미국 체류 기간, 김창열은 예술 문화적, 심리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낸다. 체류 초기 그는 록펠러재단의 후원으로 미국의 여러 대도시의 미술관과 미술대학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토록 커다란 나라인 미국의 미술계가 팝아트에 의해 완전히 점령되어, 다른 장르의 미술들이 무시당하고 있었으며, 그 다른 장르에 속했던 김창열의 작품은 내놓을 수조차 없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삶 자체를 본업이 아닌 아르바이트처럼 가볍게 여기며 궁극적 목적을 생각하기보다는 허상을 쫓는 분위기, 소수가 무시되고 대중만이 존재하는 듯한 아트라는 이름의 대중 테크닉(pop techne), 말없는 깊은 정보다는 미사여구로 치장된 언어와 광고의 홍수, 이 같은 서양식 존재 양태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등은 실체가 없는 ‘공(空)’과 같았다.


도학(道學)시대, 무(無)로
1969년, 도불함과 동시에 오랜 고민과 고통의 밤을 걷어내는 새벽의 빛을 받은 물방울은 비록 짧은 순간만을 존재함에도 존재의 충일감을 발산하는 그 아름다움에 그는 경외감마저 느꼈다. 그리고 첫 물방울 작품 〈밤의 행사(Evenement de la Nuit)〉(1972)가 태어난다. 광기와 고통의 중력으로부터 해탈한 듯 영롱하고 투명한 물방울 한 점이 밤바다와 같이 깊고 진한 캔버스 위로 두둥실 떠오른다. 무(無, 검은 색 모노크롬 배경)로부터 공(空, 물방울)의 출현이다. 이 해탈된 물방울은 파리의 권위 있는 초대전 《살롱 드메(Salon de Mai)》에 출품되고, 김창열은 물방울 작가로 데뷔하게 된다.


이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밤바다에서 태어난 물방울은 대지(大地)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초기의 또롱또롱하고 영근 물방울부터, 좀 더 여유 있어 보이는 물방울들, 금방이라도 터질 듯 팽창된 동그란 물방울부터 길게 흘러내리고 있는 물방울들, 라이프니츠의 단자(monade)처럼 닫혀 있는 물방울로부터 열려 있는 물방울들까지. “물방울을 그리면서, 물방울의 속성을 생각하게 됐지. 물방울은 하나의 자연이니 역시 자연 위에 놓여야겠다고 생각했어. 우선 캔버스 위에 그려보니까, 캔버스가 물방울의 투명성을 돕는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래서 캔버스와 가까운 것을 찾았어. 그것이 바로 마포, 모래, 나무 판이었지.” 이처럼 물방울은 바탕칠이 되지 않은 거친 마대나 모래 위로, 결이 살아 있는 나무 판 위로 여정을 계속한다. 세계적인 작가이자 평론가인 이우환의 평이다. “김창열 선배는 물방울로 세계적으로 이름이 났기 때문에 물방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왔다. 물방울이라는 하나의 메타포를 가지고 시각적으로 미술사에 남는 일을 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물방울〉 캔버스에 유채 228×182cm 1977.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물방울〉 캔버스에 유채 228×182cm 1977.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1980년대 중반부터 물방울은 천자문 위로 흐르기 시작한다. 1차적으로는 유교를 신봉했던 조부에 대한 회상이며 ‘회귀’이다. 서양에서 ‘고전 문화’에 대한 르네상스처럼, 이는 단순히 ‘유교’의 르네상스만을 의미할까? “큰 그림을 그릴 때 물방울만을 사용하니까 물방울이 마치 돌덩어리같이 느껴져서 고민하던 차에, 가깝게 있는 일상의 오브제인 신문지에 물방울을 얹어봤지. 작품이 되더라고. 그래서 '신문지라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되었고, 글자가 물방울의 투명성을 강조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신문지처럼 글자를 넣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어떤 글자를 넣어야 할까 고민하며 영문자, 한글, 숫자 등 모든 글자에 물방울을 얹어보았는데, 한자(漢字) 위에 놓았을 때 물방울이 가장 편안해 보였어. 내가 한글을 배우기 전에 익힌 글자가 천자문으로 노스탤지어가 있는데다가, 더욱이 천자문은 글자 하나도 반복되는 것이 없거든. 한자라는 것은 정신 공간으로 나아가는,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형이상학적으로 번져가는 글자이자 동서남북으로 퍼져가는 글자이기도 하지. 작업을 하면서 ‘알파벳 글자는 사람이 만든 글자이고 한자는 신(神)이 만든 글자’라는 생각에 공감하게 되었어.” 알파벳은 ‘인간’의 음성을 본 따 만든 표음 문자이지만, 상형 문자는 신이 만든 자연의 모습을 본받아 만들었기 때문에 ‘신이 만든 언어’라는 표현이 가능해진다. 비록 한자 전체에서 상형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고작 4% 내외지만, 214개의 부수자에서 상형자의 비율은 70%이다. 한자의 가장 기본 토대인 상형자는 적은 퍼센트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따라서 이미 자연의 이미지(그림)가 담겨있는 한자에 물방울이라는 또 다른 자연 이미지가 얹히는 것이 다른 어떤 종류의 글보다 잘 어울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처럼 좀 더 깊은 ‘회귀’의 2차적 의미는 결국 신의 문자(언어)인 자연으로의 복귀이다.


그렇다고 “모든 한자에 물방울이 얹힐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작가는 덧붙인다. 물방울을 통해 확대된 한자가 때로는 물방울과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한자가 물방울과 잘 어울린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뜻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광(光)자 위에 물방울을 얹어본다. 뜻이 좋기 때문이다. “빛-방울!” 하지만 광자 위의 물방울이 편안해보이지 않는다. 물방울을 약간 위로 올려서 야(夜)자와 광자 사이에 걸쳐본다. ‘밤-방울’과 ‘빛-방울’, 뜻도 좋고, 물방울도 그 사이에서 마침내 편안해보인다. 밤과 빛 사이에 걸쳐 있는 물방울은 또한 풀 끝에 매달려서 세상을 담아내고 있는 새벽이슬(露)처럼 오묘하다. 이같이 한 방울의 물방울은 시간 개념, 공간 개념, 의미, 형상 모두를 담고, 어우러져야 마침내 태어날 수 있다. 가장 찰나적인 존재이기에 물방울은 이처럼 빛과 어두움 사이에, 존재(유)와 비존재(무) 사이에 걸쳐질 수 있는 것일까?


도(道)의 움직임, “회귀”


〈회귀〉 리넨에 먹, 유채 160×195cm 1993.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회귀〉 리넨에 먹, 유채 160×195cm 1993.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동양에서 40년, 서양에서 40년을 보낸 작가는 캔버스 위에서 동양의 정신을 자연스럽게 서양의 양식으로 표현해낸다. 그와 그의 작품이 하나 되어 거쳐오고 캔버스에 물방울로 담아내는 ‘유불선(도)’ 정신은 유교, 불교, 선(도)교를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양의 주요 종교, 전통, 문화를 함께 어우르는 말이기도 하다. 본래 지성인, 통치자의 교학이었던 ‘유교(儒敎)’는 실존하고 있는 유(儒, 선비)를 가르치는 ‘유교(有敎)’로 ‘유(有)’에 근간을 두어 현실적 삶을 조명한다(작가의 어린 시절과 청년기). 불교는 ‘비(非)존재의 존재성’과 ‘존재의 비존재성’을, 혹은 ‘유도 무도 아닌(非有非無)’ 중도(中道)의 ‘공(空)’으로, 세상 만물은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닌 ‘공’임을 설명하고 있다(한국전쟁과 미국유학시절). 민중들의 신앙으로부터 형성된 도교에서 유는 만물의 본체인 무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만물의 본래의 성질이나 모습(자연)에 어긋남 없이, 지배하거나 지배되지 않는(무위) 길을 지향한다(도불 이후 현재까지). 그리고 모든 것은 다시 본래로 돌아와야 한다. 돌아오는 것, 즉 ‘회귀’는 ‘도(道)의 움직임’이다(반자도지동, 反者道之動). 김창열 작가의 작품 가운데 다섯 개의 물방울이 흘러내리며 긴 물방울 자국을 남기고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 있다. 물방울 자국은 마치 사람 형상과 같다. 흘러내리는 물방울의 길은 또한 인간의 길로, 이 길을 따라 사람의 형상(forma)이 형성된다. 이 물자국은 곧 다시 기화(in-forma)되어 원래 온 곳으로 ‘회귀’할 것이다. 유불도를 담아내는 물방울 작품을 통한 “회귀”는 이처럼 어린 시절로의 ‘회귀’를 넘어, ‘자연’으로 혹은 인간 고유의 고귀하고 아름다운 심성의 근원으로의 ‘회귀’를 말하고 있다.


바다는 싫든 좋든 흘러 들어오는 모든 물을 받아들여야 바다가 된다고 한다. 김창열 작가의 작품은 이처럼 그의 유불선적 삶과 철학을 바탕으로, 그가 좋아하는 앵포르멜부터 좋아하지 않는 팝아트까지 수많은 현대 화풍이 스며들고 모여, 한 방울로 떠내어진 바닷물이다.


김창열
1929년 평안남도 맹산 출생. 16세에 월남해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우고, 194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1957년 현대미술가협회를 결성해 한국 앵포르멜운동에 앞장섰다. 1965년 미국으로 건너가 아트스튜던트리그에서 판화를 전공하고, 1969년 파리에 정착했다. 1972년 <살롱 드 메>전에서 물방울 회화를 처음 발표했다. 국립대만미술관(2012), 주드폼미술관(2004), 국립현대미술관(1993) 등에서 60여 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퐁피두센터, 도쿄국립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등에 작품 소장. 2017년 대한민국예술원상, 2017년, 1996년 프랑스문화예술공로훈장, 2013년 대한민국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 이 원고는 아트인컬처 2021년 2월호에 수록된 것으로,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아트인컬처와 콘텐츠 협약을 맺고 게재하는 글입니다.

심은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