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3040 추상회화 39인
-(1) 평면과 물성, 끝없는 대결

posted 2022.01.17

다시, 회화 특집을 꾸민다. 작년 12월호의 「회화, 변하고 있는가?」를 잇는 기획이다. 이번에는 ‘추상’을 키워드로 삼았다. ‘추상’이라는 용어가 애매해진 오늘날, 그러나 ‘추상’이라는 창작 현상은 엄연히 우리 앞에 존재한다. 그 추상을 회화의 이름으로 다시 불러낸다. 컨템퍼러리아트의 지형에서 회화는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지키고 있는가. 회화는 급변하는 시각 환경의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21세기 회화의 비평적 쟁점은 무엇인가? 과연 새로운 변화가 있는가? 3040세대의 젊은 회화는 이전 세대와 무엇이 다른가? 회화는 오늘의 ‘전지적 스마트폰’ 환경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가? 회화의 미래를 어떻게 볼 것인가? Art는 회화를 둘러싼 동시대적 물음을 던지고, 답하는 대형 특집을 꾸몄다. 첫째, 전문가 6인이 ‘추상’에 주목해 3040세대 중심의 회화 작가를 뽑았다. 고충환, 김용대, 안소연, 유진상, 임근준, 현시원 등이 작가 선정에 참여해줬다. 이들이 총 39명의 작가를 선정했다. 편집부는 선정 작가의 작품을 형식과 내용, 재료와 기법 등에 기초해 4개의 소주제로 나눠 작품 화보를 꾸몄다. ‘평면과 물성, 끝없는 대결’, ‘신추상, 메타-조형-실천’, ‘회화의 확산, 시간과 공간으로’, ‘표현의 경계 너머, 혼성의 숲’. 둘째, 동시대회화 담론을 주고받는 온라인 좌담을 마련했다. 김복기, 유진상, 임근준이 컨템퍼러리아트의 흐름을 짚고, 회화의 위상을 다각적으로 조망한다. 해외의 작품 사례와 함께 한국 젊은 작가들의 회화 동향을 면밀히 추적한다.

평면과 물성, 끝없는 대결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추상회화’라 일컬을 수 있으리라. 본디 재현적 회화의 환영성에 대한 완강한 부정에서 태동한 추상회화는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형식주의’ 비평을 후광 삼아 동시대미술의 왕좌를 차지했다. 그린버그는 칸트의 비판 철학을 중심축으로, 자기비판의 순수성을 모색하는 예술, 즉 자신의 물적 지지체인 캔버스 평면으로 환원하는 추상회화를 모더니즘 미술의 요체임을 역설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와 함께 그린버그의 형식주의 미학은 부정당했지만, 이후로도 현대미술 담론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평면’과 ‘물성’에 천착하는 추상회화는 아직도 막강한 파워를 발휘한다. 오늘날의 추상화가는 새로운 시대의 시각 매체와 조건을 수용해 ‘평면성’의 지평을 확장한다. 하태임의 알록달록 컬러밴드가 자아내는 율동감 넘치는 화면과 윤종주의 은은한 발색으로 고요한 긴장감을 전하는 색면 회화는 순수 추상의 계보를 잇는다. 정재철과 정석우는 인간의 욕망 이면의 강렬한 원초적 감정과 에너지를 힘찬 붓질과 두터운 마티에르로 아로새긴다. 한편 재료와 기법의 다변화로 현대적 추상성을 갱신하려는 시도도 있다. 윤상렬과 편대식은 각각 샤프펜슬과 연필을 주된 도구로 삼아 평면과의 지난하고 고독한 대결을 멈추지 않는다. 김이수는 석고 붕대, 아크릴 박스, 테이프 등 비회화적 재료로 모노톤의 ‘미세한 차이’의 풍경을 그려내고, 최선은 타액, 오물 등 유기물 재료를 활용한 추상화로 반-현대미술의 미학을 개척한다. 대상의 추상적 재현, 여타 미술 장르와의 혼융을 실험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후예도 눈에 띈다. 신수혁은 도시 건축물의 구조를 미세한 파동의 그리드 풍경으로 펼쳐내고, 샌정은 수묵화의 농담이 느껴지는 화면에 기하학적 도형의 결정체를 그려넣는다. 박종규는 디지털 환경의 ‘노이즈’ 사운드를 회화 문법으로 드러낸다.

최선〈개나리〉

최선〈개나리〉, 캔버스에 아크릴릭, 194×150cm, 2017,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최선 최선은 사회 문제를 도외시한 모더니즘 미술의 권위에 반발한다. 주로 타액, 오물, 바닷물 등 비천한 재료를 구사해 정통 추상회화를 전복한다. 부패되거나 휘발되는 재료는 예술의 영원성을 부정하고 현대미술의 환상을 벗긴다.〈개나리〉는 길거리의 토사물을 만개한 개나리로 표현해 ‘추’에 대한 인식을 재고하는 작품.

하태임〈Un Passage No.201018〉

하태임〈Un Passage No.201018〉, 캔버스에 아크릴릭, 162×130cm, 2020,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하태임 프랑스 유학 시절, 소통 문제에 대한 비언어적 화답으로 서로 다른 색상의 ‘컬러 밴드’를 자신의 핵심 조형 요소로 삼았다. 컬러 밴드를 겹겹이 칠해 색과 빛을 혼합하고, 율동적인 화면을 구성한다. “색띠의 ‘반복과 차이’는 자신만의 몸이 기억하는 ‘색 경험’이자, 음의 높낮이로 조화를 이룬 멜로디다.”

김이수〈앵프라맹스-풍경〉

김이수〈앵프라맹스-풍경〉, 아크릴판에 반투명 테이프, 아크릴릭, 80×60cm, 2017,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김이수 앵프라맹스(inframince)는 뒤샹이 창안한 개념으로 ‘미세한 차이’를 뜻한다. 김이수는 석고 붕대, 종이, 아크릴 박스, 테이프 등 다양한 재료로 앵프라맹스의 풍경을 천착해왔다. 그 모노톤 화면은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경계의 풍경이다. 바다나 대지 같은 대자연을 떠올린다.

윤종주〈Cherish The Time-Line(Blue)〉

윤종주〈Cherish The Time-Line(Blue)〉, 캔버스에 아크릴릭, 미디엄 각, 60×180cm, 2020,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윤종주 아크릴 물감을 수십 차례 밑칠한 캔버스에 안료를 섞은 미디엄을 부어 다채로운 공간감과 색채를 창출한다. 미묘한 뉘앙스의 색면 패널을 수직 수평으로 배열한다. ‘회화의 형식이 곧 내용이 되는’ 모더니즘 논리를 실험한다.

윤상렬〈Silence〉

윤상렬〈Silence〉, 종이, 아크릴에 샤프펜슬, 디지털 프린팅, 71.5×46.5cm, 2019 ,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윤상렬 〈Silence〉연작은 샤프펜슬로 그은 0.3~0.9mm 굵기의 무수한 선으로 완성된다. 예리하고 날카로운 ‘선’은 예술가의 삶에 대한 두려움을 은유한다. 완벽해 보이는 직선에도 한 줄 한 줄 그을 때마다 작가의 떨림이 녹아 있기 때문. 최근에는 종이에 손으로 그은 선 위에 다시 선을 디지털 프린트한 필름이나 아크릴 판을 얹혀, 세필의 효과를 증폭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를 교란한다.

편대식〈연경(鉛鏡)〉

편대식〈연경(鉛鏡)〉, 나무 패널에 연필 각 244×122cm 2019,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편대식 편대식은 연필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재료로 회화와 대결한다. 매끈한 나무 패널의 표면을 연필로 칠했다. 오랜 시간과 반복적인 노동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흑연 가루가 반짝이는 화면은 ‘시간의 물질적 변환’이라는 주제 의식을 반영한다. 작품은 커다란 ‘심연의 거울’인 듯 우뚝 서 있다. 최근에는 패널에 바닷물을 부어 소금 결정체로 이뤄진 회화를 발표하는 등 ‘시간의 흐름과 물성의 변화’라는 실험을 지속하고 있다.

재철〈Contradictory Boundary〉

정재철〈Contradictory Boundary〉, 캔버스에 유채, 162×112cm, 2019,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정재철 정재철은 인간 초상을 추상적으로 재현한다. 인간의 모순된 욕망이 낳은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에서 인간의 얼굴을 주목했다. 그 얼굴은 눈, 코, 입이 완전히 뭉개져 있다. 작가는 뭉개진 인간의 초상에서 원초적 감정을 찾는다.

정석우〈Organ Valley #16〉

정석우〈Organ Valley #16〉, 캔버스에 유채, 227.3×181.8cm, 2020,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정석우 정석우는 색채, 필치, 마티에르 같은 회화의 기본 조형을 구사해 혼돈의 화면을 조성한다. 그 혼돈은 오늘날에 존재하지 않는 ‘원시적 에너지’를 발산한다. 대형 회화 프로젝트〈Organ Valley〉는 유기체가 장기-근골격-피부 순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회화로 구성한다.

〈No.2016〉,〈No. 2014〉

신수혁 〈No.2016〉, 131×162cm, 〈No. 2014〉, 194×260cm 캔버스에 유채, 2019,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신수혁 신수혁은 활동 초기에 건물 외벽을 연필로 묘사한 단색조 회화를 제작했다. 이후 시야를 넓혀 도시의 일상 공간을 맑은 청색 물감으로 그리다, 최근에는 건축과 도시의 그리드 구조에 착안한 추상회화로 이행했다. 세필로 수직 수평의 선을 수없이 교차해 마치 실을 직조한 듯 보인다.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는 선은 연속과 단절, 있음과 없음의 균열을 은유한다.

샌정,〈무제〉

샌정,〈무제〉, 캔버스에 유채, 50×40cm, 2019,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샌정 독일 뒤셀도르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샌정. 그의 회화론은 ‘세계에 대한 생각의 흔적이 머무는 형식’이다. 캔버스에 유화로 작업하지만, 채색된 물감을 닦아 지워내는 ‘마이너스의 붓질’로 수묵화 같은 농담을 표현해낸다. 그의 회화엔 최소한의 선, 도형, 색상만으로 형성된 미묘한 리듬감이 울려 퍼진다. “샌정이 그려내는 회화는 모든 것을 무한히 받아들일 세계 (…) 보이지 않았던 다음의 세계를 여는 행위다.”(김성우)

박종규,〈~Kreuzen 2020〉

박종규,〈~Kreuzen 2020〉,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3×97cm, 2020,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박종규 박종규는 디지털 이미지의 기본 단위 픽셀의 점과 선으로 소리의 ‘노이즈’를 구현해왔다. 독일어로 ‘순항하다’는 뜻의 〈~Krugen〉시리즈는 디지털 환경에서 발생한 노이즈의 픽셀 이미지를 출력하고 그 위에 아크릴 물감을 정교하게 칠한 작업. 회화, 영상, 설치, 미디어 등 장르를 넘나들며 시각 중심주의적 모더니즘 미술에 균열을 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