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3040 추상회화 39인
-(4) 표현의 경계 너머, 혼성의 숲

posted 2022.02.16


다시, 회화 특집을 꾸민다. 작년 12월호의 「회화, 변하고 있는가?」를 잇는 기획이다. 이번에는 ‘추상’을 키워드로 삼았다. ‘추상’이라는 용어가 애매해진 오늘날, 그러나 ‘추상’이라는 창작 현상은 엄연히 우리 앞에 존재한다. 그 추상을 회화의 이름으로 다시 불러낸다. 컨템퍼러리아트의 지형에서 회화는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지키고 있는가. 회화는 급변하는 시각 환경의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21세기 회화의 비평적 쟁점은 무엇인가? 과연 새로운 변화가 있는가? 3040세대의 젊은 회화는 이전 세대와 무엇이 다른가? 회화는 오늘의 ‘전지적 스마트폰’ 환경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가? 회화의 미래를 어떻게 볼 것인가? Art는 회화를 둘러싼 동시대적 물음을 던지고, 답하는 대형 특집을 꾸몄다. 첫째, 전문가 6인이 ‘추상’에 주목해 3040세대 중심의 회화 작가를 뽑았다. 고충환, 김용대, 안소연, 유진상, 임근준, 현시원 등이 작가 선정에 참여해줬다. 이들이 총 39명의 작가를 선정했다. 편집부는 선정 작가의 작품을 형식과 내용, 재료와 기법 등에 기초해 4개의 소주제로 나눠 작품 화보를 꾸몄다. ‘평면과 물성, 끝없는 대결’, ‘신추상, 메타-조형-실천’, ‘회화의 확산, 시간과 공간으로’, ‘표현의 경계 너머, 혼성의 숲’. 둘째, 동시대회화 담론을 주고받는 온라인 좌담을 마련했다. 김복기, 유진상, 임근준이 컨템퍼러리아트의 흐름을 짚고, 회화의 위상을 다각적으로 조망한다. 해외의 작품 사례와 함께 한국 젊은 작가들의 회화 동향을 면밀히 추적한다.


표현의 경계 너머, 혼성의 숲


포스트모더니즘의 발흥과 때맞춰, 회화는 이미지를 복원했다. 그 이미지의 효용은 모더니즘 시기의 방법론과는 다르다. 화면에는 더 이상 순수와 자율의 미술언어가 아닌 추상, 재현(representation)된 것이 아닌 구상이 공존한다. ‘추상=형식’, ‘구상=내용’의 이분법적 도식이 무너졌다. 이른바 회화 방법론의 다원주의 시대가 열려, 구상과 추상을 혼융한 혼성적 회화가 부상했다. 화면의 공간감을 다시 중시하면서 분할, 오버랩, 돌출, 서사성, 알레고리 등의 다양한 조형 문법이 혼재한다. 기존의 내적 장르 구분도 무의미해졌다. 풍경, 정물, 인물이 혼재된 회화의 종합 선물 세트다. 현실과 가상,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구상과 추상,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집단과 개인, 형식과 내용, 참여와 순수 등 이항 대립이 혼재하는 ‘안의 풍경’이자, ‘기억의 랜드스케이프’다. 이 섹션은 하나의 ‘-이즘’이나 양식으로 부를 수 없는 혼성 그 자체로서의 회화를 집중 조명한다. 우정수는 서사를 배제한 탈의미의 추상적 도상, 물성만이 남은 형상을 그려 현대 사회의 구조를 사유한다. 배헤윰은 건축물을 연상케 하는 간결한 색면으로 추상과 구상, 회화에 대한 ‘추리 게임’을 제안한다. 추상적 표현으로 대상을 재현하며 그 경계를 해체하는 경우도 있다. 김혜선은 파도가 너울대는 가상의 풍경을 두꺼운 마티에르로 표현하고, 이이정은은 생명력 넘치는 필치로 자연 풍경의 기운생동을 담아낸다. 심우현은 짧게 끊어지는 붓질로 숲속 야생화의 에너지를 시각화하고, 그속에 내밀한 미시서사를 교묘하게 숨긴다. 유현경은 주변 인물의 초상을 거친 붓질로 그리다 말거나, 과감히 지우는 기법으로 추상의 표현주의적 가능성에 성큼 다가선다. 또한 전형적인 구상 회화를 견지하면서도 추상의 함축적인 태도와 정신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문성식은 한국적 공기와 추상성의 붓질을 조우시켜 자신만의 서사성을 구축하고, 남진우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존재를 동화적인 형상으로 그려낸다.


〈황혼수심(黃昏修心) 2020-1〉

김혜선, 〈황혼수심(黃昏修心) 2020-1〉, 캔버스에 유채 72.7×90.9cm 2020.

김혜선 김혜선의 회화는 너울대는 파도가 연상된다. 작가는 이 추상적 풍경에 대해 “바람의 질감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가로로 긴 캔버스에 직접 고안한 나이프를 사용해 물감을 두껍게 올려 강렬한 색상이 뒤범벅된 고유의 질감을 구축한다. 실제 풍경을 재현하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있을 법한 바다 풍경을 구현했다. 데자뷰의 감수성을 자극한다.


이이정은〈거기, 일몰_201948〉

이이정은〈거기, 일몰_201948〉, 캔버스에 유채 162×112cm 2019.

이이정은 이이정은은 추상회화 작업 이전에 마트에 빽빽이 진열된 상품을 노동 집약적으로 그렸다. 이후 두꺼운 마티에르와 강한 스트로크로 특정 장소와 시간의 자연 풍경, 내면세계를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작품으로 변모했다. 일상에서 우연히 발견하거나, 여행에서 마주친 풍경을 모티프로 삼는다. 무한히 생성하고 증식되는 생명의 모태인 대지, 그 기운생동을 생생히 전달한다.


심우현〈Deer Hunt〉

심우현〈Deer Hunt〉, 리넨에 유채 215×295cm 2014

3 심우현 심우현은 유년 시절부터 매료되었던 숲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담는다. 짧게 끊어가며 중첩한 원색의 붓 자국으로 여전히 생경하고 위험한 숲속 야생화의 원시적 생명력을 표현한다. 올오버한 추상회화처럼 보이지만, 화면 구석구석에 사람의 얼굴, 동물이나 곤충의 형태가 슬쩍슬쩍 드러난다. 숲의 외양뿐만 아니라 숲 속에서 꿈틀대며 번식하는 생명체를 함께 그렸다. 원초적 에로스 충동, 관능적 경험과 같은 내밀한 미시서사를 교묘히 숨기고 있는 걸까.


배헤윰〈글 모르기 모험〉

배헤윰〈글 모르기 모험〉, 캔버스에 아크릴릭 112.2×145.5cm 2019

4 배헤윰 배헤윰은 특정한 의미로 규정할 수 없는 순수한 경험과 사유를 회화의 기본 단위로 삼는다. 야수파를 연상케 하는 대담한 색면 구사가 작업의 특징. 화면을 구성하는 색면의 형태는 건축물이나 자연 풍경을 떠올린다. 2019년 부터 화면 내부를 ‘플롯’이라는 개념으로 시각화하고자 했다. 물감 색과 밀도, 색면의 경계를 탐험하며 추상과 회화에 대한 ‘추리 게임’을 제안한다.


남진우〈The Protector〉

남진우〈The Protector〉, 천에 유채, 천 콜라주 126×100cm 2020

5 남진우 남진우는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대왕오징어를 작업의 주요 모티프로 삼는다. 그의 작업 세계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이방인으로 내몰려,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존재에게 헌정하는 대서사시다. 이 작품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듯, 나무로 변장한 괴물의 모습을 담았다. 괴물의 신체는 동화적인 형상으로 파편화되어 선악의 이분법적 세계를 교란한다. 하나의 형상으로 오징어, 나무, 괴물의 다중적인 알레고리를 만들어냈다.


우정수〈All of Our Yesterdays〉

우정수〈All of Our Yesterdays〉

6 우정수〈All of Our Yesterdays〉 캔버스에 아크릴릭, 잉크 116.8×91cm 2019 / 우정수는 현대 사회의 시스템을 이해하기 위해 다방면의 서적을 탐닉하거나 영화, 명화, 삽화 등의 이미지를 강박적으로 그려냈다. 서사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난 이후 그의 화면에는 의미를 탈각한 도상, 물성을 강조하는 형상이 반복 등장한다. 여기에는 구상과 추상이 중첩돼 있다. 최근 캔버스를 종횡으로 넓게 배치해 ‘벽지’로 만드는 평면 작업을 시도 중.


유현경〈뒤로 1〉

유현경〈뒤로 1〉, 캔버스에 유채 194×130cm 2013

7 유현경 유현경에게 창작이란 정체성을 둘러싼 주변 관계를 묻고 답하는 ‘선문답’의 도구다. 작품은 작가가 마주했던 누군가의 얼굴이 주된 표현의 대상. 그의 화면에는 거친 붓질로 그리다 말아버린, 혹은 과감히 지운 흔적이 모여 있다. 내면을 강하게 밖으로 밀어내는 표현주의적 회화로 읽히는 동시에, 작가 자신의 용기, 자유, 욕망이 집약된 그림 일기장이다.


문성식〈형과 나〉

문성식〈형과 나〉, 종이에 연필 55×75cm 2008

8 문성식 유년기 기억을 더듬어 한국 고유의 정서를 강하게 드러내는 문성식의 연필 드로잉. 수묵에 가까운 수채, 유화와 목탄을 함께 사용한 기법 등으로 회화의 외연을 넓혔다. 특히 연필 드로잉작품은 ‘구상=재현’, ‘추상=표현’, ‘구상=내용’, ‘추상=형식’이라는 이분법을 깬다. “그의 회화는 한국적 공기와 추상성의 붓질이 만나, 서사를 새롭게 형성하고 또 거세한다. 이는 추상과 추상이 아닌 것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제스처다.”(현시원)


※ 이 원고는 아트인컬처 2021년 7월호에 수록된 것으로,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아트인컬처와 콘텐츠 협약을 맺고 게재하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