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겹으로 이루어진, 매끄러운, 오래된 표면에 대한 탐구

posted 2022.09.06


이미지01

〈수평이동〉, 2021, 돌에 아크릴, 점착시트에 출력, 가변설치. 이미지 제공: 인천아트플랫폼.

어떤 오래된 돌의 단면을 본다고 가정해보자. 돌의 크기는 두 팔로 겨우 감싸 안을 수 있는 정도의 크기를 지니고 있으며, 잘린 단면을 제외한 그것의 표면은 거칠고 울퉁불퉁하다. 기계로 잘려 나간 듯 매끈한 절단면의 표면은 마치 물감이 일정한 방향을 가지고 섞인 것처럼 매우 여러 겹의 얇은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결코 짧은 시간 동안 만들어진 것이 아닐 것이고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닐 그 지층의 축적들은, 잘린 면으로만 떼어 본다면 많은 색선들의 묶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김인영의 평면, 입체, 설치 작업들에서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돌이나 지층의 단면, 마블링의 이미지 등은 마치 그것의 기나긴 생성의 시간들을 잊어버리고 눈앞 찰나의 시각적인 요소로서 바라보도록 만든다.


무엇이 먼저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은 것 같다. 소위 지층적 이미지들이 오랜 시간의 축적물이기에 작가의 눈길이 갔던 것인지, 혹은 반대로 이미지에 먼저 매료되어 연구와 재현을 이어온 것인지 말이다. 다만 이 글에서 질문하고자 하는 것은 작업 과정에서 스캐노그라피(scanography)를 사용하여 만든 디지털 이미지를 다시 평면의 지지체에 프린트하는 김인영의 일부 작품을 두고 ‘아날로그의 기법으로 디지털의 감각을 만들어내는 작가’ 혹은 ‘디지털 이미지를 아날로그 방식으로 출력하여 그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 등의 수식으로 정의 내리기 이전의 것이다. 작업의 모티프에 그의 근본적인 관심사가 내재되어 있으며, 그것을 구현하는 기술적인 측면 외에도 다양한 층위의 의미에 대해 언급해보고자 한다.


이미지02

《변환지점》(인천아트플랫폼 윈도우갤러리, 인천, 2021) 전시 전경. 이미지 제공: 인천아트플랫폼.

김인영은 주로 회화를 다루고 있지만 사진, 판화, 공간 설치 등 꽤 다양한 매체를 망설임 없이 사용하는 편이다. 손의 사용이 개입된 모노타이프 판화나 역시 판화의 일종인 스캐노그라피 등 프린트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김인영이 유연하게 매체를 사용하는 이유는 평면의 표면이라는 상태를 집요하게 바라보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인사미술공간에서 있었던 그의 개인전 《리-앨리어싱(Re-aliasing)》(2019)은 그의 이러한 태도를 보여주는 주요한 단서가 되어준다. 이 전시는 크게 두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1층은 〈매끄러운 막〉(2019) 시리즈가, 2층은 〈복제/붙여넣기〉(2019) 등 공간 자체를, 자세히 말하면 공간의 특징적 흔적이나 모습들을 재료로 하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었다.1)


이미지03

〈복제/붙여넣기〉, 2019, 포맥스에 UV프린트, 가변설치. 이미지 제공: 인천아트플랫폼.

〈매끄러운 막〉은 눈길을 사로잡는 화려한 이미지와 그것이 투명한 아크릴판을 투과하며 획득한 선명함과 입체감이 특징인 작품이다. 또한 김인영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지층적 이미지의 최근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살펴볼 지점이 있다. 특히 지층의 이미지는 어느덧 기본 소재가 되었고 그것이 물감에서 회화로, 회화에서 판화로, 다시 필름으로, 조각이자 설치로 이동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2) 온,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물질을 자의로, 우연으로 옮겨 다니게 만드는 일과 그 과정에서 변하는 이미지의 상태, 특히 이미지가 아크릴에 수(水)전사되어 투명하고 매끄러운 실체가 되어가는 부분은 아마도 김인영이 디지털 스크린 속에서 작품이 매끈해 보이는 감각과 맞닿아 있었으리라 예상한다.


2층의 작품들은 그간의 김인영의 작업들과 비교하면 낯선 인상으로 의문을 던져 주었는데, 오래된 건물의 내부라는 단단한 실체를 시나브로 변하게 만든 시간을 다루는 모습에서, 지층적 이미지를 가능케 한 대전제인 바로 그 시간이 작가의 진정한 관심사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는 〈웜즈〉(2019)와 〈복제/붙여넣기〉에서 바닥의 스크래치나 깊게 파인 흔적, 흰색 천장의 이격이 드러난 부분 등을 사진으로 찍은 다음, 실제 스케일과 동일하게 출력하여 해당 부분이나 부근에 덧입혔다. 시간이 만들어낸 실존하는 흔적과 자신이 스크린 위에서 비교적 단시간 동안 만들어낸 이미지의 상태를 교차해서 바라보며 아주 오래된 실체가 비물질로 대체되는 현상이 작가에게 흥미롭게 다가온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디지털’은 회화에서의 물성을 꾸준히 탐구하던 김인영의 작품에 어떻게 들어오게 된 것인가? 추측해보건대 나는 그 단서를 스캐노그라피 기법의 사용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처음 스캐노그라피 방식이 작품에 나타났던 그의 세 번째 개인전 《층 겹 켜》(2017)의 작가 노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작가의 말이 등장한다. “스캐너의 베드 위에서 색채들을 움직여 캡처하는 과정에는 스캔 헤드의 움직임 축을 따라 왜곡과 결절이 발생한다. 기계와 나의 찰나의 움직임이 만나 생산된 수많은 결을 이용해 만들어낸 결과물은 ··· 정지된 이미지이지만 마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속적으로 형태가 변화할 것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3)


이미지04

〈.jpg〉, 2020, 종이에 피그먼트 프린트, 21×29.7cm (54). 이미지 제공: 인천아트플랫폼.

위의 말을 빌려 해석하자면 스캐너가 이미지를 인식할 때 작가의 움직임을 가미하는 것은 이미지의 디지털화를 방해하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 김인영이 주로 구사하는 지층의 이미지가 무정형의 기계적 특징을 지녔다고 해서 그것이 디지털 이미지로 쉽게 불릴 수 있는 것 또한 아닐 것이다. 작가가 자신의 ‘팔레트’라고 일컬었던 〈JPG.〉(2017-)의 경우를 들여다보면 이미지 자체를 판에 올라와 있는 회화적인 물질의 상태로 바라보기 위해 스캐노그라피를 사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4) 그리고 이와 같은 이유에서, 처음에 언급했던 대로 김인영에게 자꾸 디지털을 거론하는 것은 그가 하려는 많은 것들을 짧게 내뱉는다는 인상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김인영의 이미지에는 주로 형상이 없기에 특수한 제작의 방식과 그로부터 비롯된 단어와 개념들, 해석이 잘 맞물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매체와 과정, 주제들을 변함없이 관통하고 있는 분명한 한 가지는 화면 위에서 그가 끊임없이 뒤섞고 겹쳐 만들어낸 회화적인 물질이다. 그것은 수공적인 계산과 기계적인 우연이 만들어낸 것이기에 마치 자연처럼 유일하고 신비롭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특정한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 주제에 가까웠다.”라는 작가의 말대로 김인영은 지지체를 어디로 삼든지, 어떤 도구를 손에 들고 사용하든지 간에 평면과 표면에 대한 탐구를 끈질기게 이어가고 있다.5) 그리고 이것이 내가 김인영을 소개한다면 가장 먼저 사용하고 싶은 문장이기도 하다.


[각주]


1) 작가의 의도를 따라 다시 말하자면, 전시는 인사미술공간의 공간에 따라 지하, 1층, 2층의 세 가지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본문에서는 작품의 형식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한 것임을 밝힌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리-앨리어싱』(서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9), pp.6–7.
2) 〈매끄러운 막〉(2019) 시리즈의 제작 과정에 대해 작가의 말을 빌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처음 김인영은 A4 용지 등의 종이에 여러가지 물감을 펼쳐 섞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만든다. 이후 해당 이미지를 스캐너로 스캔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왜곡이나 결절을 발생시키는 스캐노그라피 기법을 사용하여 원본과는 다른 디지털 이미지로 만든다. 이후 디지털 이미지를 포토샵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가공하고 수전사용 필름으로 제작한다. 필름으로 제작된 이미지를 아크릴에 수전사 하여 씌우는 것이 〈매끄러운 막〉의 공정이다. 원본 이미지를 직접 제작하기도 하지만 인터넷 등에서 발견한 사용 가능한 이미지를 사용하기도 한다. (2020년 8월 10일 작가와의 인터뷰 중.)
3) 〈매끄러운 막〉(2019) 시리즈의 제작 과정에 대해 작가의 말을 빌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처음 김인영은 A4 용지 등의 종이에 여러가지 물감을 펼쳐 섞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만든다. 이후 해당 이미지를 스캐너로 스캔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왜곡이나 결절을 발생시키는 스캐노그라피 기법을 사용하여 원본과는 다른 디지털 이미지로 만든다. 이후 디지털 이미지를 포토샵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가공하고 수전사용 필름으로 제작한다. 필름으로 제작된 이미지를 아크릴에 수전사 하여 씌우는 것이 〈매끄러운 막〉의 공정이다. 원본 이미지를 직접 제작하기도 하지만 인터넷 등에서 발견한 사용 가능한 이미지를 사용하기도 한다. (2020년 8월 10일 작가와의 인터뷰 중.)
4) 작가 포트폴리오에서 발췌.
5) 김인영, 「불확정성을 바탕으로 한 회화 공간의 이중적 구조화에 대한 연구」(서울: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pp.65–66.


※ 이 원고는 『2020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프로그램 결과보고 도록』에 수록된 것으로, 저작권자의 동의 아래 게재하는 글입니다.

최희승

최희승은 주로 전시를 기획하고, 즐겁게 본 작가와 전시에 대해 글을 쓴다. 2015년부터 2020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하면서 《젊은모색 2019: 액체 유리 바다》 (MMCA, 2019), 《동시적 순간》(MMCA, 2018), 《층과 사이》(MMCA, 2017) 등을 기획했다. 현재 두산갤러리 큐레이터로 재직하며 작가들과 함께 전시를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