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가이자 안무가인 송주원은 자신의 ‘댄스필름’이 ‘미술’에서 어떻게 읽히는지 궁금해했다. 처음에는 내가 그에 관한 답을 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일단 무용, 영상, 미술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거나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미술’의 일반적 관점을 대변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 궁금했다. 미술은 몸짓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시야와 담론을 확장해 왔고 특히 비디오는 발생 초기부터 몸을 기록하며 언어를 정교화 해왔지만, 분명 미술에서 몸짓이 수반된 장면에 대한 독해는 공연예술에서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여전히 미술의 퍼포먼스와 공연예술의 퍼포밍 아트를 용어상 구분해서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주로 미술 영역에서 활동해왔으며 아직 무용 공연이나 댄스필름에 대해 글을 써본 적이 없는 나의 현재 시선 그대로 송주원과 일일댄스프로젝트가 만들어온 〈풍정.각〉 시리즈를 읽어보기로 했다. 내 현재 시선은 치우침, 나아가 편협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 치우침은 아마도 퍼포밍 아트를 퍼포먼스처럼, 혹은 퍼포먼스 기록 영상처럼 읽어버리는 의도적 무리수에서 비롯될 것이다. 퍼포밍 아트에 좀 더 익숙한 이들에게는 이 글이 확실한 오독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바라건대, 그 괴리에서부터 몸짓에 대한 비평적 관점을 좀 더 세분하거나, 퍼포먼스와 퍼포밍 아트의 언어를 비교하기 위한, 혹은 그 차이를 없애기 위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작가는 〈풍정.각〉을 ‘도시공간무용프로젝트’ 또는 ‘장소특정적 공연프로그램’이라고 풀이했다. 특정 장소의 리서치와 퍼포먼스, 전시, 상영의 방식을 취한다고 밝힌 이 프로젝트는 오래된 한옥, 골목, 악기 상가, 그리고 최근 곧 철거될 자동차 부품상가에 이르기까지 사라져가는 도시 공간에서 주로 진행되었고, 때로는 미술관과 도서관 등 기성 제도의 전형적 헤테로토피아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미술에서 ‘장소특정성’이라는 개념은 다양한 의미로 바뀌어 왔지만 대체로 모더니즘 미술 특유의 물리적 경직성과 공간적 폐쇄성을 극복하는 예술에 적용되어 왔다. 그런데 이미 어느 정도의 가변성을 본성으로 하고 이제는 극장을 벗어나는 것도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공연예술에 작가는 왜 이 개념을 적용한 것일까? 그는 아마도 기성 미술에서 일으킨 파장, 혹은 파장에 대한 열망과는 다른 뜻이 있었으리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실제로 퍼포머들은 그곳에 늘 있었음직한 아이들의 놀이, 연인들의 몸짓, 오래도록 반복한 일상적 동작들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냈고, 때로 그 장소들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 동작을 통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상상하게 했다. 따라서 이 프로젝트가 지향하는 장소특정성은 매체적 유연성에 대한 문제제기라기보다는 권미원이 말한 좀 더 폭넓은 문화적 매개에 가까워보인다. 즉 “장소특정성을 도시 생활과 도시 공간을 조직하는 좀 더 폭넓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과정들에 대한 문화적 매개로 재구성”1)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넓은 의미로 이해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남는 의문이 있는데, 그것은 최근 장안평 자동차부품 상가에서 이루어진 공연이 서울시의 도시재생 프로젝트와 맞물려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시의 도시재생은 기존의 개발논리와 크게 다를 바 없이 기억과 삶을 무차별적으로 삭제한다는 비판에 직면해있는데, 사라져가는 동작과 기억에 대한 애틋함을 감추지 못하는 이 공연은 개발의 논리 ‘안’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 자주 등장하는 복고풍의 의상들은 아름답지만, 그런 아름다움이 사라짐을 기정사실화 하고 낭만화 하는 것은 아닌가? 행정이 독단적으로 도시의 기억을 삭제하는 장면을 예술가는 이렇게 그저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퍼포먼스의 중요한 재료로 무용수의 동작과 음악과 의상 외에도 장소의 맥락을 들 수 있다면, 그 장소에서 동작이 일으키는 정서가 타당한가라는 의심은 필수적이다. 더구나 미술에서 장소특정성은 자주 행정 미술에 의해 오남용되었다는 비판을 받아왔음을 고려한다면, 이 공연이 좀 더 날 선 문제제기를 했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계속 맴돈다.
〈풍정.각〉은 어느덧 11편이나 만들어졌고 ‘댄스필름’으로 기록되고 상영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드물게 긴 호흡으로 지속되는 프로젝트이다 보니 공연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방식의 다양한 고민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1편의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에서 카메라의 위치는 비교적 고정되어 있지만, 손으로 들고 있는 듯 화면이 조금씩 흔들린다. 그리고 한옥 마당에서 흙 위에 기하학적 모양을 만드는 움직임은 다분히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Anne Teresa,Baroness De Keersmaeker)의 유명한 뉴욕현대미술관 공연을 연상시키지만, 영상에는 그 모양을 강조할 조감 샷은 없고 오로지 관객의 수평적 눈높이에서 자연스럽게 찍은 장면만 있다. 사운드 역시 기타 연주에 현장의 소음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 이때만 해도 작가는 ‘댄스필름’이라는 장르를 의식하고 촬영했다기보다는 공연에 대한 충실한 기록을 남기고 싶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태원에서 진행한 2편에서부터는 위에서 수직으로 내려다본 조감 샷이 더해져 영상은 2채널이 되고 공연 엔딩에서도 카메라는 건물입구 위 작은 사각형의 공간에 몸을 꼭 맞춘 듯 모로 누운 인물을 포착한다. 음악에는 여전히 현장의 소음이 섞여 있고, 카메라의 움직임도 크지 않아 퍼포먼스 현장 기록에 가까워 보이지만, 영상은 다시점에서 촬영되어 한 관객이 동시에 볼 수 없는 장면들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서울도서관에서 촬영한 제3편에서도 현장 사운드와 정적인 카메라는 유지되지만, 제4편의 영상은 크게 달라진다. 현장의 소음이 사라졌고, 카메라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때로는 무용수들을 행인들처럼 구경하고 지나간다. 영상 끝부분에는 심지어 이들을 바라보는 카메라를 든 인물이 카메라 앞에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달라진 것은 영상의 역동성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이전 영상에서는 카메라가 신체의 동작을 포착하면 공간은 배경처럼 보인 반면 이 영상에서는 간간이 공간이 주인공이 되고 신체가 그 공간의 모양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처럼 기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자유롭게 움직이는 카메라의 프레이밍 덕분이다. 낙원상가에서 촬영된 제6편에서는 조감으로 내려다보는 카메라 프레임 안에는 건물의 여러 층이 모두 들어와 있고 각 층의 공간에 신체가 들어가 있다. 이런 구성으로 인해 장소는 바라보는 평면이 아니라 훨씬 복잡한 입체적 구조가 되고, 카메라는 그 복잡한 공간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묶어준다.
그런데 〈풍정. 각〉 시리즈가 계속 제작될수록 이런 카메라의 역동성과 공간 구조의 변화 외에도, 새로이 도드라지기 시작한 영상의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텍스트이다. 이미 제4편(〈골목낭독회〉)에서도 ‘주인공’이라고 특정할 수 있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가 선명해졌으며, 거의 대부분의 영상 곳곳에서 춤을 통해 그곳에서 있었음직한 사라진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드는 서사적 장치들은 발견된다. 하지만 서울 청파동을 중심으로 한 여덟 번째 작품(〈풍정. 각 푸른 고개가 있는 동네〉)과 돈의문 박물관 마을에서 촬영된 아홉 번째 작품(〈풍정. 각 리얼타운〉)에서는 서사적 기능으로 제한되지 않는 전혀 다른 종류의 텍스트들이 등장한다. 돈의문 박물관 마을에서는 행정기관의 주도하에 개발된 공간에 홍보를 위해 흔히 부여하는 ‘키워드’라는 희한한 텍스트를 통해 그 공간이 얼마나 삶과 멀어졌는지를 질문하려고 했으며, 청파동에서는 최승자 시인의 〈청파동을 기억하는가〉에서 언어로 이미지화된 ‘사라진 감각’을 영상에 담으려고 시도했다. 그 시도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든 간에 일반적인 서사(스토리)가 아닌 성격의 텍스트가 한 요소로 개입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공연을 기록한 영상에서 제아무리 생생하게 기록한다 하더라도 바라보는 신체와 보여지는 신체가 한 공간 안에 있을 때 발생하는 감각을 온전히 담을 수 없기 때문에 흔히 그것을 보완할 장치들을 찾음으로써 영상을 독립된 작품으로 만들곤 한다. 그런데 대부분은 그 현장감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일반적인 영상의 편집 기법으로 마치 현장에 있는 듯한 ‘착각’의 힘을 빌리려 한다. 하지만 〈풍정.각〉의 텍스트의 경우에는 그런 착각을 유도하기보다는 몸짓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감각을 텍스트의 힘을 빌어 좀더 명징하게 유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그래서인지 청파동 작품에서는 관객들로 하여금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유발하는 것을 애초에 내려놓고 ‘그들의 공간’임을 오히려 명확히 인지하게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영선과 홍석이 몸짓을 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그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쫓아다니는 한 무리의 사람들, 혹은 귀신들이며, 영상을 바라보는 관객은 그 뒤편에서 그들의 뒷모습과 함께 몸짓의 장면을 본다.
〈풍정.각〉에는 소위 전문 무용수와 비전문 무용수들이 뒤섞여 등장한다. 그들의 신체나 동작은 서로 어느 정도 구분되기는 하지만 공연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공존하면서 서로 다른 종류의 상상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면 비전문 무용수들의 일상적 동작들은 오래된 공간에 있었음직한 신체들의 동작들, 그들의 이야기들을 상상하게하고 무용 공연에서 자신도 모르게 신체의 아름다움에만 집중하는 관성을 벗어나게 해준다. 밀도가 그리 높지 않은 그들의 동작은 때로 전시장 퍼포먼스에서 흔히 나타나는 ‘티노 세갈(Tino Sehgal)’효과처럼 낯섦이 모든 다른 감정을 뒤덮어 버리는 것을 막아주기도 한다. 반면 무용수들의 아름답지만 생경하고 힘이 들어간 동작들은 일상적 공간들을 오히려 낯선 무대로 만들어 장면들에 특이점들을 만들어준다. 그것은 낙원상가나 장안평자동차 부품 상가처럼 일상적이지만 드라마틱하고 여러 겹의 레이어를 가진 독특한 기하학적 공간에서 익숙함과 낯섦 사이의 그 어디쯤에서 관객들에게 붙잡을 것과 그냥 스며들 것을 고르게 제공하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질적인 퍼포머들이 어우러진 이 공연에서 다른 협업의 요소들이 여전히 전형성을 만들어내는 것도 사실이다. 신체와 함께 공간을 채우기보다는 여전히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멜로디가 강한 배경음악 등은 때로 이 댄스필름들을 독립된 영상 작품이라기보다는 정성 들여 만든 공연 홍보 영상처럼 보이게 할 때도 있다. 8편의 공연들을 짧게 잘라 이어 붙인 축약 영상에 제4편에 사용된 음악이 재사용된 것이 조금도 이질적이지 않은 것은 그 음악이 애초부터 작품의 일부라기보다는 영상에 ‘덧붙여져’있었음을 반증한다. 물론 음악이 분위기가 되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다만 그것이 좀 더 넓은 의미의 사운드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이 자극될 뿐이다.
〈풍정.각〉은 아름답다. 때로는 모던함을 지닌 복고풍 의상처럼, 때로는 아련하지만 낯선 옛 영화처럼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의 지속도 놀랍다. 그런데 그 지속을 따라가다 보면 어쩐지 아름답지 않은 무언가를 자꾸 기대하게 된다. 우리가 사는 이 도시는 낭만화하기에는 너무 많은 폭력적 말살과 망각으로 가득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1)권미원, 『장소 특정적 미술』, 김인규 우정아 이영욱 옮김, (서울: 현실문화, 2013,) 22쪽.
안소현은 전시를 만들고 글을 쓴다. 비평의 가능성을 넓히되 여파 없는 글을 피하려 한다. 정치적이 되는 형태에 관심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