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송주호 - par‖ergon –예술로 예술의 틀을 넘다

posted 2021.12.08


〈언 강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서울〉 공연, 90분,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언 강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서울)〉 공연, 90분,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예술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예술은 인류가 자신의 죽음 너머의 어떤 것을 생각하면서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자신을 파괴하는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신과 직면한 순간, 인간은 동시에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자신이 되기를 열망했다. 그때부터 그는 눈앞의 돌과 나무에서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느끼려 했고, 덧없이 스쳐 가는 것들에서 영원한 무엇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돌과 나무 등을 이용한 형상으로, 동굴 벽에 새겨 넣은 선들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일종의 시각적인 카타르시스라고 할까. 재현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지속적 거래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차츰 넘어서게 되면서 인간은 예술을 자기의 욕망을 온전히 드러내는 하나의 수단으로 대하기 시작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보이지 않는 것 너머도 스스로 통제하고 소환할 수 있다는 저 합리적 이성이 정점을 찍었던 때는 곧 예술의 언어가 화려한 수사와 더불어 욕망의 정점을 찍은 때이기도 하다.


시각예술과 영화, 연극, 무용 등 소위 어느 장르에 속하지 않는 송주호는 그만의 타자적 감각으로 이러한 예술, 예술하기 전반에 대해 질문한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예술가로 살고 있는 자신을 반성하면서 이후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그의 현재는 아직 뭔가를 이루지 못한 어떤 미완의 부족함이라기보다, 어디로든 더 닿을 수 있고 무엇으로든 더 채워질 수 있는 열린 가능성의 상태다.


〈언 강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서울)〉 공연, 90분,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언 강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서울)〉 공연, 90분,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그는 이 일련의 질문을 대개 자신의 무대 위에서 직접 수행한다. 어떤 매개 없이 작가 송주호로 노출된 몸은 어떤 상징적 기호도 아니다. 슬랩스틱 코미디와 유사하게 모든 예술적인 것, 연극적인 것을 의도적으로 비틀거나 지우고 움직이는 그 몸은 그 자체가 예술에 대한 모든 화두를 구현하는 몸이다. 모든 예술을 의심하는 몸이자, 아직 도래하지 않은 예술을 열망하는 몸이며, 때로는 그 열망과 대면하고 불안하게 흔들리면서 그것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몸이다.


〈밤의 아름다운 소설(성미산마을극장, 서울)〉 공연, 60분,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밤의 아름다운 소설(성미산마을극장, 서울)〉 공연, 60분,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틀에 맞서는, 틀을 넘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모든 담론이 그러하듯,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예술 또한 이상적 실재와 현실의 경계 사이에서, 이쪽과 저쪽을 번갈아 살피며 실재라는 거울을 통해 자기만의 언어로 현실의 틀을 구성해왔다. 이때 틀 또는 프레임을 의미하는 파레르곤(parergon)은 인간 고유의 활동, 행위, 일, 기능을 지칭하는 ‘에르곤(ergon)’에 ‘주변’을 뜻하는 ‘파라(para)’가 덧붙여진 것이다. 그것은 안과 밖, 즉 그림인 것과 그림 아닌 것을 가르는 경계로써, 칸트가 이것을 작품, 즉 에르곤의 아름다움과 절대성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일종의 장치, 장식이라 이야기했던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밤의 아름다운 소설(성미산마을극장, 서울)〉 공연, 60분,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밤의 아름다운 소설(성미산마을극장, 서울)〉 공연, 60분,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하지만 독일의 철학자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은 칸트의 이런 생각을 반박한다. 1902년 그림의 액자에 대해 쓴 에세이에서, 그는 이 파레르곤은 자기 안의 것(예술)은 가능한 한 완벽한 것으로 이상화하려하고, 그에 비해 자기 바깥의 것은 전혀 예술적이지 않은, 부족하고 부정적인 것으로 규정해 배제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 양면적이고 이중적인 경계짓기로 인해 오히려 예술은 틀 안에 하나의 섬처럼 고립되게 된다는 것이다. 유리 로트만(Jurij Lotman)이란 사람은 그림의 틀에 대한 짐멜의 이러한 생각을 문학 텍스트의 틀로 옮겨와 해석과 수용의 차원에서 한층 더 발전시킨다. 그에 따르면 문학 텍스트의 틀은 텍스트와 텍스트가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경계를 만든다. 그에게도 틀은 틀 바깥에 대해 거리를 두는, 차별화하는 배제와 부각의 몸짓으로 결국 틀 안을 결국 폐적인 작품 공간으로 만든다. 2015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는 송주호의 작업 역시 모든 예술임 직한 담론을 구성해온, 구성하는 ‘틀(para-)’을 건드려 그 안의 ‘작품(ergon)’의 정체에 대해질문한다. 실제로 그는 테이프를 가지고 무대 바닥에 사각의 틀을 만들기도 하고, 어느 순간엔 테이프를 떼어 틀을 없애버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퍼포머들이 바닥에 사각으로 표시된 틀 위를 비틀거리면서 천천히 움직이기도 한다. 틀 안은 송주호 자신의 작업을 포함해 모든 예술이 전시되는 영역이지만 동시에 가두는 영역이며, 고립되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 허물고 다시 만들어야 할 영역이다. 〈퍼포먼스 연대기〉(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2017)는 지금까지 극장 안에 만들어진 모든 틀의 역사에 대한 연대기이기도 하다. 처음 공연이 시작되면 극장 안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는 행위를 하는 자와 그것을 구경하는 자의 경계가 없다. 보고 보는 행위를 따로 나누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 모두 시선을 나누고 인사하며, 여기저기 자유롭게 모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공간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이동한다. 하지만 이후 1시간 50여분 동안 12개의 사각 패널이 어떤 구도로, 어떤 자리에 위치하는가에 따라 극장의 공간성은 확연히 달라진다. 관객의 이동경로는 물론이고 시선의 방향에 변화가 생긴다. 극장 안에서 이뤄지는 행위는 보여주는 행위와 보는 행위로 명확히 구분되고,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위계가 예술의 옷을 입고 관객의 시선 안에 무겁게 자리 잡는다. 이처럼 극장 안에 그어진 무대와 객석의 경계, 배우와 관객의 뛰어 넘을 수 없는 경계에 대한 유희적 비틀기는 이미 〈응원세포〉(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2016)에서도 발견된다. 객석의 위치를 임의로 정한 뒤 채찍을 휘두르며 관객들을 몰아대는 이 퍼포먼스 역시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극장 안에서 이제까지 수행된 권위적 위계의 실체를 현시한다. 〈언 강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2018)은 극장 바깥과 극장 안의 경계인 극장 로비 자체를 중심에 놓는다. 그리고 예술의 환영과 현실의 가혹한 간극에 대해, 자기 틀 안에 갇힌 세상의 모든 연극에 대해 무심한 척 냉소를 날린다.


파레르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예술을 경직시켰던 틀. 송주호의 작업 안에서 종종 다양한 형태의 펜스와 함께 밧줄과 도끼, 삽 같은 도구가 사용되는 것 역시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가로놓여지는 틀들과 이 틀을 깨고 넘어서려는 작가의 의지이자 자기 질문을 동시에 시각화한다고 볼 수 있다.


〈관 짜기 모임(인천아트플랫폼, 인천)〉, 공연, 60분,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관 짜기 모임(인천아트플랫폼, 인천)〉, 공연, 60분,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두 개의 세계, 열망과 불안 사이
한편, 송주호의 이 무대에는 늘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하면서 서로 부딪힌다. 닿고자 하는 세상과 지금 여기의 현재(〈금지된 계획〉(문래예술공장 박스씨어터, 2018)), 이미 오래전에 기억 속에서 사라진 세상과 현재(〈하얗게 질리기 전에〉(남산예술센터, 2018)), 어마어마하게 팽창하는 세상과 역시 어마어마한 미래에 대한 호들갑스런 열망, 그 앞에 선 송주호 자신(〈계속해서 팽창하는 우주를 따라 커지는 지루함〉(서울무용센터, 2015)), 송주호의 예술적 자아와 인간 송주호(〈밝은 곳에 나홀로〉(문래예술공장 박스씨어터, 2016)).


〈관 짜기 모임(인천아트플랫폼, 인천)〉, 공연, 60분,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관 짜기 모임(인천아트플랫폼, 인천)〉, 공연, 60분,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그는 분명 하나의 근원에서 갈라진 두 세계의 간극을 지극히 불완전한, 그리고 어쩌면 의도적으로 모든 예술임직한 수사를 걷어내고 미숙함을 강조한 무대 이미지로 시각화한다. 얇은 종이로 만들어져 고정된 듯하지만 조그만 외부의 압력에도 쉽게 무너져버리는 의자와 소파, 문이 그렇고(〈밝은 곳에 나홀로〉), 사실성을 추구했다지만 염치없다 싶을 정도로 조악한 나무와 풀, 돌 등의 모형물로 채워진 예술가들의 언덕이 또 그렇다(〈금지된 계획〉). 의당 있어야 하고 마땅히 보여야 할 방식이 존재하지 않는 부재(不在)의 공간이다. 이 부재는 어쩌면 그 자신도 자유롭지 않은 세상이 모든 예술적 수사들에 대한 송주호의 의도된 지우기이며, 쉽게 좁혀지지 않는 실재에 대한 열망과 현재, 그래서 열려 있는 가능성 및 그 안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새롭게 써보고자 하는 의지의 공간화이다.


〈관 짜기 모임(인천아트플랫폼, 인천)〉, 공연, 60분,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관 짜기 모임(인천아트플랫폼, 인천)〉, 공연, 60분,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예술과 예술하는 자신에 대해 던진 질문은 2015년부터 2019년 현재까지 진행된 그의 작업 안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그의 작업은 한 편의 압축된 공연사이자, 메타비평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는 그 질문을 안고 극장 밖을 바라볼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지금까지 모든 예술의 동력은 중심이 아니라 스스로 주변, 타자가 되기를 선택한 예술, 예술가들로부터 생겨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제 그가 지금/여기 우리의 예술에 그러한 동력이 되어 줄 때다. 예술로 예술의 틀을 넘고자 했다면 이제 그 틀을 넘어 현실로 들어가 그 안에 산재하는 무수한 틀을 건드리는 송주호를 기대한다.


※ 이 원고는 『2019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프로그램 결과보고 도록』에 수록된 것으로, 저작권자의 동의 아래 게재하는 글입니다.

이경미

이경미는 연극학자이자 연극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독어독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독일
뒤셀도르프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연극성’에 대한 질문을 바탕으로, 공연예술이 장르의 기존 경계를 넘을 때 발생하는 ‘사이의 미학’을 인문학과 연계해 연구하고 있다. 때때로 드라마투르그로 활동하며 이론과 현장의 접점을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