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3040 한국 조각가 57인
- (1) 조각적 조각, 전통과 실험

posted 2022.03.14

지금, 조각은 변하고 있다. 20세기 이래 현대조각은 ‘해방’과 ‘자유’를 구가했다. 존재 개념, 소재 선택, 표현 기법 등이 무한히 확장하면서 ‘기념비성’과 ‘3차원성’이라는 조각 고유의 특권이 흔들렸다. 다른 장르와의 ‘이종 교배’가 급속도로 진행됐다. 이제는 회화, 사진, 설치, 퍼포먼스, 영상 등과 경계를 맞물고 있다. 조각이라는 용어가 대단히 애매해진 오늘날, 그러나 조각적 인식과 태도, 재료와 기법을 고민하는 ‘조각가’도 여전히 건재하다. Art는 질문을 던진다. 한국 조각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동시대의 ‘조각’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변화했으며, 그 변화의 요체는 무엇인가? 여기, 한국 동시대조각의 최전선에 서 있는 ‘조각가’를 호명한다. 전문가 7인이 추천위원으로 가담해 3040세대 중심의 조각가 57인을 선정했다. 이들의 작품을 3개 섹션의 화보로 꾸며, 조각 양식의 횡단면을 분석했다. 모더레이터 김복기가 7인의 추천사와 추가 인터뷰를 정리해 ‘조각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는 비평의 장을 열었다.

조각적 조각, 전통과 실험

조각이란 ‘3차원 공간에 구체적인 물질로 구현된 볼륨의 구성체’로 정의된다. 조각의 기원은 주술, 신화, 종교적 ‘우상 숭배’에 맞붙어 그 탄생부터 사람들의 경외감을 자아내는 ‘기념비성’을 배태했다. 그렇다면 현대조각의 시원은? 로댕은 조각의 독립성을 최초로 각성한 이로 지목된다. 해부학을 따르지 않는 인체 조각으로 ‘물체의 감상’을 이끌어냈다. 20세기 들어 예술의 순수성을 주창한 모더니스트는 본질적인 형태로 환원된 추상조각의 영역을 개척했고, 그 극단에 선 미니멀리스트는 산업 재료, 소비 사회, 현상학적 경험을 강조하며 조각의 ‘해방’을 일궈냈다. 무엇보다 조각은 소재와 밀접한 예술이다. 신소재의 등장은 현대조각의 표현 방식에 일대 변혁을 불러왔다. 스티로폼, 우레탄 폼, 에폭시, 라텍스 등 가볍고 값싼 재료에서 기념비적 형태를 추출하는 조각이 크게 늘었다. 모호한 조각의 경계에서, 한국의 젊은 조각가는 전통조각의 맥락을 잇되 ‘형태’, ‘재료’, ‘물성’ 실험으로 동시대성을 파고든다. 김인배, 이병호는 고전적인 인체 조각상을 뭉개고 파편화해 전통조각을 변용한다. 윤지영은 고전 양식의 조각을 여성주의적으로 재구성해 남성 중심의 역사에 일격을 가한다. 권현빈, 김주리, 김주환, 홍기하는 돌, 석고, 철, 흙 등 전통 재료의 ‘덩어리’ 개념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이를 동시대적 형상으로 연마한다. 유진식과 이동훈은 나무와 도자에 채색을 가미해 회화적 표현 언어를 접목한다. 최고은, 최태훈은 기성 용품에서 조각적 형태를 추출하고, 서성훈, 윤정의, 함진은 재료와 표현 기법의 일체화에 골몰해 새로운 양식을 제시한다. 이충현과 강재원은 물리 법칙에서 자유로운 3D 환경에서 ‘미래의 조각’을 내다본다. 조재영, 홍정표는 큐브를 반복 구축해 기하학적 형태의 조각을 제작한다. 김정현, 이상윤은 나무 조각으로 예술의 쓰임새, 조각의 생태성을 고민한다. 황수연과 여다함은 종이, 실 등 가벼운 재료로 탈구축의 조각을 제작한다.

김인배〈무거운 빛은 가볍다_왕관〉

김인배〈무거운 빛은 가볍다_왕관〉, 황동, 40×30×57cm, 2014,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김인배 김인배는 인간 신체를 변형한 조각을 제작해왔다. 눈, 코, 입이 없는 인물상이나 둥그런 양감만으로 표현한 두상 덩어리는 조각을 권위적으로 인식하는 사회적 편견에 질문을 던진다. 또한 조각의 기본 요소인 점, 선, 면, 양감, 질감 등의 일부를 극대화해 조각에 대한 시지각적 경험을 강화했다. 조각의 고전적인 범주를 재인식하거나 확장해 새로운 형태를 제시한다.

유진식〈미스티 부르주아〉

유진식〈미스티 부르주아〉, 조형토, 25.4×20.3×53.3cm, 2020,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유진식 유진식은 도자를 매체로 인체 조각을 제작한다. 영상 속의 무용수를 크로키하고, 이 드로잉을 무작위로 뒤섞고 이어 붙여 새로운 인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를 토대로 얇은 흙판을 자르고 구부려 도자로 구워낸다. 그의 도자 인체는 몸짓의 조형에 치중할 뿐, 남성이나 여성 혹은 인체 너머에 있는 관습적인 시선을 차단한다.

이병호 단체전 〈CAST〉

이병호 단체전〈CAST〉 설치 전경 d/p 2021,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이병호 이병호는 고전주의적 인체 조각을 동시대의 방법론으로 변용한다. 라이브 캐스팅으로 틀을 뜨고, 이 캐스팅을 반복해 신체 덩어리를 ‘모듈’화한다. 이 모듈의 파편을 조합해 하나의 조각으로 완성한다. 최근에는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의 형상 일부를 참조해 이전에 제작해놨던 작품을 다시 변형하거나, 새로운 지지대를 붙이고 동세를 바꿔 전시했다. 부서지고 꺾여 접합된 이 조각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윤지영〈레다와 백조〉

윤지영〈레다와 백조〉, 설치 전경 d/p 2021,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윤지영 윤지영은 조각이 점유하는 3차원의 실체를 다층적 서사로 풀어낸다. <레다와 백조>는 미술사에서 반복적으로 재현되어온 그리스 신화를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작품. 익숙한 고전조각을 재현하되, 잘려 나간 백조의 목이 자신의 성기를 물어뜯는 형상으로 바꿨다. 주변의 서 있는 원형 조각은 작가와 세 명의 여성 타투이스트가 협업한 작품. 관습적으로 고착된 ‘여성의 대상화’에 문제 제기를 한다.

이동훈 〈Not Shy〉

이동훈〈Not Shy〉, 나무에 아크릴릭, 45×40×94cm, 2021,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이동훈 이동훈은 ‘나무 조각’을 쪼고 칠한다. 회화과 출신의 작가는 나무의 결이나 질감에 반응해 조각을 깎고 다듬는다. 재료의 수축과 균열을 자연스러운 조형의 조건으로 활용한다. 그 위에 채색을 더해 화려한 ‘회화적 조각’을 완성한다. 최근에는 ‘K-Pop’ 아이돌을 주제 삼아 춤추는 신체 동작을 조각으로 만들어냈다. 움직이지 않는 조각 본연의 양식에 ‘동세’를 덧입히는 실험.

윤정의〈모델〉

윤정의〈모델〉, 조색한 석고, 아이소핑크, 유성 연필, 47×51×187cm 2021,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윤정의 <모델>은 누드 모델 드로잉 서너 장을 참고해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낸 작업. 정지 상태를 유지하려 애쓰는 모델의 동작을 표현했다. 흙을 쌓은 자리에 석고를 올리고, 물기가 마르면 쌓았던 흙을 긁어내기를 반복해, 거친 표면으로 처리한다. 신체는 뼈와 근육, 피부가 하나로 엉켜 있다.

서성훈〈자화상〉

서성훈〈자화상〉, 피지컬러, 40×40×190cm, 2020,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서성훈 서성훈은 대리석 염색으로 시작해 시멘트 도색, 석고 염색을 거쳐 2019년경 ‘피지컬러 (Physicolor)’라는 색 덩어리를 창안했다. 최근에는 직조된 피지컬러를 스프레이로 도색해 납작했던 기존의 조각 형식에서 탈피하고, 자립하는 색 조각에 무게, 촉각, 공간, 시간, 빛 등의 요소를 끌어들인다.

홍기하〈Vanilla〉

홍기하〈Vanilla〉 시리즈 석고 65×80×130cm, 22×29×185cm, 160×70×161cm(왼쪽부터 차례대로) 2021,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홍기하 홍기하는 조각에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조각은 무엇인가, 조각가는 누구인가, 이 시대의 조각이란 무엇인가, 왜 더 이상 크고 무거운 조각은 탄생하지 않는가···?’ 작가는 조각의 ‘비효율적’ 요소를 수용해 무거운 재료로 천천히 조각을 제작한다. 〈Vanilla〉 시리즈는 물성과 양감이 밋밋해진 동시대조각의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돌과 석고로 조각하는 훈련을 스스로 지시한 작업.

최고은〈오페쿨러〉

최고은〈오페쿨러〉, 대리석 판재, 인조 대리석 220×45×45cm, 100×100×25cm, 220×45×45cm, 112×86×18cm 2020,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최고은 최고은은 사물과 조각의 관계를 탐구해왔다. 레디메이드의 미술사를 참조해 산업 오브제를 전복적으로 전유하는 작품을 발표해왔다. <오페쿨러>는 덕수궁의 굴뚝과 소화전을 석탑 양식으로 바꿔낸 작업이다. 상업용 대리석 판석재를 수평으로 쌓아 올려 물질의 다양한 존재 양상을 탐구한다.

권현빈〈구름〉

권현빈〈구름〉, 혼합재료 가변크기 2017~18,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권현빈 권현빈은 물질에 내포된 조형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스티로폼이나 돌을 조각적 공정으로 두들기고, 문지르고, 자르는 ‘상상’을 동력 삼아 형태를 도출한다. 그중에서도 작가는 상품 가치가 사라진 폐석재를 다듬어 쓴다. 하나의 상품으로 규격화되었지만, 파손되거나 자투리로 남은 절단면을 그대로 작품의 조형 요소로 활용한다. 흥미롭게도 작품은 채석장에서 채굴해 온 석재의 물성이 되살아나는 듯 보인다.

김주리〈모습 某濕 Wet Matter 1〉

김주리〈모습 某濕 Wet Matter 1〉, 젖은 흙, 연필나무향, 사운드 외 혼합재료, 610×160×680cm 2020 ,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김주리 김주리는 일시적으로 생겼다 사라지는 자연이나 물질의 시간을 거대한 덩어리에 담아낸다. <모습>은 중국 단둥 지역의 압록강 하구 습지를 답사한 경험에서 출발했다. 한국, 북한, 조선족, 중국 등 다양한 문화적 공동체가 경계를 맞대는 압록강 풍경에 착안해, 흙과 물이 뒤섞인 습지의 형상을 전시장에 끌어왔다.

김주환〈월인철강〉

김주환〈월인철강〉, 철, 270×400cm, 2007,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김주환 김주환은 철 조각에 인간의 존재론적 고민을 투영한다. 두꺼운 철사를 말아 용접한 커다란 원 형상은 불교적인 번뇌와 깨달음의 의미를 담고 있다. 동심원은 번뇌를 의미하는 수면(隨眠)과 물결이 일렁이는 수면(水面)을 이중적으로 은유한 형상. 달이 천강에 비친다는 뜻의 ‘월인천강’은 저마다 다르게 달을 바라보는 인간의 제한된 시각과 인식 체계를 의미한다.

이충현〈Trinity〉

이충현〈Trinity〉, 슈퍼 미러 스테인리스 스틸, 우레탄 도장 100×200×100cm, 2021,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이충현 이충현은 가상이 실재를 대체하는 오늘의 삶의 양상에 대응해 시뮬레이션으로 ‘조각의 재현’에 집중한다. 3D 모델링 프로그램인 스케치업의 가상 공간에 에스키스를 하고, ‘큐브’의 3차원적 배열과 구축을 시도한다.〈Trinity〉는 동일한 형태의 세 조각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설치한 작업. 새로운 제작 공정과 작품 배치로 미니멀리즘 조각의 문법을 재해석했다.

강재원〈Exo2_crop〉

강재원〈Exo2_crop〉, 인플레이터블, 213×458×270cm, 2021,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강재원 강재원은 3D 프로그램의 기본 입체 도형을 변주해 조각의 형태를 선택한다. 이를 실제 공간으로 옮길 때는 나일론 원단에 공기를 주입해 세우는 ‘인플레이터블’로 구현한다. ‘인플레이터블 조각’은 무게를 비운 용적 덩어리다. 금속처럼 보이는 표면을 유지하기 위해 끝없이 공기를 주입해야 한다.

황수연〈한낮의 집 2〉

황수연〈한낮의 집 2〉, 종이, 77×15×150cm, 2018,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황수연 황수연은 재료의 고유한 성질을 자신만의 연금술로 변화시켜 조각을 제작한다. 모래를 본드와 섞어 단단하게 만들고, 알루미늄 포일을 뭉치고 망치로 두들겨 견고하게 바꾼다. 이 작품은 전통조각의 육중한 형상 같지만, 금속 표면처럼 처리한 ‘종이’로 만들었다. 콜라주와 아상블라주 기법을 조각에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품이다.

조재영〈Monster〉

조재영〈Monster〉, 카드보드, 콘택트 페이퍼, 나무, 바퀴 가변크기 2016,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조재영 조재영은 기하학 선과 면으로 조각을 구성한다. 주로 카드보드지 등의 가벼운 재료를 사용한다. 폴리곤 단위로 접합된〈Monster〉시리즈는 전시 때마다 변형된다. 폴리곤을 덧붙여 증식하거나 색을 칠해 변화의 흔적을 남긴다. 제작 공정에는 판지를 자르고 이어 붙이는 부단한 노동이 요구된다. 폴리곤의 언어로 사물을 통제하는 고된 쾌락···.

홍정표〈Hidden Edge #4〉

홍정표〈Hidden Edge #4〉, 좌대, 아크릴 각재 36×68×103cm 2016 ,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홍정표 홍정표의 작업은 예술이 되기 위한 ‘조건’에 의심을 품는 데서 출발한다. ‘좋은 조각가는 누구인가, 예술은 무엇인가’ 등의 물음을 던지면서 3차원의 불완전성을 탐구한다. 2013년부터 제작한〈Hidden Edge〉시리즈는 육면체의 기본 틀을 다양하게 재조합해 구축의 효과를 꾀한 작업. 그의 조각에는 동시대조각가의 인식적 사유, 촉각적 유희, 시각적 강박 등이 투영되어 있다.

여다함〈향로〉

여다함〈향로〉, 뜨개실, 솜, 철사, 연무기 44×34×70cm 2019,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여다함 여다함은 향로 형태의 ‘뜨개질 조각’을 제작한다. 작가는 고체, 액체, 기체로 변화하는 물질의 존재 상태에 관심을 둔다. 직물이 늘어지고 연기가 엉켜 올라가는 형상은 대단히 처연하다. 주름과 구멍만 남은 이름 없는 혹은 이름뿐인 어떤 형상을 떠올린다. 무용(無用)의 시공.

최태훈〈자소상 2〉

최태훈〈자소상 2〉, 보조 테이블 다리, 90.5×81.5×171cm, 2020 ,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최태훈 최태훈의〈자소상〉은 이케아의 DIY 가구로 만들었다. 작가는 조립식 기성 가구를 자신이 세운 조건에 근거해 예술작품으로 만들었다. 그 룰은 ‘스스로 직립할 것’, ‘모든 방향에서 형태가 다를 것’, ‘어디서 보아도 완성도가 균질할 것’, ‘오브제를 재가공하지 말 것’. 기성품의 조각적 해석은 그것이 소비되는 사회의 단면을 드러내고, 순수미술과 디자인의 경계를 허문다.

이상윤〈Path〉

이상윤〈Path〉, 간벌한 나무 2,500×3,000cm, 2015,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이상윤 이상윤은 나무를 주 재료로 조각작업을 이어 나간다. 공사장에 버려진 구조재, 간벌하고 남은 통나무 등 폐목으로 숟가락, 휴지통, 빗자루, 파리채를 만든다. 조각의 일상용품화를 시도한 작업으로 예술의 비실용성을 되묻는다.〈Path〉는 간벌한 나무를 경기도 양주 장흥면 석현리에 설치했다. 서 있는 나무를 눕혀 고불고불한 오솔길을 냈다.

김정현 나무 조각으로 ‘벌목 현장’의 감각을 재현하는 김정현. 그는 말한다. “나는 작업이 숲과 같은 하나의 생태 구조를 이룰 수 있음을 발견했다. 작품 앞에서 어떤 이는 공간에 공명하는 소리에 심취해 숲과 인간의 관계성을 탐구하고, 또 어떤 이는 나무의 향기를 맡으며 쓰러지는 숲의 서글픔을 기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