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아트로는 세계 미술계에서 종횡무진하고 있는 한국 여성 작가들의 활약에 응답하고자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여성 작가들을 조명하는 특집 기사를 준비했다. 한국의 여성 작가들은 개인의 풍부한 서사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의 다양한 사회·정치적 이슈를 다루기도 하며 초월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다채로운 작업을 선보이며 세계 무대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이들의 활동과 작업 세계를 주목하는 두번째 기사로 HG Masters는 포스트 밀레니얼 시대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보이는 '괴상함(Monstrosity)'과 '미래상(Futurity)'에 주목한다.
1990년 여름 26세에 이불은 도쿄 나리타 공항으로 가기 위해 촉수가 주렁주렁 매달린, 핏빛으로 물든 두툼한 의상을 입고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12일동안 이불은 일본의 하이퍼모던 메가시티에서 그 괴상한 의상을 입고 〈수난 유감 - 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줄 아느냐?〉 (1990)라는 퍼포먼스를 했다. 소름끼치는 과장된 신체성을 통해 이불은 부계사회 속에서 비가시화된 동시에 엄청나게 미적 대상화된 된 모순적인 여성들의 경험에 저항했다. 이불 작가의 초기 입체 작업 〈몬스터(Monster)〉 시리즈와 퍼포먼스가 최근 서울시립미술관 《이불 : 시작》에서 소개됐다. 이 전시는 당시 물질적으로 탐욕스러우리만치 급격하게 발전하면서 사회적 위계가 뿌리내리던 사회에 대해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비판한 이불의 초기 작품 활동을 중점적으로 조명한다. 작가의 신체적 괴상함과 아브젝시옹(abjection)에 대한 탐구는 이후 사이보그, 근대화의 망령 그리고 아름다움, 질서, 효험의 측면에서 실패한 유토피아적 약속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이 모든 관심사들은 이후 수십 년간의 예술적 실천으로 종합된다.
매리 셸리(Mary Shelley)의 1816년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분석한 주디트 할버스탐(Judith Halberstam)의 저서 『살 쇼: 고딕 호러와 괴물의 기술(Skin Shows: Gothic Horror and the Technology of Monsters)』(1995)에서 볼 수 있듯, 우리는 발명가 프랑켄슈타인의 유사-인간 창조물을 기술 혁신과 괴상함이 하나로 뭉쳐지며 작가와 작품의 관계로 연결되는 모더니즘적 변증법으로 이해해 왔다. 소설 연구에 대해 할버스탐은 프랑켄슈타인의 휴머노이드 피조물이 그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돼 왔음을 상기시킨다. 예컨대 계급간 갈등, 억압된 자들의 회귀, 식민주의 모델, 혹은 기독교 신학 다시 말해, 후기 계몽주의와 자유시장주의에서 비롯되거나 오염된 현대 사회의 모든 주요 특징의 은유로 해석돼 왔다는 것이다. 우리 문화에서 괴상한 것이란 익숙한 인간스러움과 두려운 차이점 둘 모두를 가진 (모더니즘의 또 다른 정신분석학적 비유인) 언캐니의 형상이다. 밀레니엄 이전과 이후, 페미니스트와 퀴어 이론가들은 괴물의 형상을 다름과 저항의 장소로서 주목했고, 바로 여기에서 이불 작가는 자신의 괴기스러운 유사-인간 창조물을 “규정된 범주를 넘어선 것"으로 위치시켜 젠더화된 몸을 둘러싼 규범적 기대의 줄을 그려내고 인간/비인간의 경계를 탐구한다.
괴물들은 휴면기를 거친 후 미래에 대한 문화적 개념 속에서 다시 깨어나 밀레니얼 동시대 예술과 문화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담고 새로운 연계 촉수를 휘두르며 새 몸으로 환생했다. 예컨대, 아트선재에서 열린 이미래의 개인전〈캐리어즈〉(2020)에서 실리콘을 덧바른 호스 뭉치 두 개는 천장에 매달려 그 위로 액체를 끌어올린 다음 내뱉는다. 촉수와 같은 형태는 헐리웃과 아시아 영화 속에 등장하는 형체를 떠올리게 하는데, 이는 주로 무언가를 배설하는 기계로 영화 <괴물>(2006)에서 서울의 하수도를 활보하는 오징어와 유사한 양서류 생물체나 H.P. 러브크래프트(H.P. Lovecraft)의 문어같은 신 크툴루(Cthulhu)보다는 해파리나 혈액 공급과 장기 기능 유지에 쓰이는 의료기기에 가깝다. 유사하게 이미래의 설치물 〈연루된 자들〉(2019)은 키네틱 오브제로 천장에 매달린 꼬인 철사, 기계에 사용하는 체인, 실리콘 호스와 화장지가 뿌연 액체 속에서 모터의 움직임에 끌려 다니는 작품이다(이 작품은 아트선재에서 2019년에 열린 전시 〈나는너를중세의미래한다1〉에 전시되었다). 이미래의 괴물들은 그로테스크하게 절단된 형체로, 장기에서 분비된 것 같은 액체와 장기 같은 움직임을 제외하면 거의 사람이나 동물처럼 보이지 않는데 역설적이게도 날 신체의 공포라는 차원에서 더 섬뜩하게 다가온다. 그들은 아브젝시옹의 새로운 단계를 성취하여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가 『공포의 힘(Powers of Horror)』에서 말하는 영역, 즉 부동의 시체와 달리 인간 주체성이 “살아있는 내 존재 조건의 경계에서” 자기 자신을 출산함으로써 “나"를 확인하는 영역에 진입했다
이미래가 만든 괴물의 절단된 성질은 그것이 프랑켄슈타인 계열의 괴물에서 상당히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프랑켄슈타인 계열 괴물의 후손들은 오늘날 인공지능 휴머노이드인 소피아(Sophia, Hanson Robotics)와 비욤미트라(Vyommitra, Indian Space Research Organization)같은 로봇들이다. 이미래 작품의 괴상함은 비-인간적이라 할 수 있다. 이 괴상함의 변증법은 인공과 유기 사이를 오가고 인간과 휴머노이드 사이는 오가지 않는다. 기술의 동시대적 은유로서 <캐리어즈>와 <연루된 자들>은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 같은 기술을 통해, 심지어는 원격 근무와 컴퓨터 활용 분석과 같은 노동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점진적 탈육체화를 반영한다. 증기기관부터 인공심장까지, 비행기부터 개인용 컴퓨터까지 현대 기술은 몸이 사용하기 위한 물리적 기계를 만들었다. 하지만 밀레니얼 시대의 위대한 혁신은 새로운 하드웨어 제조가 아니라 운영체제, 검색 알고리즘, 디지털 커뮤니티나 암호화폐와 같은 비가시적인 소프트웨어의 개발에 있다. 이미래의 작업 역시 돌연변이적, 병원체적, 균학적 형태의 비-의인화 생명 시스템을 향하고 있다. 이러한 시스템의 “지성"은 체현되어 있고 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화 되어 있고 정서적이다.
포스트 밀레니얼 세대에 대한 우리의 전망은 인류세적이면서 동시에 종말론적이다. 우리에게 공포의 경험은 “잘못될 수 있는 혁신" 혹은 “되려 우리를 해칠지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괴상한 포스트 휴머니즘의 종류를 확산시키는,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시스템 붕괴의 프레임을 통한 것이다. 최근 우리의 집단적 재앙과 관련해 부상하고 있는 하나의 전망은 기술혁신이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자리잡은 견고한 경계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의 고갈, 그리고 인류의 운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유사 생명체가 종을 뛰어넘어 자기 복제를 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신중하게 구축한 자연/인간의 구분을 근본적으로 와해시킨 적확한 사례다. 하지만 우리의 집단적 신체가 코로나19에 감염되기 이전부터 우리는 인간이 지구에 미친 영향이 인간을 포함한 종의 돌연변이 - 플라스틱에서 나오는 내분비계 교란 물질로 인한 신체 호르몬 변화 그리고 빛, 대기, 수질오염으로 인한 우리의 자연스러운 생체 주기와 신체 시계의 재프로그래밍 - 를 야기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미래상은 비록 불안정하고 예측 불가능할지라도 고전적 괴상함을 약속한다.
작가얄루는 최근 작업을 통해 인간종의 혼종화와 적응을 다루었다. 2020년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에서 선보인 《호모 폴리넬라(HomoPaulinella, Photosynthesizing Post Human Scenario)》(2020)에서 얄루는 폴리넬라(paulinella)의 바이오 신체적 특징에 주목한다. 민물 아메바 속(屬)인 폴리넬라는 광합성을 하는 박테리아인 남세균(cyanobacteri um)의 일종을 포식하여 세포 내에서 공생하게 되었는데, 작가는 여기서 영감을 받아 광합성하게 되는 미래 인간의 모습을 그렸다. 설치 작품 속에 인간과 같은 두 형체가 나란히 설치된 화면 속에 등장하는데, 어렴풋하게 인간 여성의 형상을 한 머리들은 해조류 혹은 말미잘과 같은 형체를 하고 촉수를 달고 있다. 비디오 설치물의 가운데 채널에는 태양과 줄지어 있는 태양 전지판, 확대된 녹색 폴리넬라의 모습, 그리고 우리가 인간 의식의 표식이라 여기며 소중히 여기는 인간 감정을 하찮아 보이게 하는 아이러니한 자막이 달렸다. “당신의 비탄과 동정심은 의미없고 똥 같다. 자기 위로는 더럽다. 당신은 조금 재치있을 뿐 아무 것도 아니다.” 태양의 이미지, 아메바 형태의 애니메이션, 그리고 녹색 해조류와 같은 형체의 몽타주가 전자 음악에 맞춰 화면 위를 부유하고, 곧이어 녹색 육각형 입술이 클로즈업으로 나타나 호모 폴리넬라의 잘 적응한 얼굴이 드러난다. 이 미래성에 대한 상상 속에서 인간 진화는 우리가 그동안 이해해 온 대로의 과학 혁신을 통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 우주의 근본적인 힘에 기인한 적응을 위한 변화다. 우리의 동시대적 사회 용어로 말하자면, 호모 사피엔스와 다르다는 시각적 특징 때문에 호모 폴리넬라는 괴상하지만, 얄루의 작업에서 볼 수 있듯 그리고 우리가 오늘날 그러한 특징에 부여한 의미대로 “귀엽”고 “즐거우"며 “장난스러운" 감성적 특성들도 가졌다.
또 다른 중요한 포스트 밀레니얼 의식의 전환은 바로 미래성 서사에서 인간 시각을 탈 중심화하여 괴상함과 같은 다름의 특징들을 인간의 몸에서 자연의 영역으로 옮기는 것이다.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와 같은 이론가들이 종간 교차를 위해, 전지구적 행위자 연결망을 위해 가이아(Gaia) 같은 개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설명할 때, 비록 오염과 변화의 터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라는 신체는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더 큰 자연의 생명주기로 편입됐다. 애나 로웬하우트 싱(Anna Lowenhaupt Tsing)이 그의 저서 『세상 끝의 버섯: 자본주의 폐허 속 생명의 가능성에 대하여(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 On the Possibility of Life in Capitalist Ruins)』 (2016)에서 설명하듯 자연과 인간 모두 예측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물리적 풍경과 사회의 극적인 변화에 적응할 것이며, 다중 행위자 - 명확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그 중 지역 갈등으로부터 도망친 많은 사람을 포함한 - 로서 그 자체로 괴상해진 타락한 환경을 재성형할 것이다.
이 인류세적이고 포스트 인류적인 주제가 김아영의 2020년 부산비엔날레 출품 커미션 프로젝트인 〈수리솔 수중 연구소에서〉 (2020)에 담겼다. 그의 비디오는 대한민국의 제 2의 도시가 도심이자 신산업인 바이오매스 타운을 조성함에 따라 다시마 재배와 수확이 전통적 수경재배와 경제발전의 동력으로 작동할 잠재력을 상상한다. 이 세계에서는 화석연료의 고갈 이후 조류를 발효시켜 만든 바이오 연료가 제 1의 에너지원이 되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시작 후 10년 뒤가 배경인 이 영상의 주인공 소하일라는 해저 연구실의 시니어 연구원이다. (배우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만든) 소하일라는 예멘 전쟁을 탈출하여 한국에 난민으로 들어오게 된다. 소하일라는 다시마 양식장에 유입된 유해조류 독성 포자를 조사하기 위해 무인 정찰기를 보내고 오징어 떼가 만든 조류에 휩쓸려 정신을 잃는다. 이 때 유체 이탈을 통해 코로나19 팬데믹 당시의 상황, 예컨대 감염 통계 수치와 공적 마스크 배포와 혈장에 대해 회상한다. 김아영의 서사 속에서 괴상한 것은 인간 신체가 아니라 우리의 현재 즉, 기후변화에서 비롯되거나 심화된 갈등으로부터 도피하는 경험에 대한 트라우마 장면부터 감염된 후 항체 기부까지의 모습이다. 영상의 말미에는 인공지능 컴퓨터의 목소리가 연구실 바닥에 쓰러져있는 소하일라를 깨우고, 2024년부터 시작된, 해양 생명체들의 삶을 보존할 수 있게 하는 현상인 창 밖의 “바다 눈"을 보라고 말한다. 소하일라와 유일하게 함께 남아 있는 것은 해저 유리 잠수함 연구실 내부 컴퓨터 시스템의 목소리이고, 오염된 지구의 괴상함은 옛 지구의 조각들과 지구를 잘 돌보지 못한 인간들을 죽일 수 있는 화학물질로 만들어진 예전 지구의 언캐니한 프랑켄슈타인 버전이 되어가며 잠시 아름답게 보여진다.
오늘날 많은 작가들은 추측성 픽션 장르를 통해 지구의 회복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고, 김아영도 그중 하나다. 이러한 미래 지향적 서사는 인종, 환경, 정치적 학대와 억압에 교차적 저항을 회복시키는 중요한 담론적 공간으로서 지역 지리와 현재의 정착민 식민주의적, 국가주의적 자생성과 관련된 주제를 끌어온다. 예컨대, 김아영의 프로젝트 〈페트로 제네시스, 페트라 제네트릭스〉(2019–21)는 무기물 더미인 동시에 정보 더미인, 라틴어로 “비옥한 바위"라는 의미를 가진 허구의 유사 신화적 인물을 만들기 위해 대안 지능과 지식을 찾는 과정으로 연결된다. 이 명목상 인물을 지칭하는 대명사는 모호한 복수형이며, 얼굴과 형태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페트로 제네시스, 페트라 제네트릭스〉에서 김아영의 서사는 몽골 토착신앙이 바위의 생물같음을 믿는 모습처럼 많은 고대 문명들이 지구의 무기질과 인간의 탄생 사이의 유사점을 믿었던 모습에 기초한다. 미래적이며 고대적인 〈페트로 제네시스, 페트라 제네트릭스〉의 세계는 시간과 젠더에 대한 매끄러운 모더니스트 개념을 무너뜨린다. 김아영은 철학자 레자 네가레스타니(Reza Negarestani)의 말을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 목소리를 변조한 렉쳐 퍼포먼스를 통해 빌려온다. “젠더간 갈등은 의인화된 어리석음이다.” 반면 1980년대와 90년대 초 이불에게 젠더 아이덴티티의 붕괴와 그 형태의 괴상함은 현대 발전에 대한 비평이었지만, 김아영에게는 미래를 향한 길이었다.
HG 마스터스(HG Masters)는 홍콩 아트아시아퍼시픽(ArtAsiaPacific)의 선임 에디터다. 아트아시아퍼시픽에서 2008년부터 매년 초 53개국의 현대미술을 리뷰하는 연감호(Almanac) 편집을 담당해 왔다. 예일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2011년 앤디워홀재단이 미술평론가에게 수여하는 기금(Andy Warhol Foundation Creative Capital Arts Writers Grant)에 선정되었다.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