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기 현대조각은 장르 개념, 소재와 표현 기법 등 모든 것에서 ‘해방’을 구가했던 시대였다. 첫째, ‘대상’에서의 해방. 이전의 조각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형태(주로 인체)의 표현이거나 신화와 종교, 사상의 표명이었다. ‘추상조각’의 탄생과 함께 공간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볼륨이나 밀도의 절대성에서 벗어나 요면(凹面)과 공허한 공간까지 조각작품에 도입됐다. 이러한 변화는 조각의 존재 개념을 근본부터 흔들었다. 둘째, 새로운 소재와 표현의 확산. 조각은 탄생부터 소재(나무, 돌, 점토, 브론즈)와 밀접한 예술이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새로운 소재로의 확장은 조각의 표현 방식에 일대 변혁을 불러왔다. 플라스틱, 시멘트, 철재 외에도 투명한 것, 부드러운 것까지 조각의 소재로 사용됐다. 제작 기법도 ‘깎거나(조각) 붙이는(조소)’ 방법에 더하여 구성이나 아상블라주 같은 방법이 새롭게 등장했다. 절단이나 용접 등의 산업 공정도 실행됐다. 또 움직이는 조각(모빌, 키네틱)이 등장해, 시간이라는 개념이 새롭게 부상했다. 이밖에도 직조의 부활, 좌대의 소실, 중력에서의 해방, 닫힌 형태에서 열린 형태로의 변화 등도 현대조각의 특징이다.
현대조각의 ‘해방’과 ‘자유’는 조각의 정체성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21세기 조각은 다른 장르와의 이종교배가 급속히 진행되어 ‘회화조각’, ‘사진조각’ 같은 혼성의 양식으로 뻗어간다. 무엇보다 입체 혹은 3차원 조형이 조각의 특권이었건만, 이젠 그것을 설치, 퍼포먼스, 영상 등이 공유하는 시대다. 결국, 조각이란 말 자체가 대단히 애매해졌다.
최태만 1985년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현대조각의 흐름』이 출간되었고, 1986년 퐁피두센터가〈근대조각이란 무엇인가?〉를 기획해 서구 근대조각의 주요 흐름을 훑었다. 조각에 관한 저술과 전시가 같은 시기에 이뤄졌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퐁피두 전시 이후로는 주요 미술관이 기획한 명망 있는 조각가의 회고전을 제외하면, 조각의 역사적 특성과 의미, 조각의 오늘과 내일을 조명한 전시는 거의 개최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조각이란 장르 개념이 과연 지속될지, 21세기에도 그 개념이 유효할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조각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20세기까지 지탱되어온 조각 개념의 위기가 도래했다. 그 불길한 징후는 가보 형제가 1920년에 발표한 「사실주의 선언」에서 ‘볼륨을 거부’하고 ‘덩어리를 포기’했을 때 이미 나타났다. 움직임(kinetic)이 ‘살아 있는 시간(real-time)’을 인식하는 기본 형식이라 주장한 나움 가보는 투명 플라스틱, 나일론, 유리, 금속판 등의 새로운 소재로 물체의 질량을 최소화하면서, 그것에 시간과 운동을 부여했다. 가보 형제는 3차원 물체로서 전통적인 조각의 축출을 선언했으나, 그들의 작품은 퐁피두 전시에 근대조각사의 증거로 초대되었다. 역설이다. 비록 기진맥진할지언정 조각의 죽음은 계속 유보되고 있다.
현대조각의 죽음, 그리고 조각의 복권
김종길 너무나 기다렸던 기획이다. 사실 조각 전시도 찾아볼 수 없고, 그렇다고 이제 조각만으로 전시한다는 것도 부질없어 보였는데, 변화하는 조각의 언어를 되짚는 아트인컬처의 이 기획에서 21세기 새로운 한국 조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2009년부터 3년간 미술연감 『한국미술』(월간미술 발행)의 ‘조소’ 부문 총평의 집필을 맡았다. 조각의 변화를 직접 목격했던 좋은 기회였다. 당시 미술연감에 실렸던 세 편의 글 제목이 「현실을 투영하는 다중적이며 입체적인 조소 전시들」, 「신형상주의, 신개념주의의 확장」, 「조각적 변태의 입체미술」이었다. 2011년부터 ‘조각’ 부문이 ‘입체’로 바뀌었다. 나는 이 변화를 이렇게 요약했다. “근대적 조각 개념이 현대적 입체 개념으로 확장되었거나 재정의된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말이 엎어지고 개념이 소급된 뜻의 파계일 수 있다. 그동안 조각이 입체를 수렴했고, 거기에 공간과 조형을 더했으니 말이다. 새로 쓰는 입체 개념은 3차원이되 다차원이며, 구체적 물질이되 비물질이고, 양감이되 비가시적인 것의 합이다. 조형은 이제 차원의 경계를 한정하지 않으며 또한 물질/물성의 통시적 감각을 요청하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이 기획한〈조각적인 것에 대한 저항〉(2009)과 김월식이 기획한〈낭만적 부락〉(2009)이 한 사례였고, 그 외에도 2010년에 열린 김범 개인전, 이수경의〈Broken Whole〉, 권용주의〈부표〉, 김주현의〈뒤틀림-그물망〉, 그리고 코라아나미술관의〈기념비적인 여행〉에 출품한 김상돈의〈불광동 토템〉과 제4회 페스티벌 봄은 주목할 만한 전시/작품이었다. 2011년으로 폐간된 연감은 이렇게 끝난다. “입체미술 또는 입체 조형예술은 전방위적 혼란과 수다, 방사 및 자율적 조합과 혼합 속에서 잉태될 것이다.” 그로부터 정확히 10년이 지났다. 한국 동시대조각의 실상은 그때부터 잉태된 씨알들의 실체로 보인다. 너무나 놀랍고 경이롭다.
임근준 한국 미술계에도 국제 미술계에도, ‘조각의 귀환’이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고 있지만, 국내 국공립 미술관에서 실험적 작업을 전개해온 청장년 조각가를 한자리에 모은 기획전은 볼 수 없는 상황이다. 소장품 현황을 봐도 조각은 찬밥 신세다. 한국 현대조각사는 최태만 선생이 연구해주셨고, 오늘의 조각은 평론가 안소연 선생이 비평해주고 계시니, 기획/연구 전시를 열어줄 큐레이터만 있으면 되는데, 찾기 어렵다. 1999년의〈근대를 보는 눈-조소〉이후 의제가 실종되고 만 탓이 크다. 21세기 현대미술의 지형에서, 조각 혹은 오브제가 다시 중요해진 배경엔, 전 지구화 시대의 설치미술, 즉 담론적 장소특정성(site-specificity)을 전제로 메타 비평을 전개해온 작업들, 특히 다매체 영상 설치작업의 몰락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조각적 조형이 다시 중요해진 배후엔 더 근본적인 동인이 있다. 2007~8년 이후 미디어 환경과 공리적 오브제 제작 과정의 변화로 인해, 2D가 3D로 인식되고, 3D가 2D로 인식되기 시작하는 복합적 상황이 전개되면서, 회화적 회화와 조각적 조각은, 사실상 ‘인간 현존의 위기’라는 동일한 문제의 다른 면을 다루는 일이 됐다.
미국의 경우, 2007~8년에 걸쳐 뉴뮤지엄에서 열린〈비기념비적인: 21세기의 오브제〉란 제목의 대형 전시가 전환점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전시가 추적해낸 비기념비적 현대조각 혹은 오브제작업의 계보에서 일종의 원점으로 지목된 작가는 이자 겐츠켄(Isa Genzken)과 레이첼 해리슨(Rachel Harrison) 이하 조각가들이 주류였지만, 이후 ‘좀비 포멀리즘’으로 불리던 화가들의 작업도 포괄하고 있었다. 즉, 2010년대 이후 형성된 조각의 귀환은, 추상회화의 새로운 부활과 맞물린 현상이기도 했다. 그와 함께, 과거엔 본격적인 현대미술로 간주되지 않았던 도자조각이나 공예 재료와 기법을 구사하는 조각들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기도 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알린 셰쳇(Arlene Shechet)이었다.
안소연 2000년대 이후 동시대조각의 변화는 설치미술의 국제적 확산이 지속되는 가운데, 새로운 매체 사용을 통한 조각의 한계나 문제를 극복하거나 대안을 마련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특히, 국내 미술씬에서는 작가뿐 아니라 미술 현장의 다양한 주체 및 제도 전반에 걸쳐 본격적인 세대교체가 가속화되며, 기존의 가치에 대한 해체와 재구축이 활발히 시도됐다. 그 출발점에서 급진적인 조각적 전환을 시도한 대표적인 조각가로 이형구, 최수앙, 권오상, 함진 등을 꼽을 수 있다. 그중에서 권오상과 함진은 새로운 매체를 탐구하여 조각적 조건을 갱신하는 동시대의 경향을 이끌어냈다.
정현 아서 단토는 저서 『일상적인 것의 변용』(1982)에서 작품과 일상 사물이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동시대미술의 전환을 시사했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 주제가 아니라 문맥의 변화를 감지한 것이다. 나는 ‘조각성의 변용’이란 가정으로, 한국 동시대조각의 흐름 가운데 조각을 구성하는 양감, 균형감, 역동성과 같은 조형적 조건을 바탕으로 한 미학적 실험을 전개한 작가에 주목한다. 이러한 가설을 다루기 위해서는 서양 조각에서 비롯된 전통적 관점의 ‘조각성’이 어떻게 한국 근현대조각을 구성하는 미학 원리로 작용했을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매우 거칠게 본다면, 한국 미술에서 조각성은 광복 이후 새로운 기법과 질료 등을 받아들이면서 형상이 아니라 형태, 질감, 공간에 관한 지속적인 실험으로 확장되었다. 조각적 요소를 해체하면서 동양성, 주술성 등을 끌어내어 물질과 정신의 관계항을 제시하였다. 한국의 모더니즘 조각은 회화와 마찬가지로 사실주의 미학과 비구상적인 미니멀리즘 조각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이념적 한계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마침 1988년 올림픽 조각공원의 조성은 현대조각의 흐름을 희미하게나마 제시했으나, 서구 미술과 한국 미술을 사대적인 시선으로 재단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한국 조각계는 정치적 굴레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딜레마를 안는다.
한편 사실주의 조각 전통을 변용한 작업은 2000년대 초반에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당시 미술계가 추구한 동시대성은 주로 미학의 사회적 가치를 따르는 다원적 생태계로 재배열하려는 의지가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관습적인 교육 과정과 미술현장 사이의 거리는 이전보다도 더 멀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이격 현상은 조각성의 변용이 나타나는 촉매로 작용하게 된다. 사실 2000년 이후에도 교육 환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세계화를 위해 질주하는 시간과 예술의 보폭 사이의 어긋남으로 생성된 결절은 시대착오적(anachronic)인 가능성을 반강제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포스트모던한 문화 현상은 전통적 조각성을 담론으로 삼아, 동시대와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겠다. 따라서 조각성의 변용이라는 가설은 이미 하나의 장르로 수용된 ‘비물질적인 태도로서의 동시대조각’과의 절합점을 찾아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박춘호 이제는 독립된 개체를 중심으로 한 ‘조각’이라기보다는 다양한 매체로 공간을 활용하는 ‘입체’라고 하고 싶다. 조각이든 입체든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전시는 작가 개인의 관심사에서 비롯된 작품으로 관객들과 소통하는 자리다. 소통하기 위해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과업은 본인의 생각을 잘 정제해서 작품화하는 일이다. 이 시대 미술작품은 ‘미적 효용을 주는 소비재의 역할과 일정한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투자 수단’이 되었다. 이제 그 어떤 상품도 과시적인 소비재로 미술품을 따라갈 수 없으며, 미술은 산업이 되었다. 이런 시대에 왜 작가가 되려고 할까? 어느 때보다도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한국 조각의 최전선
김복기 한국의 동시대조각은 다양한 갈래의 작품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 경향을 거칠게 세 파트로 나누어 화보를 꾸몄다. (1)조각적 조각, 전통과 실험. ‘덩어리’ 개념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전통조각의 재료와 형식을 (비)기념비적으로 표현하는 작품이다. 모더니즘 조각을 동시대적 형상으로 비틀거나 재료를 달리해 재해석하는 조각도 등장한다. 무거운 조각에서 가벼운 조각까지 재료와 기법의 변용이 대단히 자유롭다. 모더니즘 조각을 ‘인용(appropriation)’해 조각의 ‘전통’을 메타-형식적으로 다루기도 한다. (2)혼성(hybrid) 조각. ‘3차원 입체’라는 조각 장르의 고유성, 그 구속에서 벗어나 다른 장르와의 자유로운 혼성을 시도하는 작품이다. 회화, 사진 등과 표현의 경계가 맞물리면서도 ‘조각적인 조형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회화-조각, 사진-조각, 평면-조각, 공간-조각 등으로 조각의 존재 조건을 확장한다. 추상과 구상, 형식과 비형식, 영속성과 일시성 등의 이원론적 분류도 깨진다. (3)내러티브 조각, 형식에서 내용으로. 여기에서는 작가가 사회와 개인에 대한 적극적인 발언자, 이야기꾼으로서의 역할을 중시한다. 큰 이야기부터 작은 이야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담는다. 인터넷 환경의 변화와 함께 조각의 생산과 소비 경향도 바뀌고 있다. 물리적으로 가벼운 재료가 사용되거나, SNS의 속도감을 감지할 수 있는 조각이 등장한다. 전통조각이 육중한 몸체로 압도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면, 동시대의 젊은 조각은 매력적인 외형으로 온라인에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한다.
특히 젊은 조각의 판도에서 새로운 소재의 탐구가 눈에 띈다. 에폭시, 라텍스, 스티로폼 등의 산업 재료에서 기념비적 형태를 추출하는 조각이 크게 늘었다. 소비문화의 주목과도 통한다. 조각이 재료의 예술이라는 사실을 존중하면서 일상 소재까지 작품에 끌어들이고 있다. 또 공업 제품을 재료로 들여와, 물질의 생산 구조와 조각 예술의 물질성을 교차 탐구한다.
임근준 한국의 경우 ‘설치미술의 폐허’를 전제로, 조각적 작업의 귀환이 이뤄졌다. 이는 1980년대생 작가들이 주도한 신생공간/신생 콜렉티브 운동과 맞물린 현상이기도 했지만, 조소라는 키워드를 앞세워 새로운 창작 경향의 주제와 형식을 탐구하려는 시도는 그리 충분히 혹은 적절히 전개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선 버내큘러 사물/공간의 타자성을 탐구하는 오브제작업을 전개해온 여성 작가군을 지목해볼 수 있다. 곽이브, 최고은, 조혜진이 그들이다. 한편, 게임적 리얼리티나 오타쿠들의 2차 창작 문법을 의태하는 방식으로 창작하는 경향도 두드러졌다. 돈선필이나 차슬아 외에도 여러 사례가 있지만, 의외로 꾸준히 작업하는 경우가 드문 듯하다.
가상적 정보가 실재성을 띠는 시대에 시뮬레이션 가능한 혹은 불가능한 양태로 조각의 새로운 존재 조건을 탐구하는 경우론, 황수연, 이충현, 서성훈을 꼽을 수 있다. 현대조각의 역사적 차원을 참조점 삼아 소조적 조각을 전개해온 이들도 있다. 오은과 곽인탄 등이 그 주인공이다. 또 우한나는 부드러운 조각과 공예와 패션의 문법을 뒤섞어 좀비-포멀리즘적 조각을 전개해왔고, 최하늘은 좀비-포멀리즘적 조각으로 이러저러한 참조적 퀴어아트를 제작해왔는데, 신체성에 연루된 조각이라는 점에선 모종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최태훈이 레디메이드 사물의 조각적 해석으로 본격적인 조각의 가능성을 탐구한다면, 김동희는 타인의 작업을 전시하는 인터페이스의 디자인에서 조각적 시공을 조형해왔다. 마지막으론 공예 혹은 민예적 기법으로 조각가적 조각의 신기원을 창출하는 이들이 있다. 목조각과 회화작업을 병행하고 있는 이동훈과 도예조각과 회화작업을 병행하고 있는 유진식은, 극히 예외적이지만, 앞서 언급한 이들과 같은 과제를 공유한다. 오늘의 기술로 시뮬레이션하거나 출력-제조할 수 없는 양안 시각의 문제적 조각을 지향한다는 목표 말이다.
김종길 다다의 미학이 추궁했고, 플럭서스 미학이 현실과 초월의 경계를 넘나들며 가닿고자 했던 사건을 떠올린다. 요셉 보이스와 백남준의 네오 샤먼적 미학을 곰곰이 궁리한다. 시퍼런 칼날 위에서 새로운 미의 황홀과 우주를 집전하는 자의 원시적이고 근원적인 정체성! 샤먼은 최초의 미학자였고 미의 담지자였으며 미의 대리자였다고 할 수 있을 터이다. 동시대조각은 그런 프리미티브적 네오 샤먼 예술가들의 도래를 보여준다. 권용주의 예술적 촉수는 놀랍다.〈폭포〉작업을 보면 예술적 오브제와는 하등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일상의 하위적 물건을 무심하게 어떤 기준도 없이 위태롭게 쌓아올려 작품을 구성한다. 아스라한 높이의 플라스틱 개집에서 쏟아지는 폭포수(헛짓의 가짜 폭포라는 촉)는 그 위태로운 오브제(‘일상’이라는 한국 사회의 촉)과 충돌하면서 근대화, 도시화, 문명화의 디스토피아를 비꼰다. 김상돈의 유머는 우리 앞에 직립해 있는 작품의 실체가 아니라, 그 실체의 이면에 똬리를 틀고 앉아 이 세계와 저 현실을 샤먼의 시선으로 꿰뚫고, 꿰뚫어서 터진 구멍으로 깔깔거리는 공수의 언어를 퍼붓는 천연덕스러운 풍자에 있다. 제13회 광주비엔날레에 출품한〈행렬〉에 이르기까지 그의 토템적 조형이 발산하는 미학적 줏대는 쉬지 않고 이어진다.
이병호는 조각에 ‘숨’을 넣고 빼는 방식으로 형상에 시간성을 부여해 근대조각의 천재적 리얼리티 관념을 한방에 날려버렸다. 또 이미 미술사에서 기념비적 ‘조각성/예술성’을 획득한 인체를 해체하고 재구성해 조각의 ‘우상성’을 간단없이 삭제한 뒤, 앙토냉 아르토의 원초적 연극처럼 ‘원시적 생명의 충일함’을 채워넣는다. 이동훈의 조각은 선배들이 실험했던 목조와 채색조각의 형식에 동시대의 감각을 덧입힌다. 그 감각은 놀랍게도 ‘오래된 미래’의 소박, 투박, 불각(不刻)일 것이다. 지나치지 않고 넘치지 않은데 ‘충분하다’는 느낌을 주는 미래 조각이다. 예스러움의 조각미에서 미래 감각을 틔웠다고 해야 할까! 믹스앤픽스의 작업은 담시(譚詩)를 닮았다. 그들이 조각으로 들려주는 서사는 장편이다. 신화적이고 역사적이며, 때때로 그들은 신비하고 비극적인 사건을 형상화한다. 그것은 마치 한 편의 잘 짜인 무대와 같다. 관객은 그 사이를 거닐면서 미학적 사건의 ‘목격자’가 된다. 그들이 다루는 재료는 늘 가변적이고 일시적이지만, 어떤 ‘숭고’에 가닿는다.
전소정은 소리를 조각하고 느낌을 조각하고, 보이는 그 무엇을 조각하는 비조각의 예술가다. 그의 작업은 공간을 구성하는 소리, 영상, 오브제, 빛, 그리고 건축적 소재로 ‘조각적인’ 면모를 보여주지만, 그것이 조각은 아니다. 그 모든 것은 그가 다루는 하나의 주제를 향해 구축될 뿐이다. 주제는 ‘현실’과 이어지는데, 그런 측면에서 그의 공간은 하나의 조각적 현실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이다. 곽인탄의 입체는 이미 세워진 미술사/미학을 뒤죽박죽으로 물성화해버린 전복적 구조물이다. 그는 자신이 제작한 작품의 흔적조차 위대한 작품의 그림자와 하나로 뒤섞어 액체 조형물(혹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구조물)로 만들어버린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은 ‘위대한 작품성’ 따위를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새롭다.
최하늘의 조각은 어떤 장면, 어떤 풍경, 어떤 극적 장치로 이어진다. 조각보다 먼저 그는 공간을 구성하는 장면, 풍경, 장치로 조각적 주제어를 튀어 오르게 한다. 재료는 그 뒤를 따른다. 그에게 재료라는 물성은 조각을 한정하는 절대적 가치가 되지 못한다.〈입체 병풍〉연작,〈대체시선용 조각〉이 그것의 주제어였다면, 최근 김종영의 작품을 퀴어-페티쉬 코드로 접목한 것은 유쾌하고 발칙한 상상어다. 돈선필의 조각은 만화, 애니메이션, SF 영화의 ‘아니마(anima)’ 세계에 홀린, 존재의 기억술과 그 기억술이 만들어낸 판타지 만화경이다.〈디버깅 스테이션〉은 스크린 너머의 아니마가 현실의 아니마로 재현된 판타지 조각일 터. 그는 종종 수집한 피규어 사이로 그가 제작한 작품을 개입시킨다. 피규어 캐릭터의 세계와 우리가 사는 현실이 겹치면서 미술과 미술 아닌 것의 세계 가운데 관객은 혼란에 빠진다.
최태만 잡지나 신문의 화보에서 오려낸 이미지를 거울에 반사해 벽에 비추는 이창원의 그림자와 김주리의 축축한 덩어리로서 건축물은 전통적인 조각을 벗어나고 있다. 고즈넉한 산사의 어느 선방에 한가롭게 놓여 있을 법한 작은 탁자에 놓인 목탁이 반복적인 나무채 기계의 작동으로 두들겨 맞는 김상진의〈명상〉은 조각인가, 설치인가, 키네틱인가. 미디어, 캔버스 프레임, 화이트 큐브를 조합한 금민정의 작품은 조각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 이은우와 조재영의 개념적인 구조물은 사물의 관습적인 쓰임새에 질문한다. 진기종은 뜻밖에 전통적인 조각의 범주에 속할 뿐만 아니라 극사실 조각에 가깝다. 이들을 하나의 개념으로 규정하고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있을까.
내가 주목한 작가들의 작업에서 발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통점은 조각이라기보다 일상과 소통이며 사물은 그 매개체이다. 예컨대 조혜진의 유사 주택은 30년 이상 한동네에서 살아온 그의 일상의 흔적이자 기억이며 기록이다. 민성홍은 일상에서 사용되다가 폐기된 사물을 조립해 익숙하지만 낯선 형태를 구축한다. 이들은 사물로 일상과 그 신화에 대해 질문하고 사회를 조각한다. 소통은 관계가 형성되어야 가능하다. 사소하든 심각하든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의제’이다. 이들이 제안하는 의제는 개인에서 비롯해 사회로 확대된다. 그것은 사회를 향한 말 걸기, 규정된 일상을 거부하고 그곳으로 ‘표류하기’(물론 기 드보르의 말이긴 하다), ‘무위의 공동체’(장 뤽 낭시를 차용했다), 구축을 위한 ‘일상의 실천’(당연히 앙리 르페브르의 개념을 훔쳐왔다)이다. 내가 허락 없이 베낀 이 개념으로 작가들의 작업을 해석할 의도는 추호도 없다. 다만 이들의 작업을 어떻게 읽을까에 대한 조심스러운 말 걸기를 하고 싶을 따름이다.
인공 지능, 가상 현실, 증강 현실이 현실의 연장이 된 21세기에 조각의 비물질화는 개념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현상이자 방향이다. 종이 출판이 이북(e-Book)으로 대체되고 지폐와 동전이 지갑에서 사라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카드마저 스마트폰의 애플리케이션으로 대체되었다. 이와 함께 가상 세계에서도 물질의 경험이 가능한 시간이 점점 앞당겨지고 있다. 뜻밖에도 역병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멋진 신세계’로의 몰입을 촉발했다. 코로나19가 불러온 팬데믹으로 접촉의 일상을 박탈당한 사람들이 메타버스로의 탈주를 꿈꾸고 있다. 느닷없이 출몰한 NFT가 ‘유일성’을 내세우며 새로운 시장을 구축한다. 기술의 발달과 역병이 새로운 일상을 만들고 있는 이즈음, 우리는 다시 사물과 접촉할 수밖에 없는 ‘일상’을 돌아보며, 안온한 일상이란 최면과 마술의 틈새에 난 상처임을 인식하고, 우리 사회의 폭력을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포스트인터넷 세대의 조각
안소연 2010년대에 포스트인터넷 세대의 집단적 출현과 회화에서 시작된 매체적 참조성이 가속화되면서 조각에서도 동시대적 전환이 시급해 보였다. 큰 틀에서는 권오상과 함진이 본격화했던 조각 매체의 변화가 조각적 형태의 변환을 이끌어냈다면, 새로운 세대의 조각가들은 새로운 조각적 조건을 갱신하며 매체적 특성을 재구축하려는 시도를 강하게 드러냈다. 동시대조각에 유효한 질문을 지속해온 작가로는 이병호, 김인배, 정소영이다. 이병호는 조각의 보이지 않는 내부에 대한 탐구를 시작으로 소조나 몰드 캐스팅과 같은 조각적 방법론을 재인식할 새로운 실천을 제시해왔다. 김인배는 조각적 경험의 불확실성에 보다 개념적으로 접근해, 조각에 대한 시지각적 경험을 넘어선 조각적 감각 및 인식을 강화했다. 정소영은 조각적 순간에 집중하여 역사, 장소, 정체성 등 시공간의 연속적 상황에서 조각적 순간과 사건에 대한 조명과 그것의 현존을 조각적 형태로 제시해왔다. 이들은 대부분 조각의 고전적인 범주를 재인식하여 확장하거나, 그렇게 하여 획득한 새로운 조각적 형태를 꾸준히 드러내 보여왔다.
최고은은 사물과 조각의 관계를 탐구해온 조각사적 시도를 참조하여, 특수한 오브제를 전복적으로 전유한 조각을 제시하고 있다. 윤지영은 조각 질료의 물성을 강조하여 조각적 공간 및 조각적 움직임 등 조각이 점유하는 3차원성의 실체를 다층적 서사로 극대화한다. 최하늘과 이동훈은 각각 의인화된 인체 형상을 주로 제시해왔는데, 최하늘이 스티로폼, 아이소핑크, 스펀지 등 공업용 재료를 전통적 조각 방식으로 가공하여 조각적 방법론을 갱신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면, 이동훈은 전통적인 자연 재료로 나무를 쓰되 조각적 윤곽선을 정교하게 구축하는 대신 권오상과 마찬가지로 조각의 지지체와 표면을 분리시켜 회화적 조각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다. 권오상은 초상조각의 고전적인 형식을 참조하되 조각의 내부와 외부의 논리적 관계를 지탱해주던 매체의 순수성에서 벗어나 조각의 ‘지지체’와 ‘표면’을 분리시켰다. 그는 제작 과정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주로 스티로폼/아이소핑크와 사진을 사용해 등신대의 초상 조각을 제작하면서, 역사적으로 조각을 규정해온 양감, 질감, 기념비, 중력 등의 조형적 범주를 새롭게 적용했다. 함진은 설치미술의 문법을 참조해 조각적 공간과 조각의 크기 문제를 부각했으며 동시에 회화적 서사성을 조각에 적용해, 3차원적 조각 경험이 지닌 시지각적 불확실성을 배가하는 전략으로 나아갔다.
남웅 내가 추천한 작가는 속을 게워내며 살과 뼈대를 만든다. 조각의 가능성이 끝장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기어이 그 끝을 열어내며 다음을 도모하는 조각이다. 이소정은 오늘의 집 같은 홈스타일 페이지와 무인양품과 이케아 쇼룸 등의 탬플릿을 참조한다. 작가는 3D 펜으로 포인트 인테리어와 생활용품을 복각한다. 허공 위에 3D 펜을 수다하게 놀린 드로잉은 실리콘으로 복각된 대상을 생성한다. 참조한 사물과 결과물 사이에는 인위적 패턴이 개입하고 피할 수 없는 변형이 가해진다. 작가는 이를 사용하는 퍼포먼스를 영상으로 남기는데, 드로잉과 조형, 레디메이드의 질서를 한데 포갠 일련의 수행은 복각의 참조 대상으로서 원전의 실체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항변하는 듯하다. 여다함이 털실을 짜나간 자리는 직물뿐 아니라 구멍을 남긴다. 오랜 시간 반복하는 뜨개 행위는 의식과 신체를 분리한다. 각기 다른 면들은 바늘과 실로 용접하듯 직물을 붙여낸다. 종유석과 고드름을 유비하는 그의 직물 덩어리는 흡사 실로 엮인 소조적 형상을 떠올리게 한다. 안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직물의 크고 작은 구멍으로 숨을 불어 넣는다. 직물이 늘어지고 연기가 엉켜 올라가는 처연한 형상은, 형상보다 주름과 구멍만 남은 이름 없는 것들과 이름뿐인 것들, 무용함으로 가득한 시공을 소환한다.
조이솝의 검고 흰 식물 모양 오브제들이 플라스틱 레디메이드로 만들어진 것임을 발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사물은 질감에 따라 앙상한 줄기가 되고 꽃봉오리가 되며 촉수와 균사체의 환유로 연결된다. 아상블라주 작법이 새로울 것은 없지만, 조이솝의 오브제는 공격성을 띠었을지언정 어딘지 중력의 질서에 지친 듯 고개를 숙이고 불사른 제 모습을 함께 취한다. 구석을 향해 깊게 뿌리 내린 ‘식물’이라는 사건으로서 조각은, 조각의 모습으로 레디메이드를 언캐니하게 출몰시키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플랜테리어가 트렌드가 되어버린 락다운 시대의 집단 취향을 음화하는 것은 아닌지, 일테면 고독과 취약함의 지독한 조형적 표징은 아닌지 생각한다.
조재영은 사물과 공간을 폴리곤 단위로 계산한다. 사물을 쪼개는 공정은 복잡한 계산뿐 아니라 판지를 자르고 이어붙이는 부단한 노동을 요구한다. 균질한 질감과 단위를 확보한 폴리곤은 사물의 질서를 변형하고 유기체와 무기체 형상의 종적 횡단을 불사하는 가운데, 고정 장치에 오브제를 결박하고 매달아 전시한다. 폴리곤의 언어로 사물을 통제하는 조각적 공정은, 작가의 몸을 갈아 넣어 성취할 수 있는 고된 쾌락은 아닐까. 황수연의 은박의 덩어리는 종이조각으로, 표면 질감의 볼륨을 압착한 평면의 조합으로 수렴한다. 그 과정에 (은박과 흑연이라는) 금속과 탄소 재질의 무게감은 조형이 조형으로 보이기 위한, 하지만 조형의 불가능성이 폭로될 수밖에 없는 피상적 맥거핀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량한 무게감마저 소거한 최근 작업은 셀로판지와 반짝이 종이를 포갠 희박한 부조를 드리운다. 평면으로 수렴하는 조각의 최소 지지체는 어쩌면 크기와 모양을 달리하는 조각난 종이들이 포개어진 얄팍한 결들로, 부조감을 드리우는 그림자가 아닐까.
리본과 대리석 무늬 포장지, 구슬과 실리콘, 온전히 다듬어지지 않은 장식 기둥, 거울과 유리판으로 헝클어지고 산재한 박보마의 조각은 대상을 연상시키는 스킨의 형태를 취하지만, 스킨이 참조한 실체 또한 스킨의 효과일 뿐임을 주장한다. 스킨의 방법론은 실체가 소거된 형식만이 질서의 전부를 이루는 경제와 서비스로 확장한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속을 드러내지만 이미 소모되었거나 생산되기 직전인지라 소유하거나 고갈시킬 수 없는 프로토타입, 또는 김뺘뺘의 분석처럼 ‘샘플’로서 조각일 것이며, 샘플로서 전시되고 소비되지만 온전한 실재를 드러내지 않되 실재의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장식, 온전하지 않음을 제 실체로 삼지만 온전하지 않음으로 제 기능을 다 하고 마는 재현의 전술일 것이다.
오은은 한국 미술가들의 작품을 스케치하듯 조각하면서 ‘정신성을 시뮬레이션’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복제가 아니되 보이지 않는 정신성의 흔적은 거칠고 빈곤한 표면으로 시각화된다. 누군가는 고군분투로 부를 수 있을 표면의 형상에서 오늘의 조각에 대한 척박함과 절박함을 읽는다면, 또 다른 누군가는 선적 역사의 기념비적 형상들을 각개의 방법론으로 쪼개고 다시 포개는 변신술로서 조각의 가능성을 예측할지 모른다.
윤정의는 흙을 쌓은 자리에 석고를 올리고, 마르면 쌓았던 흙을 긁어내기를 반복한다. 그의 조각은 쌓기 위해 긁어내는 행위이자 긁어내기 위해 형상을 쌓은 흔적이기도 하다. 가득 차 있되 비어 있는 조각적 신체는 뼈와 피부, 근육이 구분 없이 하나로 엉켜 있는 모습이다. 텅 빈 제 속을 드러내면서 피부이자 살이자 뼈대라는 질료 덩어리로 서 있는 조각은 제 껍데기가 전부라고 증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변 사물과 담론과 자신의 욕망까지 조각 언어로 번역하는 최하늘은 꿈도 조각으로 꿀 것이다. 근작에서 그는 조각의 무대적 볼륨을 키우며 풍경으로 확장하는 모습이다. 좌대에서 조각적 디오라마로 품을 넓히는 그의 작업은 때로 불가능한 야망을 조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여 최근에는 다른 물음이 생겼다. 조각의 곤란에서 틔워낸 조각의 야망은, 다시금 어떻게 조각적 야망으로 번역하며 부숴낼 수 있을까.
이미지로 유통되고, 유통된 이미지에서 물리적 형상을 만드는 조각은 복각되면서 차원과 형질을 전환한다. 빈곤한 자원과 시공간에 펼쳐내는 동시대조각은 이미지로 소모되고 다른 장르에 개입 당하며 금세 다른 피드에 묻힌다. 조각의 불모성을 자원 삼아 질문을 빼곡하게 채우는 홍기하는 질문으로부터 질료를 고르고, 질문을 깎아내며, 질문으로서 조각을 실천한다. 허연화의 평면적 사물은 이미지의 정체를 확인시켜주기보다 비선형적이고 유동적인 리듬을, 분절과 접속을 거듭하는 SNS의 화면을 시각화한다. 이미지들은 3차원 오브제의 표면이 되어 가설된 프레임과 시중에 판매하는 걸이용 지지대에 걸린다. 작가는 파도와 수영 등 물과 관련된 모티프에서 소재를 얻는다. 고정되지 않은 채 빛을 반사하고 투과하며 증발하여 사라지기도 하는 물결과 그에 부유하는 신체들은, 고정되었지만 결정적이지 않고, 개연성 없지만 표면으로 현현하는 풍경을 만든다.
강재원이 3D 프로그램으로 만든 원형질의 매끈한 조각 이미지는 3차원의 물리적 공간을 참조하고, 참조함으로써 공간의 질서에 개입한다. ctrl+z/ctrl+shift+z의 반복으로 이뤄지는 조각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는 물리적 공정과 달리 언제 어느 시점으로든 되돌릴 수 있는 무시간적 화면의 전개로 완성된다. 그래픽 체제 위에 주조된 이미지로서의 나일론 풍선은 현실에 그대로 부풀어 오른 채 현현한다. ‘인플레이터블(inflatable)’ 조각으로 불리는 그의 그래픽적 조각은 무게를 비운 용적뿐인 덩어리로서 금속처럼 보이는 표면 질감과 탄성을 위해 끝없이 공기를 주입해야 한다. 다시 말해 형상을 유지하기 위한 에어 펌프와 그래픽 프로그램이 무리 없이 작동할 수 있도록 기기의 열기를 내보내는 냉각팬을 지지체 삼는 공기의 조각이기도 하다. 문이삭은 3D 제작 프로그램의 좌표를 물리적 공간으로 옮겨낸다. 그의 조각은 차원을 전환하는 과정에서 처리되지 못한 오류와 변수로 구현된 형상이다. 그가 ‘사건’으로 지칭하곤 했던 일련의 번역 작업은, 방법론을 달리하며 번역의 범주를 늘리는데, 최근 합성 점토로 빚은 그의 못생긴 형상들은 사물과 이미지에 걸쳐 있고, 예술작품과 이미지에 걸쳐 있으며, 사물과 예술작품에 걸쳐 있지만 어딘가를 확실하게 점하지 못한 채 덩어리가 구성된 손의 흔적과 과정을 드러낸다.
정현 이병호는 공기 주입 방식을 이용한 두상 조각으로 하나의 형상에서 삶과 죽음의 교차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인체 조상을 하나의 생명체로 다룬다. 사실주의적 조각의 문법을 따르지만, 그가 형상을 대하는 포용적 태도는 조각에서의 물성, 재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되묻고 있다. 김인배는 서양 조각을 이끈 주요한 동력인 움직임을 시공간으로 확장한다. 미래주의 조각이 움직임을 풍자적으로 묘사했다면, 그는 움직임의 벡터를 계산하여 신체 움직임의 원리를 제시한다. 유럽 근대조각이 정면성의 원리를 벗어나는 데 어려움을 겪어, 결국 양감을 버리고 평면적인 미니멀리즘으로 이행하였다면, 김인배는 오히려 전통적 조각성을 버리지 않고 움직임이라는 시간성을 부여하여 돌파구를 찾아낸다.
심승욱의 조각은 검정과 중력이라는 담론에서 비롯된다. 최근에는 설치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으나, 작업의 본령은 바로 조각의 원리를 해체하여 동시대를 향한 비애감을 끌어낸다. 이의성은 조각의 행위를 노동과 연결하여 미학과 현실과의 조응을 실험한다. 그는 조각이라는 예술적 활동의 이면을 통계학적으로 분석해 전통적 조각 행위에 드리운 낭만적인 측면을 제거함으로써 예술과 노동이라는 의미를 이중적으로 질문한다. 윤가림의 작업은 언뜻 조각 영역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가는 제례 음식과 제빵과 같은 매우 사적이면서 일상적인 가사 활동을 공적인 차원으로 전유한다. 기념비적 조각의 웅장함에 반하는 수공적 방식의 작업으로 대항적인 조각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박춘호 얼마 전 퐁피두센터에서 한국 원로 작가의 작품을 영구 소장한다는 소식이 미술계에서 화제가 되었다. 이 기사를 접하며 우리는 여전히 ‘해외에서 인정받은 한국 미술’을 지향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피게 된다. 그리고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 출품하는 한국 작가를 누가 어떤 기준으로 선정하는지 궁금하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하면 동시대 작가는 무엇보다도 소신 있게 작업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를 얻기 위해서는 시대를 통찰해야 한다. 그 중심은 ‘나’이다. 물론 나의 발전을 위해서는 남의 이야기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이러한 사유를 토대로 조형하는 최적의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따라서 작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철저함과 집요함이다. 이러한 자세로 작업에 임하는 작가는 작가들 사이에서 먼저 회자한다. 무엇보다 드러나지 않은 작가들을 찾아내서 격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기획자의 책무이다. 이러한 작가들을 많이 발굴할수록 한국 미술계는 풍요로워질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동안 만나본 작가 중 10명을 추천했다. 이들 모두는 시류와는 거리를 두고 자신의 관심사에 집중하며,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에게 ‘서여기인(書如其人)’은 여전히 유효한 척도임을 확인할 수 있다.
재료와 패트런과의 격투사
김복기 돌이켜 보면, 모든 점에서 조각은 ‘격투’의 역사였다. 첫 번째, ‘재료’와의 격투다. 조각은 소재의 예술이며, 소재에 규정된 부분이 압도적으로 크다. 조각 제작은 많은 품과 시간을 요구한다. 조각은 언제나 재료와 기술의 진화에 대응해 발전해왔다. 두 번째, ‘패트런’과의 격투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예술가의 순수한 개성 표현이란 생각할 수 없었다. 작품은 대다수가 주문 제작이었으며, 주문자의 취향이 크게 가로막고 있었다. 이 사실은 교황과 자주 충돌해 도망을 다니다 끌려갔던 미켈란젤로의 모습에 상징적으로 드러나 있다. 혼자서 고독하게 그림을 그렸던 고흐이지만, 그가 홀로 묵묵히 조각에 열중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김종길 오랫동안 조각은 비좁은 몇 개의 물질에 갇혀 있었다. 물질은 조각가의 ‘언어’와 ‘상상’을 구속했다. 아직 생성되지 않은 언어와 현현되지 않은 상상이 물질로부터의 도주와 탈주를 감행한 것은 최근이다. 조각의 문법을 낱낱이 해체하며 스스로 창조적 재조각화를 시도한 조각가들의 손에는 오롯이 ‘철학하는 시의 망치’가 들려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시의 망치’로 물질에 갇힌 ‘조각’을 쪼개고 부수고 없앤 자리에서 철학하는 예술의 ‘리얼리티’를 드러내고 표현하기 위한 새로운 재료를 궁리했다. 조각의 개념과 그림자조차 남지 않은 자리에서 그들이 짓고 일으킨 것은 하나의 사건,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침묵, 하나의 시공, 하나의 현실, 그리고 하나의 초월이었다. 그 하나하나는 다르게 이어지는 ‘조각하기’의 굿거리다. 서로서로 이어서 일으키는 재료들의 실체는 ‘조각 해방’의 탈주로였고, 그들은 차오르는 미적 혼돈의 시학을 표현하기 위해 재료와 난투를 벌인다. 조각의 정의를 묻지 않는 자리에서 조각은 다시 어떤 뿌리로 싹을 틔우기 때문이다. 재료는 마주침의 우연성, 혹은 필연적인 것이어서 서로 당기고 밀어내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연쇄적으로 달라붙는 걸 좋아한다. 물질/비물질의 연쇄적 알레고리의 새 조각! 조각가들은 ‘조각의 근거는 이제 없다’라는 판단에 이른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없는 곳’을 향해 비판적 재료의 물성을 던지고 쌓아서 아이러니를 구축하고, 엉망진창의 현실을 빗대고 뒤집는다. 이미 있는 조각의 언어는 붕괴하고 새로 탄생한 언어는 그래서 아이러니와 유머를 오간다. 때때로 그것들은 기념비적인 신화와 같아서 시제가 뒤틀린 ‘미래 현재’, 혹은 ‘과거 현재’의 동시성으로 우리 앞에 등장한다. 불현듯, 홀린 듯이, 마주한다.
최태만 이승택은 이미 1960년대부터(작가는 내가 제시한 시기가 틀렸다고 화를 내며 더 앞당겨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노끈, 깃털, 비닐, 머리털, 폐기된 기성품 같은 비조각적인 재료와 물, 불, 공기, 흙, 바람을 사용해 조각을 해체했다. 이처럼 이승택은 비조각, 탈조각, 장르 파괴의 선봉에 있었다.〈바람〉연작은 조각이면서 현장 설치이고, 자연 현상과 시간이 조형 요소를 대신하는 과정예술이자 토탈아트이다. 마네킹을 태우는 제의적 작품은 ‘조각적인 것’에 대한 부정의 정신을 드러낸다. 어느 집에서 버린 예수가 그려진 액자를 주워 생활 쓰레기와 함께 설치한〈결국 예술은 쓰레기가 되었다〉는 예수가 폐기됐듯이 예술도 결국 폐기될 것이란 뒤샹의 말장난처럼 다다적 전복의 전략을 보여준다. 21세기의 비조각적 작업은 개념이나 방법이 다르더라도 이승택에게 빚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1980년대까지 회화와 조각은 경계가 비교적 분명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혼성적 재료의 사용, 신체와 성에 대한 관심 고조, 독립된 오브제 대신에 공간 연출이 중시되는 설치의 팽창, 탈장르의 추구에 따라 조각의 확장이 이루어졌다. 최정화의 키치 오브제, 이불의 썩어가는 물고기와 그로테스크한 괴물, 최우람의 유사(pseudo) 미래 고고학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우주 생물체, 서도호의 군대의 인식표로 만든 갑주와 서울의 한옥과 미국 여러 도시의 작업실을 캐스팅하여 자신의 유목적 정체성을 묻는 작업은 조각이면서 조각이라고 할 수 없는 경계에 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은 조각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재료 기법에 얽매여 동어 반복, 자기 복제, 되새김질, 재탕이 거듭되면서 숙련된 기술이 빈곤한 내용을 은폐하는 가운데 활력을 상실하고 양식화의 길을 걸었던 점도 있다. 한편으로 설치와 영상을 전위 부대 삼아 1990년대를 지배했던 비엔날레의 담론이 시들해지면서 그 휴지(休止)의 공간을 아트페어가 파고들었다. 마침내 조각이 시장에 항복 문서를 갖다 바치는 순간, 장식이 의미를 추월하고 예술가의 자존심은 시장 논리를 강화하는 보증서로 전락하거나 혹은 자본의 포로가 되었다. 여기에 ‘문화예술진흥법’의 건축물 미술장식 조항이 개정되었지만, 공공미술로 위장한 이른바 환경 조형물이 여전히 범람하면서 조각은 ‘사업’이 되었다. 쿠오바디스(quo vadis), 조각이여!
김복기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인문주의자 안젤로 폴리치아노(Angelo Poliziano)의 『범지론(Panespistemon)』(1491)에 의하면, 15세기만 해도 아직 ‘조각’을 총칭하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조각가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는 statuarii(돌을 소재로 쓰는 사람), caelatores(금속을 소재로 쓰는 사람), sculptores(나무를 소재로 쓰는 사람), fictores(점토를 소재로 쓰는 사람), encausti(밀랍을 소재로 쓰는 사람)라는 말을 쓰고 있다. 다섯 가지 소재의 차이에 따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마다의 호칭을 붙였다. 그러나, 이 다섯 개의 활동 영역이 급속하게 하나의 카테고리로 수렴해갔다. 나무를 소재로 쓰는 ‘sculptores’가 모두를 대표해서, 결국 조각가가 되었다. 조르조 바사리의 저서는 모두 이 말을 쓰고 있다. 이렇게 해서 ‘조각’의 근대가 시작된 것이었다. 오늘날 조각 재료의 급진적인 확산, 전통적인 카테고리의 붕괴 양상은 폴리치아노 이전으로 회귀한 것 같기도 하다. 이번에 소개하는 작품에도 레진, 우레탄폼, 아이소핑크, 스티로폼, 공기 펌프, 고무, 종이 포일, 싸구려 장식품, 실, 천 등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다양하다. 재료의 다양성은 필연적으로 기법의 다양성으로 이어진다.
최태만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모더니즘 조각, 대지예술, 장소특정적 미술을 분석하면서 제시한 도식은 유명하다. 그는 모더니즘 조각을 풍경-건축과 대척 지점에 있는 풍경 아닌 것-건축 아닌 것 사이에 위치시킨 반면 대지예술과 장소특정적 미술을 풍경-건축, 풍경 아닌 것-건축 아닌 것 사이의 표시된 장소(marked sites)와 공리적 구조(axiomatic structure)에 서로 마주 배치했다. 동시대조각은 1970년대에 적용된 이 도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정도로 혼종적 방법으로 증식되어 풍경/건축, 장소/공간, 물질/개념 사이를 넘나들고 있다. 조각은 세포 분열과 자기 복제는 물론 동종, 이종을 가리지 않고 포식하는 잡식성을 발휘하며 조각/조각 아닌 것, 형태/탈형태, 물질/비물질, 순종/잡종의 경계를 해체하고 마침내 사이보그로서의 포스트 휴먼을 주장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동시대미술은 장르 구분을 거부하고 ‘더 새로운 것을 향해’ 전진한다. 형태, 덩어리, 볼륨, 질감을 지니더라도 조각이 아닌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3차원 입체로서 조각만이 지닌 속성, 물질의 실재성이 불러일으키는 심미성, 공간에 놓였을 때 드러나는 양괴, 양감, 질감, 촉각 등이 지닌 미적 특질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대리석에서 형태를 해방한다는 미켈란젤로의 신화적인 말은 조각만이 지닌 특성을 압축하고 있다. 또 그의 미완성(non-finito)은 현대에도 의미 있는 연구를 자극한다. 데이비드 핀이 촬영한 미켈란젤로나 베르니니의 조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빛은 형태를 넘어서 조각에 깊이를 부여한다. 미켈란젤로가 말했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조각은 이미 대리석 덩어리 안에 완성돼 있었다. 나는 단지 재료의 불필요한 부분을 끌로 깎기만 하면 된다.”
김복기 칸트에 의하면 회화, 조각, 건축, 조경 같은 모든 조형예술에서 본질적인 것은 ‘die Zeichnung(선묘적 디자인)’이며,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미적 판단에 관계하는 형식이다. 색채는 감각적 자극에 속하는 질료에 지나지 않는다. 질료인 색채는 아름다운 형식에 의해 비로소 순화된다. 조형예술의 본질을 ‘선묘적 디자인’에 두는 입장은, 이미 바사리가 건축, 회화, 조각 삼자를 동등하게 ‘선묘적 디자인의 기예(arti del disegno)’로 간주하고 『미술가 열전』(1550)을 성립시켰던 이래로 서구 예술론의 ‘정통’으로 굳건하게 이어졌다. 결국, 바사리에서 칸트로 이어지는 서양의 예술론적 ‘정통’에서 중요한 것은 색이 아니라 ‘선’이었다. 이게 바로 디세뇨(disegno)의 전통이다. 뵐플린 식으로 말하면 ‘회화적(painterly)인 것’과 대척점에 있는 선적(linera), 즉 조소적인 것이다.
중세 이래 조각에서 색채가 다시 등장한 것은 20세기에 이르러서다. 카로(1924~2013)의 작품 언저리라 생각할 수 있다. 그의 조각은 조각적 구조에 회화적 경험을 동시에 유도한다. 정면에서 본 그의 조각은 실제 공간의 모든 요소를 회화의 수직 면 직립성 속으로 압축한다. ‘공간 드로잉’이다. 카로는 미국 현대회화의 영향을 받아 철근 용접과 채색으로 추상조각을 실천했다. 그는 단순히 오브제 이상의 의미를 열기 위해 회화의 평면성, 2차원 이미지를 노린다. 바로 ‘조각의 회화화’라 할 수 있다. 작품은 오브제의 본성을 뛰어넘어 즉각적으로 통합적인 내용을 전달한다. 그 단일한 명료성의 순간!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회화의 상태를 지향하는 이러한 조각의 경향을 ‘회화주의 (pictorialism)’라 불렀다. 이번에 소개하는 작품 중에는 회화적 조각이 확실히 눈에 띈다. 조각의 색채주의는 ‘디세뇨 전통에서의 해방’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최태만 덩어리, 형태, 양감, 질감, 공간, 빛, 면은 조각을 규정하는 요소이다. 재료와 기법은 조각을 조각이 되도록 만든다. 회화의 조형 요소인 점, 선, 면, 색채는 조각과도 공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점, 선, 면 형태를 기초로 피카소가 철로 만든 많은 조각은 선적으로 공간을 점유하기보다 공간과 공간을 서로 소통시키기 때문에 ‘공간 드로잉’으로 규정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색채는 회화 고유의 것이 아니었다.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조각은 채색되었을 확률이 높다. 석굴암 본존불도 채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채색의 근거는 이 조상들이 숭배 또는 예배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화려한 채색이 재료의 물질적 속성을 감출 수 있기 때문에, 색채가 조각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는 것은 몰역사적인 이해이다. 제프 쿤스의 반짝이는 색채처럼 동시대조각은 오히려 색채를 장려하다 못해 남용하기도 한다.
조각의 미래, 젊은 조각가의 생존은…
김복기 1980년대 이후 현대조각은 신체 등의 구상적 이미지의 복권, 대중적 이야기나 부정형 사물의 사용, 기존 공간의 콘텍스트 재구축 등 작품의 형식, 재료, 기술, 프레젠테이션에서 다양해졌다. 특히 로버트 고버나 키키 스미스는 표현적인 구상 이미지를 신체의 표상과 함께 다룬다. 신체는 자주 파편화되거나 훼손되고 상처 입은 것으로 제시된다. 이 시기에는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 문제 등 ‘삶’에 얽힌 갈등, 그 삶과 함께 존재하는 주체의 모습을 현재화(顯在化)해, 유년기로의 퇴행이나 트라우마를 강조하는 작품이 대거 등장했다. 특히 폴 매카시나 마이크 켈리의 경우, 억압된 유년기의 회귀나 생리적인 혐오감, 폭력성을 느끼게 하는, ‘역거운’, ‘끔찍한’ 이른바 ‘애브젝트(abject)’ 조각이 대두했다. 한국에서도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까지 파편화된 신체를 다루는 조각이 많았다. 이번에 선정된 젊은 조각가들은 이러한 흐름과는 다소 거리를 두고 있다. 인체 혹은 신체를 다룬 작품이 적고, 대체로 온건하고 얌전한 작품이 많다. 또 새로운 시각 환경을 반영하듯 전반적으로 조각이 평평해졌다. 과거의 힘, 기념비성이 약화된 것이 사실이다. 필름 사진이 디지털 사진으로 바뀌면서 깊이감이 현저히 떨어진 것처럼 말이다. 또 나무, 돌, 흙 같은 전통 재료, 자연 재료를 구사하는 조각가가 급격히 줄어든 탓인지, 그 이전(적어도 1990년대 전반)까지 한국 조각의 핵심 쟁점의 하나였던 ‘한국성의 변용’이라든지 ‘모국주의(venacullarism)’ 담론에 기대는 작품도 많이 줄었다. 오늘날 ‘민속학적 전회’가 비엔날레 같은 국제적 장에서 뜨겁게 일고 있는 상황과는 좀 다르다. 올해 열린 광주비엔날레를 상기해보라.
조각작품의 내적인 변화는 창작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앞서 조각과 ‘패트런’의 격투사를 언급했다. 현대조각의 패트런이라면 국가와 기업이다.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조각가의 생존 활동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나 미술시장에서 조각은 회화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다. 한국에서 조각가로 성공하려면 대학교수, 공공미술 프로젝트 중 하나를 성취해야 한다. 또 조각의 경우 제작 환경도 남다르다. 회화보다 훨씬 더 큰 공간이 필요하다. 기성 작가가 도심에 조각 아틀리에를 두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러한 조각 환경에서 젊은 조각가의 작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공적 기관의 지원금, 생존 방식, 제작 시스템과 보존 등…. 조각이 변화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김종길 추천 작가의 일부는 대학 교육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21세기로 깊숙이 이행한 현재도 대학의 커리큘럼은 지나치게 ‘근대적’이다. 한국 동시대미술에 대한 비평적 강의는 찾아볼 수 없고, 미학의 논법을 벗어난 예술적 실험은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한다. ‘창조성’이 핵심인 예술학교가 아카데미 내부에 있는 한, 이러한 문제는 더 심화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 미술이 진보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교육의 틀이 혁명적으로 뒤바뀌어야 한다. 미술사나 미학이 아니라 창작은, 역설적으로 ‘탈학습의 경로’를 찾아야만 새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조각의 언어는 예술언어의 한 분야에 불과하다. 조각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한 예술가로 사는 방법을 체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위대한 예술가 되기의 욕망보다는 ‘새로운 예술가 되기’를 꿈꾸는 것이 생각보다 현실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새로운 예술가의 역사는 결코 지워지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정현 나아갈 미래가 불확실해서일까, 동시대미술이란 명제가 미술의 근간 자체를 무효하게 만드는 것 같다. 세계화 시대를 산다고 하지만, 미술현장의 변화가 이전보다도 더 엘리트미술의 문법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경향의 변화 주기도 빨라지면서 전시, 비엔날레, 이론, 새로운 장르 또는 동시대적인 무언가를 차분히 들여다보기도 전에 새로운 것이 대체한다. 마치 죽은 채 걸어오는 좀비와 같은 유형들이 미술현장을 채우고 있는 듯하다. 나는 이번 조각 특집에서 전통적인 조각성을 반영하는 작가를 생각해보았다. 아직은 가설일 뿐이지만, 지나치게 빠르게 변하는 현장의 흐름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절합점을 찾아보고자 했다. 무언가를 발견했다기보다 그렇게라도 지금의 속도를 조금이나마 지연하고 싶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