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3040 추상회화 39인
-(2) 신추상, 메타-조형-실천

posted 2022.01.27


다시, 회화 특집을 꾸민다. 작년 12월호의 「회화, 변하고 있는가?」를 잇는 기획이다. 이번에는 ‘추상’을 키워드로 삼았다. ‘추상’이라는 용어가 애매해진 오늘날, 그러나 ‘추상’이라는 창작 현상은 엄연히 우리 앞에 존재한다. 그 추상을 회화의 이름으로 다시 불러낸다. 컨템퍼러리아트의 지형에서 회화는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지키고 있는가. 회화는 급변하는 시각 환경의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21세기 회화의 비평적 쟁점은 무엇인가? 과연 새로운 변화가 있는가? 3040세대의 젊은 회화는 이전 세대와 무엇이 다른가? 회화는 오늘의 ‘전지적 스마트폰’ 환경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가? 회화의 미래를 어떻게 볼 것인가? Art는 회화를 둘러싼 동시대적 물음을 던지고, 답하는 대형 특집을 꾸몄다. 첫째, 전문가 6인이 ‘추상’에 주목해 3040세대 중심의 회화 작가를 뽑았다. 고충환, 김용대, 안소연, 유진상, 임근준, 현시원 등이 작가 선정에 참여해줬다. 이들이 총 39명의 작가를 선정했다. 편집부는 선정 작가의 작품을 형식과 내용, 재료와 기법 등에 기초해 4개의 소주제로 나눠 작품 화보를 꾸몄다. ‘평면과 물성, 끝없는 대결’, ‘신추상, 메타-조형-실천’, ‘회화의 확산, 시간과 공간으로’, ‘표현의 경계 너머, 혼성의 숲’. 둘째, 동시대회화 담론을 주고받는 온라인 좌담을 마련했다. 김복기, 유진상, 임근준이 컨템퍼러리아트의 흐름을 짚고, 회화의 위상을 다각적으로 조망한다. 해외의 작품 사례와 함께 한국 젊은 작가들의 회화 동향을 면밀히 추적한다.


신추상, 메타-조형-실천


포스트모더니즘의 종말 이후, 현대미술은 스스로의 당위성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했을까? 동시대미술이 미래로의 추동, 시대정신을 망실한 가운데 추상회화는 이전 시대의 대가를 다시 소환하기에 이른다. 20세기 미술의 형식주의 어법과 역사를 참조하는 ‘메타-조형-실천’은 기성 평론계에서 ‘좀비-형식주의’라는 오명을 얻었지만, 디지털 환경을 매개한 추상의 역사, 가상적 숭고에 대한 동시대적 충동은 유일하게 생존한 창작의 원천이자,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한국의 젊은 추상화가도 미래를 향한 추동이 거세된 상황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다. 이 섹션에서는 포스트-미디엄의 자장 내에서 ‘참조’에 방점을 찍고 추상 형식과 방법론의 재창안을 시도하는 작가를 소개한다. 이소정이 동양화 수묵 기법을 캔버스 회화의 방법론으로 변주한다면, 차승언은 앞선 시대의 거장 추상미술가의 조형성을 섬유공예 직조의 방식으로 재해석한다. 김아라는 한국 전통 건축의 시각적 특징을 추상의 패턴으로 치환한다. 김서울은 회화의 기본 도구인 붓에 주목해 자기 충족적, 유희적 프로토콜의 회화를, 조현선은 자신이 마침표를 찍은 과거 작품을 다시 불러내 분석적 추상 표현을 실험한다. 디지털을 매개해 전유하는 방식에도 주목할 만하다. 컴퓨터 환경의 서체를 회화적 기호로 추출해 작업 세계를 확장해온 박미나, 애니메이션의 장면이나 대가의 카탈로그 레조네를 캡처한 스크린샷을 캔버스로 삼는 윤향로가 대표적이다. 전현선은 인터넷에서 수집한 이미지와 삼각형, 원뿔 등 기하학적 도형를 병치해 평평한 레이어가 중첩된 화면을 구성한다. 전유의 전략을 우회해 자신만의 회화적 양식을 구축하는 데에 몰입한 경우도 있다. 이영준은 추상회화의 언어와 표현주의의 정서를 혼융해 평면 공간의 개념에 집요하게 파고들고, 성낙희는 반복과 증식의 조형론으로 음악적 운율을 시각화한다.


성낙희〈Sequence 11〉

성낙희〈Sequence 11〉, 캔버스에 아크릴릭 65×53cm 2019,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성낙희 성낙희는 오일, 아크릴, 과슈로 내면의 추상적 형상을 표출해왔다. 마치 캔버스의 특정 부분에서 발생한 에너지가 사방으로 퍼지듯, 타원에 가까운 사각형을 즉흥적으로 그려낸다. 다양한 색의 아크릴 물감을 투명하게 겹치는 기법은 밝은 빛이 번져 나가는 공간적 효과와 음악적 운율을 시각화한 결과.


김서울〈Flibert Family No.4〉

김서울〈Flibert Family No.4〉, 캔버스에 유채, 콜드 왁스, 스탠드 오일 172×172cm 2019,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김서울 김서울의 회화는 그림의 도구, 재료, 기법을 총체적으로 분석한 결과물이다. ‘필버트 붓’이라는 유화의 기본 도구에 집중해 시리즈를 제작했다. 붓의 형태와 크기에 따라 아치, 반달, 별 등의 형상이 화면에 그대로 구현된다. 디자인과 건축에 대한 관심사는 프레임을 회화의 조형 요소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으로 확장되고 있다.


김아라〈무제〉

김아라〈무제〉, 캔버스에 아크릴릭, 안료 130.3×193.9cm 2021,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김아라 김아라는 화성 행궁이 자리한 수원 출신으로 한국 전통 건축물의 문양과 색감을 주된 조형 언어로 삼는다. 캔버스 틀과 같은 구조에 단청 무늬를 입히는 입체 작업에서 시작해, 반복, 중첩, 대칭의 방법론을 적용해 그리드의 조형적 균형감을 추구하는 평면 작업으로 이어졌다. “전통 건축의 구조를 조각으로 이해하고 그를 실험적 추상회화로 풀어낸다는 점에서, 독자성을 획득하고 있다.”(임근준)


박미나〈111122223333444556677888999 000ㅁㅁㅠㅠㄹㅎ허ㅐㅍㅍㅉㅈㅌ〉

박미나〈111122223333444556677888999 000ㅁㅁㅠㅠㄹㅎ허ㅐㅍㅍㅉㅈㅌ〉, 캔버스에 아크릴릭 200×450cm 2012,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박미나 박미나는 회화를 둘러싼 물질, 기술, 문화 조건을 기반으로 작업을 지속해왔다. 재료 수집, 기호 변주, 그리기 규율 정립 등으로 일종의 ‘회화 프로그램’을 만들어 작품을 제작한다. 화면 안팎으로 이어지는 증식, 진화, 매개의 방법론은 박미나 회화의 독자성이다. 컴퓨터 환경에서 사용되는 기호 폰트 ‘딩벳’에서 착안한〈딩벳〉연작은〈정보〉,〈숫자〉,〈트립틱 페인팅〉등의 시리즈로 파생되고 있다. 제목은 화면 속 이미지를 지시하는 일종의 암호다.


윤향로 개인전〈캔버스들〉

윤향로 개인전〈캔버스들〉, 학고재갤러리 2020 전경,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윤향로 윤향로의 작업은 세계를 붙잡는 스크린 샷이다. 활동 초기에는 애니메이션 등의 캡처 이미지에서 착안해 서사가 사라진 장면을 캔버스에 옮겼다. 최근에는 미술사의 이미지를 차용하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 여성 추상화가 프랑켄텔러의 작품 이미지를 디지털화해 출력한 후 그 지지체에 에어브러시로 채색했다. 작가 자신은 ‘유사 회화’라 부른다.


〈반달색인_위장된 오렌지〉
〈반달색인_위장된 오렌지〉

〈반달색인_위장된 오렌지〉, 종이에 오일 파스텔 2021,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조현선 조현선은 일상용품과 폐기물을 집요하게 관찰해 추상회화〈위장된 오렌지〉를 그려냈다. 이 작품을 모체로 삼아〈반달색인_위장된 오렌지〉를 발표했다. 줌 인, 줌 아웃, 크롭의 방법론을 적용했다. 원작의 중첩된 레이어를 해체해 화면을 간결한 색면으로 재구성한다. 얼핏 선적(linear) 색면 추상처럼 보이지만, 오일 파스텔의 질감에서 미묘한 회화적 뉘앙스를 놓지 않는다.


전현선〈Fog And Horizon〉

전현선〈Fog And Horizon〉, 캔버스에 수채 각 1,000×400cm 2020,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전현선 전현선의 작업에는 인터넷에서 수집한 구체적 이미지와 함께 삼각형, 사각형, 원뿔이 등장한다. 낱장의 종이 같이 얇은 화면의 레이어는 온라인의 평평한 공간감을 반영한다. 그러면서도 수채화 화면 군데군데 깊이감, 부피감을 살리는 전통적인 퍼스펙티브를 끌어들인다. 최근 작가의 ‘올오버’ 회화는 캔버스를 위아래로 높고 길게 배치되는 설치로 확장되었다. 거대한 기하학적 숲이다.


이소정〈거인〉

이소정〈거인〉, 장지에 과슈, 먹, 아크릴 65.3×53.1cm 2020,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이소정 이소정은 동양화의 필묵에 기반한 추상회화를 전개한다. 장지에 순지를 겹쳐 올려 주묵(朱墨)을 칠하면, 스미고 마른 흔적이 형성된다. 그 다음에 유화, 과슈 물감으로 화면을 조성한다. 회화의 우연성에 대한 작가의 의식적 대응이다. “우연히 만들어지는 이미지에 통제를 가해 필연적 화면을 구성한다. 우리 모두 엄청난 우연의 확률을 뚫고 세상에 태어나 누군가 혹은 무언가와 관계를 맺으며 필연의 존재가 되어가 듯.”


이영준〈Nacht Pinochio〉

이영준〈Nacht Pinochio〉, 캔버스에 유채 130×100cm 2020,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이영준 이영준은 회화에서 평면과 공간의 개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작가는 추상회화의 조형 언어에 표현주의의 정서를 접목했다. 얇고 묽은 물감이 서로 뒤섞인 기묘한 공간에 자연 풍경, 대중문화의 아이콘을 병치한다. 20대 청년기에 전원생활에서 느낀 우울은 여전히 작품의 저변에 흐르는 영감의 원천. “멜랑콜리의 경험은 하나의 시적 형상이 되고, 하나의 화면에서 자연의 모티프와 중첩된다.”


차승언〈TwillStaion-6〉

차승언〈TwillStaion-6〉, 면사, 합성사, 염료 162×97cm(부분) 2017,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차승언 차승언은 자신이 직접 베틀과 실로 짠 천을 나무 틀에 고정해 캔버스로 삼는다. 그는 섬유공예를 전공했다. 작품은 한국 추상화가 작품의 조형성과 방법론을 참조해 채색 혹은 염색한 것이다. 작가는 이 작업을 ‘참조의 직조 회화’라고 설명한다. 올을 풀어 실 가닥을 드러낸 작품은 모더니즘 회화와 달리 하나의 시점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연극성’을 띤다.


※ 이 원고는 아트인컬처 2021년 7월호에 수록된 것으로,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아트인컬처와 콘텐츠 협약을 맺고 게재하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