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나, 우리, 그리고 지금 – 배윤환 회화에 부쳐

posted 2022.10.04


배윤환 작가의 2021년 신작 회화인 〈다음 정거장은 당신이 있는 곳이에요〉는 총 세 개의 캔버스로 연결되는 하나의 장소인 전철을 배경으로 한다. 각 캔버스의 장면은 옴니버스 구성처럼 보이기도, 혹은 하나의 이미지로서 이어진다. 세 개의 캔버스 중 가장 왼쪽 그림의 전철 속 인파는 여느 아침 출근의 풍경과 다르지 않게 빽빽하다. 작년부터 의무적으로 착용해야 하는 마스크가 이들 간의 심리적 거리를 시각화하고 있으며, 마스크 밖으로 드러난 표정과 몸짓 등은 인물들 간 노골적인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다. 이 군중들은 흑백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 와중에 화면 중앙에 꽃을 든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마스크도 착용하지 않은 채 환하게 웃으며 손에 쥔 꽃을 내려다보고 있다. 마치 현실 세계로 홀연히 나타난 듯 이 꽃은 흑백 화면 한가운데에서 홀로 화사한 색채의 빛을 뿜고 있다. 이를 들고 있는 남성은 꽃으로부터 발산되고 있는 빛에 동화되며 원래의 색상으로 물들어간다. 여전히 무심하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거나, 곁눈질로 째려보고 있는 주변 사람들은 이 신기한 광경보다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이 남자의 부주의함에 불편한 기색이다. 그는 화면 한가운데서 홀로 행복감을 만끽하며 다른 이의 눈에는 지금의 환경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는, 군집의 활동 지침에서 어긋나있는 거추장스러운 개인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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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정거장은 당신이 있는 곳이에요〉, 2021, 캔버스에 아크릴, 73x117cm. 이미지 제공: 배윤환

세 개의 캔버스 중 가운데 놓인 화면에는 전철 출입구 문이 그려져 있다. 전철 문을 경계 삼아 문밖에 나란히 서 있는 이들은, 배윤환이 묘사한 흑백 인간 군상과는 다른, 유채색의 풍경이다. 서로 힐끗거리고 있는 흰색과 갈색의 이 두 마리의 곰은 서로 상반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흰색 곰은 섬들이 그려진 노랑색 셔츠를 입고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을 숟가락으로 퍼먹고 있다. 딸기 치즈맛이 나는 이 아이스크림의 붉은 과즙을 입가에 묻힌 채이다. 다른 창밖에 서 있는 갈색 곰은 숲속을 헤매고 뒹군 듯 나무 이파리를 몸 여기저기 붙인 채 사냥한 연어 한 마리를 입에 물고 있다. 이 장면은 첫 번째 캔버스에서의 모호했던 창밖 풍경과 내부의 경계를 보다 명확하게 한다. 첫 번째 캔버스를 잘 들여다보면 인간 군상이 모여 있는 실내와 구분되는 바깥 풍경이 그려져 있음을 눈치 챌 수 있는데, 오른쪽 윗부분에 그려진 원형의 이미지는, 작가의 말에 따르면, ‘뛰는 누우의 뒷모습’이다. 이 두 번째 캔버스에는 전철문 뒤의 창밖 풍경으로 컬러 색채를 사용함으로써 안과 밖을 한결 명확히 구분한다.


세 번째 캔버스도 사람들로 가득한 전철 내부인데, 화면의 배경인 전철 밖은 자연 풍경이다. 붉은 산과 푸른 산, 새벽녘이거나 한밤중 같은 하늘빛과 대조적으로 사람들은 역시나 흑백의 무채색이다. 이들은 곧 내릴 정류장으로 향하는 무리, 혹은 의자에 앉아있거나 자신의 모바일 전화기에 집중한 채 주변을 신경 쓰지 않는 무리 등으로 나뉘어진다. 이 군중 속에는 기이하게도 두루미류의 조류 한 마리가 섞여 있는데, 화면 속 인물들은 그 누구도 이 뜬금없는 동물이 섞여 있는 것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이질적인 존재는 마치 숨은그림찾기처럼 주변과의 위화감 없이 섞여 있다. 앞의 그림처럼 색채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며 불편한 감정을 넘어서 아예 무관심한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그림의 전체 분위기로서 그려진 마스크를 쓰고 있는 인간 군상의 풍경은 지금도 그 확산세를 멈출 줄 모르는 전 지구적 팬데믹 사태의 현실을 드러낸다. 화면 안에서 제시하고 있는 꽃과 인간, 바깥과 안, 유채색과 무채색, 자연과 사회 등 그 경계를 나눌 수 있는 시각적 장치들은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표현해온 서사를 그만두고 싶다던 배윤환의 말을 떠올리게 했다. 이미지 자체로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는 보다 매크로(macro)한 시각으로 화면을 그려내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는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가 그린 숲의 모습이 좋다고 말했다. 호크니의 풍경화를 개인의 서사를 일일이 설명할 필요 없는 ‘그림’으로서 인지할 수 있어서일 것이다. 그는 이 노작가가 그린 거대한 풍경 속에서 단지 바라보면서 이미지에 감흥 할 수 있는 그림의 힘에 압도되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이번 신작은 개인 서사를 중심으로 텍스트화 하고 있던 글과 이미지 등을 좀 더 시각적인 상징으로 압축시키고자 하는 동시에 관객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는 현재 인류가 공통적으로 처한 위기 상황 속 각자의 모습을 환기하고 함께 고민하게 하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


지금껏 배윤환은 이미지 못지않게 텍스트를 즐겨 사용해 왔다. 그의 텍스트는 특유의 짧고 거친 드로잉 선처럼 건조하면서 강렬한 문장들로 이루어진, 자신이 처한 개인의 서사로 가득하다. 또한 개인적 경험과 일상으로부터 전달하고자 하는 그의 단편 소설같은 서사는 여러 단위의 장면으로 나누어 연속적인 드로잉이나 설치를 통한 애니메이션으로 구현되곤 하였다. 화면에는 주로 굵고 거친 강렬한 선으로 구성된 캐릭터들이 생생하게 꿈틀거리는 화면이 만들어졌다. 배역이 주어진 캐릭터가 그려지고, 스토리가 입혀지며, 장면이 연출되면서 완성된 화면은 다소 거칠고 시니컬한 이야기들이 엉키면서 생동감으로 채워졌다. 이에 비해 앞서 살펴본 회화 신작과 더불어 진행 중인 2021년 신작 드로잉들은 여러 종류의 감각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시도가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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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엽수, 날카로운 부엉이〉, 2021, 종이 위에 오일파스텔, 119 x 74 cm. 이미지 제공: 배윤환

“날카로운 침엽수의 잎이나 청설모의 털, 고슴도치, 박쥐 날개의 생김새를 보면 뾰족한 선들과 깍깍 거리는 까마귀나 까치의 울음소리가 연동된다. 매미의 울음소리는 변칙적인 전자음과 같아서 어떤 특정한 선이라기보다 뒤죽박죽 섞인 선처럼 느껴진다. 활엽수의 넓적하고 둥그런 모양은 호박벌의 귀여운 몸짓과 비행술, 뚱뚱한 곰의 형태 혹은 뭉게구름 같은 것들과 연결된다.” (작가 노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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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벌〉, 2021, 종이위에 목탄, 74 x110 cm. 이미지 제공: 배윤환

그래서 이번 드로잉들은 사건의 서술적 묘사보다는 특정 대상에 온 감각이 집중된 이미지로 구현되었다. 작가 노트에서 서술한 것처럼 각 대상이 내는 소리, 생김새, 몸짓에 따라 재료의 선택과 그 사용 방법이 다르다. 가령 〈침엽수, 날카로운 부엉이〉 (2021, 종이위에 오일파스텔, 119 x 74 cm.)의 경우 짧은 선으로 화면을 뒤덮고 있는데, 침엽수의 얇고 뾰족한 잎새들과 부엉이의 몸을 덮고 있는 깃털과 날개 등이 공기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리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침엽수, 박쥐, 까치〉 (2021, 종이위에 오일파스텔, 76.5 x 57 cm.)는 신경질적인 울음소리와 날개의 퍼덕임, 그리고 침엽수의 날카로운 형태의 감각에 몰두하여 만들어낸 이미지임을 느낄 수 있다. 〈호박벌〉 (2021, 종이위에 목탄, 74 x110 cm.)은 벌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따라가는 곡선들과 양봉을 시도하는 양봉업자가 있는 풍경으로, 목탄을 최대한 부드럽게 문질러서 둔탁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최대한 살리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대상의 감각을 온전히 즐기는 방법을 선택한 작가의 그리기 형식은 한동안 지속될 것 같다. ‘일상’이라는 당연했던 개념이 점점 유효하지 않게 된 오늘날,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각자의 모습,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현상, 상호 작용 등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한 요즘이다. 작가는 언제나 자신의 방법론을 변화시키고, 다름을 만들어내며 무채색으로 잠식되지 않으려는 존재라는 메시지가 요즘의 배윤환 작가의 작업 속에서 강렬하게 전해진다.


※ 이 원고는 『2021 국립현대미술관 고양 레지던시 입주작가 비평모음집』에 수록된 것으로, 저작권자의 동의 아래 게재하는 글입니다.

김인선

김인선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대표는 이화여자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미술사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대안공간 루프 큐레이터(1999), 광주비엔날레 코디네이터(2002), 부산비엔날레 코디네이터(2000), 부산비엔날레 큐레이터(2006), 부산비엔날레 프로듀서(2012), 제주비엔날레 예술감독(2020), 국제갤러리 부디렉터(2003–2004),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사무국장(2005), 대림미술관 학예실장(2006–2007), 인터알리아 아트컴퍼니 디렉터(2007–2009) 등을 역임했다. 현재 전시 공간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을 운영하면서 국내 작가들을 소개하고 국내외 전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