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회화 특집을 꾸민다. 작년 12월호의 「회화, 변하고 있는가?」를 잇는 기획이다. 이번에는 ‘추상’을 키워드로 삼았다. ‘추상’이라는 용어가 애매해진 오늘날, 그러나 ‘추상’이라는 창작 현상은 엄연히 우리 앞에 존재한다. 그 추상을 회화의 이름으로 다시 불러낸다. 컨템퍼러리아트의 지형에서 회화는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지키고 있는가. 회화는 급변하는 시각 환경의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21세기 회화의 비평적 쟁점은 무엇인가? 과연 새로운 변화가 있는가? 3040세대의 젊은 회화는 이전 세대와 무엇이 다른가? 회화는 오늘의 ‘전지적 스마트폰’ 환경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가? 회화의 미래를 어떻게 볼 것인가? Art는 회화를 둘러싼 동시대적 물음을 던지고, 답하는 대형 특집을 꾸몄다. 첫째, 전문가 6인이 ‘추상’에 주목해 3040세대 중심의 회화 작가를 뽑았다. 고충환, 김용대, 안소연, 유진상, 임근준, 현시원 등이 작가 선정에 참여해줬다. 이들이 총 39명의 작가를 선정했다. 편집부는 선정 작가의 작품을 형식과 내용, 재료와 기법 등에 기초해 4개의 소주제로 나눠 작품 화보를 꾸몄다. ‘평면과 물성, 끝없는 대결’, ‘신추상, 메타-조형-실천’, ‘회화의 확산, 시간과 공간으로’, ‘표현의 경계 너머, 혼성의 숲’. 둘째, 동시대회화 담론을 주고받는 온라인 좌담을 마련했다. 김복기, 유진상, 임근준이 컨템퍼러리아트의 흐름을 짚고, 회화의 위상을 다각적으로 조망한다. 해외의 작품 사례와 함께 한국 젊은 작가들의 회화 동향을 면밀히 추적한다.
회화의 확산, 시간과 공간으로
20세기 중반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하에 기존의 미술 장르와 매체 구분은 무의미해졌다.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포스트 매체’ 담론은 예술/비예술, 예술/기술 매체가 융합된 예술 형식에 정당성을 마련했다. 회화는 얇은 평면과 물감에 천착했던 형식주의를 스스로 전복하고, 캔버스 자체와 외부의 3차원성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색면 추상을 정육면체의 부조로 입체화한 도널드 저드, 땅과 바다를 지지체 삼은 로버트 스미스슨이 그 선구자다. 도널드 저드와 같은 미니멀리즘 작품으로 관객의 신체 경험이 개입되는 상황의존적인 ‘연극성’ 개념이 새롭게 부각됐다. 이렇듯 부피와 질량을 가진 채 공간으로 확산한 회화는 보다 유연한 모습으로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이 모든 회화사를 압축적으로 경험한 한국 동시대 추상회화의 양상은 어떨까? 강서경은 프레임, 격자, 평면 등 모더니즘 회화의 주요 개념을 한국 전통의 미감과 조각의 형식으로 번안한다. 백경호와 박경률은 각각 캔버스와 붓질을 하나의 오브제로 정의하고, 설치미술의 방법론으로 풀어낸다. 이혜인은 사생 현장에서 발견한 나뭇가지 등의 사물을 캔버스와 병치해 일루전과 실재를 재맥락화한다. 신현정은 날씨 변화에 대한 신체 감각을 표현한 색면 추상화를 진열대에 올려 감상의 일상성을 강조한다. 백현진은 자신의 다양한 직업적 정체성을 창작 과정에 끌어들이고 회화적 제스처를 조각, 음악, 퍼포먼스와 융합한다. 한편, 최근 디지털 환경을 완전히 체화한 세대의 추상화가가 미술계에 속속 출현 중이다. 이들은 가상과 현실 세계를 오가며 회화의 장소를 비물리적 공간까지 확장하고 있다. 정희민은 만질 수 없는 디지털 세계의 촉각을 겔 미디엄으로 물리화하고, 박정혜는 가상과 실재의 사물을 종이 접기하듯 납작하게 표현한다. 안상훈은 비재현의 추상회화에 인터넷으로 검색한 무작위적 제목을 붙여 느슨한 서사를 구성하고, 이희준은 직접 촬영한 디지털 풍경 이미지를 지지체로 삼은 추상 표현을 전개한다.
백현진 백현진은 미술가, 퍼포머, 음악가, 배우로 활동한다. 회화작품에는 주로 원, 삼각형, 사각형으로 추상화된 풍경을 담는다. 최근 개인전〈말보다는〉(PKM갤러리)에 출품된 신작은 회화의 전시, 감상, 해석의 장을 활짝 열었다. 퍼포먼스에서 창작의 힌트를 던지는 연기를 펼치는가 하면, 회화작품에 작곡을 붙이고, 회화 전시에 사이키 조명을 비추는 등…. 백현진의 회화를 관통하는 ‘시간과 행위에 대한 사유’의 총체다.
박경률 박경률은 2차원 회화의 한계에 주목해왔다. 그 한계를 넘어 회화의 외연을 넓히기 위해 ‘조각적 회화’라는 장르를 창안했다. 회화의 붓질을 ‘오브제’로 인식하고 이를 캔버스 바깥으로 확산하는 전략. 작가는 캔버스 밖 공간의 중력과 시간마저 회화의 요소로 수용해 ‘반-이차원적 세계’를 창출하고, 재차 화면으로 빨려 들어가 차원을 초월한 회화 공간을 제안한다.
백경호 백경호에게 캔버스란 단순히 회화의 물리적 지지체가 아니다. 그는 캔버스를 오브제로 삼아 인체 형상으로 조합한 작품을 선보여왔다. 화면은 추상뿐만 아니라 다양한 양식의 실험 무대. 20세기의 유명한 미술가의 스타일을 답습하거나 일상 풍경을 무심히 담는다. 최근에는 심오한 의미를 띠지 않는 줄무늬에서 착안해 회화적 ‘텍스타일’을 개발하고 있다.
신현정 신현정의〈날씨 회화〉연작은 계절 변화에 대한 작가의 예민한 반응이다. 스프레이로 엷게 분사한 색 입자는 날마다 바뀌는 대기 상태를 은유한다. 철제 앵글로 짠 신문 가판대 같은 진열대에 작품을 무심히 올려두어 감상의 일상성을 강조했다. 개인전〈우리 안의 공기〉(갤러리수 2020)에서는 캔버스 천을 전시장에 걸어 3차원으로의 확장을 모색했다.
강서경 강서경의 작품은 겉으로 보면, 전형적인 조각의 형식을 취하지만 프레임, 격자, 사각형, 평면 등 모더니즘 회화의 주요 개념을 끌어안고 있다.〈얼굴〉은 3차원 공간 속에 평면과 입체가 뒤섞인 설치 형식을 띠고 있지만, ‘공간 드로잉’으로 다양한 얼굴을 형상화했다.〈정(井)〉(2012~15)에서 조선시대의 악보 체계인 정간보를 차용해 회화의 물리적, 개념적 프레임으로 활용했다.
정희민 정희민은 손에 잡히지 않는 디지털 세계의 정물, 기호, 공간을 캔버스에 옮겨왔다. 마스킹 테이프, 에어브러시를 사용하여, 이미지를 비트 단위의 픽셀로 잘게 쪼개듯 신중하게 그려낸다. 작가의 회화에 자주 등장하는 반투명의 ‘겔 미디엄’은 평평한 액정에 사물의 부피감을 부여한다. 디지털 세계를 원천으로 삼으면서도, 현실 세계처럼 손에 잡고 싶은 실재로의 욕망을 놓지 않는다.
박정혜 박정혜는 가상과 실재를 모두 아우르는 다중 세계를 네모난 캔버스에 담아냈다. 이를 위해 형상을 납작하게 누르거나, 접은 듯 묘사하는 표현 기법을 꾸준히 개발해왔다. 최근에는 빛에 대한 관심을 심화해 캔버스 화면을 창문 삼아 일상과 자연의 색을 표현했다. 초록 혹은 노랑 필터를 끼고 바라본 평평한 사물의 풍경이다.
이혜인 이혜인의 회화는 유년기의 풍경을 기억에 의존해 재조합하는 데서 시작했다. 이후 일시적으로 체류했던 장소 현장에서 사생의 방법론을 고집하는 회화를 제작해왔다.〈Mom-Looking Inside〉는 엄마에 대한 상념을 드로잉, 반짝이 필름 콜라주, 오브제 등으로 그려 좌대 형식으로 전시했다. 최근 개인전〈어느 날, 날씨를 밟으며〉(갤러리기체 2020)에선 캔버스의 풍경과 함께 사생 현장의 나뭇가지를 전시했다. 회화적 재현과 실재의 오브제를 병치했다.
안상훈 안상훈의 회화는 형식적으로 ‘회화적 회화’를 계승하면서도 디지털 시대 회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 작품 촬영 사진의 일련번호를 인터넷에 검색해 무작위의 단어나 문장을 도출하고, 그것을 작품 제목으로 삼는다. 형이상학적 개념과 결별하고, 서사를 부여하려는 제스처다. 전시장 가벽, 바닥, 비닐, 건물 벽면 등을 그리기의 무대를 확장하고 있다.
이희준 활동 초기, 도시 건축물의 형태와 구조를 기하학적 형태의 환원한 추상회화를 선보였다. 이후〈Biei〉,〈Floating Floor〉등의 연작으로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건축적 풍경을 ‘사진’을 매개해 재현했다.〈The Tourist〉에 이르러 사진은 참조 대상이 아닌 회화의 지지체로 역할을 바꿔 화폭에 직접 등장한다. 그 위를 여러 모양의 물감 자국은 흑백의 사진이 소거한 본래 풍경과 사물의 색과 질감의 인덱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