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헵타포드들은 자유롭지 않지만 속박당한 것도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이 개념들을 이해하는 방식으로는 그렇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무력한 자동인형인 것도 아니다. 헵타포드의 의식 양태를 특이하게 만드는 것은 단지 그들의 행위가 역사상의 사건과 일치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의 동기 또한 역사의 목적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들은 미래를 창출해내고, 연대기를 실연해 보이기 위해 행동한다.”2)
테드 창(Ted Chiang)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영화 〈컨택트(Arrival)〉에는 7개의 촉수가 달린 외계 생명체 ‘헵타포드(heptapod)’가 등장한다. 외계인과 소통하기 위해 투입된 언어학자 루이스는 이들과 소통을 하면서 점점 사고의 변화를 겪는다. 헵타포드의 언어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한다. 인간의 언어가 선형적인 반면 이들의 언어는 비선형적이라는 것.
언어학자인 사피어(Edward Sapir)와 워프(Benjamin Whorf)는 시간 구분이 뚜렷한 유럽 언어와 달리 시제가 분명하지 않은 호피족의 언어를 연구한 뒤에 “언어는 인간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라고 말했다. 루이스는 이 ‘사피어 워프 가설’처럼 헵타포드와 만남을 지속하면서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게 된다. ‘헵타포드’에게 던지는 인간들의 첫 번째 질문은 “당신들 여기 왜 왔나요?”였다. 루이스는 헵타포드에게 인간의 존재를 인식시키기 위해 ‘Human(인간)’이라는 단어를 보여준다. 헵타포드는 루이스가 그저 ‘Human’이었다가 루이스라는 개별적인 이름을 익힘으로써 친구가 되고, 인간 하나하나의 개별성을 인지해나간다.
루이스는 비선형의 시간을 인식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본다. 개인의 인생은 원형으로 귀결된다는 것, 보이지 않는 이 질서 위에 던져져 있다는 것. 루이스는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어떻게 흘러갈지 알면서도, 난 모든 걸 껴안을 거야.....”, “처음과 끝은 나에게 더이상 무의미하다”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빅 퀘스천’을 던져준 헵타포드식 사고는 윤성필이 오랫동안 천착해온 ‘대단위의 규칙. 우주는 하나의 유닛이며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과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
인천아트플랫폼 창고갤러리에서 선보인 전시 《불합리한 인식》(2019)은 레지던시 프로그램 ‘2019 입주 예술가 창·제작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윤성필은 그동안 조각, 설치, 키네틱아트, 페인팅을 통해 자신의 우주관과 세계관을 드러냈다. 이번 〈불합리한 인식〉 시리즈 작업도 우주관, 세계관 등의 거시적 관점에서부터 구체적 개인으로 넘어가는 미시적 관점으로의 전환을 선보이는 전시다. 그는 “〈불합리한 인식〉엔 자타불이(自他不二)라는 부제를 달았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걸 사진매체를 통해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나에게 ‘자타불이’는 삶의 주제이다.”라고 말했다. 젤라틴 실버프린트 위에 실크스크린을 접목한 겹치기 방식은 ‘순환’을 넘어,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다. 즉 ‘자타불이’를 시각화한 것이다. 그에게 겹쳐지고, 얽히고, 합쳐지는 과정은 곧 나와 나의 관계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다양한 인물 사진을 이용해 작가 자신과 타인의 혼재된 상황을 연출하는 방식을 활용했다. 흑백 인화를 이용해 이미지를 구현해내고, 탈색 후 실크스크린을 이용해 다른 이의 인물 이미지를 중첩시켰다. 이처럼 대상체의 은 입자 정보가 바탕이 되어 다른 대상체의 이미지가 구현될 수 있는 이중구조로 쌓아 올렸다. 전통적인 조각을 하지 않고도 마치 조각의 개념을 실현시키듯이.
이번 사진 작업은 전작 〈정중동〉 시리즈, 철가루와 자석을 활용한 평면작업 〈Chaos, Cosmos and Circulation〉 시리즈와 궤적을 같이한다. 모든 것에는 움직임이 있고 정해진 규칙이 있다. 그 시발점은 또한 우주의 원리다. 철학과 물리학을 길로 삼는데 양자역학은 그의 꾸준한 관심사였다. 평면작업 시리즈에는 철가루와 자석이 등장한다. 캔버스 뒷면에서 원을 그리며 자석을 돌리고, 앞면에는 이 자기력을 따라 흔적을 남긴 철가루의 이동을 포착하는 것이다. 두 시간의 회전 뒤, 캔버스 위에는 철가루의 경로가 원을 그리며 남게 되는데 철가루가 남긴 회화다.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은 순환한다’라는 주제는 주로 곡선과 원으로 표현되고 있다. “모든 것은 움직입니다. 그리고 순환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 우주를 돌고 도는 윤회의 영역으로 보았습니다.” 움직임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사람이 작품 앞에 서면 센서가 작동하고 작품 뒤의 자석은 꼭짓점을 중심으로 뱅글뱅글 돌도록 했다.
전시 《불합리한 인식》에는 인물 초상이 등장한다. 그동안 ‘질서에 대한 상상’이 처음으로 인물을 선택한 작업이다. 윤성필 자신의 자화상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 겹쳐진 인물들은 그가 아니다. 인터넷에서 무작위로 검색한 얼굴 위에 자신의 얼굴을 겹쳐놓았지만, 우리는 그의 얼굴이라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불합리한 인식 SG-03〉). 인터넷에서 추출한 인물들의 얼굴을 겹쳐놓은 〈불합리한 인식 BS-01〉은 개개인의 개별성은 사라지고 우리에게 ‘사람의 얼굴’이라는 단순한 정보만 남긴다. 마치 텅 빈 것처럼 보이지만 옆으로 슬쩍 비켜서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일명 ‘하얀 초상’으로 불리는 〈불합리한 인식 WG-02〉에는 부처가 등장한다.
“‘불합리한 인식’이라는 표현은 ‘하얀 초상’시리즈처럼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는 데 정보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데, 깨닫는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존재한다. 인식한다’라는 뜻으로 썼다.”
〈불합리한 인식 BS-01〉, 〈불합리한 인식 BS-02〉 시리즈는 인터넷에서 고른 외국인 두 명의 사진을 합친 것이다. 깜깜한 어둠을 촬영하여 인화된 사진을 블리치(bleach) 시키면 백색으로 나온다. 다시 복원제로 밀어버리면 한 명의 이미지가 나오고 다른 이미지로 실크스크린으로 밀면 마치 부조처럼 다른 이미지가 나오는 것이다. 그는 데스마스크를 연상시키는 블랙의 초상 이미지를 통해 죽음을 드러내고 있다. 어릴 때부터 ‘죽음’자체를 두려워하기보다는 늘 ‘죽음 너머’의 세계가 궁금했었다고 한다. “죽음은 무엇인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이며 가장 자유로운 순간이라고 봐야 할 것 같아요. 제 분자나 원자는 다른 곳으로 갈 거잖아요. 정해진 루트라고 생각해요." '검은 초상'은 일종의 파괴된 질서를 드러내려고 했다. 그는 죽음의 의미를 "나에게 이 상태는 일종의 질서가 파괴된 상태라고 생각한다. '죽었다'도 일종의 규칙이다. 순환의 상태인데 순환의 질서가 혼돈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고, 질서를 재조합하기 위한 전 단계이며 순환의 고리 안에 있는 한 요소이다. 어둠은 체계를 갖추기 위한 자유로운 상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검은 초상'에서는 바로 이 자유의 상태를 포착하고 있다.
1851년 만국박람회 개최를 앞둔 시점에 사진은 '정확성'을 갖추고서 시간-공간을 '포착할'수 있었다. 순간성은 이후 20년간 탐구 대상이 되었다. 또 사진 이미지의 대중화를 위한 '복제 가능성‘에 대한 연구도 열리던 때였다. 윤성필의 초상사진은 초기 사진이 발명되었을 때부터 시작된 실험을 떠올리게 만든다. 니에프스(Joseph Nicéhore Niepce, 1765-1833)는 임시변통으로 제작한 암상자로 자연경관을 건진 그때를 관점 ’points de vue‘라고 불렀다. 윤성필은 마치 사진을 통해 이미지와 씨름하고 있는 초기 사진의 발명가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사진은 재현이라기보다는 환상과 상상의 이미지, 내면의 이미지를 드러낸다는 면에서 이데아(idea)이다. 이데아의 어원은 ’idein‘에서 유래했는데 ’본다‘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보는 것을 보게 하는 환영 이미지를 통해 윤성필은 시각적으로 본다는 것에 ’깨달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시선을 담고 싶어 했다.
사실 그의 ‘하얀 초상’, ‘검은 초상’작업에서 소재로 쓰인 인물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얼굴은 단지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소재로 쓰였을 뿐이다. 그 자신이건, 부처이건, 혹은 무명의 인물이건 블리치가 되면 모두 같은 상태인 것이 중요하다. 희끄무레한 이미지로 남는 순간 우린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드러나는 이미지는 우리가 시각화시키고 의미를 덧붙인 것이지 ‘인간’으로는 같은 존재다. 마치 영화 〈컨택트〉의 헵타포드가 처음 ‘인간’이라는 존재를 인식했듯이 말이다.
1)제목 ‘처음과 끝은 나에게 더 이상 무의미하다’는 감독 드니 뵐뇌브(Denis Villeneuve)의 영화 〈컨택트(Arrival)〉(2016)에서 주인공 ‘루이스(Louise)’의 대사이다.
2)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김상훈 옮김(엘리, 2016), 208쪽.
천수림은 월간 『사진예술』 편집장, 《2017~2018서울사진축제》(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프로그램 디렉터를 지냈다. 현재 큐레토리얼 콜렉티브 ‘멜팅포트’의 디렉터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