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시간의 피부

posted 2021.05.25


안소연


동양화가 유근택. 그는 일상 소재를 한지에 소환하고, 지필묵의 물성을 실험하면서 동양화의 현대화를 모색했다. 4년 만의 개인전<시간의 피부>(2. 24~4. 18 사비나미술관)에서 주목한 새로운 관심사는 격변의 동시대상이다. 팬데믹 이후 뒤바뀐 현실 풍경, 남북 분단의 정치적 대립각을 신작에 투영했다. 필자는 유근택 작품 세계를 ‘형상과 물성의 관계’로 고찰한다. 종이표면을 거칠게 일으켜 공간감을 만드는 표현법은 작가가 체험한 대상을 내면화하는 전략이다.


<어떤 경계-뉴욕타임즈> 한지에 먹, 호분, 템페라 148×270cm 2019. 이미지제공 아트인컬처

<어떤 경계-뉴욕타임즈> 한지에 먹, 호분, 템페라 148×270cm 2019. 이미지제공 아트인컬처.

한쪽 벽의 나란한<시간>(2020) 연작은 반듯하게 펼쳐진 채 불타고 있는 신문을 보여준다. 그림의 배경을 이루는 것은, 각기 다른 단색조의 색채와 화면을 꽉 채우고 있는 구체적인 사물의 표면을 연상시키는 나뭇결이다. 색채와 나뭇결, 그것을 배경으로 불에 타들어가고 있는 신문지는 비장해 보일 만큼이나 반듯하다. 유근택은 이 <시간> 연작에서 종이 신문과 불과 나무 탁자를 대상으로 삼아 ‘시간’을 사유하고 성찰하며 그것을 일곱 점의 서로 닮은 회화로 기록했다. 연속하는 벽에 걸려 있던 <생.장>(2020) 연작 또한 각각의 꼬리표 같은 부제를 달고 화면 가득 무성하게 자라난 풀을 배경으로 어떤 형상들이 자리하고 있어, 같은 사유에서 비롯된 구조라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시간의 피부>로 이름 붙인 이번 개인전에서, 유근택은 유독 배경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의 물성과 그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듯 놓여 있는 또 다른 존재들의 형상을 나란히 병치해놓았다는 강한 인상을 전한다. 사실 그의 회화에서 물성과 형상을 뚝 끊어 선명하게 규정하거나 구별하기는 어렵지만, 그는 ‘시간의 피부’라는 언어의 감각으로 그 둘 사이의 인과 관계 혹은 둘의 하나 됨에 가까운 중첩을 환기한다. 그 물성과 형상이 그의 회화에 대한 직관적이며 찰나적인 경험에서는 배경과 형태의 관계로 드러나곤 하여, 내게 주어진 어떤 ‘난제’처럼, 그의 회화에 담긴 것을 참되게 포착하기 위한 시지각의 조건도 한참 떠올려보게 한다.


체험, 작업의 출발점


유근택은 나와 <시간> 연작을 이야기하다가, 문득 <아침>(2020) 연작으로 눈을 돌려 그 화면 안의 탁자에 대해 그가 겪었던 일을 말했다. “매일 내가 식사하는 탁자인데, 안경 벗고 그 나뭇결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니 되게 웃겼다. 거기서 시냇물이 흐르고 있는 거다.”(3월 18일 인터뷰) 그는 그 탁자에 당장 배를 띄워도 말이 되겠다는 회화적 상상에 가닿아, 화면에서 나무 탁자 한쪽 모서리로부터 물살을 가르며 떠다니는 나룻배 한 척을 그렸다. 그 배는 식탁의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는 접시나 빵 조각이나 접힌 신문보다 작게 그려졌는데, (비현실적이게도) 그것들보다 큰 코끼리와 사공을 안에 태우고 있다.


말하자면, 어느 날 아침 그와 탁자 사이에 일어난 하나의 사건으로서 그의 몸이 지각해낸 서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의 표현대로, 그와 탁자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한 “몸의 언어들이 (회화의) 화면으로 기어들어가” 하나의 장면이 된 셈이다. 그가 오랫동안 관찰하고 사유해왔던 사물로서의 탁자는, <아침>과 <시간> 연작을 가로지르면서 회화의 구조를 지탱해주는 복잡하고도 구체적인 상황을 연출한다. 이는, 그림이란 “나로부터 파생된 감동과 호흡”이라 줄곧 말해왔던 유근택의 태도를 방증하며, 자신이 체험한 대상을 그리기 행위를 통해 자기 안으로 응집하려는 화가로서의 의도를 충분히 가늠케 한다.


그가 회화의 대상을 생각해왔던 입장은 이처럼 ‘체험’이라는 단어에 집중되어 있다. 언제부터였을까를 생각하며 한참 거슬러 올라가보면, 사실 그의 작업의 모든 출발점이 거기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게 체험한 대상이고, 체험한 정서다. 예컨대, 아주 오래된 작업 중에 <할머니>(1995) 연작은 1991년에 그린 할머니의 초상화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는데, 유근택의 첫 개인전이 1991년에 있었던 걸 보면 작업 초기에 그린 할머니 초상 연작은 굳이 설명을 붙이지 않더라도 각별해 보인다. 자신이 직접 마주하여 경험했던 ‘할머니와의 (긴) 대화’를 ‘할머니를 위한 (반복적) 소묘’로 옮겨놓은 그는, 사물이든 자연이든 인물이든 그 대상과의 대화—언어의 발생—를 통한 형상 연구의 필연적인 여정을 이미 가장 진솔한 태도로 드러내 보였다.


<아침> 한지에 먹, 호분, 템페라 205×223cm 2020. 이미지제공 아트인컬처

<아침> 한지에 먹, 호분, 템페라 205×223cm 2020. 이미지제공 아트인컬처

그래서 내가 <시간> 연작에서 새삼스럽게 감지하는 어떤 형상에 대한 그의 집요한 ‘관찰’과 다시 객관적인 대상으로 환원할 수 없는 지속적인 ‘변형’을 포착하여 그에게 질문했던 것은, 체험이라는 실존적인 경험이 그의 작업에서 ‘사생’과 ‘사유’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서다. 그의 대답은 대상과 그림 앞에서 그의 체험이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 상상해볼 충분한 여지를 주었다. 유근택은 그것이 자신의 버릇이라 말했고, 그것은 같은 대상을 같은 위치에서 계속 바라보며 관찰하려 드는 사생의 방식과 태도임을 설명했다. 그는 같은 풍경, 같은 해안, 같은 창밖, 같은 탁자를 같은 자리에서 바라보면서, 그가 바라보는 것에 내재해 있는 ‘힘’과 그것이 일으키는 ‘변화’의 순간들과 그 사이에서 생성되어 실존적으로 체험되는 몸의 언어와 시간, 즉 서사를 찾는다. <아침> 연작에서 나무 탁자를 매개로 그가 체험했던 정서는 <시간> 연작으로 옮겨 가 아침 밥상에서 그가 펼쳤던 신문에 대한 몸의 기억을 현실 공간에 공유하기 위해 제 화면의 또 다른 배경을 설정하기에 이른다.


나무 탁자에서 강물로 이어진 그의 체험적 시지각의 상상력은 한 장소에 고정되어 있는 탁자의 단단한 물성과 흐르는 수면의 유동적인 물성을 하나의 화면에 켜켜이 중첩해놓은 것처럼도 느껴져, 그가 이번 전시에서 말하는 ‘시간의 피부’에 대한 은유가 이때 생겨난 듯싶기도 하다. 이처럼 일곱 점의 서로 닮아 있는 <시간> 연작에서 배경을 차지하고 있는 임의의 탁자에 발생한 형태와 물성의 지속적인 변형은 불타고 있는 신문 또한 그 내부에서 동일하게 겪고 있는 일이다. 신문 한쪽 모서리에서 시작된 작은 불은 그것이 통째로 재가 되는 상황에 이르도록 점점 커지기도 하고 (탁자 위의 나룻배처럼) 어떤 힘의 운동성을 따라 움직이면서, 신문지라는 사물의 물성을 새까맣게 부서진 재가 될 때까지 존재의 변형을 이끄는 형상으로 각인된다. 이 불의 형상은 유근택의 회화에서 종종 출현했던 것으로, 도시의 먼 풍경에 불길하게 솟아 있기도 하고 어느 들판과 정원의 무성한 잡초에 지펴져 있기도 하고 울타리 아래나 혹은 TV 속 한 장면에서 무언가를 태우며 평범한 풍경에 복잡한 상황을 가져다 놓는다. 신문지를 불로 태우는 것은, 그리고 그것이 재가 되는 것은, 아침 식탁처럼 평범한 일상에서 때때로 그의 몸이 겪는 불안과 공포의 실존과 관련된 것이므로 감각에 의해 지각된/촉발된 현상의 리얼리티라 말할 수 있겠다.


<파도> 한지에 먹, 호분, 템페라 150×207cm 2020. 이미지제공 아트인컬처

<파도> 한지에 먹, 호분, 템페라 150×207cm 2020. 이미지제공 아트인컬처

인간적인 질서


그가 언젠가 써놓은 글을 보면, “나는 나의 작업이 가장 인간적인 질서로 남겨지길 바란다”고 했다.(『지독한 풍경』(2013)) 그가 말한 ‘인간적인 질서’란, “대상으로부터 다가오는 힘과 정서에 모든 초점을 기울”이는 자세이자 “시간 위에 발생하는 사건에 주목”하는 태도에서 비롯한다. 대상으로부터 다가오는 힘과 정서, 시간 위에 발생하는 사건처럼, 그가 좇는 이 ‘체험한 대상’에 대한 지각의 과정을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는 일찍이 ‘회의(doubt)’라 규정한 바 있고, 유근택은 자기의 언어로 ‘인간적 질서’를 말했다. <생.장> 연작에서, 유근택은 풍경과 사물을 보는 특유의 방식을 거쳐 메를로 퐁티가 탐구했던 현상학적 지각의 시각적 구현을 나름의 구조와 표현으로 또다시 환기했다.


전 세계적인 팬데믹 위기 상황에서 불가피한 고립과 무차별적인 혐오가 일상에 파고든 현실에 머물며 속절없는 시간을 보내던 중에, 그는 인적 드문 해안가로 나가 몇 개의 풍경을 스케치로 기록해왔다. 모필 소묘로 완성한 <예단포에서>(2020)는 그중 하나다. 인적이 끊긴 유원지 주차장의 보행길 보도블록 틈새에서 길을 다 잠식해버릴 만큼 무성하게 자라버린 잡초와 그것이 만들어낸 기이한 현실 풍경을 바라본 유근택은, 그 대상으로부터 다가오는 힘과 정서에 초점을 맞추고 이 원초적이고도 공허한 시간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에 집중했다. 단단한 보도블록 틈새로 살짝 드러난, 보이지 않는 저 깊은 곳에서 축적되어온 흙에 뿌리를 둔 채 비좁은 틈을 뚫고 나온 식물의 원초적인 생명력에, 그는 놀랐다고 했다.(3월 18일 인터뷰) 이 놀라운 풍경을 지각하고 있는 나, 화가로서의 유근택은 사생과 사유를 통해 자신과 (체험된) 풍경 사이의 지각적 관계에 기여할 회화적 구조로, 그가 누누이 말해왔던 ‘인간적인 질서’를 또 한번 표현해보고 싶지 않았겠는가.


<생.장>, <생.장-청춘>, <생.장-나>, <생.장-나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이 연작은, 마치 보도블록 틈새를 뚫고 나온 잡초들이 공간을 잠식해버린 사태처럼, 생에 뿌리를 둔 일련의 체험된 서사가 각각 현실 공간의 틈새에서 시대착오적으로 자라나 그 불확실하지만 실존적인 힘과 정서에 의해 동시대의 시간성을 담아낸 회화적 구조에서 존재에 관한 사건을 발생시킨다. 체험한 대상과 체험된 시각이 마치 화학적으로 반응하여 만들어낸 회화적 공간처럼 말이다. 이는 유근택의 회화에서 늘상 시각적으로 구조화되어온 방법으로서, <자라나는 실내> 연작이나 < A Scene > 연작 및 그것에서 파생된 크고 작은 변형 회화 연작들로 반복해온 구조다. 말하자면, 그가 “그림이란 하나의 공간을 찾아 들어가는 일”이라 했던 것처럼, 그는 ‘대상’과 ‘나’ 사이에서 발생하는 ‘힘의 응집’에 의해 새롭게 지각되는 회화적 공간을 제시한다.


그것은 몸을 구부려 틈새를 보는 일이며, 발끝으로 경계에 서는 일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끝에 서 있는 1-4>(2018) 연작과 <어떤 경계>(2018~19) 연작, <파도>(2020) 연작 등에서, 힘의 응집과 그 힘의 방향이 만들어내는 회화적 공간의 실존 가능성을 살필 수 있었다. 이를테면, 회화의 구조에서 점을 확보하고 선을 확보하여 일련의 또 다른 형태와 공간을 집요하게 찾아 들어갈 때, 거기서 만들어지는 하나의 공간을 말한다.


유근택의 체험된 시각에 힘입어 내가 특히 흥미롭게 본 그림은 <파도> 연작이다. 그림의 화면을 깊이의 차원에서 둘로 나누는 철조망과 그것을 기준으로 해변과 바다로 구분되어 있는 그림 내부의 공간은, 불에 타들어가는 탁자의 신문지처럼 철조망 너머 부서지는 파도의 개별적인 형상 때문에 굴절된 크리스털처럼 수십 개의 공간을 발생시킨다. 그 결과, 매번 같은 바다, 같은 해변에 서서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그 대상으로부터 자신에게 밀려오는 힘과 변화를 관찰하려 했던 유근택의 축적된 경험처럼, 저 철조망에 가려진 파도 그림 앞에서 나는 칸칸이 생성되는 공간의 에너지 때문에 보이지 않던 분절/ 분단이라는 실존의 형식을 회화적 구조로 지각하여 사유하며 체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어떤 만찬> 한지에 먹, 호분, 템페라 204×295cm 2019. 이미지제공 아트인컬처

<어떤 만찬> 한지에 먹, 호분, 템페라 204×295cm 2019. 이미지제공 아트인컬처

동양화에서의 ‘공간’


유근택은 목판도 다룬다. 어쩌면 ‘체험한 대상’과 ‘인간적인 (현상적 지각의) 질서’에 따른 힘의 응집도 그가 오랫동안 작업해왔던 이 목판의 감각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동양화를 공부하고 여전히 지필묵을 사용하는 그가 오래전부터 목판화에 손을 댄 이유는, 그것이 지필묵과 매우 닮았으면서도 동양화 종이가 지닌 본유적인 특성이 그에게 한계로 느껴졌을 때 다른 경로의 경험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동양화에서 지필묵의 긴밀한 상호 관계는 얇고 투명한 화선지에 스며들어간 수묵이 최종적으로 생성하는 무한한 공간감에서 제 역량을 한껏 드러내지만, 유근택의 경우, 산수화에 적합한 재료 고유의 성질이 아니라 감각에 따른 직접적이고 즉흥적인 표현의 가능성이 지필묵에 필요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화선지 속으로 모두 스며들어가서 그림이 말을 안 한다”고 했던 당시 그의 고민은, 목판으로 일종의 보상을 받았던 셈이다.(3월 18일 인터뷰) 유근택은 온갖 나무를 가리지 않고 가져다 스케치도 하지 않은 채 즉흥적이며 빠른 속도로 깎아서, 그의 내면에 체험된 대상에 대한 시각을 일련의 매체로 직접 옮기기 위한 방법과 태도를 진지하게 살폈던 모양이다. 말하자면, 동양화에서 붓을 다룰 때 발생하는 그 힘의 응집을 회화에 그대로 남겨놓을 방법을 찾다가 일필휘지와 같은 목판의 솔직한 작화법에서 대안을 발견한 것이다.


유근택은 드로잉이란 “대상 자체의 호흡을 좇는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주로 모필 소묘를 해왔는데, 바라보는 행위가 동반된 드로잉의 방식은 대상을 손으로 더듬어가는 행위와도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회화와 모필 소묘가 매개하는 목판화의 기법적 의의도 그가 마주해온 수많은 작업의 ‘난제들’을 풀어내는 데 있어서 큰 접점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해 보인다. 일찌감치 유근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특유의 두껍고 거친 화면 질감을 실험하며 보여줬다. 호분과 수묵의 변증법적 관계로 응집된 유근택 회화의 표면은, 차라리 두께라고 말하는 게 더 타당할지 모른다. 게다가 종이의 배접과 요철로 한껏 강화된 화면의 두께는 공간에 더욱 가까워진다. 그가 추구했던 그림의 공간이자, 힘의 응집이 발생하는 곳 말이다. 예컨대, 그는 초기에 종이를 배접할 때 종이와 종이 사이에 호분과 먹 터치를 삽입해 실제적인 화면의 층위를 만들고자 했다. 종이 표면에 떠 있는 호분과 종이로 스미는 수묵이 배접 과정에서 서로 충돌하고 뭉개지면서 지지체 자체에 묘한 떨림을 만들고 그것이 또한 공간감을 나타내면서 유근택은 자신이 체험한 대상과의 사이에서 발생한 언어들을 훨씬 자유롭게 그 틈새로 밀어 넣고 응집할 수 있었을 테다. 그는 그것이 스스로 발 딛고 살아가는 땅 위에서 매일매일 일어나는 사건이자 현상이라 했다. 그는 자신이 이런 작업을 할 수 있게 한 가장 희망적인 존재로 팔대산인과 정선을 말했다. 팔대산인의 사실주의적 태도에서 비롯한 공간감을 말하면서 정선으로 이어져 그의 <만폭동> 같은 그림에서 완벽하게 구현된 미디어적 회화의 실체를 말할 때는, 동양화의 ‘공간’ 문제에 대한 그들과의 공감대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 종이를 여러 겹 배접하여 철솔로 문질러 종이 표면을 거칠게 일으킨 후, 거기에서 붓으로 호분과 수묵을 이용해 공간을 확보해 나가는 최근의 작업은 재료의 물성으로 회화의 구조를 이끌어내려는 시도이며, 이는 체험된 대상(형상)을 지각의 주체인 나의 구조 안으로 끌어들이는 하나의 회화적 전략이라 할 수 있다.


※ 이 원고는 아트인컬처 2021년 4월호에 수록된 것으로,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아트인컬처와 콘텐츠 협약을 맺고 게재하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