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차승언 -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posted 2021.12.13


스스로 (참조적) “직조회화”1)라 부르는 차승언의 작업에 대해, 나는 다뤄지지 않은 다른 사유의 경로에서 서사의 변형을 제안해 본다. 이 서사의 변형을 (굳이) 재맥락화로 이해해도 상관은 없다. 예컨대, 차승언의 직조회화의 육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필 때, 내가 제안하는 서술의 방향성은 그것의 현현이 갖는 당대적 의미-형상에 대한 즉각적인 믿음과 관련해서-로부터 그것의 본성을 증명하기보다는 그것의 본성이 갖는 조건적 의미로부터 그것의 (당대적) 현현이 함의하는 당위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직조회화로 환원되는 매체와 기법과 형식 등의 본성을 짜 맞춰 추리는데 연연하지 않고 도리어 매체와 기법과 형식의 본성[*본성이라는 단어의 위험성을 감수하면서]이 직조회화의 출현과 그것의 소명을 증거하는데 몰두해 보려는 것이다. 이때 나는 직조회화를 둘로 분리함과 동시에 동등한 하나로 일체화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잠정적으로 서로 연합한 두 개의 낱말 사이에 연결부호(-)를 끼워 넣기로 했다. 표기는 “직조-회화”로 한다.


〈그라데이션얼룩-1〉, (세부), 면사, 합성사, 염료, 146×97cm (3),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그라데이션얼룩-1〉, (세부), 면사, 합성사, 염료, 146×97cm (3),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차승언의 작업은 보통 직조기를 이용한 수공의 직조 행위로 이루어진다. 이때 그에게 일련의 직조 행위는 출발부터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듯한데, 대개 캔버스 틀과 결합하기 위한 조건 안에서 가장자리의 경계를 선명하게 인식하며 화면을 구축한다. 예컨대, 참조적 직조회화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렸던 〈Agnes- Patch〉(2012)로부터 감싸고 있는 캔버스 틀을 노골적으로 “흉내 낸”〈Frame12P-1〉(2012)을 거쳐 〈Twill97cmFrame〉(2013) 등의 제작 방식을 스스로 연구하여 찾아내면서, 차승언은 수공으로 짠 직물과 규격화된 캔버스 틀의 결합 조건을 필연적인 것으로 전제하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간혹 강력한 수공의 효과가 태피스트리를 연상시키는 장식적 직물 공예의 면모를 크게 부각시키다가도, 최종적으로 직물 자체로 펼쳐 놓이는 상황에서 벗어나 캔버스 틀의 견고한 지탱에 힘입어 중력에 의한 직물의 수직적 무게나 공간성을 띠는 직물의 양면적 질감이 일시 상쇄된 순수한 시각적 몰입을 강화시킨다. 모더니즘 추상회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차승언의 “직조-회화”에서 그러한 몰입은 끝까지 지속되지 못하고 금세 도전을 받게 되는데, 이는 직물 뒤로 마치 전통 창호 틀처럼 반투명하게 비치는 프레임의 격자무늬나 혹은 때때로 미완처럼 보이는 (일정하게) 성근 직물 뒤로 드러나 있는 캔버스 틀의 일부 때문이다. 이처럼 계획적으로 “누락된 직조 행위”의 부분적인 개입이 몰입을 방해하는 시각적 소외를 이끌기도 한다. 이러한 연쇄적인 교차가 만들어내는 시각적 긴장은 거의 예외를 두지 않고 ‘이 실체가 과연 무엇인가?’하는 물음에 닿게 되는데, 차승언은 이미 그것을 “직조회화”라 명명하여 부르고 있다.


〈여섯 개의 일〉, 면사, 폴리에스테르 얀, 염료, 227×97cm (6), 2019. 《벽걸이들》(021갤러리, 대구, 2019) 설치 전경.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여섯 개의 일〉, 면사, 폴리에스테르 얀, 염료, 227×97cm (6), 2019. 《벽걸이들》(021갤러리, 대구, 2019) 설치 전경.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여기서 나는, “직조라는 기법에 의해 만들어진 회화”로 이해되기 십상인 이 단단한 합성어의 위계적 의미를 다시 헐겁게 풀어 놓기 위해 직조-회화라는 수평적 결합의 함의를 강조해 보기로 했다. 이는 둘의 결합에서 느닷없이 발생하는 과거의 계시와 현재의 표적 간의 수정과 갱신을 간간히 목격하며 짐작만 해오다가, 어느 순간 마음에서 일어난 어떤 믿음에 대해 설명해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둘 사이의 (구분이 명확하지만은 않은) 초월적 자율성과 세속적 성취라는 상이한 본성에 대해 서로가 그 위상의 참조적 갱신을 시도하는, 비유적으로 다소 개혁에 바탕을 둔 신학적 사고를 동반할 수 있다. 초월적인 서사가 계시했던 구원의 실체가 세속적 현실 공간에서 급진적으로 성취되었고 또다시 도래할 것이라는 신학적 사유를 힘입어, 자율적 존재로서의 회화에 대한 “오래된 현대성”의 신념과 그것의 세속적 해방을 도모하는 공예의 실천적 직조 기법에 깃든 이질적인 둘 간의 본질적 일체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는 직조와 회화라는 기법과 형식의 결합을 통해 공예와 회화의 상호 재인식의 가능성을 새로운 서사적 변형 안에서 가늠해 보는 일이다. 직물에 얼룩처럼 깃들어 있는 손의 노동은 차승언의 직조-회화에서 좀처럼 강도를 세게 하여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이 만약 어떤 지지체도 없이 홀로 눈앞의 공간에 펼쳐 놓아졌더라면 상황은 또 달랐을 텐데, 규격화된 캔버스 틀에 힘입어 팽팽하게 당겨진 직물의 표면에서 지난한 노동의 과정은 일련의 회화적으로 성취된 결과에 압도당하고 만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고, 그러한 (사라진 노동에 대한) 착시는 규범과 율법에 기대어 놓은 엄격한 마음에 불행한 의심을 한껏 키워간다. 훈련된 어떤 신체의 반복적인 노동이 그것의 집약을 통하여 성취하게 될 스스로의 숭고한 본성과, 반대로 초월적 숭고로 정의된 바 있는 존재 안에 신화적으로 도포된 노동의 흔적이 비로소 현전하게 될 때, 불순한 의심은 놀라운 은총 가운데 믿음의 갱신을 돕게 된다.


〈처ㅓㅓㅓㅓㄴ-6(부분)〉, 면사, 합성사, 나무프레임, 147×194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처ㅓㅓㅓㅓㄴ-6(부분)〉, 면사, 합성사, 나무프레임, 147×194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누군가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지나치게 비약적인 비유라 생각할 수도 있을 테다. 나는 차승언의 직조-회화를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서사로, 신학적 사건을 또다시 비유로 설명하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친 예수에게 유대인들이 이를 문제 삼자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답변을 예수가 내놓음으로써 지상에서 하늘의 아버지와 같은 일을 행하고 있는 아들의 (동등한) 자격을 증거한다.2) 이때, 창조자의 거룩한 안식의 의미와 병 고침의 전능한 표적이, 세속의 육체적 노동(일)과 같은 차원에서 지지를 얻는다. 나아가 세 개의 서로 다른 위상이 긴밀하게 충돌하며 주고받는 각각의 본성이 일체화된 감각에 의해 새롭게 갱신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이 서사의 맥락을 재고하며 구조화한 데에는, 차승언의 직조-회화가 함의할 수 있는 서사적 참조성을 새로이 가늠해 보기 위함이다.


〈세 개의 일〉, 면사, 합성사, 염료, 194×97cm (3),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세 개의 일〉, 면사, 합성사, 염료, 194×97cm (3),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요컨대, 차승언의 직조-회화가 지닌 구조는 “직조”와 “회화”의 수평적 결합에 의해 양자 간의 개념과 실체를 갱신할 모종의 서사를 찾는다. 때문에, 그 결합의 맥락에서 추상회화와 직물공예는 자신의 본성에 대해 서로를 참조함으로써 갱신하며 증명하는 절차를 보여준다. 그것은 “노동”이라는 화두를 통해서 어떤 동등한 합의에 도달하는데, 마치 하늘과 안식일을 규정해온 율법적 초월성과 거룩함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하늘의 아버지와 세속에 육화되어 온 아들의 “일/노동”에 의해서 경험적이며 실체를 가진 것으로 갱신되었던 것과 같다. 이를테면, 차승언은 직조-회화에서 회화에 접근하기를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정신성을 표상하는 형상/형식을 참조하되 그것의 거룩함이 캔버스에 밀착해 서서 (그의 작가노트에 쓰여 있는 대로) 믿음과 계시와 직관과 또 우연과 시간을 검증할 신체의 “노동”에 의해 실체화된 것임을 알고자 했다.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 리처드 터틀(Richard Tuttle), 이우환, 이성자 등 국내외 추상 화가들을 참조하면서, 차승언은 그들에게서 강조된 지루한 반복적 움직임과 비현실적인 추상의 형태를 동등하게 일체화 한 현대의 회화적 사건을 일련의 신학적 사건과 견주며 세속적 신체의 “노동”이 도달하게 될 거룩한 정신성을 동등한 자리로 옮겨다 놓은 셈이다.


〈능직얼룩H1~9〉, 면사, 폴리에스테르 얀, 염료, 450×97cm (9), 2019. 《흐트흐트 위반의 기술》(인천아트플랫폼 창고갤러리, 인천, 2019) 설치 전경.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능직얼룩H1~9〉, 면사, 폴리에스테르 얀, 염료, 450×97cm (9), 2019. 《흐트흐트 위반의 기술》(인천아트플랫폼 창고갤러리, 인천, 2019) 설치 전경.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그렇다면, 직조-회화에서 회화를 참조한 직조 기법의 갱신은 또 어떤 소명으로 나아가는가를 살펴보자. 차승언은 추상회화 작가들의 반복적이고 지루한 노동을 통하여 정신적 구도의 경지에 다다르는 면면을 참조함으로써, 직조의 과정이 함축하고 있는 일련의 유사성을 숭고에 대한 참조적 전유로 끌고 갔다. 말하자면 이러한 것인데,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그의 아들로 동등한 자격을 지닌 예수의 세속에서의 일이 안식일의 거룩함을 결코 손상시키지 못함 같이 일련의 참조한 추상회화에서 노동에 의해 실체화된 정신성의 특징은 캔버스 틀과 결합하기 이전의 직물에서도 동일한 절차에 의해 도모된다. 초월적이고 숭고한 정신성이 지루한 반복적 노동을 전제로 믿음을 얻고 있으니, 또다시 직조의 과정에서 지루한 반복적 노동은 그것이 참조한 숭고의 실체에 의해 그것과 동등한 것으로 갱신되는 것이다. 이렇게 출현한 차승언의 “직조-회화”는 신학적 사유에 의해 둘의 수평적 결합과 지속적인 참조에 의한 제 본성의 갱신을 하나의 소명으로 삼아 그 믿음을 키워가고 있음을 짐작해 볼 수도 있겠다.


1)차승언은 2017년에 작성한 작가노트에서, ‘참조적 직조회화’라는 제목 아래 “한국과 서구의 근대 추상회화를 참조해서 직조의 방법으로 회화를 만든다”고 서술하였다.
2)이 내용은 성경의 요한복음 5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 이 원고는 『2019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프로그램 결과보고 도록』에 수록된 것으로, 저작권자의 동의 아래 게재하는 글입니다.

안소연 / 미술비평가

안소연은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한 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고 미술비평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동시대 미술의 현장에서 언어를 통한 이미지 사유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다. 현재 대학에서 미술사 및 미술이론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