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권도연 - 개의 초상, 또는 산의 풍경

posted 2021.12.06


권도연은 지난 2년 동안 북한산에서 야생화된 개들을 촬영했다. 그 결과물은 그곳에 개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의 사회 문제로 보여주는 보도 사진도 아니고, 각각의 개들을 등록하고 계량하여 야생화된 개들에 대한 지식을 수립하는 과학적 사진도 아니다. 조금 이상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 이미지들은 아주 정성껏 만들어진 개들의 초상 사진처럼 보인다. 그런데 작가는 이 사진들을 그저〈북한산〉이라는 제목으로 묶었다. 실제로 모든 사진은 북한산에서 찍은 것이고 그래서 개는 산을 배경으로 서있다. 어떤 사진은 산만 보이고 개는 보이지 않기도 한다.


〈섬광기억#콩나물1〉, 피그먼트 프린트, 105×140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섬광기억#콩나물1〉, 피그먼트 프린트, 105×140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하지만 개들은 북한산에 속하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개들은 원래부터 산에 살던 것이 아니다. 이들은 지난 몇 년 동안 주변 지역이 재개발되면서 버려진 개들이 야생화된 것으로, 등산객과 자연 생태를 위협하는 외래종으로 분류되어 대부분 포획 후에 안락사되었다. 남은 개들은 사람을 피해 다니기 때문에 실제로 마주치기 어렵지만, 사람들은 각자의 관점에 따라 이들을 늑대와 다름없는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또는 집에서 기르는 개와 똑같이 상상하고 동정한다. 그러나 이 개들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 나오는 완벽한 야생 동물과도 다르고, 해피독(Happy dog) 채널에 나오는 완벽한 반려견과도 다르다.


이들은 자연 또는 문화가 아니라 그 두 범주가 혼성되고 관리되는 어딘가에 위치하며, 실은 북한산 국립공원이라는 장소 자체도 그렇다. 산세가 깊으면서도 도심에서 가까워 방문객이 많을 때는 연간 천만 명에 육박할 정도였으니, 한 해에 서울시 전체 인구만큼 많은 사람들이 북한산에 올랐던 셈이다. 북한산의 자연 생태만이 문제라면 들개보다도 인간이 오히려 가장 위협적인 외래종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암묵적으로 우리 자신을 자연의 주인으로 상정하고, 북한산을 서울 시민의 뒤뜰처럼 바라보며, 그런 관점에서 들개는 우리의 정원에 두고 싶지 않은 존재로서 제거 대상이 된다.


〈섬광기억#콩나물2〉, 피그먼트 프린트, 90×70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섬광기억#콩나물2〉, 피그먼트 프린트, 90×70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작가는 자연을 탐구하는 박물학자처럼 집 근처의 북한산의 현장 조사를 시작했지만, 개들을 통해서 이곳을 유서 깊은 이종 간 교류의 역사를 가진 인간과 개가 서로 간에 위협적인 외래종으로서 대치하는 아이러니한 장소로 재발견했다. 인간이 점유한 영토로서 북한산이 개들을 환대하지 않듯이, 개들이 점유한 영토로서 북한산은 인간을 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산에서 개들을 박멸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입산을 전면 금지하고 인간을 몰아내는 것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다. 인간과 개는 서로의 거울상처럼, 오래된 암반으로 이루어진 산을 밟고 다니며 그 산의 풍경이 의미하는 바를 조금은 바꾸어 놓는다.


사진 속에는 작가의 모습이 직접 드러나지 않지만, 그 이미지들은 개들을 찾아 산을 돌아다닌 작가의 운동과 시간을 기록한다. 개들은 카메라 앞에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기도 한다. 작가는 반복적으로 산을 오르면서 개들이 발견된 곳을 기록하고 이들의 동선을 파악하며 개들이 나와 주기를 기다린다. 역시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모든 사진은 개들의 허가 하에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사진에 담긴 개들은 설령 카메라를 바라보지 않더라도 작가가 근거리에 있는 것을 용인하고 있다. 그 이미지들은 인간과 개의 친밀한 관계가 회복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 외래종이 서로를 포식자와 사냥감 또는 주인과 부하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해진 일정한 거리 위에 성립한다.


〈북한산#2〉, 피그먼트 프린트, 90×135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북한산#2〉, 피그먼트 프린트, 90×135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실제로 사진을 찍으러 다니다 보면 개들이 카메라 뒤의 작가에게 적대감을 드러내거나 친근감을 표하는 순간들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면 그런 장면들은 관객에게 극적 긴장이나 마법 같은 교감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 개들이 처한 복잡한 상황이나 이들이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얼굴을 모두 드러내는 편을 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아주 클래식한 초상 사진가처럼, 리얼리티쇼의 규칙을 따르는 ‘셀카’나 관료제의 규칙을 따르는 증명사진과 구별되는, 개들의 초상 사진을 찍는다.


초상은 특정 매체에 속하지도 않고 엄밀히 미술에 한정되지도 않는 아주 오래된 이미지 형식이다. 로마의 박물학자 플리니우스는 인간이 스스로 빚은 최초의 이미지가 인간 자신의 형상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도공 부타데스의 딸 코라가 연인의 이미지를 간직하기 위해 벽에 비친 그림자의 윤곽선을 따라 그린 것을 그 아버지가 진흙으로 채우고 구워서 보존한 것이 회화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개체를 시각적으로 포획하려는 의지, 그 개체의 본질적인 부분을 복제하고 고정해서 단순히 원본의 복제물이 아니라 대체물을 수립하려는 열망이 있다. 그 이미지는 시간 속의 우연한 배치를 광학적으로 정확하게 포착하려는 투시도법적 또는 사진적 풍경과는 조금 다른 정념에 의해 추동된다.


〈북한산#2〉, 피그먼트 프린트, 90×135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LEFT〈북한산#13〉, 피그먼트 프린트, 90×135cm, 2019. RIGHT〈북한산#15〉, 피그먼트 프린트, 90×135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풍경은 상대적으로 새로운 이미지 형식이다. 중요하고 의미 있는 대상을 식별하여 거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하나의 전체로서 관조하는 것은 근대에 등장한 보기의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거울과 렌즈,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에서 사진기에 이르는 기계적 광학 장치의 무분별하고 무관심한 시선은 풍경을 발견하는 주요한 통로 중 하나였다. 인간의 눈은 한편으로 이러한 기계의 눈을 닮아갔지만, 다른 한편으로 기계적으로 제작된 이미지에 대하여 다시 관계를 맺고 의미를 부여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말하자면 우리는 풍경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가 보고 싶은 무엇인가의 초상을 본다. 그것은 우리 자신일 수도 있고 작가일 수도 있으며, 의인화될 수 없는 어떤 신성한 것 또는 신성모독적인 것일 수도 있다.


또는 그것은 단지 개의 초상일 수도 있다. 작가는 개들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인간에 가깝게 의인화되거나 거꾸로 지나치게 인간과 무관한 풍경으로 자연화되지 않을 수 있는 어떤 적절한 거리를 찾기 위해 애썼는데, 왜냐하면 이 개들은 진실로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위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개들은 익숙한 풍경을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변형시킨다. 일단 그들을 보고 나면, 평범해 보이는 산의 풍경조차 개들이 숨어들어 어디선가 계속 살아가고 있는 산, 또는 그렇게 살아가던 개들이 하나 둘씩 붙잡혀 사라지고 있는 산이라는 새로운 의미 속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런 식으로 이 개들은 관객의 눈 속으로 침투하고 그 눈에 비치는 것들을 조금은 달라지게 만든다.


〈북한산#19〉, 피그먼트 프린트, 90×135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북한산#19〉, 피그먼트 프린트, 90×135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작가는 이 개들의 사진이 장기적으로 인터넷 이미지 데이터베이스에 침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들이 산 속으로 숨어든 것처럼, 이들의 이미지가 또 다른 이미지들 틈으로 잠입해서, 누군가 입력하는 검색 키워드에 따라 평범한 개들, 또는 들개들, 또는 그저 북한산의 이미지들 사이에서, 때로 등산객과 함께, 때로 사냥꾼과 함께, 때로 황소개구리와 함께 스크린 위로 떠오른다면. 그 미미하고 이질적인 존재가 디지털 이미지들의 파노라마에 어떤 영향을 끼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일단 침투에 성공한다면, 그들은 다른 많은 이미지들과 함께 완전히 망각되는 것도 완전히 기억되는 것도 아닌 반영구적인 연옥에 머물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축복이든 저주든 간에, 그런 식으로 이 개들은 우리의 이웃이 될 것이다.


※ 이 원고는 『2019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프로그램 결과보고 도록』에 수록된 것으로, 저작권자의 동의 아래 게재하는 글입니다.

윤원화

시각문화 연구자. 『문서는 시간을 재/생산할 수 있는가』(서울: 미디어버스, 2017),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서울: 워크룸프레스, 2016), 역서로 『기록시스템 1800·1900』(서울: 문학동네, 2015), 『광학적 미디어: 1999년베를린 강의 예술, 기술, 전쟁』(서울: 현실문화, 2011) 등이 있다.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일민미술관, 2014)를 공동 기획했고,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18에서 〈부드러운 지점들〉을 공동 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