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희영
정덕현에게 있어 그림은 진실이 머무르는 공간이다. 그렇기에 그는 그 진심이 머물지 못하고 떠날까 염려한다. 세상에 대한 거친 이해와 성급한 단정을 자신의 그림이 가속화시킬 수 있단 사실을 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이를 경계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진실은 삶의 내면에 도사려 있으면서도 온 신경을 오랜 시간 곤두세우지 않으면 쉬이 포착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마음이 바쁜 작가들이 빈번히 놓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가 이미 아는 것에는 포착하기 어려울 것이, 빈번히 놓치게 될 것이 들어가 있을 리 없다. 이미 드러난 것, 인식 속에 있는 것들은 결코 그림이 아닐 것이므로. 우리의 작가는 그 진실에 다가서기 위해 방향을 조금씩 틀어가며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진실을 찾으려 하면서, 찾은 진실엔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그러고도 의심 끝에 확인된 진실을 또다시 회의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 좌우충돌의 여정에 그가 밝히려는 ‘그림의 힘’이 있다. 본 글은 그 여정을 담는다.
작가가 자신의 첫 작업이라 여기는 작품은 〈분열〉 시리즈(2011)이다. 회화과 학부 시절, 답사지에서 학우들이 야외 스케치에 걸맞을 자연을 찾을 때, 정덕현은 시멘트 공장에 매료된다. 시멘트 공장이란 한시적인 사용 기간을 갖고 있기에 그 효용이 다한 후에는 새로 건축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공장 외벽은 분열과 증식을 반복한다. 이를 생성의 한 과정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분열과 증식을 거듭하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끊임없는 의심 속에서 진실을 사장시켰다 탄생시키는 그의 여정에 닿아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작가는 이 현대적 경관에 “그림이 되겠다!”며 감탄한 것이다. 인식된 것엔 진실이 없다는 말은 다시 한번 쓰일 수 있다. 깊이 매혹될수록 몸은 이성에 앞서 반응한다. 작가는 답사가 끝난 후에도 매주 지방에 내려가 생성과정이 느껴지는 공장 외관을 촬영하고 작업실로 돌아와 현대적 ‘산수’를 그렸다.
정덕현이 시멘트 공장의 외벽을 통해서 보여준 생성은 공장 그 자체가 생산과 처리 그리고 폐기를 통해 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외면을 포착할수록 진실에 대한 열망은 점차 내부로 침입한다. 외면엔 내부로부터의 필연성이 늘 존재하는 이유에서다. 그는 몇몇 공장 내부를 견학하는 이방인으로 시작했지만 곧 반도체 공장 기계실에 노동자로 공장의 생성에 가담해버린다. 내면으로 비집고 들어가 자신을 현혹시킨 ‘공장’이라는 사물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리라. 체육관, 공장, 백화점과 같은 대형건물 지하 7층 기계실에서 오래된 부품을 가는 업무를 팀과 함께 수행하면서, 작품은 자연스럽게 원경에서 근경으로, 진경산수에서 정물로 뒤섞여 들어간다. 강조하자. 옮겨가는 것이 아니다, 뒤섞이는 것이지. 거대한 욕망의 기계 장치(공장)에서 가장 작고 소박한 단위의 사물(너트)로 시야는 수축되고 팽창하길 반복한다.
이 가담 중에 작가는 사고를 겪었고 불편해진 몸을 이유로 가담자는 다시 이방인이 된다. 이 경험은 그저 나선형의 도상에 불과했던 나사가 그 내면에 ‘노동’의 의미를 함유하도록 만들었다. 나사, 볼트, 너트 등은 기계가 지속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쓰이고 처분되길 거듭하는 부속품이다. 못과 너트는 작가의 노동에 의해서 기계의 작동에 종사했지만, 작가가 나선의 도상에서 ‘노동’을 보기 시작하자 마주한 사회 현실을 비추기 시작한다. 그렇게 노동의 소품 혹은 주변은 비로소 주인공이 된다. “내가 선택한 사물들 혹은 나를 선택한 사물들은 나와 동료들의 초상이 되었고, 약자들이 되었으며, 사회의 시스템이 되었다”는 지난 인터뷰에 나왔던 작가의 말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정덕현의 작업이 각별히 인상적인 지점은 공장의 외벽에서부터 침습하여 내부에 침윤되고 끝내 노동자로 살아가는 자들의 내밀한 사정까지 작업에 녹여낸다는 점에 있다. 2011년 〈분열〉 연작에서 2013년 〈피에타〉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은 정덕현이 정물화가로서 특정 사물을 매개체 삼아 사회적 진실을 얼마만큼 깊이 포착해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피에타〉는 1990년대 가족의 부품으로 희생당한 여성에 관한 작업이다. 방직공장에서 사용하는 재봉틀은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피에타의 도상이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떠안은 성모 마리아의 비통을 표현한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 누가 죽음을 선고받았는가. 여기 죽어있는 것은 노동이다. 정덕현의 〈피에타〉는 회화라는 성모, 혹은 지필묵인 성모가 ‘죽은 노동’을 품고 비탄에 잠겨 있다. 상품의 생산은 원재료, 생산 기계, 노동을 질료로 한다. 그러나 원재료와 기계에서 이윤이 발생하는 것은 아닐 테다. 이 둘은 이윤을 발생시키기에 언제나 탄력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노동은 그 값어치에 있어서 늘 탄력적이다. 이로써 부르주아의 이윤은 언제나 ‘노동’에서 증류된다. 자본의 사회에서 ‘노동’은 평가 절하되고, 살아있는 자들의 노동은 교환을 매개 삼아 화폐 혹은 상품이라는 물질로 질식될 때 죽은 노동이 되어 이윤을 탐식하는 이의 배를 불리운다. 작가는 재봉틀이라는 철 지난 사물에서 죽음의 선고를 읽었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거나 동정하는 것으로 몫을 다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이를 넘어 예술이 성모처럼 그 주검을 안을 수 있다 여겼다. 그것이 그가 노동의 생에 관해 고발하는 방법일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누구도 이전으로 돌아갈 방법을 알지 못했다. 정덕현의 경우, 세월호를 둘러싼 가짜 뉴스들의 범람은 그로 하여금 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작업으로 표현하게 만들었다. 작가는, 회화의 과제일 대상에 대한 감각적인 포착보다 예술이 수행해야 하는 사회적 책임이나 영향력에 대해 물음했다. 합정지구에서 진행한 개인전 《역사는 더 나쁘게 과거를 반복한다》는 이러한 예술의 정치적 과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미를 생산해냈다. 예컨대, 〈장벽〉(2015)이나 〈대리인〉(2015) 작업은 방송국의 지속된 오보에 참담함을 느끼고 진행한 작업으로 자신이 무엇을 보고 믿어온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멀리서 다가오는 생명체가 개인지 늑대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해 질 무렵을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라 불렀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기가 찾아오듯, 이 시기에 정덕현은 자신이 보는 것이 개인지 늑대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시간에 갇힌 듯하다. 세상을 알아갈수록 선명한 시선은 우둔한 자의 고집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일까. 이윽고 자신이 화폭에 담은 사물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자. 외면엔 내부로부터의 필연성이 있다. 무엇도 믿을 수 없게 되자 그는 스스로까지도 회의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그릇된 시선에 대한 기억은 늘 쓰라린 아픔으로 되밀려왔을 것이고, 점차 자신의 시선에 머뭇거리게 되었을 것이다. 확신이 없는 순간조차 진실에 목매지 않을 수 없어 진실을 찾아야만 할 때, 정덕현은 차라리 어떤 깨달음도 얻지 못했던 초심으로 되돌아갔다.
작가는 어딘가로 경도되었을지 모를 시선을 반성하기 위해 〈다각기둥〉 연작을 제작한다. 이 다각기둥엔 그동안 작가가 다져 점철시켰던 의미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외려 의미들은 소거되고 그것을 의심할 수 있는 시선만이, 각도만이 남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과 다른 상황에 놓여 있었던 자들의 입장이나 처지를 이해하게 되면서, 사물을 여러 시선에서 바라볼 것이라는 다짐은 이렇게 드러났다. 〈다각기둥〉 연작은 전혀 다른 시점을 한 작업에 동시에 담으려 한 작업으로, 파편화되어 있는 다양한 시선을 집합시킨 작업이다. 예컨대, 소파, 나사 등의 사물을 여러 측면에서 바라보고자 바닥을 제외한 육면체의 다섯 면에 다섯 관점을 그린다. 여기에는 하나의 식별될 수 있는 사물을 지시하는 총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 분절되었기에 그것은 하나의 식별이 아닌 여럿의 관점‘들’만을 설립한다. 이 관점들을 모두 파악한다고 해도 의심은 거둬지지 않을 것이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밑면이 있는 까닭이다.
《조각모음》 전시가 한 사물을 여러 시점에서 살피려던 시도였다면, 《천장 위의 바닥》 전시는 한 사물을 어디까지 포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실험이라 할 수 있다. 〈교작〉 연작은 쉼 없이 움직이는 진자를 눈으로 포착하여 그린 작업이다. 움직임을 거듭하는 진자의 외형을 포착하기 위해서 그리는 작가 역시 거듭된다. 이는 단순히 움직임의 외형을 잡아내려는 시도처럼 보이지만, 생동하는 정물과 이를 포착하려는 작가 사이에서 발생하는 시각적 교감을 기반으로 한 작업이다. 이는 정물에 직관적으로 반응하고 변화하는 특성에 누구보다 감각적으로 다루기 위한 과정이 된다. 작가는 이전에 공장 앞에서 공장 안으로 가담한 바가 있다. 그리고 이후에 그것과 거리를 두며 다각화될 수 있는 관점에 대해서 살폈다. 작가는 한 번 더 전진하기 위해 다시 돌아와 뒤섞인다. 진자의 운동을 여러 각도로 살피는 것은 관점의 다각화이지만, 그 다각화된 관점을 표현하기 위해 스스로 같은 대상에 대한 작업을 거듭하는 것은 진자로의 가담이다. 정덕현의 작업에서 주체로 등장하던 사물은 이제 교감하고 소통하고 반응하고 감각하는 사물로 변화한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기 어려워 ‘사물’ 자체에 집중했지만, 작가는 여전히 의심을 멈추기 어려웠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선명한 진실을 욕망하던 작가는 길을 잃는다. 그러나 전부에 대한 의심은 되려 확신을 낳는다. 이는 작가의 방법적 회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의심한다 하더라도 그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는 존재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 어떤 것도 거짓의 혐의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때조차도 그 의심을 지속하는 하고 있는 사실만은 진실하다. 작가는 그렇기에 경도되었다며 뒤로 물러섰던 ‘가담’이란 자리에 기꺼이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림 자체에 대한 의심은 내내 〈00가 있는 정물〉 연작(2020)처럼 그 안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림 자체에 대해 의심하면서 어떻게 그림을 지속할 수 있느냐 물을 수는 없다. 오직 그림에 대해서 의심하는 선에서만 의심하는 한 그림도 작가도 진실할 수 있기에 작업은 지속될 수 있다. 그렇게 작가는 마지막 남은 진실, 그림에 대한 의심을 그린다.
정덕현에게 있어 사물은 쓰이고 버려지는 객체가 아니다. 그에게 선택된 사물들은 소품이나 주변의 위치에서 주체의 자리로 이동한다. 사물의 외부에서 내부로 침습하고 사물을 뒤집고 옮기고 확대하는 여정은 사소한 사물들을 늘 주체로 서 있게 만든다. 그렇게 현실의 온갖 오물들로 오염된 사물의 여러 면은 이 여정 속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 수면의 가장 높은 곳까지 사물의 숨겨진 면을 드러내며 상승한다. 그가 사물에 부력을 부여한 것은 아니다. 사물은 본디 부력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모든 사물은 물에 뜨려 한다. 그가 행한 것은 그것이 한없이 가라앉고 말 것이라는 여론에 의심을 제기한 것이다. 그러자 사물은 떠올랐다. 정물들은 인간과 사회와 소통하고 교감하는 생동하는 생명체로서 그 자태를 뽐낸다. 그가 선택한 사물은 그렇게 추동력을 지닌다. 사회적 메시지는 작업에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붙고 떨어짐은 사물의 일관되지 못한 변덕을 의미하지 않았다. 이 낙폭이 오히려 진실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까닭이다. 의미에 경도될 수도, 의미 없이 관점만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붙고 떨어지는 낙폭 속에서만 진실은 그 생존을 알린다.
미술과 정치, 자본과 시선, 창작과 일상에 관심을 둔 기획자. 삼성미술관 리움과 컨템포러리 아트 저널에서 틈틈이 전시와 글을 배웠다. 2017년 첫 기획전 《학 다리 구멍》(킵인터치)을 시작으로 같은 해 강기석 개인전(서울혁신파크)을 열었다. 최근에는 《링, 동그라미를 가리키고 사각을 뜻하는》(인사미술공간, 서울, 2019; 주홍콩한국문화원, 홍콩, 2020), 《할아버지 시계》(별관, 2020) 등을 기획했다. 감각 못지않게 깊은 사유를 끌어내는 전시, 미술이 관객의 일상을 관통하는 전시를 기획하고자 한다. 저서로는 『시, 사랑, 돈: 예술이 제안하는 비폭력 대화에 관하여』가, 공저로는 『한국미술의 빅뱅』, 『기대감소의 시대와 근시예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