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계영
보이는 것
김보민은 ‘지금-여기’의 풍경을 그린다. 작가는 “풍경으로서 도시환경에 가치를 두고 전통회화의 방법을 응용해”1) 그린다. 전통회화 기법의 산수와 테이프로 그려진 현대적인 고층 건물과 교각, 사물들이 한 화면에 있어 언뜻 보기에 김보민의 작품은 서로 다른 두 시간대, 즉 전통(혹은 전통에서 연상되는 과거)과 현재를 공존시키는 것 같지만 작가의 지금은 전통의 현재진행형이며 새로운 버전이다. 다시 말해 김보민의 지금은 전통과 단절되거나 분리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작가는 도시와 자연, 도시와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다. 작가에게 서울은 하나의 거대한 산수이며, 일상 공간인 도시는 우리 외부의 풍경이 아니라 우리의 일부이다.2) 도시의 풍경은 화면 앞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구도와 부감법으로 존재를 과시하고, 뚜렷한 형태와 세밀한 묘사로 실체를 드러낸다(〈독립문〉(2006), 〈가회도〉(2009)).
보이지 않는 것
그런데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작가의 작업실에는 조금 전까지 그림을 그린 것처럼 종이와 화구가 어지럽게 놓여있고(〈The Root〉(2012), 〈안개〉(2010)), 작가에게 영감을 주었던 안견의 〈몽유도원도〉도 보이지만(〈몽유도원(2005)〉 화가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기사도 승객도 태우지 않은 버스는 덩그러니 길 위에 서있고 공항 앞 버스정류장에도 지나는 사람이 없다(〈비둘기〉(2007), 〈국제선〉(2006)). 전통산수화에서도 유람을 하는 촌로나 계회(契會)를 즐기는 문인들이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서울을 그린 그림에 사람이 없다니 이상하다.
그러다 작가가 사는 강서구 일대를 그린 작품에 이르러서야 사람이 온전히 등장한다. 여기서 ‘온전히’라고 말한 것은 감정을 느끼고 사건의 당사자로서 사람이 등장했음을 의미한다. 비록 설화의 형식을 빌렸지만, 긴 머리의 여인은 눈을 가리고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며, 무릎을 끌어안고 울고 있다(〈곰달래〉(2014), 〈혈거인〉(2015)).
비로소 보여주는 것
최근의 벽화-설치 작품에서도 서울이나 강을 그린 그림에서처럼 과거의 인물과 현재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 둘이 한 화면에 함께 나타나지 않는다(〈렬차〉(2019), 〈우물〉(2020)). 각각 하나의 드로잉 작품으로 그려져서, 비교나 참조의 과정 없이 완전하게 개별적인 인물로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3) 여기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여인의 초상이다. 과거의 신문기사와 사진자료에서 착안한 이미지라고 해도, 남자는 사선으로 앉았거나 전운이 감도는 바다를 무기력하게 바라보지만, 여인은 의지를 가지고 움직인다. 거울 속 자신을 응시하며, 여성에게는 입산이 금지된 금강산으로 향한다.(〈거울1900〉(2017), 〈입산〉(2018))
형상 역시 사진을 찍은 것 마냥 고정된 모습에서 유연해진다. 〈고요의 바다〉(2015-16)에서는 주기에 따른 달의 변화를 한 화면에 담아 형태의 가변적인 모습을 보여줬는데, 최근 들어서는 선의 사용과 세필묘사를 줄이고 수묵의 농담으로 형상을 표현한다.4) 이러한 변화는 재료와 화재(畫材) 선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5년부터 작가는 비단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비단은 물감이 잘 스며들어 발색효과가 좋으며 필름과 같이 투명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비단의 특징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작가는 명확하고 구체적인 모습을 고수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2018년 무렵 김보민은 1901년에 제작된 미국여행가 버튼 홈즈의 서울여행기 영상에서5) 망건을 두르는 남자, 춤추는 여자들, 양산을 쓰고 걸어오는 여자 등 움직이는 사람에 주목한다. 움직임을 표현할 때에는 정밀한 세부묘사보다는 전체적인 실루엣이 중요하다.6) 이 지점에서 이들의 움직임을 그린 작가에게 시선을 돌려보자. 왜 이런 것에 관심이 갔을까? 어째서 정지된 풍경이 아니라 움직이는 사람을 바라봤을까? 도시가 우리의 일부라는 작가의 말처럼 사람 역시 풍경의 일부라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그보다는 비로소 사람을 드러내어 그렸다고 말하는 것이 어울린다. 그동안 우리가 봤던 김보민의 풍경은 인적 드문 곳이 아니었으며, 사람이 보이지 않아도 사람이 다니고 머무는 공간이었다. 김보민은 우회하여 사람에 도달하였다.
김보민이 그림에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작품의 변화가 곧 성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보다는 부단한 작업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변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작가와 그림 사이의 거리를 관심있게 바라보아야 한다. 작업 초기 작가가 도시풍경을 관조했다면, 어느새 작가는 다른 이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고 때로는 화면 안으로 들어간다. 거리를 자유자재로 조절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 속 죽은 자와 산 자를 연결하는 영매나 타오르는 심장을 가진 여성은 작가와 다르지 않다(〈포옹〉(2018), 〈The Burning Heart〉(2018)).
작가는 전통은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메시지가 단번에 읽히지는 않는다. 김보민의 그림은 우회하며, 하늘을 나는 사람은 높이 올라갈수록 지상에 있는 이에게는 작아보이기 때문이다.7)
1)작가의 말
2)강홍구, 「회화의 지리학 - 현실과 가상의 틈새에서」, 2010에서 작가의 말을 재인용
3)작가는 드로잉 두 점을 나란히 설치하여 대를 이루기도 하고, 춤이나 동작의 연속성을 여러 점의 드로잉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4)보는 이는 표현기법의 변화를 크게 느끼지만, 작가는 변화에 크게 비중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구륵법에서 몰골법으로 기법을 바꾼 것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5)버튼 홈스는 미국 각지의 대도시에서 기행영화를 상영하며 자신의 여행담을 강연한 저명한 여행가이자 영화인으로, ‘여행기(travelogue)’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그의 방문 시기가 1899년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제물포에서 한강철교를 건너 서대문역에 도착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서대문역까지 경인철도가 완전히 개통된 1900년 7월 이후, 1901년 무렵 한국에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우연히 왕실 종친 이재순을 만나 궁으로 초대를 받아 고종황제와 황실 인사들 앞에서 영화를 상영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 상영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6)홈즈의 기록영상을 보면 망건을 쓰는 사내의 얼굴이 까맣게 나오지만 마지막에는 얼굴을 식별할 수 있다. 그렇기에 작가가 얼굴을 그리지 않은 것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작가가 그리지 않기로 선택한 것이다.
7)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에서 여성들이 모닥블을 둘러싸고 부르던 노랫말 “우리가 높이 올라갈수록, 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더욱 작게 보인다.”를 차용했다.
대림미술관 에듀케이터, 한미사진미술관 학예팀장, 서울디자인재단 선임연구원, 대구미술관 학예연구사 등을 거쳤으며, 매체를 제한하지 않고 문화예술콘텐츠와 수용자를 매개하는 사람으로서의 기획자를 지향한다. 이와 함께 10년 넘게 커뮤니티시네마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