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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B 특집 (3) – 김실비, '빚지지 않는 빛, 위로와 연대'

posted 2021.07.15


광주비엔날레는 광주 정신과 동시대의 다양한 담론을 다루는 작품들을 꾸준히 선보이며 국제 현대미술의 장으로서 역할을 모색해 왔다. 올해로 제 13회를 맞는 광주비엔날레는 ‘떠오르는 마음, 맞이하는 영혼(Minds Rising, Spirits Tuning)’ 이라는 주제로, 광주 도심 전역에서 39일 동안 진행되었다. 비엔날레전시관, 국립광주박물관, 양림산 호랑가시아트폴리곤, 광주극장, 구 국군광주병원 등에 총 43개국 69명 작가(팀)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이번 광주비엔날레에는 다수성(Plurality)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전 지구적인 생활체계와 샤머니즘, 토착 생활양식, 반주류적 사회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동체 의식’을 이야기하는 다수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비엔날레에 참여한 총 11명(팀)의 한국 작가 중, 더 아트로는 3명의 작가를 선정하였다. 광주 비엔날레에 선보인 커미션 신작을 통해 이들의 작업세계를 조망해보고자 한다. 이번 특집기사의 세 번째 기사는 김실비 작가의 영상 설치 작품, 〈빚지지 않은 삶〉(2021)을 통해 작가의 작업세계를 주목한다.


빚지지 않는 빛, 위로와 연대


문선아


병풍형 구조물과 단채널 영상, 관람객의 행위가 하나의 짝을 이룬다. 검은 판 여러 개가 놓이고, 그 위에 달린 조그만 조명들이 언뜻언뜻 판 위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궁금증을 안고 휴대폰을 들어 플래시 라이트를 터뜨리면 빛을 반사한 화려한 서예(calligraphy)가 각각의 관람객을 맞이한다. 설치물 사이로 나아가면 언뜻 가려 있던 영상이 온전히 드러난다. “과거와 미래에 가린 우리의 서로 다른 껍질 아래를 똑같이 빚어낸 것은”이라는 깃발이 펄럭이는 이미지로 시작하는 영상의 주인공은 의인화된 빛과 바람, 물과 광물, 파생상품이다. 다섯 인물이 한 공간에 스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빛은 공간으로 내려와 “우애가 터 잡은” 그곳에서 과거에 빚진 각 원소를 비춘다. 영상에는 끊임없이 내레이션이 겹쳐지며 서사를 이끈다. “너의 다음은 거부에서 시작된다”라는 내레이션에 이어 각 원소는 ‘과거의 부채’와 ‘다음’을 이야기하는 돌림노래를 부르고, 함께 셀피(selfie)를 찍으며 자신들이 함께하는 시간을 기록한다. “세포는 통화가 된다. 우리는 계속하기 위하여 이를 교환한다”, “섬광이 일고 세포가 변이한다. (...) 우리는 합산되지 않고도 배가될 수 있다”라는 등의 내레이션이 나오는 동안 영상 속의 인물들은 서로의 머리카락을 땋고, 빛, 바람, 물, 광물은 자신을 상징하는 물건들을 하나둘 파생상품에 물려준다. “그리하여 존재는 역할도 속박도 당위도 벗어난다. 스스로 보고 듣고 말한다. (...) 불편한 자리로 밀려나 드디어 만난 일에 대하여”라는 내레이션에 이어 ‘자유’와 ‘미래’에 대한 돌림 노래 후, 다시 인물들은 스치듯 헤어진다.


<빚지지 않은 삶>, 2021, 영상 설치, 단채널 영상, 4K HD 변환, 색, 소리, 9분 23초, 사진: 김상태, 이미지 광주비엔날레 제공.

김실비, <빚지지 않은 삶>, 2021,영상 설치, 단채널 영상, 4K HD 변환, 색, 소리, 9분 23초; 철판, 철제 각파이프, 우레탄 페인트, 재귀반사 접착 시트, 휴대폰 거치대, 휴대폰 플래시, 201 x 224 x 75 cm 또는 201 x 280 x 75 cm. 제13회 광주비엔날레 커미션. 사진 김상태, 광주비엔날레 제공.

일상 속 정치와 사회 문제를 고민하며, 디지털 제작 과정, 빛, 소리 등을 재료로 다양한 시청각 언어가 현실로 확장된 영상 구조를 실험해 온 김실비는 제13회 광주비엔날레 《떠오르는 마음, 맞이하는 영혼》(2021. 4. 1.~2021. 5. 9.)에서 〈빚지지 않은 삶〉(2021)을 선보였다. 그는 수년 전부터 우리가 역사적으로 지니고 있는 원형(archetype)1 과 현대인으로서 지니게 되는 태도를 특유의 방식으로 접합해왔고, 이번 작업에서는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원형으로 삼고 있는 5원소설2 을 다시 불러내 의인화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원소로 명명되는 땅, 불, 바람, 물과 달리 불을 빛으로, 공기를 바람으로, 흙을 광물로 설정하고, 미지의 다섯 번째 원소를 파생상품으로 변경해내는 것은 현대의 의식 변화와 이에 관한 작가의 깊이 있는 고민을 반영한다. 고정된 것으로 인식되던 원소들은 움직이는 물질이자 ‘파동’을 지닌 것으로 다시 태어난다.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파동의 가장 큰 특징은 ‘간섭’이다. 그가 설정한 원소들은 입자가 아닌 파동으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연동되고 영향을 주는 존재로 설정된다.


특히, 제5원소로 설정된 ‘파생상품(derivatives)’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천적으로는 “어떤 것에서 가지를 치고 나간 주변의 어떤 존재”를 의미하는 이 단어는 자본주의가 도래하면서 경제학적으로 “주식과 채권 같은 전통적인 금융 상품을 기초 자산으로 하여 새로운 현금 흐름을 만드는 증권”이라는 다른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다. 결국, 만물을 이루고 있다고 여겨지던 원소들은 지금 이 시대에서 금융 사회의 첨예한 현상을 만들어가는 파생상품에 그 성질과 역할을 이어주고 있다.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자본화되고 있는 현실을 드러낸 셈이지만, 작가는 이 상황에 대하여 어떠한 비판을 제시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공유하고 ‘함께’의 연대를 꿈꾼다. 함께 셀피를 남기고, 머리를 땋고, 내레이션을 넣고, 과거의 편향을 극복하며 돌림노래를 부르는, 작가가 고의로 마련해 놓은 전형적이고 진부한 행위들에서 작가의 숨은 지향점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빚지지 않은 삶>, 2021, 영상 설치, 단채널 영상, 4K HD 변환, 색, 소리, 9분 23초, 사진: 김상태, 이미지 작가 제공.

김실비, <빚지지 않은 삶>, 2021,영상 설치, 단채널 영상, 4K HD 변환, 색, 소리, 9분 23초; 철판, 철제 각파이프, 우레탄 페인트, 재귀반사 접착 시트, 휴대폰 거치대, 휴대폰 플래시, 201 x 224 x 75 cm 또는 201 x 280 x 75 cm. 제13회 광주비엔날레 커미션. 사진 김상태, 광주비엔날레 제공.

김실비의 작업은 많은 경우 기표(signifiant)를 나열해 그 기의(signifié)를 숨긴다. 일상의 기표를 보다 전형적인 것으로 선택해 한껏 납작하게 만들어 층위(layer)를 여러 겹으로 쌓고 가장 깊이 있는 기저의 자리를 비워 외려 상상력의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그 기의를 확장한다. 따라서 그 자리엔 우리가 일상에서 인지하지 못하지만 시대와 국경을 넘어 공유되는 원형이 들어가기도 하고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태도가 들어가기도 한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어떤 것이 때로는 쉽게 그곳에 자리한다.


이번 영상에서는 인물 역시 하나의 기표로 등장해 5원소를 다룬 이야기와 겹쳐진다. 퍼포머들은 관람객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고유한 이야기를 지닌 개인들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들의 개인사를 고의로 숨김으로써 보다 다양한 개인을 끌어들인다. 계층, 겉모습, 나이, 정체성 등 여러 사회적 기준으로 재단돼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감각으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역시 작업 안으로 들어온다. 누군가의 어머니이거나 딸일, 누군가의 아버지이거나 아들일 그들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삶 안에서 소외되어온, 따라서 역사의 선택에 따라 자신의 삶이 삭제되어왔던 여성이나 성 소수자일 수도, 누군가를 위해 싸우고 있을 활동가이거나 작업 앞에 선 관람객일 수도 있다. 그들은 각자 삶의 이름표를 떼고 작가가 형성해낸 우애가 터 잡은 그곳에서 새로운 기표를 부여받는다. 각자가 원소가 되어 스치듯 만났다가 헤어진다. 이를 통해 작가는 “나고 자란 몸과 마음 그대로도 평안할 수 있는 시대와 장소가 존재하는지”를 묻는다. 이 지점에서 촬영지가 국립아시아문화전당3이라는 사실 역시 의미심장하지만, 작가는 그 장소성 역시 작업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으면서 의미를 숨겨놓는다.


김실비는 빛이 이번 작업의 트리거(trigger)였고, 작업은 인간의 삶을 연장하기 위한 생명공학 연구 중 새로이 발견된 ‘미토 섬광’에 기반한다고 말한다. 미토 섬광은 세포가 자살하기 전이나 다른 예측 불가 변화에 앞서서 세포의 미토콘드리아에서 강하게 반짝거리는 순간적인 형광 신호를 의미하며, 세포 하나만 떼어 놓고 관찰하더라도 수천 개 미토콘드리아에서 개별 미토콘드리아 단위로 반짝임이 관찰된다. 인간의 몸이 약 60조 개의 세포로 이뤄져 있고, 한 세포당 100개에서 3,000개 정도의 미토콘드리아가 존재하니, 그야말로 변화의 순간에 직면한 인간은 빛의 집합체가 되는 셈이다. 해서 우리의 몸에는, 누구에게나 실질적이고도 물질적으로 변화의 빛이 깃들어 있다.4 그리고 다양한 사회적 역할들을 벗어낸 우리는 미토콘드리아의 차원에서 보자면 그 누구도 다를 것이 없다.
“변화의 빛은 이미 우리 모두의 안에 깃들어있다”라는 자신의 관념과 신념을 효과적으로 구현해내기 위해 작가는 병풍형 구조물에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나 플래시 라이트를 비추면 광원에서 나온 빛이 산란하지 않고 거의 모두 빛을 비춘 방향으로 되돌아가 광원 쪽에 있는 사람이 그 반사를 뚜렷하게 볼 수 있는” 재귀 반사 시트를 사용한다. 영상에서 플래시 라이트로 여기저기를 비추는 퍼포머같이, 또 수정구슬을 통해 여기저기를 바라보는 또 다른 퍼포머같이, 관람객은 자신의 휴대폰을 통해 빛을 비추고 그 빛을 다시 이미지로 반사 받는다.


<빚지지 않은 삶>, 2021, 영상 설치, 단채널 영상, 4K HD 변환, 색, 소리, 9분 23초, 사진: 김상태, 이미지 작가 제공.

김실비, <빚지지 않은 삶>, 2021,영상 설치, 단채널 영상, 4K HD 변환, 색, 소리, 9분 23초; 철판, 철제 각파이프, 우레탄 페인트, 재귀반사 접착 시트, 휴대폰 거치대, 휴대폰 플래시, 201 x 224 x 75 cm 또는 201 x 280 x 75 cm. 제13회 광주비엔날레 커미션. 사진 김상태, 광주비엔날레 제공.

작가가 한국어로 빛, 바람, 물, 광물, 파생상품을 쓰고 일러스트로 효과를 준 서예가 기운생동(氣韻生動)하는 생명체와 같이 꿈틀거리는 모습으로 떠오른다. 재귀 반사 시트 특성상, 광원에게만 온전히 빛이 돌아가기 때문에 그 경험은 오롯이 개인적이다. 이 지점에서 작가가 퍼포머들에게 부여했던 기표는 고스란히 관람객에게로 전해진다. 관람객은 각자의 삶을 지우고 스스로가 빛을 지닌 빛, 바람, 물, 광물, 파생상품으로 거듭난다. 찍고 바라보고 담아내는 행위의 공통성 그리고 퍼포머의 의복과 구조물의 서예 사이의 통일성으로, 어렵지 않게 영상 속 인물들과 동기화된 체험을 하게 된다. 이 행위를 통로로 삼아, 작가가 영상에 구현해낸 여러 사회적 요인들을 벗어나 누구나 스스럼없이 존재할 수 있는 가상의 시공간은 다시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재의 시공간과 이어진다. 결국, 이 작업의 완성 여부는 플래시 라이트를 터트리는 행위를 하는 관람객의 몫으로 남는다.


김실비는 인간이라면 누군가의 시간과 노고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 그 부채감에서 자유로운, “모든 이종이 공존”하는 시공간을 상상하고 퍼포머와 관람객을 초대한다. 그곳에서 빚지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한 다짐을 돌림노래를 통해 공유하고 서로를 비춰 감춰진 빛을 드러냄으로써 위로와 연대의 발판을 마련한다. “흐릿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대를 거듭해 변혁을 불러왔던 작은 희망”을 이야기하고, 이를 어떻게 전수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다정하고 깨끗한 사람아, 너는 어디에나 있다. 네가 무엇이든 무얼 하든 괜찮다. 이게 다 무언지도 알 수 있으리. 처음으로 너는 자유롭다.” 빚지지 않는 빛으로서 우리가 스스로를 인지하고, 함께 미래를 모색하고자 하는 작가의 절실한 기원은 고스란히 그의 돌림노래에 담겨있다.


1 본능과 함께 유전적으로 갖추어지며 집단 무의식을 구성하는 보편적 상징. 민족이나 문화를 초월하여 신화, 전설, 문예, 의식 따위의 주제나 모티프로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오랜 역사 속에서 겪은 조상의 경험이 전형화되어 계승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표준국어대사전』. (검색일자: 2021. 6. 19.).
2 ‘이 세계가 무엇으로 이뤄져 있는가’, 즉 철학적 용어로 바꿔 말하자면 ‘실체 혹은 신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성찰은 세상의 기원과 함께 시작해 지속해왔다. 그리고 1808년 영국 화학자 J. 돌턴(John Dalton)이 ‘원자론’을 이야기하기 전까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Empedocles)가 만물이 물, 불, 공기, 흙 네 가지 원소로 이뤄져 있다고 정리했던 가설 ‘4원소설'은 지배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한발 더 나아가 언젠가는 멈추게 되는 지상의 물체들과는 달리, 계속 움직이는 천체의 영원한 운동을 가능케 하는 요인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이에 따라 천체는 ‘에테르(ether)'라는 제5원소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제5원소가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가 1808년까지 이어졌다. 많은 철학자와 연금술사들이 제5원소를 찾아내거나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을 펼쳤다. 이제는 그것을 믿지 않는 시대가 왔음에도, 프랑스 감독 뤼크 베송(Luc Besson)의 영화 <제5원소>나 미국 애니메이션 <출동! 지구특공대>(Captain Planet and the Planeteers, 1990년부터 1996년까지 제작 방영, 1993년 한국에서 방영) 등의 대중문화에서 그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3 1980년, 광주와 전남 일원에서는 신군부의 집권 음모를 규탄하고 민주주의의 실현을 요구하며 5∙18민주화운동이 전개됐고, 수많은 목숨이 희생됐다. 그 최후의 항전지였던 전남도청 자리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위치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의 원형으로서, 그 장소는 나고 자란 몸과 마음 그대로도 있을 수 있는 곳이었던 동시에 현실적 차원에서는 절대 그럴 수 없었던 곳으로 존재한다.
4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사실 변화를 거듭할수록 에너지를 소진하고 늙어간다. 따라서 빛이 발생할수록 빠르게 성장하고, 죽음이라는 이생에서의 귀결을 앞당긴다. 작가는 관람객이 이를 인지하면서 스스로의 멸망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다음 세대에게 미래를 어떻게 넘겨줄 것인가를 고민하기를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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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아

문선아는 다양한 관점에서 현재의 시대성을 관찰하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관계성을 형성하는 기획을 진행해왔다. <제6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공생도시>의 주제전 <내일 보다 나은>(2019), 세대론과 미디어이론을 결합한 ‘시대정신’ 시리즈(2016-2018) 등을 기획했다. 올해 8월 경기도 동두천시에 개관을 앞둔 스페이스 아프로아시아의 디렉터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관계성 안에서 내일의 시각문화를 모색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