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현실을 꿰뚫는 신바로크주의

posted 2021.09.14


‘광부 화가’ 황재형. 그는 현실을 화폭에 담기 위해 광부가 됐다. 눈앞에서 목도한 ‘막장’에서의 삶을 펄펄 끓는 예술로 승화했다. 이후 대자연을 품어 만물을 포용하고, 머리카락을 재료 삼아 인간 영혼의 희구를 꿈꿨다. 그에게 ‘사실성’은 단순 형상이 아니라, 삶을 오롯이 비추는 성찰의 그릇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황재형 회고전 <회천> (4. 30~8. 22)이 열리고 있다. 노동자와 소수자를 향한 40여 년의 예술적 여정을 종합한 대형 전시다. 필자는 황재형의 작품 세계를 ‘새로운 바로크주의’로 읽는다. 대칭과 절제의 형식에 담긴 박애의 마음. 황재형은 막장의 끝에서 ‘희망의 별’을 본다.


이미지 1+2/ 왼쪽 1982-83 태백 태영광업소 광부 재직 당시 황재형 작가, 오른쪽 1980년대 초반 태백 탄광촌 어귀에서 간이 캔버스에 작업 중인 작가.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왼쪽 1982-83 태백 태영광업소 광부 재직 당시 황재형 작가, 오른쪽 1980년대 초반 태백 탄광촌 어귀에서 간이 캔버스에 작업 중인 작가.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황재형

1952년 전라남도 보성 출생. 1982년 중앙대 회화과 졸업. 1982년 중앙대 회화과 복학생이던 박흥순, 전준엽, 이종구 등과 함께 ‘임술년, “구만팔천구백구십이”에서’를 조직하고 덕수미술관에서 창립전을 열었다. 1982~85년 광부 생활과 회화작업을 병행하다 결막염이 악화돼 노동직을 그만둔다. 1984년 첫 번째 개인전 <쥘 흙과 뉠 땅>을 제3미술관에서 개최했고, 2010년까지 같은 이름의 개인전을 총 일곱 차례 진행했다. 이후 광주시립미술관(2013), 박수근미술관(2017), 가나아트센터(2017) 등에서 개인전 개최. <제3회화의 전개>(관훈미술관 1981), <불법압류 판화전>(그림마당민 1991), <민중미술 15년>(국립현대미술관 1999) 등 다수의 단체전 참여. 1992~96년에는 고한 성당, 태백 칠표 목장, 황지 천주교 성당 등에 벽화작업을 했다.

반 고흐


“감자를 심고, 거두고, 집어 든 그 손을 그리고 싶었어. 얼마나 정직하게 한 끼의 식사를 일궜는지 말하고 싶었던 거야.” 막장에서 별처럼 빛나는 삶의 마지막 희망을 본 반 고흐는 지금부터 정확히 1백 년 전 벨기에의 보리나주 탄광촌에서 임시직 전도사를 하다가 광부와 너무 격 없이 지내 선교사로서 품위 유지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했다. 이후 그는 화가가 되어 광부를, 그리고 먼 훗날 막장에서 보았던 쏟아지는 별빛을 회오리치도록 그렸다. 고흐가 화가가 된 나이에 광부가 된, 용모와 체구가 특출나고 매우 유능한 공감 능력으로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화가 황재형은 고희가 될 때까지 고장에 남아 초지일관 화업에 전념했다. 헌신적인 반려자에게 1년만 해보겠다고 약속했던 그를, 태백은 놓아주지 않았다. 두문동 현자의 혼백들이 황재형을 붙잡았던 탓일까.


고흐는 태어나다 죽은 형을 대신하여 살고 있다는 생각에 헐벗고 가난한 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고 오로지 그들을 위해 미술을 하리라 다짐했다. 고흐는 세속적인 성공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순수한 영혼의 길을 가려 했기에 실패를 무릅쓰고 그림 그리는 일로 세상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현대화가는 반 고흐의 후예이다. 그는 아카데미의 정형화된 규율을 벗어나 모더니티로의 이행을 실현해낸 인물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를 둘러싼 담론은 예술의 가치를 가늠하는 기준이 작품에서 점차 작품을 창조하는 ‘개인’으로 옮겨갔음을 방증한다. 작품의 특이성은 예술가의 전기나 심리적 정보와 연결돼 예술작품을 인격화했다. 즉 주체와 대상, 예술가와 작품은 서명으로써 하나의 패키지로 묶인다. ‘진정성’이라는 통념은 이 모든 것을 관통한다. 화가는 영적인 중심에 자신의 궁극적인 사랑과 헌신을 온전히 바치게 된다.


<작은 탄천의 노을>, 캔버스에 유채, 193.5×130cm, 2008. 탄가루와 오물이 뒤섞인 사북의 탄천에 황금빛 노을이 비치는 광경을 그렸다. 황재형의 작품 세계를 전후로 가르는 기념비적 회화.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작은 탄천의 노을>, 캔버스에 유채, 193.5×130cm, 2008. 탄가루와 오물이 뒤섞인 사북의 탄천에 황금빛 노을이 비치는 광경을 그렸다. 황재형의 작품 세계를 전후로 가르는 기념비적 회화.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광부 화가


황재형은 바로 그 지점에서 가장 깊숙하고 멀리까지 도달하기를 원했다. 작가는 1982년 9월부터 지금까지 태백시에 살고 있다. 그는 함백, 정동, 구절 탄광 등을 전전하며 노동 강도가 가장 높고 위험한 탄광에서 광차도 없이 질통을 지고 탄을 캐는 식으로 광부 일을 시작하였고, 두세 달 간격으로 광업소를 옮겨 다니며 주말에 그림을 그리는 이중생활을 하였다. 1980년대에 탄광촌은 호황을 누렸다. 정부는 1978년 태백시 장성동에 화광 아파트를 탄광 직원에게 지어주었고 뒤쪽 언덕에는 사택에 들어가지 못한 광업소 직원이 모여 지내던 화산동 판잣집이 골목에 길게 늘어서 있었다. 장성, 철암, 황지, 통리, 고한, 사북, 도계 등의 탄광촌에는 광부가 되려는 사람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그곳에서는 ‘지나가는 강아지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라는 말이 통하였다.


하지만 이건 인근 방석집 주인이나 탄광 업주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었다. 그 시절에도 광부는 여전히 가난했다. 20대 후반의 황재형은 탄광 노동자의 밑바닥 삶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자기희생 정신과 르포르타주 정신이 살아 있는 작품을 남기고 싶었다. 이는 르포르타주 문학의 고전으로 통하는 조지 오웰이 대공황과 파시즘을 배경으로 영국 북부 탄광 지대를 답사하며 광부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낸 『위건 부두로 가는 길』(1936)에서 볼 수 있는 세계 자체였다. 탄광촌에 대한 오웰의 극사실적인 묘사는 황재형의 극사실적인 그림과 교감한다. 오웰의 ‘파르헤지아(진실에의 용기)’ 정신과 거침없고 시원한 발언은 르포르타주 예술가이자 현장의 인물이던 황재형이 실천한 도덕적 삶에서 한층 더 빛을 발한다. 그는 회화라는 ‘말 없는 시’로 사실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광부는 땅 밑 수백, 수천 미터의 깜깜한 곳에서 석탄을 채굴한다. 고농축 태양 에너지의 채굴로 산업 혁명을 이뤄낸 영국은 1984~85년 마가렛 대처의 ‘TINA(There Is No Alternative)’ 슬로건으로 광부 노조의 사보타주를 패퇴시켜 전 세계적으로 ‘탄소 민주주의’의 흐름을 바꾸고 중동과의 테러전을 전면화하였다. 자국의 탄소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중동의 민주주의를 유린한 것이다. 2015년에는 그나마 남은 2개의 탄광이 폐광하며 3백 년의 탄광 역사는 끝이 났다.


이제는 같은 화석 연료라 해도 석탄이 땅속의 진주라면, 석유는 다이아몬드가 됐다. 석탄이 고갈되고 석유는 권력이 되면서 석유가 석탄을 대체하는 전 세계적인 전환을 막을 순 없었다. 1989년 ‘석탄산업 합리화법’은 한국 탄광 산업의 종언을 알리는 서곡이었고 ‘산업 전사’로 호명되며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광부들은 일자리를 잃고 흩어졌다. 중요한 것은 화석 자본주의의 현실과 민주주의의 관련성이다.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는 인간 세상의 이야기이고, 에너지 자원이나 기후 변화는 이를 에워싼 자연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경제 정치학자 티머시 미첼은 이러한 상식을 뒤집는다. “탄소는 민주주의 ‘속’에서 그것을 지탱하고 또한 제약하는 요소인 것이다.”1) 선거 제도 쟁취에 앞장선 노동 운동의 주력은 광산과 철도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다. 석탄을 캐고 운송하는 민주주의의 전사였던 것이다.


<황지330>, 캔버스에 유채, 227×130cm, 1981. 1980년 황지 탄광에서 매몰 사고로 사망한 광부의 낡은 작업복을 극사실적으로 그린 회화. 작가는 이 작품으로 제5회 중앙미술대전(1982) 장려상을 수상하며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황지330>, 캔버스에 유채, 227×130cm, 1981. 1980년 황지 탄광에서 매몰 사고로 사망한 광부의 낡은 작업복을 극사실적으로 그린 회화. 작가는 이 작품으로 제5회 중앙미술대전(1982) 장려상을 수상하며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새로운 바로크주의


삼엽충과 공룡이 살던 시절의 거대한 숲이 아주 긴 기간 동안 엄청난 압력으로 땅에 응축되어 있다. 그 탄맥을 파내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고강도 노동이다. 천장이 낮아 숨이 콱콱 막히는 곳에서 그야말로 지옥 노동을 하는 광부들은 장화에 가득 고이는 땀을 수시로 따라내고, 속옷을 벗어 땀을 짜내야 한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물통, 무너질 것 같은 갱도, 냄새도 빛도 없는 가스가 퍼지는 캄캄한 땅에서는 늘 긴장이 흐른다. 말 그대로 막장이다. 광부에게 막장은 숭고한 의미를 지닌다. 채탄 작업장의 공간적 막장, 마지막 기회로 선택하는 노동의 막장, 인생 막바지에 다다른 삶의 막장,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생명의 막장이다. 막장의 다양한 의미를 포괄하는 예술용어가 가능하다면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에서 온 ‘바로크주의(Baroqueism)’일 것이다.


1980년대 이후 급변하는 시각 환경에서 자신의 메시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전파해온 황재형은 상업적이고 제도적인 회화의 경계를 확장하여 새 길을 열었다. 작가는 장성 광업소에서 해발 -375미터, 즉 지하 975미터 깊이에서 채탄 작업을 하였다. 그 안에서 하는 발파 작업은 좁은 동굴을 붕괴시킬 듯한 진동과 고막을 때리는 폭음을 견디는 일이다. 동시에 한 치 앞도, 아니 자신의 몸뚱이조차 식별할 수 없는, 안전등도 소용없는 탄진과 먼지뿐인 세계에 갇혀 그저 잠자코 있어야 하는 일이다. 채탄부가 일단 막장에 들어서면 식사는커녕 물조차 마시기 어렵다. 한증막 같은 더위에 케이빙까지 겹치는 날이면, 날벌레 같은 탄가루와 화약 연기가 펄펄 춤추는 마당에 무슨 식사란 말인가. 석탄을 캐면 캘수록 막장은 까마득한 지하로 깊어진다.


들뢰즈가 말하는 바로크의 어두운 밀폐 공간, 영혼의 모나드. 광산 내부는 모두 타버린 부스러기 더미와 탄맥의 주름으로 가득하다. 주름은 주름을 만들며 한없이 이어진다. 탄광의 사망 사고가 가장 잦던 1970년대에는 막장에서 목숨을 잃는 광부 수가 한 해 230~250명에 달했고 1980년대를 전후해서는 연평균 200여 명을 웃돌았다. 당시 진폐로 인한 사망자 수는 연평균 250명에 이르렀다. 세상에서 가장 긴 영어 단어인 진폐증(Pneumonoultramicroscopicsilicovolcanoconiosis). 그 의미를 풀어보면 “화산재 등에 섞여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규소가 폐에 달라붙어서 생기는 병”이다. 진폐증은 인간에게 불을 공급한 죄로 영구히 치유되지 않는 천형이다. 조지 오웰은 말한다. “우월한 인간이 계속 우월하기 위해서는 광부가 피땀을 흘려야만 한다. 당신도 나도 편집인도 시인도 캔터베리 대주교도 아무개 동지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가 지금 누리고 있는 비교적 고상한 생활은 진정으로 땅속에서 미천한 고역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빚지고 얻은 것이다. 눈가가 시커메지고 목구멍에 석탄가루가 꽉 차도록 강철 같은 팔과 복근으로 삽질을 해대는 그들 말이다.”


황재형의 작업에는 대립적인 두 가지의 표현 양식이 내적으로 충돌하고 변주해왔다. 대칭과 절제가 존중된 중량감을 지닌 형식으로, 혼돈과 모순을 본질로 가지고 있다. 하나의 동작에 모순된 의도가 숨어 있으면 그 스타일의 결과는 항상 바로크의 범주에 속한다. 이때의 바로크는 서구의 17세기에 한정된 역사가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나타나는 “인간 정신의 근본적인 표현 양식”이다. 이는 스페인 미술사가 에우헤니오 도르스의 『바로크론』(1935)과 프랑스 미술사가 앙리 포시용의 『형태의 삶』(1936)에서 표명된 견해로, 빛과 어둠의 강렬한 충돌, 감정의 동요, 소수자에 대한 도덕적, 종교적 열정 그리고 우연과 혼돈이 낳은 형식의 심연이 바로크다. 그러니까 바로크는 인간 본성을 상수로 보는, 즉 근본적으로 정신을 표현하는 양식의 하나이다. 바로크는 고전주의와 대립해 파생된 낭만주의보다도 본질적으로 고전주의 양식과 대립한다. 낭만주의는 결국 바로크적 상수의 전개에서 하나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2) 낙반 사고로 사망한 광부 김광춘을 애도하는 <황지330>(1981)은 비판적 리얼리즘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 완성된 가장 완벽한 바로크주의 작품이다.


1972년 한국의 한 작가는 물방울의 투명성과 흔적을 극사실적으로 그려내 유럽인에게 오리엔탈리즘의 환상을 불러일으켰지만 그것은 사회적 진실과는 무관한 주관의 반영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황재형은 신즉물주의자처럼 거울을 보는 듯한 이 놀라운 형상을 관객에게 들이댔다. 극사실주의는 ‘진실(Veritas)’에서 유래하여 1920년대 무정부주의 다다이즘에서 사회 비판으로 발전하였던 신즉물주의의 일부였다. 이러한 폭로는 외형적 시각으로 ‘사실성’을 향한 미술의 진술을 전제한 것이었다. 사망자가 평소 입었던 실물을 촬영한 사진 이미지를 보며 캔버스에 그린 그림이지만 실재가 맑은 거울에 투영된 듯한 착각(환각 효과)을 불러일으킨다. 어둠을 그리고 싶어 했던 작가는 배경을 철저히 배제하고 수직으로 길게 변형된 캔버스에 옷의 위아래 그리고 양팔을 꽉 채워 극도로 줌 인된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깊게 패여 일렁이는 바로크적 표면, 즉 유동적인 파형 벽체가 연출하는 빛과 어둠의 강한 대비는 독립된 실체의 두터운 너울로 보인다. 소속 탄광, 성명, 사진, 계약 기간이 새겨진 명찰과 인식표, 심지어 속옷 상표와 사이즈의 개별 정보를 알려주는 이 옷은 어둠에서 갑옷으로 등장하는 『햄릿』의 유령처럼 우리 앞으로 다가온다. 그림을 그린 당시 작가는 “아가리가 입을 벌리고 있다”라고 표현했다. 실밥 터진 ‘흰’ 셔츠는 심하게 응축된 압력을 느끼게 한다. 이미지는 일렁이는 ‘몸짓’으로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 같지만, 알 수는 없다.


작가는 확인할 수 있는 가시성의 차원을 넘어 어떻게 볼 수 없는 ‘실재 X’와 관계하는 것일까. 이는 일종의 회화적 가설이다. 가설이라 말하는 까닭은 이 회화작품이 가시적인 객관 세계(대상)와 짝을 이루기보다는 불확실한 가운데 심연을 그리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주고 있어서다. 회화 속 사물과 바깥의 객관적, 중립적, 통일적인 가시 세계는 전혀 다른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아무런 매개 없이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작품은 리얼리즘이 아니다. 노동자를 영웅시하거나 자본주의의 병폐를 기록하는 사회주의적인 내용과는 무관하다. 광부를 담은 작품, 1980년 사북사태의 고통을 반영한 <징후>(1980) 그리고 많은 풍경화는 직접적이거나 선동적이지 않다. 노동 현장에서 예술과 정치가 연결될 가능성에 대한 성찰의 산물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를 소시민적 차원의 비판적 리얼리즘이라 규정한다면 예술의 역할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황지330>은 거울 이미지를 회화적 이미지와 일치시켜 원근법적인 착시가 아니라 환각의 눈속임으로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새로운 바로크이다. 생사의 경계는 하나의 작은 출입문으로 나뉘는지도 모른다. 그 문은 저승으로 들어가는 얇은 막과 주름(커튼)으로 되어 있다. 배경은 없다. 단지 딱딱한 옷걸이가 힘없는 뼈대처럼 죽은 자의 너울을 드리운다.


<식사>, 캔버스에 유채, 91×117cm, 1985. 작가는 ‘예술의 본질’을 찾고자 1982~85년 사이 강원도 정선의 함백, 강릉의 정동 등에서 광부로 일하며 작업을 지속했다. <식사>는 동료 광부의 헤드랜턴에 의지해 석탄 가루로 뒤덮인 도시락을 먹었던 경험을 반영한다.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식사>, 캔버스에 유채, 91×117cm, 1985. 작가는 ‘예술의 본질’을 찾고자 1982~85년 사이 강원도 정선의 함백, 강릉의 정동 등에서 광부로 일하며 작업을 지속했다. <식사>는 동료 광부의 헤드랜턴에 의지해 석탄 가루로 뒤덮인 도시락을 먹었던 경험을 반영한다.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어둠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1998)은 오스만튀르크 시대의 세밀화가가 생사를 걸고 그림을 그리는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당시에는 규칙을 어기고 새로운 시도를 하려면 목숨 정도는 걸어야 했다. 이들에게 궁극의 경지란 밤낮으로 연습하는 걸 넘어서 눈이 멀어도 대상을 그릴 수 있는 완벽한 상태이다. 황재형은 중세 세밀화를 그리던 사람처럼 어둠을 기억해 그린다. 그것은 대상을 본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다. 황재형은 절대로 “자연을 따라 그대로” 그리지 않는다. 인물이든 풍경이든 그가 원하는 것은 “자연과 평행을 이루는 구조와 조화”였다. 그는 말한다. “빛이 삶의 본질이 아니라 어둠이 인간 존재의 본질일 수 있다. 그 어떤 절망, 회의 속에서도 다시 꽃피우길 바라는 어둠. 그 너머의 빛이다.”


우리는 예술이 요구하는 바를 철저히 따를 때 죽음을 경험한다. 이는 누군가의 소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무의미성이나 주체의 한계를 묻는 질문으로서의 죽음이다. 세상 모든 것은 죽음을 사유하는 연료로 쓰인다. 황재형은 기본 드로잉을 충실하게 한 후 대상을 눈앞에서 치우고 붓과 나이프로 계속 조금씩 그림을 매만진다. 그에게 그림은 곧 어둠을 그리는 행위이다. 회화에서 진실성이란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표현되는 대상의 은밀한 핵심과 계속 부딪혀 종국엔 일치로 나아가는 행위다. 그 분명하고도 무의식적인 핵심은 숨어 있고, 묻혀 있고, 경우에 따라선 훼손되어 있다. 황재형은 1970년대 신형상주의, 신표현주의의 유행에서 고전적인 극사실 기법을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드는 데 열정을 기울여 신즉물주의의 사실주의 정신을 따르려 했다.


즉 그의 내부에는 반 고흐, 프랑수아 밀레의 성찰적인 자연주의와 신즉물적 리얼리즘이라는 두 경향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인물화 작업에서 황재형은 긴 역사의 침묵을 다루었다. 고단한 시대를 함께 지나온 그의 그림은 흥선 스님의 말마따나 “그 시대의 강을 함께 건넌 사람들에게 바치는 헌사”이다.


<발파음 (Ⅱ)>, 캔버스에 유채, 116.8×80.3cm, 2000. 황재형은 탄광에서 사회적 빈곤과 인간의 소외를 발견했지만 종국에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얼굴을 볼 때마다 숭고함을 느낍니다. 표현을 잃어버린 표현들, 울지 않는 울음들. 이름을 빼앗긴 이 사람들에게 이름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발파음 (Ⅱ)>, 캔버스에 유채, 116.8×80.3cm, 2000. 황재형은 탄광에서 사회적 빈곤과 인간의 소외를 발견했지만 종국에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얼굴을 볼 때마다 숭고함을 느낍니다. 표현을 잃어버린 표현들, 울지 않는 울음들. 이름을 빼앗긴 이 사람들에게 이름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네 가지 거울


예술을 대하는 황재형의 태도는 동시대의 유행보다 정신에 대한 통합적 세계를 온전히 수행하는 집요한 자기 통제 및 성찰—명령, 질서, 교육—과 같은 중세의 지적, 정서적 세계에 가깝다. 이는 이웃을 통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끝없는 응시를 추구했던 반 고흐의 심리적, 실존적 태도와 상당히 유사하다. 13세기 프랑스의 스콜라학자이자 도미니크회 수도사였던 뱅상 드 보베는 자신의 앎을 견실하게 만들어가는 과업으로서 고대와 중세의 시화집을 지었다. 황재형의 세계는 삶의 진실에 근접하기 위해 쓴 그의 책 네 권 『자연의 거울』, 『원칙의 거울』, 『도덕의 거울』, 『역사의 거울』과 맞닿아 있다.


또한 탄광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나 도상학적 미술사로 공적을 남긴 프랑스 미술사학자 에밀 말의 일생은 자기 자신에 대한 명령, 질서, 그리고 함께 나누는 교육으로 가득했다. 이렇게 황재형의 미술은 1980년대 미술운동에 대한 비평에서 거론되어온 비판적 리얼리즘, 사회주의 리얼리즘, 민중적 리얼리즘, 공동체 신명론, 전투적 신명론 등과 내재적으로 거리가 멀다. 그의 초기작 <징후>, <황지330>, <식사>(1985), <목욕(씻을 수 없는)>(1983) 그리고 <백두대간>(1993~2004)을 경유하여 머리카락 시리즈에서 공통적으로 흐르는 정서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바로크주의’라 본다. 2011년 ‘삶의 주름, 노동의 무게’로 이행된 작품의 주제는 작가가 다중적인 울림을 갖는 바로크적 자연학으로 심도를 옮긴 결과다.


<이른 장마>, 캔버스에 유채, 162×112.1cm, 1993~2006. 1990년대 이후 작가는 쇠락한 폐광촌과 강원도 풍경을 그렸다. 한국 사회의 압축 성장이 야기한 모순과 문제를 기록하려는 목적.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이른 장마>, 캔버스에 유채, 162×112.1cm, 1993~2006. 1990년대 이후 작가는 쇠락한 폐광촌과 강원도 풍경을 그렸다. 한국 사회의 압축 성장이 야기한 모순과 문제를 기록하려는 목적.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추상미술에 대한 오해


이제까지 추상은 일루전 공간을 파기한 결과로 이해됐다. 하지만 추상은 일루전 이전의 그 무엇, 맨 처음 등장한 그 무엇이다. 이미지 혹은 형상은 시각적 좌표에서 벗어나 낯설고 새로운 지각을 창조하는 구성적 공간에서 ‘생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추상을 형상과 서사로 구성된 일루전 공간을 비워내는 것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추상의 동기는 자기 지시적 금욕에 입각하여 모든 것을 배제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시각의 붕괴 혹은 회화의 눈멀음으로 비로소 사물을 보고자 하는 바로 그 순간의 감각에서 추동됐다. 우리의 시각은 보이는 대로 보지 않는다. 눈앞 풍경이 망막에 들어와 뇌에서 화면처럼 펼쳐지는 것 같지만, 실상 그리 간단하지 않다. 시각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이미 분석을 시작한다. 풍경의 선, 색,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분리하여 따로 처리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작가 자신의 정치적 태도’가 아니라, 그의 ‘작업이 지닌 정치적 태도’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고, 그 태도란 바로 ‘정치에 저항하는 태도’이다. 정확히 말해 ‘예술을 그 어떤 의미의 매개체로 예속시키는 정치’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저항의 전략은 바로 넘쳐흐르는 몸의 감각을 활용하는 것이다.”(김원방) 모든 예술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이다. 문제는 예술을 정치적 대상으로만 보고 이를 신체의 현존에서 분리하려는 신학주의적, 계몽주의적 예술관이다. 그것이 리얼리즘이 빠진 수렁이다.


<백두대간>, 캔버스에 유채, 206.5×496cm, 1993~2004. 황재형은 대상의 본질을 포착하기 위해 한 작업을 다년간 개작한다. 약 10년에 걸쳐 완성한 <백두대간>. 폭설이 내린 밤 풍경을 그리고자 다음 날 아침 같은 장소에 갔지만, 어제의 모습은 사라지고 고요함만 남아 있던 경험을 바탕으로 그렸다. 1990년대 들어 탄광촌에서 대자연으로 작업 세계를 이행해 사실성의 범주를 넓혀 나갔다.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백두대간>, 캔버스에 유채, 206.5×496cm, 1993~2004. 황재형은 대상의 본질을 포착하기 위해 한 작업을 다년간 개작한다. 약 10년에 걸쳐 완성한 <백두대간>. 폭설이 내린 밤 풍경을 그리고자 다음 날 아침 같은 장소에 갔지만, 어제의 모습은 사라지고 고요함만 남아 있던 경험을 바탕으로 그렸다. 1990년대 들어 탄광촌에서 대자연으로 작업 세계를 이행해 사실성의 범주를 넓혀 나갔다.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징후


황재형의 <징후>에는 탄맥을 연상시키는 까만 하늘이 화면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그 아래론 엄청난 규모로 벌채된 대지와 트랙터 기계 자국이 지평선을 향해 가없이 펼쳐 있다. 풀 한 포기 남아 있지 않은 폐허이고 황무지이다. 이 공포스러운 풍경은 197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사람이라면 익숙할 T.S. 엘리엇의 시 <황무지>를 떠올리게 한다. “죽은 자의 매장”이라는 1부의 첫 줄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시작해 “손 안에 든 한 움큼의 먼지만큼 공포를 보여주마”로 끝맺는다.


시 전체의 마지막에는 산스크리트어 주문인 “샨티 샨티 샨티(Shantih Shantih Shantih)”가 적혀 있다. 샨티는 평화를 뜻하며, 세 번 반복하면 정신적 고통, 육체적 고통, 자연재해로 인한 고통에서 풀려난다고 한다. 고통의 해방과 사랑의 나눔은 황재형 예술의 도덕적 기초이자 정치적 축으로, <징후>는 그 출발점에 서 있는 작업이다. 이 그림은 작가가 태백의 광부로 안착하기 직전인 1980년 4월의 사북항쟁, 바로 이어진 5월의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칠흑 세상을 담아낸 것으로, 한국 노동 운동사에 획을 긋는 기념비적 작품이다. <징후>는 죽음의 땅 저편에 가느다란 빛이 아직 남아 있음을, 무참히 잘린 나무가 드러낸 생살에서 희망을 잃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현대적 바로크라 해석되는 판소리의 탁음과 전율을 느낀다.


〈Sulfuric Acid〉, 캔버스에 유채, 112.1×162.2cm, 2008. 황재형의 풍경화는 두꺼운 마티에르가 특징이다. 작품 제목인 ‘황산’은 환경 오염으로 검붉게 물든 사회를 의미한다. 리얼리티를 획득하기 위한 실험적 작품.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Sulfuric Acid〉, 캔버스에 유채, 112.1×162.2cm, 2008. 황재형의 풍경화는 두꺼운 마티에르가 특징이다. 작품 제목인 ‘황산’은 환경 오염으로 검붉게 물든 사회를 의미한다. 리얼리티를 획득하기 위한 실험적 작품.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쑥부쟁이와 여성 노동자


황재형의 그림에는 여공, 누이, 어머니, 세월호 유족 등 많은 여성이 등장한다. 노동 현장에 대한 그의 경험은 노동자의 90퍼센트를 차지했던 여공을 위한 야학에서 비롯하였다. <쑥부쟁이>의 어린 여자아이는 쑥을 잔뜩 담은 망태기를 머리에 이고 등에는 동생을 업고 있다. 쑥부쟁이가 흐드러지게 핀 바람의 언덕을 향해 발길을 재촉하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여기엔 부모 없이 동생을 키워야 하는 소녀 가장의 슬픈 이야기가 담겨 있다. 미당 서정주의 <자화상> 시구 “자신을 키워온 것은 8할이 바람이었다”를 떠올리게 한다. 전 세계적으로 동일한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황재형은 애처로운 회고에 그치지 않고 쓰라린 삶에도 좌절하지 않는 강한 생명력에 주목해 이를 대담한 어법으로 승화하였다.


황재형은 1984년부터 2010년까지 일곱 번의 개인전 제목을 모두 <쥘 흙과 뉠 땅>으로 고집했다. 산모퉁이 마을의 생명력을 그린 <백두대간>, 탄가루를 뒤집어쓰고 절규하는 눈빛의 <선탄부 권씨>(1996), 다닥다닥 붙어있는 낙엽 같은 판잣집을 그린 <삶의 무게>(1999), 돌멩이 얹은 슬레이트 지붕에 비친 <노을 한 자락>(2003), 험준한 계곡 아래 눈 쌓인 판잣집에서 새어나오는 노란 불빛의 <아랫목Ⅱ>(2004), 비탈길 판잣집에 내려앉은 <고한의 볕>(2006) 등은 모두 쥘 흙만 있을 뿐 뉠 땅 하나 없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담은 작품이다.
산업 사회에 공장제가 도입되면서 노동(일), 토지(땅), 화폐(돈)가 모두 판매를 위한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경제적 허구가 사회의 조직 원리가 되고 만 것이다. 특히 노동은 사람에게 부여된 행위이기에 인간 사회는 모든 면에서 경제 체제의 부속물이 되었다. 인간과 자연이 보호받지 못하고 시장 경제라는 ‘사탄의 맷돌’에 통째로 갈려 퇴락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된다면 무지막지한 허구의 경제 체제가 몰고 올 결과를 어떤 사회도, 그 누구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하모니카 나고야>, 캔버스에 머리카락, 100×240cm, 2017. 2010년대 작가는 사실성을 ‘머리카락’이라는 재료로 풀어냈다. <하모니카 나고야>에는 하모니카처럼 늘어선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 조선인 노동자의 막사가 머리카락으로 묘사돼 있다.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하모니카 나고야>, 캔버스에 머리카락, 100×240cm, 2017. 2010년대 작가는 사실성을 ‘머리카락’이라는 재료로 풀어냈다. <하모니카 나고야>에는 하모니카처럼 늘어선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 조선인 노동자의 막사가 머리카락으로 묘사돼 있다.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그림 속 화가


8명의 광부가 좁고 어두운 갱에서 식사를 한다. 외눈박이 랜턴이 그들에겐 생명의 등불이다. 자신의 등불로 상대의 도시락을 비춰주며 바쁘게 도시락을 먹는다. 뿜어져 나오는 빛 덩어리는 혼탁한 갱을 비추어 조지 오웰이 지옥이라 부른 탄광의 막장을 보여준다. 쭈그리고 둘러앉아 ‘일그러진 진주’처럼 교차되는 불빛은 긴장과 생동이 있는 커브 라인을 두텁게 형성한다. 화가는 관객의 시선이 도달하는 지점을 의식해 의미를 감추어두거나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맨 앞에 위치한 광부는 바닥으로 고개를 숙여 자신의 랜턴으로 정확히 철로를 비추고 있다. 이는 갱도의 출구로 향하는 유일한 ‘탈주로’이다.
한편 예술가는 군상을 그릴 때 본능적으로 ‘공감’의 대행자로서 자신을 그려 넣고 싶은 심리적 충동에 빠지곤 한다. 그것은 언젠가 누군가와 만날 ‘지금 여기’를 사건화(무대화)하는 상황에 증인으로서 자신을 세우는 서명 행위이기도 하다. <식사>에서는 밀도 있는 광부들의 강렬함에 눈을 빼앗겨 ‘응시’를 놓쳐버리기 십상이다. 그림의 우측 상단에는 광부의 옆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식사 중 사색에 빠진 모습은 급하게 음식을 밀어 넣는 다른 광부와 동떨어진 분위기를 자아낸다. 바로 옆의 동료는 그 모습이 낯설다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극한의 노동 현장을 담은 그림에서 황재형은 어둠에 자신의 얼굴을 새겨 넣는 심리적인 이야기를 주입하여 ‘살아있는 형식’을 만들어냈다.


촉수적 상상력


모든 것을 포용하고 수용하는 <백두대간>, 그리고 제단 기능을 하는 영혼의 닫힌 방 <황지330>. 이 둘의 조화는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황재형이 어떻게 자신의 예술을 종합했는지가 궁금하다. 머리카락은 희로애락을 관장하는 곳, 즉 영혼이 잠들어 있는 신체의 일부이다. 인간의 꿈은 머리로 구현되었다. 그래서 힘의 상징이기도 하다. 머리카락은 인체 중 탄소 성분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고, 터럭이면서도 매우 가늘기에 인간에 가장 가깝다.


탄소 섬유는 비행기, 자동차의 무게를 절반 이하로 줄이거나 이산화탄소 배출을 크게 감소시킬 수 있는 ‘초경량에 초강력’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해당 분야의 전문가는 “20세기가 규소(실리콘)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탄소 섬유의 시대가 될 것”이라 전망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린 <회천>에는 2016년부터 머리카락을 재료로 삼은 작품이 유화작품과 함께 대거 출품됐다. 황재형에 따르면 머리카락은 정보의 저장소로서, 살아온 과정, 환경과의 관계가 새겨진 필름인데, 출처를 알 수 없는 머리카락들이 모여 하나의 형상을 만든다. 따라서 작품 속 머리카락에는 명시적이기보다는 암묵적인 상태, 즉 “그것은 알 수 없다”라는 고백과 표명이 담겨 있다. 황재형은 리얼리티에 접근하는 데 있어 재현적 사유의 결과인 리얼리즘과는 항상 거리를 유지한다. 그의 작업은 탄소의 흐름이다. 원자 번호 6번인 탄소가 지구의 생명이자 땅속의 햇살인 까닭이다.


기억이란 고통과 불안, 수치와 공포가 담긴 판도라 상자의 밑바닥을 휘저어 그럼에도 즐거웠던 일, 그리고 희망이라는 글자를 찾으려는 행위이다. 머리카락으로 그려진 인물과 풍경…. 이것은 알 수 없는 각각의 정보가 뒤섞인 집적 회로의 비유로서, 타자의 집합인 나와 친족을 향한 사랑의 징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식의 사고는 구체적이지 않을뿐더러 무력해지기 쉽다. 모든 것이 얽혀 있다면 도무지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는 폐기되거나 개선되어야 할 과거의 습관을 끊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되풀이할 수 있다는 문제를 야기한다. 카르마의 사고는 동일자 중심의 사고방식을 강요하여 여성, 장애인, 유색 인종, 성소수자 등의 비동일자를 끊임없이 사회에서 추방하는 전체주의적 사고와도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황재형은 노동자만을 위한 사회 변혁론의 전위대가 아니라 소수자에 대한 보살핌과 제도적인 지속성이 필요함을 몸소 나타내 보였다. 하여 황재형의 예술은 그것을 일상에서 반복 실행하는 기억술인 동시에 총체적인 생명을 아우르는 자연학이다. 여성과 남성, 장애인과 비장애인, 아이와 어른, 동물과 인간, 유색 인종과 백인종과 어쨌든 다르기에, 연결되지 않고 연결할 수도 없는 지점이 존재한다. 다수와는 다른 소수자 고유의 가치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더 나아가 생명체는 모든 곳이 아니라 특정한 장소에 산다. 필연적으로 저것이 아니라 이것과 연결되어 있다. 동시에 그 연결은 우발적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바와 상관없이 소수자 입장에 처해 끼리끼리 만날 수 있고, 연대할 수도 있다.


황재형의 머리카락 작업은 촉수로 ‘기억 형상’을 포착하는 그림이다. 그는 기억-움직임-호흡-보기를 담아내는 촉수적 스타일을 회화매체로 구현하기 위해 오랜 시간 고민했다. 어떻게 우리는 생각의 풍부함과 끈적함을 온전히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을 회화 평면을 기억하는 뇌처럼 사고하는 가운데 그림과 대화를 나누고 감정을 교류하며 끝없이 작업을 펼쳐 나간다.


<우리는 늘 소가 넘어갑니다(속아 넘어갑니다)>, 캔버스에 머리카락, 181.8×227.3cm, 2012~18. 황재형은 머리카락으로 과거의 작업을 다시 그리거나 사회적 사건을 묘사한다. 이 작품은 세월호 침몰을 초래한 정치적 사건을 은유한다.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우리는 늘 소가 넘어갑니다(속아 넘어갑니다)>, 캔버스에 머리카락, 181.8×227.3cm, 2012~18. 황재형은 머리카락으로 과거의 작업을 다시 그리거나 사회적 사건을 묘사한다. 이 작품은 세월호 침몰을 초래한 정치적 사건을 은유한다.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산 노동’의 산물


황재형에게 생동이란 그 무엇도 정적이지 않다는 사실, 그러니깐 ‘울림’의 리듬이 살아 있다는 말이다. 마르크스의 용어를 빌리자면 회화는 ‘살아 있는 노동’으로 생생해진다. 화가의 노동과 삶은 회화에 ‘저장’된다. 이는 회화의 특정한 지표성—그 안에 노동과 삶이 포함되었다고 여겨지는 식—으로, 서사와 형식 사이에는 내적인 연관성이 있다. 정확히 하자면 예술가의 생애와 작업 시간을 어떤 방식으로 저장하는지에 따라 누구든 회화의 ‘대중성’과 관계할 수 있다. 회화는 새로운 경제가 도래할지라도 살아 있는 노동을 포획해온 감각으로 지금 여기의 대중성을 포획할 수 있다. 여기서 새로운 경제란 1980년대 이후 확연해지기 시작한 탈포디즘적 조건, 인지적 자본주의 혹은 네트워크 자본주의 등이다.


새로운 경제는 우리의 인지적, 정동적인 능력을 목표로 한다. 트위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같은 사회적 미디어 장소가 우리 삶을 어떻게 마케팅하는지 보라.
회화는 작가의 노동과 삶으로 흠뻑 젖어 있다는 인식 때문에 경제 시스템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다. 여전히 예술가의 위계는 가장 높이 위치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작품은 가장 고가의 경매품이 된다. 회화에는 ‘상품화되는 우리’가 사는 방식이 드러나 있다. 황재형은 1980년대 민중미술 ‘운동 노선’의 비평가나 작가가 주장한 리얼리즘과는 다른 방식으로 서사화(내면화) 경험을 구현해왔다. 데이빗 흄의 말을 빌리자면 그 서사는 ‘필연적인 연결’이 아니라 ‘접합’을 내포한다. 그렇다면 서사는 어둠을 횡단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가치 있는 자기 발견술적 형식인 것이다.


사탄의 맷돌


국립현대미술관에 초대된 고희의 황재형은 단 한 개의 신작만 만들었다. 나머지는 지난 40년 동안 제작해온 작품을 작가가 선별한 것이다. 신작은 루어 낚시에 사용하는 메탈지그(가짜 미끼)를 확대 복제한 오브제이다. 인간은 체계라는 가짜 미끼에 걸려들기 위해 줄을 선다. 한때 리얼리스트란 현실을 요지부동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을 뜻했다. 1980년대에는 적어도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적 대안이라는 명목이 있었다. 당시에는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의 마지막 단계에 있긴 했어도 존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변했다. 지금은 훨씬 깊고 만연한 고갈의 느낌, 문화 정치적으로 거의 불모인 느낌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무한히 가변적이어서 언제든지 스스로를 현실에 예속시킨다. 신자유주의가 제공하는 쾌락은 우리가 계속 같은 충동에 매달리도록 잡아끄는 (가짜) 미끼다.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인간을 철저히 망가뜨리는 시장 자본주의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경제적 착취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와 영혼이 부정당하고 시장에서 단순 상품 취급을 받는 데 대한 분노였다. 황재형은 폴라니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묘사하기 위해 영국의 시인 겸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서 차용한 ‘사탄의 맷돌’이란 말을 다시 작품 제목으로 취했다. 충동을 따라 소소한 즐거움에서 다른 즐거움으로, 이슈에서 이슈로, 트렌드에서 트렌드로, 프로그램에서 프로그램으로 순환하며 떠돌아다니는 사람들. 현대 사회에는 조증의 비활성적 측면으로 우울증이 만연해 있다. 반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안에 널리 유포되어 있다. 그러니 반자본주의적 몸짓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무너뜨리기는커녕 오히려 강화한다.


한 세기 전 고흐의 삶은 광부와 부대끼며 생활한 보리나주 탄광촌에서 바뀌었다. 그는 광부의 비참한 노동 조건과 열악한 생활상을 가까이서 지켜봤고, 부상자를 간호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를 올리면서 인간의 조건에 대한 원초적인 물음을 던졌다. 황재형은 탄광촌에서 그에 비할 바 없이 훨씬 대단한 삶을 일궈냈다. 왜 수많은 사람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이토록 고통받아야 하는가. 왜 인간의 힘겨운 노동은 어디서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가. 이렇게 황재형은 자신만의 촉수로 모두가 기피하는 곳에서 예술적 발견을 이룩했고, 모두가 외면하는 곳에서 이웃을 돌보았다. 그는 올바른 판단으로 정확한 감각을 구사하길 바랐고 또 성취하였다.


왼쪽 <내 땅을 딛고서서>, 캔버스에 머리카락, 162×227cm, 2016. 오른쪽 <드러난 얼굴>, 캔버스에 머리카락, 162.2×130.3cm 2017. 현재에 되살아난 과거 탄광촌 경험. 노동자의 이야기에 ‘사실성’의 숨을 불어넣는 실험은 여전히 지속 중이다.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왼쪽 <내 땅을 딛고서서>, 캔버스에 머리카락, 162×227cm, 2016. 오른쪽 <드러난 얼굴>, 캔버스에 머리카락, 162.2×130.3cm 2017. 현재에 되살아난 과거 탄광촌 경험. 노동자의 이야기에 ‘사실성’의 숨을 불어넣는 실험은 여전히 지속 중이다.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이제 광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000년 이후 작품에는 광부나 탄광촌 인물이 거의 사라지고, 그들이 살고 있는 산촌 마을이나 태백의 골목 풍경이 등장한다. 그의 풍경 가운데서도 탁월한 <외줄타기>(1996~2007)에는 눈 녹은 산비탈의 흙더미와 거의 한 덩어리가 된 집이 마치 고생대 동물의 거죽처럼 보인다. 한 남자가 손에 무언가를 든 채 미끄러운 길을 올려보며 걷고 있다. 꺼진 축대와 나란한 길은 화면에서 날카롭게 잘렸다. 아마 그는 미끄러운 경사로를 타고 올라가야 할 것이다. 이는 불안하고 위험한 미래를 암시한다. 그림 속 남자는 광부 일반이자 또한 자신이었으리라. “나의 캔버스가 곧 현실이었으며 현실 개조의 희망 그 자체였다”라는 말이 가슴으로 와닿는 그림이다. 황재형 그림에는 길이 많다. 길은 우연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다. 길에서는 다양한 사람이 하나의 시공간적 지점에서 교차한다. 길에서는 인간 운명을 규정하는 시공간적 연쇄가 사회적 거리감의 붕괴로 인해 더욱 복잡해진다. 그리고는 독특한 방식으로 결합된다. 길의 크로노토프는 새로운 출발인 동시에 사건의 결말이 일어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길은 우연히 지배하는 사건을 묘사하는 데 적절하다. 작품은 말한다. ‘삶이여, 있는 그대로 영원하라!’(베르토프)


황재형은 일상성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작가다. 그는 삶을 있는 그대로 그리지도, 그렇다고 무엇을 덧붙이거나 변조하지도 않는다. 탄부의 이미지는 매일 다가오는 불안한 미래에 이미 도달한, 현재의 낯선 인용일 것이다. 이런 현재화는 작은 출구를 가리킬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진실은 작가의 기대에 따라 만들어지는 주관적인 견해이자 산물이다. 다큐멘터리 형식은 현실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형식 자체의 권력 의지를 묘사한다. ‘있는 그대로’라는 문구는, 이 문장의 진술을 정반대로 뒤집어놓는 역동적인 첨가어이다. 삶을 있는 그대로, 다큐멘터리로 포착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림에는 ‘있는 그대로’의 삶이 들어갈 수 없다. 삶이 이미지가 되는 순간, 그것은 삶 자체이기를 포기하고 스스로의 타자이자, 정지된 오브제가 된다. 진짜이면서도 섬뜩하고, 원본이면서도 복제이고, 현실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현실의 도플갱어이다. 다큐멘터리 속 삶은 다른 모든 것이 될 수는 있어도 삶 자체가 될 순 없다.
집과 땅이 한 덩어리가 되어버린 <삶의 무게>(1999), 깊고 거대한 산의 아랫목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검은 울음>(1996~2008), 산동네가 시꺼먼 탄재를 뒤집어쓴 <천국에서>(1997)는 탄광촌 정경을 담고 있다. 늘어서 있는 집 한 줄 전체가 놀라운 각도로 미끄러져, 창들이 수평보다 10~20도 정도 누워 있다. 집이 어느 날 갑자기 기울면 창과 문이 완전히 틀어져버린다고 한다. 탄광촌 사람에겐 놀랄 일도 아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광부가 도끼로 문을 부수고 안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그냥 한번 웃어버리고 만다.


20세기 초 영국의 유명 작가였던 G.K. 체스터튼은 당대 문명의 기반이 추상화라 주장한 바 있다. 그는 틀렸다. 현대 문명의 기반은 탄소의 흐름이고 그 가운데 민주주의를 진전시킨 것은 석탄이었다. 우리를 살게 하는 기계가, 그 기계를 만드는 기계가 전부 직간접적으로 석탄에 의존하고 있었다. 석탄과 산업화, 식민화의 관계는 화석 연료와 민주주의를 잇는 가장 근본적인 첫 연결 고리이다. 그것을 새롭게 이해하려면 주체 중심의 이념이나 사회적 의식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적절한 이해, 즉 “사물은 단일체가 아니라 오히려 다양체이고, 사유와 세계가 각각 따로 존재해 상호작용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내부 작용’한다”라고 했던 캐런 바라드의 주장을 실험해봐야 한다. 탄소에는 그것을 채굴하는 광부와 노동자의 노동으로 형성된, 눈에 보이거나 때로는 보이지 않는 ‘연결’이나 ‘동맹’이 포함돼 있다. 이 연결과 동맹은 물질과 관념, 경제와 정치, 자연과 사회, 인간과 비인간, 혹은 폭력과 재현 사이의 어떠한 구분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 모든 걸 예술에서 찾아보려고 온몸으로 사유했던 황재형의 노고에, 우리는 진정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1)티머시 미첼은 탄소라는 ‘행위자(actant)’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본다. 현대 민주 정치는 정치 기구를 구성하는 데 열역학적인 동력을 제공한 석탄의 채굴과 분리될 수 없으며 석탄이 민주주의를 진전, 강화시킨 반면에 석유는 그것을 약화시킨다고 말한다. 티머시 미첼,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역), 『탄소 민주주의』, 생각비행, 2017.
2)미술사가 임영방은 작고하기 직전에 역저 3권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와 미술』(2003), 『중세 미술과 도상』(2011), 『바로크』(2011)를 연달아 출간하였다. 그는 『바로크』에서 에우헤니오 도르스의 ‘바로크론’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도르스는 바로크의 역사적 양태를 분류한 ‘바로크의 22개 종속표’를 제시했고, 이는 선사시대 바로크, 불교 바로크, 민중 바로크, 치유 바로크를 포함한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바로크는 20세기와 17세기를 연결해주는 구름다리이며 바로크는 아직 살아 있는 개념’이다”라고 말한다. 김현, 『행복의 시학/제강의 꿈』, 「바로크 개념의 의미 변환에 대하여」(문학과지성사, 1991), p.163.


※ 이 원고는 아트인컬처 2021년 7월호에 수록된 것으로,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아트인컬처와 콘텐츠 협약을 맺고 게재하는 글입니다.

이영철 / 아시아문화개발원 원장

이영철은 현재 국가법인 아시아문화개발원 원장(대표이사)이며, 계원예술대학교수로 재직 중이다. 백남준아트센터 초대관장, 제 1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예술감독, 2회 광주/부산비엔날레 예술감독을 역임하였으며, 저서로는 『백남준의 귀환』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