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디지털 인터페이스와 모눈종이 사이: 정희민의 형상과 배경

posted 2021.04.07


곽영빈



주지하듯, 정희민은 디지털 환경 속에서 변화된 이미지의 위상을 회화 매체를 통해 다룬다. 대부분의 비평들 역시 이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지만, 사실 정확히 무엇이 그의 작업을 독특한 것으로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는 인상이 강하다. 2018년에 열린 그룹전 <이브 EVE>의 도록에 쓴 글에서, 나는 그의 작업이 “‘형상과 배경(figure and ground)’의 위계적이분법을 유예”시킨다고 쓴 바 있는데, 이 짧은 글에서 나는 이 논점을 그의 최근 전시작업들을 참조해 보다 명확히 하려 한다.

“자유롭게 거리를 배회하는 개와 개의 입안이라는 촉촉한 가상의 공간”이 상정된 〈그의 촉촉한 입안에서 당신이 서 있는 들판을 바라보았다〉(2019)에서 출발해보자. ‘젊은 모색 2019’ 전에 출품되었던 이 작품은 개의 입안에서 보이는 세상을 묘사한 것으로 기술됐는데, 이러한 “촉각적인 장면”은 “치아, 눈, 손톱” 등의 신체적 이미지와 입안에서 상기되는 타액의 물성을 담은 조각 등을 매개로 공간에 펼쳐졌다는 것이 전시장 벽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이 작업이 “보는 이의 순간적인 몰입을 유도”하는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그것이 목표 성취에 ‘실패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 작업이 관객을 “몰입[으로] 유도”한다, 또는 해야 한다는 전제 자체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지의 독해와 관련된 많은 문제들이 이른바 작품의 ‘해석’ 단계에서 발생하기보다, 해당 작업의 ‘묘사’ 또는 ‘기술’의 차원에서 생겨난다는 미묘한 사실을 환기시킨다. 이는 후자가 전자의 지평 자체를 규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설혹 위의 묘사가 작가 자신의 설명이었다 하더라도, 해당 작업을 현장에서, 또는 그것의 이미지를 보면서 위의 묘사를 즉자적으로 떠올리거나 둘의 상관관계를 감각적으로 파악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촉각적인 장면”으로 묘사된 회화작업을 잠시 괄호 쳐도, 예를 들어 캔버스 앞 갤러리 공간 바닥에 산재된 반투명한 물질과, 그 위로 피어난 꽃의 형상들이 그림과 대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철저히 불투명한 것으로 남는 것이다. 꽃들의 하단에 자리 잡은 레진은 왜 반투명으로 처리되었을까? 꽃들의 형상은 왜 들쭉날쭉한, 픽셀화된 디지털 이미지를 환기하는 형태로 처리된 것일까? 더 근원적으로, 평면적 회화와 바닥의 물체들은 정확히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은 정희민의 작업이 ‘도상학적’이거나 ‘도상 해석학적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위상 학적 규정’ 또는 ‘묘사’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환기해주는데, 이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논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이들은 위에서 시사한 정희민 작업의 변이 궤적 및 함의와 직접적으로 공명한다.


My Old Faded Palette, 2020,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My Old Faded Palette, 2020,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먼저 전시장 바닥에 설치된 꽃을 독해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이를 ‘실체’ 또는 ‘부피’에 대한 ‘디지털/평면 이미지’의 욕망으로 읽는 것이다. 이 욕망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작업이 〈아이의 노래〉(2019)다. 2019년 P21에서 열린 개인전(《천사가 속삭인다》)에서 작가가 최초로 선보인 이 오디오비주얼 영상작업은, 위에서 언급한 노스탤지어와 결핍, 멜랑콜리의 토포스가 아이의 서사를 매개로 펼쳐진다. 디지털 이미지의 생태계를 환유하는 ‘표면’은 ‘부피’와 ‘두께’를 결여한 것으로 거의 강박적으로 제시되는데, 이러한 부재의 모티프는 작가가 이 작품의 원재료로 삼은 빔 벤더스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주인공인 천사가 인간의 육체를 ‘결여’한 것에 조응할 뿐만 아니라,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마트에 간 화자가 “두부와 치즈, 젤리”처럼, 촉감과 물성이 강조되는 식재료들을 ‘짓뭉갠 기억’으로, 다시 말해 ‘두 겹의 유실’을 통해 환기된다. (‘우는 데이터’라는 김정현의 비평글이나, ‘길고 슬픈 블루(스)’라는 이 현의 비평글 제목이 시사하듯, 그의 작업에 대한 비평들이 슬픔과 멜랑콜리의 토포스로 관류되는 건 전혀 놀랍지 않다)
둘째로 문제의 꽃이 단순한 ‘실체’가 아니라는 점이 지적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반투명의 토양, 또는 둔덕에 핀 픽셀화된 꽃에 가까운데, 전자의 반투명성은 디지털 기기의 액정화면을 환기시키며, 픽셀화된 윤곽선으로만 형상화된 꽃 역시 디지털 인터페이스의 특징을 그대로 담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실체’인가? 아니면 ‘실체가 되지 못한 실패작’인가? 답안과 무관하게, 이러한 의문들은 ‘실체’에 준거해 디지털 이미지를 전자의 ‘결핍과 부재’의 차원에서 부정적으로 판단한다는 의미에서 결코 좋은 질문이 아니다.
다시 말해, 관건은 어떻게 디지털과 아날로그, 또는 ‘평면과 물질/조각’의 사이의 간극을 ‘결핍’의 토포스나 ‘노스탤지어’ 또는 ‘멜랑콜리’적인 것으로 채색하지 않고, 모호한 ‘변증법’의 수사를 통해 우회하지 않느냐이다.
예를 들어 김홍기는 정희민의 캔버스가 “디지털 이미지의 비물질성과 회화의 물질성이 거래되는 장소”이며, “디지털 이미지의 비물질성에 대한 매혹과 캔버스와 안료의 물질성에 대한 의욕이 동시에 공존”한다고 올바르게 지적한다. (이러한 ‘거래’와 ‘공존’의 토포스는, 물속으로의 ‘하강’과 높은 대상으로의 ‘등반’이 등치되는 정희민이 올 초 이용아, 전승호와 함께 만든 또 다른 오디오비주얼 영상 〈등반가들 Climbers〉(2020)에서도 확인된다) 우리의 의문은, 그가 “디지털 이미지의 비물질성에 매료되면서도 캔버스와 안료의 물질성으로 저항”한다고 덧붙일 때 제기된다. 작가는 “비물질성”에 “저항”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이 물질성에 의해- 또는 물질성‘으로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이 둘의 차이는 결정적이다.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021 갤러리 대구, 2020) 전시전경.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021 갤러리 대구, 2020) 전시전경.

이런 맥락에서 시사적인 건, 올 6월부터 8월 중순까지 열린 가장 최근의 개인전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If We Ever Meet Again》이다. 물론 여기에도 상실과 부재의 토포스는 여전해 보인다. (e.g. ‘도착하지 못한 인사’, ‘사라진 고양이’, ‘내가 그리울 거야’) 하지만 그러한 연속성보다 눈에 (안) 띄는 건, 전시장의 한 벽면 전체를 뒤덮은 배경과 그 함의다. 도록의 바탕으로까지 일관되게 자리 잡은 그것은 모눈종이로, 이들은 ‘격자무늬(grid)’라는 점에서 미니멀리즘의 잔상과 겹쳐지기도 하고, 디지털 픽셀의 이미지와도 중첩되지만, 오롯이 아날로그 세계의 것으로 남는다. 작가는 디지털 인터페이스를 모눈종이라는 아날로그의 물질성으로 ‘회귀’시키려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정희민의 작업이 “‘형상과 배경(figure and ground)’의 위계적 이분법을 유예”시킨다고 썼던, 나의 2018년 글을 다시 한번 환기해보자. 그가 캔버스 표면에 물감을 두껍게 덧바르고, 두껍게 물질화하여 포개거나 겹치는 것을 ‘아날로그 vs. 디지털’이라는 위계적 이분법의 차원에서 파악하면, 후자는 전자의 ‘결핍’을 ‘벌충’하려는 우울한 블루스로 밖에 파악될 수 없을 것이다. 대신 정희민은, 마치 점멸하는 형광등처럼 전시장에 부분적으로만 도입한 모눈종이를 통해, 이 시대의 이미지들과 가시성의 바탕과 토대, 즉 배경이 무엇인가를 되묻는다. 정확하게 이런 의미에서 그가 지금까지 만들어온 작업들은, 작가 자신이 의식적으로 전경화, 또는 형상화해온 멜랑콜리와 부재의 토포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유예’의 차원과 시각에서 처음부터 다시 읽혀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서 만나기로 하자.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 이 원고는 『2020 국립현대미술관 고양 레지던시 입주작가 비평모음집』에 수록된 것으로, 저작권자의 동의 아래 게재하는 글입니다.

곽영빈

미술평론가이자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객원교수로, 미국 아이오와 대학에서 「한국 비애극의 기원」 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5년 서울시립미술관이 제정한 최초의 국공립 미술관 평론상인 제1회 SeMA-하나 비평상을 수상했고, 2016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과 2017년 제17회 송은미술대상전, 제4회 포스코 미술관 신진작가 공모전 심사를 맡았다. 논문으로 「<다다익선>의 오래된 미래: 쓸모없는 뉴미디어의 ‘시차적 당대성’」, 「페르/소나로서의 역사에 대한 반복강박 - 임흥순과 오디오-비주얼 이미지」 등이, 저서로는 『초연결시대 인간-미디어-문화』(공저), 『21세기 한국 예술의 고전을 찾아서』(공저), 『비디오 포트레이트』(공저), 『이미지의 막다른 길』(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