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기(KIM) 반갑습니다. 회화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작년 12월호 「회화, 변하고 있는가」의 후속 기획입니다. 이번 특집의 키워드는 ‘추상’입니다. 막상 ‘추상’을 내세웠습니다만, 오늘의 미술에서 ‘추상’만큼 애매한 용어도 없습니다. 오래전에 허버트 리드(Herbert Read)가 “본래 모든 미술은 추상적이다”라고 했듯, 추상이라는 단어는 하나의 양식으로 규정할 수 없을 만큼 그 폭이 넓습니다. 미술비평에서는 비(非)구상, 비묘사적, 비재현 등의 용어를 사용합니다만, 그 내용을 정의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프랭크 화이트포드(Frank Whiteford)가 주장했듯이, 추상은 ‘양식’이 아니라 작가의 ‘자세’를 가리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작가마다 각각 다른 형태의 추상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렇게 추상을 원론적으로 파고들면 여러 복잡한 문제에 부딪힙니다만, 미술현장이나 제도에서는 추상회화가 엄연히 존속하고 있습니다. 아트마켓에서도 강세를 보이고, 한국 단색화도 상종가를 치고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 추상회화를 거칠게 분류하면, (1)포스트단색화(용어의 적합성은 차치하고)의 흐름이 존속합니다. ‘모더니즘 회화의 지속’이라 할 수 있는 흐름입니다. (2)‘메타 형식주의’입니다. 모더니즘 ‘회화의 죽음 이후’의 회화에서도 여전히 추상회화의 무한 변용을 확인할 수 있지요. ‘포스트모던적 추상’, 더 나아가 ‘포스트-포스트모던적 추상’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탈모더니즘 회화 흐름이라 할 수 있겠는데, 여기에는 그린버그 유의 형식주의와 달리 새로운 재료 기법의 확장, 장르 융합 등이 눈에 띕니다. (3)디지털 하이테크 시대의 추상입니다. 이젠, 창작의 원천, 작품의 발상, 회화적 리얼리티의 출처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추상과 구상의 의미, 경계마저 사라진 혼성의 원더랜드랄까요. 이런 분류는 양식의 변화에도 기인하지만, 삶을 둘러싼 시각 환경의 변화와도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 좌담은 한국 추상회화의 현황을 놓고, 동시대미술의 흐름에서 좀더 면밀하게 조망해보는 자리입니다. 먼저 오늘의 회화를 컨템퍼러리아트의 문맥에서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듯합니다.
‘좀비 타임’ 혹은 ‘레트로 마니아’의 시대
임근준(LIM)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아방가르드미술과 모더니즘의 형성은 자연주의적 재현 회화(눈속임 미술)의 죽음을 전제로 한 판단 유예의 시공에서 이뤄졌고, 전후 모더니즘의 발흥은 북미 중심으로 반복, 심화, 확장시킨 결과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반면, 1968년 이후의 새로운 아방가르드미술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형성은 모더니즘, 특히 추상미술의 죽음을 전제로 한 것이었죠. 한편 전 지구화를 추동해온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스템이 근본적 한계를 드러낸 2008년 이후, 우리는 다문화주의적 통치성과 결탁해온 포스트모더니즘, 특히 비미술적 재료를 포괄하며 담론적 장소특정성을 추구해온 설치미술의 죽음을 대면하거나 혹은 외면하고 있습니다. 저는 전자를 현대미술에서 ‘제1의 죽음’으로, 중자를 ‘제2의 죽음’으로, 후자를 ‘제3의 죽음’이라 부릅니다.
현대미술사에서 ‘제3의 죽음’은 2008년의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좀비 모더니즘 혹은 좀비 형식주의(zombie formalism)의 발흥을 이끌었습니다. 포스트모던 미술이 미술계의 급속한 팽창을 전제로 했다면, 포스트-컨템퍼러리미술은 기대 감소 시대의 현상 유지 혹은 수축, 붕괴를 전제로 했습니다. 20세기 미술의 핵심이, 로버트 휴즈(Robert Hughes)의 표현대로, ‘새로운 것의 충격’에 있었다면, 21세기의 지난 20여 년을 특징지은 것은 ‘오래된 것의 충격’이었습니다. 20세기에 이뤘던 성취를 지속적으로 재발견, 재구성하는 일이 반복되었죠. 이는 2010년대에 이르러 특유의 ‘무시간성(atemporality)’을 야기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오늘’의 동적 공간은 유례없이 좁아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대다수 사람에게 허락된 ‘오늘’은 소비 활동을 위한 시공, 많은 경우 레디메이드 경험을 결박해놓은 정크 스페이스(쇼핑몰화한 공간)에서 구현되는 것에 불과합니다. 21세기의 특징은 ‘오늘’의 개념이 쪼그라든 데 있습니다. 현대성의 시공간 개념은 애초에 과학적 가치 평가를 내려놓은 ‘과거’와 그를 통해 야기된 ‘오늘’과 우리가 도달해야 마땅한 ‘미래’로 구성된 일안 원근법적인 시각성을 전제로 했습니다. 그런데 2008년 이후 ‘오늘’의 개념이 변화해버리자 포스트모던의 비평 효과는 한순간에 파괴됐습니다.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새로운 발달과 함께 역사로 전환됐어야 마땅했던 20세기는 더욱 생생한 모습으로 ‘오늘’에 귀환하기 시작했습니다. 2010년대는 20세기를 데이터베이스로 삼아 끝없이 재구성되는 다층적 스킨의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이먼 레이놀즈 식으로 말하자면, ‘레트로 마니아’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죠.
KIM 최근 20여 년간 컨템퍼러리라는 가치 체계의 이중화, 다중화가 심각합니다. 뒤샹 같은 작가에게 부여한 역사적 시간 개념의 컨템퍼러리와 ‘지금, 여기’ 작가들이 직면하고 있는 가치 개념의 컨템퍼러리. 그 개념뿐만 아니라 제도와 실천에서도 복수의 지평이 중첩되고 있습니다. 핼 포스터는 『Bad New Days』(2015)에서 이 문제를 ‘하이브리드의 현재성(hybrid temporality)’ 혹은 ‘좀비 타임(zombie time)’이라 논합니다. 과거의 현대미술이 좀비처럼 몇 번이고 되살아나고 있다는 비유지요. 이 점에서 컨템퍼러리아트는 ‘시대착오(anachronism)’ 개념이 강합니다. ‘좀비 타임’에는 확실히 비판적인 시선이 깔려 있습니다. 이걸 좀 순화하면, ‘전위의 리사이클링’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대표적인 예가 ‘네오 컨셉추얼아트(Neo-Conceptual Art)’죠. 1990년대 이후 고전적 현대 미술작품이나 퍼포먼스를 재연, 참조하는 경향이 뚜렷했습니다. 일례로 마이크 켈리(Mike Kelly)와 폴 맥카시가 비토 아콘치를 재연한다든지, 타시타 딘(Tacita Dean)이나 샘 듀랜트(Sam Durant)가 로버트 스미스슨을 참조하는 경우입니다. 2005년에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ivic)가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요셉 보이스와 브루스 나우만 등의 과거 퍼포먼스 작품을 재연(〈7개의 홀가분한 작품〉)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례는 개별 작가나 작품을 직접 참조하는 것인데, 2010년대의 ‘1960년대 미술로의 회귀’라고도 부를 만한, 1960년대 전후의 컨셉추얼아트와 ‘제도 비평’에 존재했던 표현을 끌어들이는 수법이 유행했습니다. 예를 들면, 라이언 갠더(Ryan Gander)와 세스 프라이스(Seth Price)의 작품에는 미술관이나 미술시장, 작품과 관객과의 커뮤니케이션의 엇갈림 등에 초점을 맞췄던 마르셀 브로타에스(Marcel Broodthaers)의 영향이 보입니다. 1960~70년대 미술의 적극적인 참조나 동화, 가까운 과거 현대미술의 전용이나 응용은 고도의 비평성을 갖춘 현대미술의 좀비적 연명이기도 한데, 한편으로 ‘미술 내 미술’의 폐색을 초래할 위험도 있습니다.
유진상(YOO) 서유럽과 뉴욕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20세기의 미술은 이론적, 일관적으로 보이는 외양 못지않게, 가까이 들여다보면 참가자들의 다양한 입장과 태도의 교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뒤샹,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 네오 다다 계열(플럭서스, 팝아트, 미니멀리즘) 그리고 개념미술에 이르기까지 서구 미술의 주요한 사조는 동료, 선후배, 사제, 연인, 또래 집단의 이합집산으로 이뤄졌습니다. 그 핵심적인 동인은 ‘반(反)미술’이죠. 20세기 전반에 여전히 커다란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구체제 미술의 역사를 극복하고 미술 자체를 영점에서 다시 해방하려는 기획이 수없이 반복되었던 겁니다. 1913년에 뒤샹이 퓌토(Puteau)의 또래 집단에서 탈출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도서관 사서로 취직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후에 그는 파리 미술계를 벗어나기 위해 뉴욕으로 탈출합니다. 뉴욕에서 전쟁으로 국가주의가 비등할 때는 다시 아르헨티나로 탈출합니다. 억압하고 젠체하는 권위주의적 담론 및 신화화의 횡행에 대항하기 위해 미술 자체를 공격하거나 배제하는 메커니즘이 잠재적 동인으로 자리 잡았던 겁니다. 누보 리얼리즘이나 상황주의 등은 이런 태도를 명확한 전략으로 삼는 모습을 보입니다. 동시대미술은 이러한 서사에서 파생되었으며,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 반미술적 태도는 예술가에게 큰 동력을 제공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동시대미술에 대해 경험하는 정체와 무력감은, 마치 자본이 그러하듯, 동시대미술이 그것에 저항할 만한 선택의 여지가 좁기 때문입니다. 반-동시대미술의 필요성은 인지하고 있으나, 그것이 어떤 형태로 드러나게 될지 예측하기는 어렵습니다. 역사로부터 예측할 수 있는 키워드는 무관심, 파티, 유머, 우정, 추상 정도입니다. 삶과 지속적인 태도로부터의 예외성에서 새로운 예시가 나타날 것입니다. 이론은 현상을 정리할 뿐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회화의 죽음? 그 이후의 회화
KIM 회화로 좁혀보죠. 지금까지 수도 없이 ‘회화의 죽음’이 언급돼왔지만, 현재도 뛰어난 회화작품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2000년대 이후 글로벌 아트마켓에서는 추상미술이 강세였죠. 마켓에서 추상회화에 대한 수요가 급증해 ‘회화의 유행’이라는 사태를 맞았습니다. 이 회화의 유행을 이끌었던 추상회화를 ‘좀비 형식주의’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형식주의’란 예전의 추상회화를 가리키는 겁니다. 이들 마켓용 회화는 그 형식을 즐기는 듯 색면이나 필촉, 형태의 조작에 시종합니다. 과거 모더니즘의 사상적 배경이나 필연성, 실험성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호응하는 작가로는 크리스토퍼 울(Christopher Wool), 마크 그로찬(Mark Grotjahn), 토마 압츠(Toma Abts) 등입니다. 이 밖에 오스카 무리요(Oska Murillo), 루돌프 스팅겔(Rudolf Stingel) 등 그래피티 문화와의 관계가 느껴지는 작가도 여기저기서 보입니다. 임근준 선생은 아트인컬처 2015년 5월호의 「새로운 추상 포스트-레트로 회화」라는 논고로, 글로벌 아트씬에서 ‘신추상’의 새로운 흐름을 조망한 바 있습니다. 이번 회화 특집과 관련해서 대단히 중요한 논고입니다.
LIM 2010년대 중반 제 모습을 드러낸 포스트-컨템퍼러리미술의 흐름에서 가장 큰 논란은 20세기의 미술사를 참조 대상으로 삼은 새로운 추상미술이었습니다. 한데, 놀랍게도 그 주역이 미국의 에이미 실먼(Amy Sillman), 독일의 샤를리네 폰 하일(Charline von Heyl) 같은 여성 화가들이었지요. 페미니즘의 흥망 이후, 여성 화가가 새로운 미술운동이나 사조에서 개척자 노릇을 맡고 또 제 몫의 조명을 받기는 처음이었으니, 이 또한 흥미로운 현상이었습니다. 허나, 안타깝게도 오늘의 방만한 현대미술계에서 포스트-컨템퍼러리의 시공을 야기해온 새로운 죽음, 즉 ‘제3의 죽음’이 야기하는 새롭지 않게 새로운 상황과 후기(탈)-동시대성의 (메타)시각성에 주목하는 이론가나 작가는 많지 않습니다. 21세기 신추상미술의 대두를 갈무리하고 역사화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그를 부정하려는 이들의 비난이 쏟아졌지만, 정작 새로운 시대의 시각성을 규명하려고 애쓰는 논자는 찾아보기 어려웠죠. 세기의 전환기에 각광을 받았던 뉴미디어아트와 그 담론의 붕괴에 주목해, 포스트 인터넷아트라는 헛 카테고리를 제시해 오늘의 문제를 진단해보려는 시도도 있었고, 포스트 시네마라는 이름으로 ‘포스트 미디엄의 상황에 대응해 영화를 실험의 매체로 재창안하고자 노력해온 이들’을 계보화하려는 시도도 이어졌습니다. 포스트 시네마는 20세기 특유의 ‘시나리오에 기반을 둔 서사 영화’가 맞은 상징적 차원의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니, 사실 현대미술사에 적확하게 부합하는 개념 틀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추상미술을 서둘러 역사화하고자 했던 논자와, 포스트 인터넷아트를 새로운 포스트 뉴미디어아트의 리그로서 정식화하고자 했던 논자에게선, 뭔가 불건전한 공통점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기성 현대미술계의 구태 자체는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이죠. 오히려 그들은 판단 유예의 시공을 창출해 현대미술계의 ‘정체 상태(status quo)’를 유지하려는 보수적 자세를 취했습니다. 즉, 다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현대미술(계)의 종말을 우려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한국 동시대추상의 현황
KIM 이번 특집에서 임근준 선생은 한국의 신추상 회화작가를 추천했습니다. 이 작가들을 대상으로 한국 ‘신추상’에 대해 더 깊이 들어가보죠. 과연 ‘무엇이’ 새로운 겁니까?
LIM 한국에서 포스트-컨템퍼러리의 상황에 부합하는 신추상회화로 성취를 거두고 있는 이들은 누구일까? 저는 김아라, 박미나, 백경호, 성낙희, 윤향로, 이소정, 이영준, 전현선, 정석우, 조현선, 차승언을 꼽았습니다. 작업 세계는 제각각이지만, 형식주의적 현대미술의 역학에 비평적으로 화답하는 맥락에서, 추상미술의 기본 어법을 따르는 동시에, 포스트 미디엄의 상황에 부합하는 미적 미디엄/미디어로서의 회화 형식과 방법론을 재창안하고 있다는 점에선, 모두가 공통점을 가집니다. 회화적 회화의 실험을 전개하는 길로 나아간 경우는 백경호, 성낙희, 이소정 등을 지목할 수 있고, 개념적 프로토콜의 수립과 변주에 천착한 경우로 박미나, 윤향로, 차승언 등을 가려낼 수 있으며, 독창적 그리기 방법/형식의 고안이라는 면에서 차별성을 띠는 그룹에는 차승언, 이소정, 김아라 등을 넣을 수 있습니다. 반면 이영준, 전현선, 조현선 등은 유희적 그리기의 세계로 나아가 회화적 양식화에 성공하고 있는 경우로 볼 수 있습니다.
KIM 이번 특집에서 편집부는 모더니즘의 전통을 이어가는 작품을 신추상과 다른 섹션으로 분류해봤는데, 그중에는 재료와 기법뿐만 아니라 미학적 태도에서 모더니즘을 넘어서려는 추상작가도 많습니다. 신추상과 교집합을 이루는 작가들입니다. 김이수, 윤상렬은 비회화적 재료를 끌어들이고, 박종규는 디지털 소음을 회화 문법으로 활용합니다. 신추상의 범위는 더 확장할 수 있다고 봅니다. 유진상 선생께서는 좀더 전통적인(?) 회화의 입장에서 작가를 추천해줬습니다.
YOO 회화의 핵심 조건은 그것이 특히 화가 개인의 시공간으로 수렴된다는 사실입니다. 화가는 불가피하게 자신의 삶 전체를 추상화합니다. 브리태니커 사전에서는 추상을 ‘전체를 부분으로 축약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제유법의 설명처럼 들리는 이 정의로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화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생물학적, 정신적 삶의 총체성을 하나의 형식으로 요약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그의 추상성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이것은 화가가 아닌 예술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화가의 특수성은 그가 물감을 다룬다는 점입니다. 특히 유화 물감은 단순히 재현의 재료가 아니라 그것의 물성으로 ‘사건의 흔적’이라는 독특한 고유성을 드러냅니다. 20세기 회화의 역사는 그것이 추상표현주의이건 미니멀리즘이건 ‘캔버스에 발려 있는 물감에의 응시’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물감은 ‘체액’이나 ‘살’과 같은 것으로 신체적 현전과 등치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탈인간화 시대, 회화의 존재론
KIM 추천 작가에 주목해 더 언급해주신다면….
YOO 회화에 대한 다양한 관념들, 이를테면 재현, 물성, 평면성과 함께 회화 매체의 중요한 특성은, 그것이 인간의 존재 양태와 독자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술 초월의 시대에, 그리고 많은 매체가 탈인간화의 후기 인류세로 나아가고 있는 시대에 역으로 인간의 신체, 지각, 감각이 조합해내는 물질적 관능성의 영역을 탐험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매체가 회화입니다. 회화적 기록에 우리가 큰 의미를 부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궁극적으로 그것은 주체로서의 인간에게 주어진 절대적 조건, 이를테면 삶, 죽음, 사유, 감각, 쾌락, 고통 등을 축약한 시간적 단면이자 증거물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알버트 오엘렌(Albert Oehlen), 마크 브래드포드(Mark Bradford), 크리스토퍼 울과 같은 동시대 화가의 작품에서 ‘회화적 사건’이 갖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국내 작가로는 붓과 캔버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회화적 사건의 레이어를 붓질의 감소를 통해 투명하게 다루는 샌정, 유현경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안상훈, 심우현의 작품은 물감과 신체가 본질적으로 공유할 수밖에 없는 관능성에 먼저 주목하게 합니다. 보통 ‘회화적 회화(painterly painting)’라는 동어반복적 용어를 떠올릴 때 예시로 드는 작가들입니다. 박정혜와 배헤윰은 물감의 물성이 뿜어내는 색채의 평면적 비례를 매우 설득력 있게 구사하는 매력적인 작가입니다. 이혜인과 이희준의 작품은 매우 다르지만 회화적 제스처와 평면의 구조를 과감하게 변형하고 재구성하는 상당한 역량을 보여줍니다. 우정수, 이혜인의 작품은 서사와 에피소드의 병치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그 바탕을 이루는 회화적 구조에 시선을 끄는 강력한 스타일을 보여줍니다.
KIM 회화의 문제를 탈인간화 시대와 연결한 점이 흥미롭습니다. 최근 10여 년간 컨템퍼러리아트에 새롭게 등장했던 미학과 예술이론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실재/사물로의 회귀’라는 특징을 띠고 있습니다.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 객체 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 신유물론(New Materialism) 등의 이론이 유행했는데, 이것은 일차적으로 ‘탈인간화 세계’로의 지향으로 엮어도 좋겠습니다. 지난 20여 년간 미술이론 쪽에서 거의 유일 모드로 존재했던 것은 니콜라 부리오의 관계미학과, 그것을 마이크로토피아적 친밀감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던 클레어 비숍의 ‘적대성(antagonism)’ 개념이지요. 양쪽의 차이는 인간끼리의 대립 ‘유지’인가 대립 ‘해소’인가의 문제에 달려 있습니다. 두 이론은 대립하지만, 인간이라는 단위를 중심에 두고 있다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말하자면 양쪽 다 현전하는 인간 주체를 전제로 삼고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는 부리오도 비숍도 ‘모더니즘적 현전성=지금, 여기’라는 틀에 묶여 있습니다. 그런데 사변적 실재론이나 객체 지향 존재론은 칸트 이래 ‘인간’에서 점점 탈피해 인류 이전이라든가 인간 부재의 세계를 고찰하려는 경향입니다. 주제와 대상, 감각과 실재를 둘러싼 종래의 이원론적 내지는 인간 중심적 철학에 제동을 걸고 나섰습니다. 그 근저에는 인간(주체)에 의한 세계(대상)의 지각을 특권화하지 않는, 일종의 탈인간주의적 태도가 깔려 있지요. 소박하게 말하면 비실재적인 대상을 포함하는 모든 ‘객체’의 시점으로 세계를 포착, 구축하려는 사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보면 회화는 확실히 주체 지향적인 예술이지요.
YOO 모더니즘 회화의 역사에서 이미 탈주체화의 회화적 제스처를 찾을 수 있습니다. 회화를 절대적 평면으로 귀결하려 한 미니멀리즘 회화나, 붓질을 인쇄물과 같은 평면(리히텐슈타인의 ‘망점(Ben-Day Dots) 회화’ 같은)으로 치환한 팝아트나 하이퍼리얼리즘의 사례 말이지요. 흥미로운 점은 ‘망점’조차 붓질의 흔적을 지니고 있어, 관객이 그것을 회화적 희열의 근거로 삼는다는 겁니다. 게리 흄은 산업용 물감으로 알루미늄에 그립니다만, 미세한 물감의 비균질성이 보여주는 인간적 흔적이 회화적 희열을 줍니다. 회화는 동시대미술에서 예외적 영역임이 분명합니다. 반미술과 개념미술의 압도적 흥행에도 회화는 일종의 ‘반-반미술’로 간주되어왔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식욕이나 성욕을 끊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본성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회화의 상업성이나 물신주의를 비난한다 해도 음식이나 사랑에 내재된 기쁨의 예감을 거부할 수 없는 것처럼 회화 역시 거부할 수 없습니다. 뒤샹이 언급한 ‘망막적 전율(retinal shudder)’은 회화의 본질보다는 그것이 과도하게 신화화되거나 억압으로 작동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1910년대에 회화는 다른 모든 가능성을 억누르는 전제적 매체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회화를 ‘반미술’의 운동성에서 파생된 다른 경향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식사나 사랑을 독서나 산책과 구분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추상, 재연과 샘플링
KIM 이번 특집에서 6명의 전문가가 총 51명의 작가를 추천했습니다. 그중에 중복 추천이 많아 결국은 총 39명이 선정됐습니다. 중복 추천이 많다는 사실은 추상 형식의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사실 4개의 화보 카테고리는 두부 자르듯 명확하진 않습니다. 편집부가 꾸민 이번 특집의 화보를 놓고 자유로운 논평을 부탁드립니다.
YOO 물론 젊은 추상화가가 다 망라되어 있지는 않을 겁니다만, 회화의 영역에서 중요한 작가들이 선정된 점은 분명합니다. 추상회화라고는 하나 그 경향을 크게 나눠볼 수 있습니다. 첫째, 추상성을 회화적 서사에서 내재적으로 다루는 작가. 둘째 추상성을 재현적 모티프와 함께 병치하는 작가, 이 두 흐름이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회화적 서사’란 ‘구조’와 같이 평면, 사각형, 물감, 캔버스, 붓과 같은 요소를 작품의 제작 과정에서 새롭게 해석해 강조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첫째 부류는 이러한 회화적 서사를 추상성의 중요한 형식적 계기로 삼고 있습니다. 둘째 부류는 소위 구상적, 재현적 요소를 다룸에도 결국 추상회화의 범주로 진입합니다. 모두 2000년대 이후의 회화를 다룰 때 가장 많이 언급됩니다. 이 두 범주가 혼재되는 현상도 볼 수 있습니다.
KIM 회화의 기본 구조와 관련해, 무엇보다 사각 캔버스라는 물리적 미학적 조건을 뒤흔드는 작품이 눈에 띕니다. 바로 프레임의 문제지요. 새로운 회화는 회화 역사의 오랜 구조적 정치였던 사각의 프레임을 중요한 표현 수단으로 삼습니다. 차승언은 나무틀을 베틀처럼 지지체로 적극 끌어들이고, 김서울은 프레임 속에 다시 프레임을 만들어 회화의 전통을 비틉니다. 더 나아가 백경호, 신현정, 이혜인은 사각 프레임의 성역에서 벗어나 다른 구조물을 덧붙인 화면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강서경, 박경률은 이 프레임의 문제를 공간으로 확장합니다. 회화를 에워싸는 액자나 설치대가 과거에는 한낮 장식물, 일종의 부가물(perergon)에 지나지 않았는데, 작품 밖에 있던 이 부가물을 작품(ergon)으로 수용하는 일. 바로 이 지점에서 회화는 3차원으로의 가능성을 활짝 엽니다. ‘ergon’과 ‘perergon’의 역전 현상이랄까?
LIM 이번 아트인컬처의 기획은 여러 면에서, 그 누구보다 먼저 21세기 신추상미술의 경향을 갈무리해냈던 평론가이자 큐레이터 밥 니카스(Bob Nickas)의 책 『추상을 그리기: 추상회화의 새로운 요소들』(2009)이나,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2014~15년 기획전〈영원한 현재: 무시간적 세상의 당대회화〉를 닮았습니다. 니카스는 2009년을 기준으로 지난 약 5년간의 신경향을 80명의 작가로 총망라해 꽤 주목을 받았지만, 홀로 신추상 전반을 담론하는 일에는 다소간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가 놓쳤던 부분을 명료화해냈던 첫 출판 기획은, 안네 링 페테르센(Anne Ring Petersen), 미켈 보흐(Mikkel Bogh), 한스 담 그리슈텐센(Hans Dam Christensen), 페터 노르가르트 라르센(Peter Norgaard Larsen)이 편집, 출간했던 『맥락 속의 당대 회화』(2010)였습니다. 메타-이론이 크게 쇠퇴해버린 상황인지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못했지만, 미디어이론가이자 큐레이터 페터 바이벨(Peter Weibel)의 1990년대 회화에 대한 비평적 회고나, 미술언론인이자 평론가 배리 슈왑스키(Barry Schwabsky)의 회화의 존재론에 대한 성찰, 새로운 추상회화의 개척자인 카타리나 그로세의 제 작업 해설 등은 유사한 작업을 펼쳐온 미술가들에게 상당한 자극이 됐더랬습니다. MoMA의〈영원한 현재〉는 ‘무시간성(atemporality)’을 주제어로 삼아 새로운 추상회화의 경향을 추적하는 야심찬 17인전이었습니다. 기획자는 새로운 추상미술의 특징을 재동화/재활성와 재연(reenactment)과 샘플링(sampling)으로 나눠 고찰하고, 더 나아가 이러한 창작 방식의 원형을 찾고자 애썼습니다.
KIM 이들과 한국의 신추상화가를 비교해보면….
LIM 예. 공통점과 차이점이 모두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국내 작가 일부가 매체 특정성의 논리를 충분히 체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형식주의를 유희한다는 점입니다. 결국은 효과적인 비평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양식화한 ‘추상적 이미지’를 창출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한데, 그렇게 되면, 추상적 허상을 만드는 작업이라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회화, 화가의 유한성에의 대응
YOO 나는 회화의 본질을 특히 강조하고 싶습니다. 회화는 존재의 ‘유한성’에 대응하는, 각각의 예술가가 한정된 삶의 차원에서 추출해낸 결단의 순간들입니다. 그러한 결정의 순간은 대체로 화가 스스로에게도 불명확하고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무의미한 판단으로 비칩니다. 이 결정이 회화가 갖는 추상성의 본질입니다.
KIM 그렇지요. 회화처럼 ‘내밀한’ 조형 언어를 가진 예술 장르가 또 있을까요? 회화의 본질은, 게르하르트 리히터 식으로 말하면, ‘가상(Schein)’에 있습니다. 눈앞의 살아 있는 현상을 하나의 ‘정지된 화면’에 ‘환영(illusion)’으로 표현하는 이 숙명의 한계 혹은 위대한 미션. 어쩌면 ‘빙의(憑依)의 조형’이라 할 수 있죠. 2차원 평면은 3차원 입체보다 차원이 하나 빠져 있지요. 이 한 차원을 접고 화가는 작품을 주관합니다. 일찍이 보들레르가 설파했듯, 회화란 깊은 추론(推論)의 예술입니다. 회화는 단 하나의 시점으로 감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단히 배타적, 전제적 예술이죠.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화가의 표현이란 대단히 자발적인 강력한 능력이 요구되는 거죠. 보들레르는 회화를 오로지 하나의 시점밖에 허용하지 않는 ‘전문적인’ 예술로, 이에 비해 조각은 많은 시점을 허용하고 많은 측면을 드러내는 ‘자연에 가까운’ 예술로 파악합니다. 그래서 조각은 시시하다고 지적한 거지요. 회화를 향유하는 일, 회화를 비평하는 일도 특별한 비의전수(秘儀傳授, initiation)가 필요합니다.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는 행위 하나만 봐도, 거기에는 실천자의 고유성이 숨어 있습니다. 회화는 인간의 신체 행동과 사고의 흔적을 기록하는 매개입니다. 순간순간의 수많은 판단이나 결단이 화면에 숨겨져 있습니다. 거기에 언어로는 결코 환원할 수 없는 수많은 정보가 내장되어 있습니다. 결국 회화작품은 작가마다 다른 생성 과정을 가지고 있고, 작품에 내포된 시간의 질도 다릅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회화를 보는 일(감상과 비평)은 화가의 그리는 일을 ‘추체험’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회화의 정체성, 회화 보기의 난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YOO 20세기 미술사를 통해 화가의 현전을 지우려 했던 수많은 시도는 추상성이 존재의 유한성과 고통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비반성적이고 환금성을 띤 권위로 변질한 것에 대한 반발이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그 예술사는 화가의 결단이라는 회화의 본질을 지우지 못했습니다. 직접 상황주의를 만들었지만 회화를 포기할 것을 요구한 기 드보르(Guy Debord) 등의 요구를 거절하고 상황주의를 탈퇴할 수밖에 없었던 아스거 요른(Asger Jorn)에게서 보듯이, 이 모순은 각자가 자신의 삶을 통해 짊어져야 할 문제입니다. 나는 대부분의 화가가 회화가 유한성에의 대응임을, 죽음에 대한 삶의 대답임을 알고 있다고 믿습니다.
KIM 이번 특집에서는 회화가 평면성, 물성, 유일성에서 벗어나 시간과 공간으로 확장되는 ‘입체회화’, ‘구조회화’, ‘설치회화’라 부를 수 있는 작품도 거론했습니다. 저는 회화가 크게 두 방향으로 진전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회화의 고유성을 존중하고 고수하는 쪽일 테고, 또 하나는 회화 스스로 자신의 고유성을 죽임으로써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쪽입니다. 특히 후자라면 회화는 이제 하나의 시점 혹은 하나의 시간 개념을 뛰어넘습니다. 회화가 ‘상황 의존적’으로 빠지게 되지요. ‘상황 의존적’이라는 의미는 작품이 많은 측면을 드러내 관객에게 지속적인 감상 시간을 요구하는 겁니다. 마이클 프리드는 이러한 특성을 일종의 ‘자연주의’라 보고, 이것을 ‘연극적’이라 불러 비판했던 것이지요. 프리드가 미니멀리즘을 부정했던 이유도 그것이 하나의 시점에서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모더니즘 회화와 대조적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자, 이 지점에 이르면 회화의 경계는 과연 어디인가, 새로운 명칭이 필요한 건 아닌가, 회화의 확산 혹은 변용의 문제를 어떻게 보는지요?
YOO 먼저 한국 현대미술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용어 가운데 ‘구조’가 있습니다. 예컨대 단색화 혹은 후기 단색화의 지향으로서 물감의 층위와 붓질의 패턴을 사각형과 평면이라는 기본 요소에 의거해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화 역시 1950년대 추상표현주의의 압도적 지배에 대한 1960년대 미니멀리즘의 반발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주의’ 미술은 하나의 사례에 머문 1970년대 프랑스의 쉬포르-쉬르파스와 달리, 한국 현대회화의 중요한 축이 됐습니다. 단색화 경우, 미니멀리즘과 마찬가지로 회화성은 붓질의 자율성이나 물감의 관능성 대신 회화적 사물로서의 ‘전일성(uniqueness)’에 포함됩니다. 이 외에도 사진을 그대로 캔버스에 전사한 존 발데사리나 금속판에 오토바이 타이어 자국을 남긴 애런 영(Aron Young)과 같은 작가의 이론적, 파생적 회화가 있습니다. 회화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해 최대한의 자유를 추구하는 작가들이 있습니다만, 여전히 회화의 기본적 조건은 첫째, 캔버스와 같은 평면적 구조, 둘째 물감과 그것을 바르는 행위, 셋째 신체와의 관계라는 기본적 요소를 포함합니다. 그 외의 경우는, 회화에 대한 개념적 대체물 내지는 은유, 패러디라고 할 수 있습니다.
LIM 저는 마이클 프리드의 연극성 비판 이론에 오류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추상회화를 ‘추창조(追創造, nachschaffen)’하는 시점을 고정적으로 사고했던 프리드는, 사실상 일안 원근법 시대의 회화를 해석하는 사고 틀에 대한 안티테제로 전개된 성기 모더니즘의 가설적 관점을 바탕으로, 형식주의 미술의 말기에 해당하는 미니멀리즘을 부정했던 것입니다. 고로 자연주의의 모순에 빠진다는 진단은 기실 순환 논리에 불과합니다. 장소가 되는 조각을 제시한 칼 안드레나 리처드 세라 부류의 미니멀리즘 이후, 제도 비판 미술이 등장하고, 담론적 설치미술이 전개됐을 때, 누구도 프리드의 논리를 바탕으로 연극성을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프리드의 논리에 동의한다면, 관계미술 같은 건 진리를 은폐하는 인형 놀이나 다름없는 게 되고 맙니다. 프리드의 논리를 응용해, 미니멀리즘은 사실 모더니즘 말기가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의 제1기였다고 재해석, 긍정해볼 수는 있겠습니다.
‘전지적 스마트폰 시대’, 실체와 환영의 동역학
KIM 스마트 기기로 연결되는 인터넷 세계가 인류의 감각과 실재까지 지배하는 시대를 맞았습니다. 이른바 ‘전지적 스마트폰’의 상황에서, 오늘의 회화는 가상을 통해 새로운 물신성과 실재를 포착하고, 그것을 회화 화면에 불러내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아티스트 저마다의 타임라인으로 타고 흐르는 시간성을 어떻게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가, 또한 그런 작품을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가, 이것은 21세기 회화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제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표면적으로는 다 같이 리얼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실은 그 창작의 원천이 자연이냐 사진이냐, 포토샵이냐에 따라 회화는 다른 얼굴을 내보입니다. 디지털 환경과 관련해 회화의 미래를 짚어보지요.
YOO 지금까지 우리는 기계 장치에 의한 사출 혹은 인쇄 방식을 차용한 회화, 예를 들어 라우센버그의 콜라주, 아상블라주 같은 배치와 연결의 회화를 봐왔습니다. 심지어 플라스틱 보드나 평면 오브제를 그대로 벽에 캔버스처럼 거는 작품도 봤습니다. 모니터를 이용한 단 프레임 비디오나 호크니의 경우에서 보듯 디지털 회화 역시 봤습니다. 지금은 인공지능으로 ‘프란시스 베이컨 효과’를 생산하는 컴퓨터페인팅까지 보고 있습니다. 트레버 페글렌(Trevor Paglen)은 데이터 수집을 통해 회화로 재구성된 추상적 평면을 보여줍니다. 지금까지 회화적 회화 혹은 추상회화가 탈의미화의 영역을 보여줬다면, 후기 인공지능 시대의 미술은 데이터의 의미가 시각적 제시를 추월하고 있습니다. 물론 전통회화나 컴퓨터페인팅이나 둘 다 의미를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결국은 지각과 감상에 있어 인간의 두뇌가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점에서 같은 방향으로 귀결됩니다. 다만 인공지능과 데이터 기반 회화의 경우, 그 기원과 이력에 관심을 갖는 인간적 시선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가 관건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현재 우리가 NFT아트에 갖는 우려처럼 고유성은 지니되 ‘이력’이 부족한 작품이 양산될 겁니다.
LIM 모더니즘은 실체(진상)의 환영(허상)을 구축해온 구습에서 벗어나는 게임이나 다름없었고, 결국 실체 자체로 전화하는 미술, 즉 미니멀리즘에 도달했었습니다만….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미술인은 환영에도 실체성과 실존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역학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미디어 환경의 발전에 따라 실체와 환영의 관계와 동역학에도 중대한 구조 변동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이었죠. 1960년대 후반, 실체적 작업 환경으로 전화-작동하는 환영을 전제로 하는 컴퓨팅 인터페이스가 개발된 이래, 컴퓨팅 네트워크에 의해 기동되는 환영은 실재계를 서서히 재매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일레인 스터트번트(Elane Sturtevant)가 사이버네틱스의 유비를 앞세워, 이미지(그림자/환영/허상)와 오브제(실체/진상)의 관계를 역전해 고찰하는 방법을 제시했던 것은 철학적으로도 탁월했습니다. 이후 몇 단계의 기술 변동과 미디어 기반의 확충과 컴퓨팅 인터페이스의 진화를 거쳐, ‘뉴미디어 환경에 의해 재매개된 실재계’와 ‘뉴미디어에 의한 투명성의 비매개를 전제로 하는 환영/허상계’와 ‘뉴미디어에 의한 비가시적 하이퍼 매개의 연결망’의 삼각 연속체가 상호 연동하며 공진하는, 새롭지 않게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공과 동시대성의 붕괴는 그렇게 찾아왔습니다. ‘뉴미디어에 의한 투명성의 비매개를 전제로 하는 환영’은 실존성 이상의 힘을 획득하고 있고, ‘뉴미디어 환경에 의해 재매개된 실재계’는 실체성과 실존성과 물신성을 공히 크게 상실하고, 인프라 리얼리티(infra-reality)의 허상적 성격을 획득하고 있습니다. 인프라 리얼리티란 분간이 되지 않는 상황에 놓인 리얼리티와 가짜 리얼리티를 지칭합니다.
회화는 어디로?
KIM 미디어 이론가 레프 마노비치(Lev Manovich)가 제시하는 ‘포스트미디어’ 개념도, 그 요점은 디지털 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기존의 다양한 미디엄은 계속 존재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컴퓨터상의 디지털 데이터로 통합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몸을 두고 있는 상황 그 자체가 ‘포스트미디어’적이며, 결국 그 앞에 대기하고 있는 것은 이젠 미디엄이 아니라 ‘소프트웨어’가 지휘하는 세계라고 지적합니다.
LIM 2015년에 저는 ‘인프라 리얼(infra-real)’이라는 개념어를 새로 제시했습니다. 이는 세상을 유동하는 맵핑 이미지로 재매개, 재현해버리는 스마트 기기 환경에서, ‘리얼함을 리얼하게 대체하는 의태된 리얼함’을 실재의 리얼함과 분간하지 못하는 현상을 총칭하는 용어였습니다. 현대의 시각 문화예술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전환이 ‘리얼한 것의 귀환’으로 특징짓는다면, 오늘의 시각 문화예술은 실감하기 어려운 양태의 ‘리얼한 것의 소멸’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한데, 인프라 리얼리티를 구현하는 미술이 역사로 축적되기도 전에, 그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인프라 추상미술’부터 시도됐다는 점은 다소 흥미롭습니다. 물론, 많은 평자가 크랩스트랙션(crapstraction), 좀비 형식주의 등으로 혹평해온 21세기의 새로운 추상미술이 이전 시대의 추상성에 상당하는 새로운 추상성이나 숭고(미)를 구현해놓은 미술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다수 좀비 형식주의 추상미술의 최대 약점은 충분히 인프라 리얼하게 추상적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오늘의 세계가 여전히 하나의 혹은 상호 연결된 플라톤식 유비의 동굴이라면, 그 동굴에서 그림자(환영)는 실체(진상)의 파생물이 아닙니다. 그림자와 실체는 상호 연동하는 단계를 지나, 서로 구분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어떤 그림자는 재정의된 실체를 지배하며 실존성 이상의 힘을 획득했는데, 불행히도 아직 그 특별한 존재엔 이름이 없습니다. 호명되지 않으니, 대중은 그를 인식, 인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21세기의 현재 상황에서, 그 새로운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쪽은, 환영계(허상계)가 아니라, 재매개된 실재계라는 점을 꼭 강조하고 싶습니다. 오늘의 동굴에서, 새로운 기술 환경에 의해 재매개된 구식 실체는 ‘제2의 그림자’가 됩니다.
KIM 좋은 논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회화 논의가 더 깊게 진전되길 기대합니다. 아트인컬처는 앞으로 조각 분야에 집중해, 한국미술의 새로운 지형을 살펴보고, 동시대미술의 지형과 견주는 기획을 이어갈 계획입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