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상 잡다(雜多)와 인간 지각이 만날 때
〈에이포트레이트(Aportrait)〉(2017)는 측량에서 시작된다. ‘박아람’은 키, 몸무게, 발, 심박수, 호흡수, 체온 등 수치화될 수 있는 항목으로 변환된다. 도출된 숫자는 모종의 연산 절차를 경유하여 브러시의 너비와 스트로크의 길이로 치환되어 캔버스 위 균일한 사각형 공간에 배치된다. 이때 회화는 브러시를 마치 기계처럼, 혹은 소프트웨어상 툴과 같이 사용하여 일종의 연산 작용을 거친 결괏값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회화의 함수적 작동은 〈자석 올가미 측량(Magnetic Lasso Survey)〉(2012)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는 박아람의 방법론 중 하나다. 〈자석 올가미 측량〉은 픽셀 간 색상 차이에 달라붙어 일정한 윤곽을 이루고 이로써 영역을 지정하는 포토샵의 툴인 자석 올가미(magnetic lasso)를 활용하여 인터넷에서 수집한 디지털 이미지로부터 형태를 도출해낸다. 입력 데이터와 이를 처리할 일련의 규칙, 그리고 연산 기계를 통과한 결괏값이(임의의 선택으로 인해 발생한 일정 정도의 오차범위를 남기고) 작업의 처음과 끝을 오므려 놓는다.
이때 회화는 그 이면에서 벌어지는 일, 즉 불명확한 경계 위에 올려진 형태를 추상하여 정렬 가능한 것으로 변환하는 작용의 인터페이스다. 반-초상화(A-portrait)의 대상인 ‘박아람’은 쉬지 않고 운동하는 존재이자 물리적이면서도 정신적인, 수동적이면서도 능동적인, 독립적이면서도 관계적인 생물체다. 하지만 회화는 이처럼 복잡한 대상을 잠정적이나마 정적인 상태의 현현으로 표현할 것을 요구한다. 필연적으로 일련의 추출과 연산의 과정이 도입된다. 지난 몇 년 사이 이미지 편집 소프트웨어의 등장과 이미지의 범람으로 인해 재조정된 시각 장 내에서 회화의 과제를 재고한 박아람을 비롯한 몇몇 작가들의 시도가 그 과정에 다소 임의적이되 엄격한 법칙을 적용시켰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물론 이러한 “규칙-회화”가 순수 규칙 제정의 권한을 온전히 작가에게 넘겨줌으로써, 그리고 재현이나 지시작용에 기대지 않고 평면 그 자체로 승부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모더니즘 회화의 전통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지 않느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아왔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박아람의 경우 중요한 것은 적용된 규칙 그 자체보다 회화 평면을 연산이 거듭되고 발산할 수 있는 일종의 액정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회화는 눈에 보이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물감의 레이어가 얇게 도포된 평면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 이면에 연산 작용이 ‘임베디드(embedded)’되어 있다. 물론, 이 차별점은 회화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었을 때에야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박아람의 평면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어떻게 환원적이고 단호한 회화가 보이는 것 너머와 교섭할 수 있는가?
2. 중첩과 활성화의 기술
"작도 연습은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지만 가능한 것을 작도합니다."
〈작도 연습(Drawing Exercise)〉(2014~2016)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위와 같이 선언한다. 이 언표가 암시하듯 작도 연습은 시각과 촉각의 두 가지 변수를 둔 사방면-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만질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사이를 종횡한다. 〈세 번째 작도 연습(3rd Drawing Exercise)〉(2015)의 경우, 원형 극장을 앞에 두고 지시하는 음성이 흘러나온다. 무대의 중앙이나 가장자리 등 몇몇 기점에 가상의 점을 찍고, 점을 이어 선분을 만들고, 일정한 축을 기준 삼아 회전하고, 같은 일을 반복하여 궤적을 쌓아간다.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그 무언가가 탄생한 순간이다. 하지만 바로 이 정신 작용, 혹은 머릿속 소프트웨어의 가동, 어쩌면 ‘가상 현실’속의 구상 활동은 결코 명상의 시간처럼 운영되지 않는다. 그 어디에 내면의 파라다이스를 만날 수 있도록 훈련하는 활동과 달리 작도 연습은 지정된 장소에서 이루어진다. 가시권에 속하는 극장 공간(혹은 시각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추출한 극장의 심상) 위에 비가시적인 도형을 올린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을 새로이 구획하고,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해상도를 끌어올린다. 그 와중에 제공된 알사탕은 입안에서 돌고 돈다.
이처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포개지도록 하는 ‘연습’은 각종 디바이스에 동기화된 감각과 조응한다. 세 차례의 작도 연습 이후 선보인 〈콜(Call)〉(2017)에서 스마트폰 액정이 등장한 것은 아마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열 개의 숫자 버튼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제자리를 지킨다. 손가락이 그 위를 오가며 액정과 만진다. 접촉한 복수의 점을 이어서 직선과 도형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을 이리저리 굴리거나 서로 다른 배경 위에 얹어본다. 보이지 않는 알고리즘과 액정을 뚫고 발광하는 빛, 스크린을 만지는 손가락과 그 손가락의 움직임을 바탕으로 머릿속에 그려내는 형상, 그리고 공간을 열심히 훑어내며 끊임없이 구르는 눈알과 혀 위에 빙글빙글 도는 사탕. 액정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 만지는 감각과 만질 수 없는 것을 더듬는 활동을 매개한다.
다시 〈에이포트레이트〉 앞에 서 보자. 그것은 일종의 액정처럼 걸려있다. 각 네모 칸 안에 들어 있는 획을 따라 위에서 아래로, 좌에서 우로, 혹은 그 반대 방향으로 핥아보자. 정연하게 놓인 획의 집합은 모종의 연산 작용의 결괏값이자 운동을 위한 지시문이다. 눈의 움직임, 추가적인 연산, 망상-소프트웨어의 작동에 따라 획이 재배치되고 잠재태로만 존재하는 형태들이 고개를 든다.
3. 2019_painting_performance_complex.zip
박아람의 페인팅은 일련의 알고리즘에 대한 결괏값으로만 존재하기보다 연산이 임베디드되어 있는 매체이자 감상자가 눈을 굴리고 체내 소프트웨어를 가동하여 형태를 구상하도록 하는 지시문이다. 다시 말해, 박아람의 페인팅은 측량되지 않은 잡다를 수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운영체계, 보이지 않는 형태를 연상하도록 하는 스코어, 그리고 마음속 눈을 굴려 형상을 빚어내는 퍼포먼스 등이 압축된 확장자로 존재한다. 그 총체, 혹은 페인팅-퍼포먼스 복합체는 우리의 지각 가능한 영역과 지각 너머에 이루어지는 영역을 왕복하며 매개하는 액정과 같이 존재한다.
박아람은 “가상과 현실이 포개어진 오늘날의 시공간을 운용할 수 있는 회화적 상징형식”을 도모한다고 말한다. 가시 범위에 들어오는 것과 그 너머에 있는 것 사이를 매개하는 인터페이스로서의 회화는 어떤 ‘상징형식’을 취하고 있는가?
에르빈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는 근대적 평면 원근법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고대적 각도의 원근법을 규명하고, 시대별 원근법의 차이가 가치판단의 영역은 아니지만 “양식(Stil)의 계기”가 된다는 점을 피력한다.1) 원근법은 감각할 수 없는 것과 감각할 수 있는 것 사이를 조율하는 작용이자 이미 내재화된 당대의 상징형식의 일종이다. 따라서 당대의 원근법은 세상을 어떤 설정으로 만날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한편, 뒤러(Albrecht Düer)는 철저히 경험적으로 검증된 방식으로 세상을 평면 위에 옮기고자 했다. 그는 대상과 눈 사이의 거리를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 이 둘 사이를 직선으로 이은 다음 그사이에 모눈종이를 댄 평면을 설치하기까지 한다. 동그란 눈으로는 현실 세계를 똑바로 볼 수 없기에 내세운 확실한 대책이다. 다른 한편, 박아람의 근작은 바로 이러한 원근법의 적용, 즉 포섭되지 않는 세계를 일정한 단면에 옮겨오는 작전을 오히려 역산할 것을 제안한다. 진행형의 행렬을 발췌한 듯한 색면 구성-〈나는 너를(Je T’)〉(2019)-과 사분면의 일부이자 자체적으로 일정한 비율로 축소된 사각형을 품고 있는 이미지-〈팬지(Pansy)〉(2019)-앞에 서 보자. 무엇이 보이는가? 수식을 입력할 수 있는 균일한 직사각형이 나열된 스프레드시트의 그리드 양식과 컴퓨터 공학의 기반이 된 행렬의 형태가 비쳐 보이지 않는가? 연산이 곧 해석학이고, 터치가 곧 입력인 지금의 원근법이 언뜻 등장하지 않았는가?
1)에르빈 파노프스키, 심철민 옮김, 『상징형식으로서의 원근법』(도서출판b, 2014), 27쪽.
유지원은 주로 서울에서 기획하고 글 쓰고, 번역한다. 플랫폼 자본주의가 재조정한 노동의 조건과 소통 방식에 대한 리서치를 바탕으로 《유어서치: 내 손안의 리서치 서비스》(두산갤러리 서울, 서울, 2018)를 공동 기획했으며, 소셜 미디어 시대의 여성의 자기 전시에 대한 진행형 리서치 플랫폼인 ‘notyourtypicalnarcissis.com’을 운영하고 있다. 복수의 필명을 오가며 미술, 마케팅, 대중문화를 소화하는 글을 쓴다. 현재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20”의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