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이소요: 도시자연이 풀려나다

posted 2022.10.06


〈서울에 풀려나다〉 연작, 2021, 식물 보존물, 단채널 비디오, 가변크기. 사진: 최연근.

〈서울에 풀려나다〉 연작, 2021, 식물 보존물, 단채널 비디오, 가변크기. 사진: 최연근.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창동 레지던시.

이소요의 〈서울에 풀려나다〉 연작은 도시에 대해 감각을 열어준다. 그는 도시라는 공간을 마치 인간만의 공간으로 상정해왔던 우리의 공간적 인식을 새롭게 환기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언제나 주변에서 함께 시공간을 공유하며 살아왔지만, 단지 우리 인식체계 속에 들어오지 않았을 뿐인 비인간 행위자들에 주목하기를 권한다. 작품의 이와 같은 인식론은 최근 도시정치생태학(urban political ecology)으로 명명된 하나의 인식론이자 방법론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 공간에 대한 새로운 주목과 그 결을 함께하고 있다.


정치생태학이라는 학문은 그 이름이 말해주고 있듯이 생태학을 정치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다른 분과학문에서 환경사회학, 환경지리학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모두 기본적으로 그 인식론적 바탕을 자연의 사회적 구성에 두고 있다. 즉, 정치와 생태, 환경과 사회의 관계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관계임을 상정하고, 각 영역의 문제를 결부시켜 분석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생태 문제를 정치적 관계로 해석하고, 환경의 문제를 사회 안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도시’정치 생태학이란 용어를 명명하였을까? 도시정치생태학은 전략적으로 정치생태학 앞에 ‘도시’를 강조한다(Heynen et al., 2006). 이는 기존 정치생태학자 연구 방법과 장소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환기시키고자 하는 일종의 은유이다. 즉 ‘제3세계’ 혹은 멀거나 외딴 곳에 있는 ‘야생’이 곧 ‘자연’이라고 보았던 기존 관점이 정치와 생태의 이분법을 강화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도시도 자연의 일부임을 상기하고자 ‘도시’를 명기한 것이다. ‘도시’를 앞에 붙인 정치생태학은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정치생태학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지적 자기반성 정도로 치부하면 충분한 것일까? 필자는 단호히 그 이상의 효과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전략적 용어로서 ‘도시’는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왔던 기존의 공간들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Amin & Thrift, 2017). 특히 정치생태학의 분석 대상과 시기, 방법에서 획기적인 전환을 불러왔다. 이런 측면에서 도시자연(urban nature)이란 개념은 인간의 정주공간으로 인식되어왔던 도시 공간의 인식론을 확장하여 그 속에 존재하는 동물, 식물, 사물, 인프라와 인간과의 관계성을 시-공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다. 따라서 도시자연은 ‘도시 속의 자연’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기존에 도시 공간을 가로지르던 인간-비인간, 인공-자연, 농촌-도시의 이분법적 경계들을 해체하려는 시도이다(Ernstson & Sörlin, 2019). 그런 점에서 〈서울에 풀려나다〉는 도시의 삶을 자연의 일부, 즉 도시자연이라고 보는 도시정치생태학의 관점과 상통하며, 그 연구 대상과 방법을 확장해준다.


〈서울에 풀려나다 – 야고(野菰), 버섯 같은 것〉, 2021, 식물 보존물, 단채널 비디오, 가변크기. 사진: 최연근.

〈서울에 풀려나다 – 야고(野菰), 버섯 같은 것〉, 2021, 식물 보존물, 단채널 비디오, 가변크기. 사진: 최연근.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창동 레지던시.

〈서울에 풀려나다 – 야고(野菰), 버섯 같은 것〉, 2021, 세부. 사진: 작가 제공.

〈서울에 풀려나다 – 야고(野菰), 버섯 같은 것〉, 2021, 세부. 사진: 작가 제공.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창동 레지던시.

도시 공간 사이사이마다 자리를 잡아간 식물 사례들을 통해 이소요는 서울이라는 공간과 한국 사회가 경험해온 개발의 역사성과 물질성에 주목한다. 특히 인간에 의해 형성된 다양한 인공물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온 식물계의 물질성은 우리가 도시에 대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도시성’이라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힌다. 또한, 발전주의적 개발사업과 동시에 녹화사업이라는 국가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가 돌아가고 싶어하는 자연의 모습’을 상정하고, 이를 조형해나간 국가의 수행성도 드러낸다. 우리(인간)는 언제나 원하는 것을 계획하고, 설계하여 그것을 작동하게 하며, 동시에 이를 잘 수행했다고 자부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비인간 행위자들은 이 틈에서 자신의 물질성과 행위성을 드러내고 인간의 계획에 따라 순응하기도 하고, 때로는 저항하고 교란하기도 하면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창발적 생태(emergent ecologies)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Kirksey, 2015).


〈서울에 풀려나다 – 참오동나무〉, 2021, 세부. 사진: 작가 제공.

〈서울에 풀려나다 – 참오동나무〉, 2021, 세부. 사진: 작가 제공.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창동 레지던시.

〈서울에 풀려나다〉가 가지는 정치생태학적 특성을 두 가지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방법론적 환기의 측면에서 작가를 도시정치생태학자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소요는 도시 공간 속에 비가시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다양한 비인간 행위자들을 드러낸다. 에어컨 실외기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로 싹을 틔우거나, 담벼락과 하나 되어 20년이 넘도록 우리의 시선에 포착되지 않은 참오동나무, 하늘공원에 매립된 폐기물이 만드는 지열을 통해 억새 뿌리에 기생하는 “버섯 같은” 야고 등 그가 작품을 통해 드러낸 비인간 행위자들은 그 존재 양식에 대한 주목 자체로도 우리의 시-공간적 감각을 새롭게 재구성한다. 두 번째로 〈서울에 풀려나다〉는 스케일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가 제시하는 비인간 행위자들의 모습들은 우리의 눈에 익숙하지 않은 비가시적 스케일을 지니지만, 이들을 직접 가공하여 조형물로 만들고, 담론을 구성하는 과정은 비인간 행위자들에게서 새로운 역사성을 발견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이와 더불어 이소요의 작품세계는 활발한 현장성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는 다양한 비인간 행위자들을 포착하고, 드러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다가간다. 전국의 산과 도시를 막론하고 직접 현장에서 비인간 행위자들의 존재 양식을 확인하면서 이들의 특성을 이해하고자 한다. 이렇게 발견한 생물을 채취하여 키우고, 보존하면서 담론을 만들어내는 전 과정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생물 종이 작가의 손을 거쳐 발화(發話)하는데 적어도 1년의 시간과 노동이 투입된다. 그동안 작가는 비인간 행위자들의 생활사를 이해하고, 이들과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마주칠 수 있는지 조사하고 현장으로 들어간다. 이런 현장성은 인간과 비인간의 복잡한 관계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독특한 형태의 실천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식물도설 유독식물편』, 주석〉, 2021, 식물 보존물과 문서가 있는 설치, 가변크기. 사진: 최연근.

〈『조선식물도설 유독식물편』, 주석〉, 2021, 식물 보존물과 문서가 있는 설치, 가변크기. 사진: 최연근.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창동 레지던시.

〈『조선식물도설 유독식물편』, 주석〉, 2021, 세부. 사진: 최연근.

〈『조선식물도설 유독식물편』, 주석〉, 2021, 세부. 사진: 최연근.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창동 레지던시.

〈서울에 풀려나다〉는 ‘재자연화’ 혹은 ‘활생’ 등으로 번역되어온 ‘페럴’(feral)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계획과 의도대로 자연을 조형하고 변형시켜왔다고 믿지만, 이소요의 작품은 이런 믿음에 균열을 가한다. 비인간 자연의 생활사와 그들의 물질적 특성은 항상 인간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여기서 “서울에 풀려난” 것은 인간이 풀어준 것도 아니고, 비인간이 독자적으로 풀려난 것도 아니다. 다만, 인간과 비인간의 독특한 형태의 관계 맺기가 특정한 물질적,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문화적 마주침을 통해 일어난 것일 뿐이다. 인간이 참오동나무 씨앗을 자리를 잡게 만들기 위해 에어컨 실외기에서 물이 떨어지게 한 것이 아니라, 도시에 흩어진 수많은 씨앗 중 하나가 물을 만나 발아할 수 있었을 뿐이다. 하늘공원의 야고는 제주에서 이식한 억새에 기생하고 있다가 인간에 의해 기후가 다른 서울로 옮겨졌고, 매립지의 물질작용이 지열을 제공하여 그 다종적 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처럼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은 우연적이기도 하면서 창발적이다. 풀려난(feralized)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은 결코 특정한 방향으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며, 정하고자 한 대로 흘러가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독특한 관계성은 결코, 자연에 대한 낭만화나 회복과 복구의 서사로만 바라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연에 대한 폭력성과 정복, 자원화의 서사로만으로도 볼 수 없다. 이소요는 이와 같은 이분법적 서사를 넘어서 복잡한 다종적 관계성의 지형들을 보여준다. 작가가 그려내는 도시자연의 모습은 인간과 비인간, 인공과 자연, 농촌과 도시 등의 다양한 양분법적 접근에 균열을 내어 대안적 관계성을 모색함으로써 새로운 설명방식을 제공하고 있다.


〈『조선식물도설 유독식물편』, 주석〉, 2021, 작업 과정. 사진: 작가 제공.

〈『조선식물도설 유독식물편』, 주석〉, 2021, 작업 과정. 사진: 작가 제공.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창동 레지던시.

[참고문헌]

1) Amin, Ash & Thrift, Proff. Seeing like a city. Chichester: John Wiley & Sons. 2017.
2) Ernstson, Henrik., Sörlin Sverker. Grounding urban natures: histories and futures of urban ecologies. Massachusetts: MIT Press. 2019.
3) Heynen, Nick., Kaika, Maria., & Swyngedouw, Erik. (Eds.). In the nature of cities: urban political ecology and the politics of urban metabolism. New York: Taylor & Francis. 2006.
4) Kirksey, Eben. Emergent ecologies. North Carolina: Duke University Press. 2015.


※ 이 원고는 『2021 국립현대미술관 창동 레지던시 입주작가 비평모음집』에 수록된 것으로, 저작권자의 동의 아래 게재하는 글입니다.

김준수

김준수는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에서 학부와 석사마치고,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에서 박사를 수료했다. 국가와 자연의 관계성을 다룬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특히 인간 너머의 지리학, 동아시아 인류세에 대한 여러 논문을 출판했다. 비인간 행위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근대국가의 형태와 능력, 수행성을 만들어냈는지 연구했으며, 도시의 비둘기, 한강, 아프리카돼지열병, 외래종 붉은 가재 등을 연구했다. 최근에는 제국주의 시기 동원된 비인간 행위자들과 동아시아에서 북미지역으로 넘어간 외래종 물고기에 대해 국가생태학 지식이 어떤 방식으로 생산되고 있는지를 현장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