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김주리 : 장소의 흙이 가진 로컬 내러티브와 역사, 그리고 여행자로서의 예술가

posted 2021.03.11


김남수


김주리 작가는 ‘장소’라는 기억의 매개적 영역을 건드리면서 미술관 공간으로 흙덩이를 들여온다. 이 흙덩이는 구체적인 ‘장소’로부터 유입된 것이며, 이 유입의 형식은 전혀 아방가르드적이지 않다. 오히려 아방가르드가 1968년 이후 포스트모던이라는 파상성과 혼합주의에 자리를 내주면서 ‘시간’이라는, ‘시간의 교차성’이라는 주제로 자체의 뼈대를 드러내는 것과 대조적으로 김주리 작가는 ‘공간’이라는, 이 선험적 형식을 차지하는 미술관 전시장에 ‘장소’로부터 연관되는 흙덩이를 들여놓아 구불구불한 지리적 여행을 암시한다. 실제로 작가는 끊임없이 여행을 하고 있으며, 지금처럼 20세기 후반부터 정립된 전자미디어의 글로벌화로 인해 시공간 압축 현상이 가져온 ‘장소 상실’ 그리고 ‘경험 결핍’이 작가들의 일반적인 현존의 속성으로 자리 잡는 것과는 궤를 달리하고 있다. 말하자면 작가는 굉장히 경험주의자의 태도를 견지하여 그로 인해 시대착오로 오인될 여지가 있음에도 아랑곳없이 어느 지역의 특정한 흙덩이를 만지고 있으며, 그 흙덩이가 가진 질감을 느끼고 있다.


모든 것들이 빠르게 시간예술화되고 있고, 그로 인해 시간의 얼굴(들)을 우리의 주어진 현실의 매트릭스로부터 그 명확하고 전투적인 형식으로 드러내는 매체 – 가령, 싱글 채널 영상 매체 – 가 전시의 일반적인 선택으로 자리 잡는 것과는 다르게 작가는 공간의 권능을 극단화하는 거대한 메스 형태의 흙 재료 위주의 작업을 펼쳐가고 있다. 이 공간축선에서 지리철학[Geo-Philosophy]적인 태도로 땅바닥에 배를 깔고 지그재그식의 기기를 거듭하는 뱀과 같은 동물적인 행동학이 시간의 얼굴(들) 드러내기에 직접 연관된 작업들과 다르게 “시간은 신의 소관처럼 여겨지는가 하면, 공간은 피조물의 상태를 고스란히 반영한다”라는 식의 저 바닥으로, 저 아래로 낮게 몰락하는 ‘노예의 도덕’(헤겔)과 유사한 에토스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 뱀이 의식을 치르듯 구불구불하게 좌우 곡선을 꺾으며 동시에 예측할 수 없이 땅의 바닥을 쓸면서 그 온도와 먼지를 덮어쓴 여행을 하는 것이 ‘노예의 도덕’이 갖는 전복적인 성격이며, 이는 ‘주인의 도덕’이 주어진 현실과 사물의 질서에 복속하여 게임의 규칙을 준수하면서 승리하고자 하는 판과는 전혀 다른 선상에서 이루어진다. 즉 뱀과 같이 여행하는 방식으로 흙덩이를, 구체적으로 어딘가에 존재하는 흙덩이를 겪는 감각에서 전자미디어와는 유다른 미디어, 즉 전통적으로 엘리멘탈[Elemental, 원소]이라고 불리워온 미디어에 재접속하는 것은 질료의 상서로운 측면을 느끼는 것인 동시에 여행하는 예술가가 질료 자체와 동일화되어가는 경험이기도 한 것이라 하겠다.


〈모습〉, 2020, 젖은 흙, 혼합재료, 연필나무향, 사운드, 680 x 610 x 160 cm.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모습〉, 2020, 젖은 흙, 혼합재료, 연필나무향, 사운드, 680 x 610 x 160 cm.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최근 송은아트센터 3층 전체 전시장을 점유한 전시 《모습 某濕 Wet Matter》에서 흙덩이들의 현실화된 형태, 상형문자의 출현 없이 그 잠재력의 원천으로 되돌아가서 자연의 어둠 일체를 분별없이 생각하게 하는 형태를 3점의 작품들로부터 접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이 작품들의 내재적 경험의 질적 요소는 작가의 실존적인 내러티브로부터 들려져야 하는데, 전시장에 마치 안개처럼 분무되는 일종의 스펙트럼 음악은 단순히 소멸하고 멸망하는 사물들이거나 그 종언에서 다시 시작으로 소환되는 사물들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하늘, 공기, 물, 땅 그리고 그 원소들 사이의 경계가 정치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벌거벗은 삶의 차원에서 구분지어지고 다시 무화되며 동시에 날카롭게 경계지대로 출현하는 과정들에 대한 모호한 증언이자 고백이라고 할 것이다. 사실 이러한 증언이자 고백은 지극히 사적인 로컬 내러티브를 터뜨릴 만한 작가의 여행이 뒷받침되고 있고, 그 여행의 결로부터 흙덩이의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이 목적론 없이 전시장에 여며져 있다고 할까. 늘 축축한 상태로서 생명의 자연발생의 조건처럼 흙덩이가 자기조직화의 과정에 들어서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 과정 속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아주 특정한 로컬 내러티브의 톤과 음색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가 두더지 – 사회적 참여를 하면서 혁명의 꿈을 버리지 않은 작가는 ‘두더지’(마르크스)로 표상된다 – 같은 방식이 아니라 뱀 같은 방식으로 여행을 한 지역은 중국의 만주 지역으로서 중국과 북한 사이의 단둥이라는 땅이었다. 그곳에서 작가가 탈북하는 사람들이 밟은 땅의 흙덩이, 그 바닥의 암울한 일상, 낱낱으로 분산된 채 환멸에 빠질 수밖에 없는 벌거벗은 삶의 침잠에도 젖어들었지만, 무엇보다 국경이라는 선이 갖는 비애의 감각 속에 그러한 정치적인 무의식, 정서적인 기호들이 고스란히 여며지고 동시에 흙덩이를 중심으로 한 풍경 – 바람 풍, 햇빛 경 – 에 귀속되고 통합된다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단둥의 흙덩이를 중심으로 한 풍경이 그대로 전시 《모습》 속에 레디메이드 형태로 도입된 것은 아니지만, 그 풍경의 본질과 흙의 질료적 느낌이 풍경의 알레고리로서 표현되었다고 할까. 그로부터 단둥 지방을 여행한 작가의 경험이 직접적이면서도 우의적으로 흙덩이라는 원소 미디어를 통하여 역운[역사적 운명]의 그림자처럼 나타난다고 할까. 이는 작가의 여행 경험에서 배태된 그 무엇이 단둥 지방과 송은아트센터라는 전혀 다른 장소들을 묶으면서 동시에 본래 선험적인 ‘공간’이 아닌 영역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하겠다.


김주리 작가는 2017년 사루비아다방에서 진행한 전시 《일기생멸 一期生滅》에서도 위의 《모습》 전에서 드러난 양상과 유사한 과정이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즉 이 전시에서 작가는 어둠의 허공에 매달린 달이 물 위에 달그림자를 드리우는 일종의 수월[水月]의 풍경을 기본 골조로 하여 그 풍경이 장소화되는 연극적 설정에서 쑥과 야생의 잡풀 그리고 백묘국 등의 식물들을 습지에 설치하였다. 여기서 백묘국은 작가가 일종의 개인적인 심적 유보나 기억의 유예처럼 되어 있던 것이 우연과 필연을 따른 재출현의 에피파니 현상을 겪으며 거기 그 자리에 삶의 솟구쳐오르는 탄생과 거꾸러지는 소멸의 아이콘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즉 작가는 유럽의 어느 작은 도시를 여행하던 중에 싱그럽게 살아있을 적에는 백색을 띠고, 죽음을 맞이했을 적에는 녹색을 띠는 식물을 처음 접했다. 그리고 의식의 수면 아래로 잠복했던 그 식물이 서울의 어느 골목길에서 우연히 재발견함으로써 어떤 확신에 가까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 이중등록되는 경험은 여행이 아무리 뱀과 같은 모험의 여정을 꾸린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의 전사[前史]로서만 기능하고, 다시 돌아온 익숙한 장소에서 반복되는 인지의 경험으로 그 전사의 여행이 재인지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결국 김주리 작가는 수월[水月]이라는 동아시아적 미학의 장치를 장소화된 설치로써 접근하지만, 그 보편적인 장치의 이면에서 울려 나오는 로컬 내러티브는 유럽과 서울을 관통하여 삶의 탄생과 소멸을 심연 속으로 빨아들이는 백묘국을 통하여 나직이 토해 내진다. 백묘국의 삶과 죽음, 그 과정의 스펙트럼에서 달이라는 불멸 역시 물 위의 수많은 복제에도 불구하고 유한성의 풍경을 배운다고 할까. 죽음 의식이 ‘장소’라는 매개된 영역을 빨아들이면서 어떤 권태나 회의에도 간과할 수 없는 삶의 근본 문제에 직면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고 할까. 이러한 전개 과정에서 작가의 여행에서 두 개의 장소들이 서로 내포되고, 그 내포의 형식으로 백묘국과 같은 매체가 고딕적이지 않고 숭고하지 않은 방식으로 개입한다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모습〉, 2020, 젖은 흙, 혼합재료, 연필나무향, 사운드, 680 x 610 x 160 cm.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모습〉, 2020, 젖은 흙, 혼합재료, 연필나무향, 사운드, 680 x 610 x 160 cm.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여행, 두 개의 장소(들)과 연결, 연결고리로서 매체 감각, 장소에 얽힌 풍경의 감각과 역사, 현실의 상태가 전시장으로 전이되는 현상 등등이 김주리 작가에게는 기본적으로 다양한 변주 계열의 작업을 펼치면서도 여전히 눈에 띄는 일관성의 구도이다. 이는 작가가 2011년 제10회 송은미술대상 수상의 《휘경 輝景》 전에서 이미 본성적으로 내재화된 것인지 모른다. 작가가 경희대, 외대 인근의 휘경동 일대의 다세대 주택을 하이퍼리얼하게 흙 재료로 세공한 작품들을 수반[手盤] 위에서 물분자의 파괴적 스며들기에 의해 천천히 소멸되어가는 과정, 시간적 추이의 과정을 체험하게 한 연출은 서로 다른 역사시대를 거대한 전환의 선이 이동하면서 소멸의 축을 중심으로 드러내고, 감각적으로 흙과 물이 상호대화하는 연인들의 발라드처럼 굉장히 의미심장했다. 1960년대 박정희 근대화와 함께 도시의 건축적 조밀도와 풍경이 바뀌는 것과 함께 건축법이 바뀌면서 지어지는 다세대 슬라브 주택 -- 1980년대 이후 서울의 중하층 민가주택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건축가 없는 건축’이자 ‘민간적 상상력이 개입하는 건축’으로서 삶의 표상적 성격이 강한 주택 – 이 휘경동이라는 ‘장소’의 패러디로서 ‘휘경’[輝景], 즉 “휘발되어 날아가는 풍경”이라고, 장소의 중력을 여전히 느끼면서도 그 기체적인 날아감을 통한 여행의 잠재성이 한껏 안으로 여며진 형식이면서 동시에 이러한 형식이 물의 분자적 결합과 함께 아이러니하게도 바다진흙 – 그리스 신화에서 모든 것을 만드는 기본 질료 – 으로 회귀하기 위하여 소멸되는 비-형식의 형식이란 것이 절대모순적 정신의 현현으로 보였다. 장소에 붙박이면서도 동시에 그 장소로부터 이탈하는 소용돌이가 느껴지는 풍경, 그것이 죽음의 느낌일 수 있는 풍경이라는 것이 그 정신성의 정체라고 할까. 거기에는 작가가 휘경동이라는 ‘장소’에 근거하여 세계의 무가치함과 허무함을 깊이 체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이란 이처럼 아무것도 지켜낼 수 없이 체험하는 것이고, 무엇인가 이질적인 것이 갑자기 백묘국처럼 침투해 들어오는 것이다. 2016년 경기창작센터 레지던시에 참여한 작가는 이러한 여행의 감각으로 그러나 ‘노예의 도덕’이 갖는 우울을 드러내면서 본관 건물 3층에서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자주에 가까운 해질녘의 하늘은 사위가 어두워져 갔고, 작가는 체인스모커로서 그 어둠 속에 잠겨 드는 공간을 응시하고 있기 일쑤였다. 지하인간처럼 “휘경”의 마력에 사로잡혀 수수께끼 같고 비밀 많은 동굴처럼 음습한 그 스튜디오에는 어디서 퍼왔는지 모를 흙덩이가 한가운데 놓여 있었고, 그때는 그 흙덩이가 여행의 신비론적 매체라는 사실을 전혀 알 길이 없었다. 물질적 질감이 그 내부의 계단을 숨기고 있고, 그 계단을 따라가면 시간의 흐름을 잊어버리는 ‘장소’로의 진입이 있고, 그 ‘장소’에서 삶은 죽었다가 다시 모든 것이 무화[無化]되는 순환질서 속에서 뱀처럼 기존의 낡은 껍질을 벗고 다시 기기 시작한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김주리 작가에게 여행은 그런 것이었다.


※ 이 원고는 『2020 국립현대미술관 고양 레지던시 입주작가 비평모음집』에 수록된 것으로, 저작권자의 동의 아래 게재하는 글입니다.

김남수 / 안무비평가

2001년 제9회 무용예술상 무용평론 부문 당선과 함께 무용평론 활동 시작. 2003년 무용월간지 [몸] 편집위원을 거쳐, 2006년 퍼포밍 아트지 [판] 창간 작업과 함께 편집위원으로 현재까지 활동. 2008년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연구원(3년), 2011년 국립극단 선임연구원(1년)으로 『백남준: 말에서 크리스토까지』『백남준의 귀환』 등을 편저 및 출간 했고, [계간 연극]을 창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