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정소영: 알 수 없는 곳의 움직임

posted 2022.10.06


〈어부의 섬〉, 2021, 한-중 배타적 경계 수역에서 떠내려 온 것으로 추정되는 부표, 구리, 가변 크기.

〈어부의 섬〉, 2021, 한-중 배타적 경계 수역에서 떠내려 온 것으로 추정되는 부표, 구리, 가변 크기.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창동 레지던시.

인간과 조각은 모두 ‘땅’ 위에 직립한 존재/물이다. 조각(가)은 땅에 의탁하고 연루되며, 또 저항하길 반복해왔다. 정소영의 작업 역시 조각-작품의 필수 배경이자 조건인 ‘땅’, ‘공간’, ‘장소’를 지질학적, 또 사회 정치적으로 사고하며 다층적 역사와 개념을 물질화한다. 다시 말해, 작업은 물질과 이미지로 귀결되는 미술(조각)에 관한 질문이자, 수많은 종과 경계가 뒤섞이고 축적된,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물리적 시공간에 관한 탐구로 볼 수 있다.


조각과 지질학은 땅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관여한다는 점 외에도 시간을 축척하며 그 사전/후를 활성화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먼저, 조각은 그 과정과 시도가 어떠하든 결국 덩어리로 귀결되곤 한다. 같은 이유로 전통 조각은 절대불변의 가치 표상과 숭배의 대상이 되곤 했더랬다. 지질학은 통상적으로 이미 결정된 데이터로서 지각 조성과 구조를 분석 응용한다. 수많은 손의 움직임으로 만들어진 조각과 다양한 성질과 구조가 축척된 지각은 모두 과거를 관통하며 자기 절대성을 분해 재생산한다. 정소영은 이 같은 시간의 해체와 재생산에 주목하며 조각을 고정불변의 결과가 아닌 일종의 ‘변화’이자 ‘속도’로 현시한다. 이미 결정된 물질이 드러내는 절대성보다는 사전/후 시공의 활성화에 주목하며 일종의 움직임으로, 증가와 방향의 매체로 조각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조각의 속도는 무분별하게 발생하는 정신착란의 불연속적 사건과는 정반대의 미시적이지만 거대한 지속적인 세계의 호흡으로 감지된다. 그렇게 세계의 심층으로 침투하고 스스로를 풀어헤치는, 잉여적이지만 멈추지 않는 움직임으로 조각은 만들어진다. 때문에 그것의 직립은 지면에 박힌 말뚝이 아니라 일종의 순례이자 배회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배경으로서의 전시장/땅은 기존 경계에서 벗어나는 역사와 정념, 기억을 상기하는 공간이 된다.


〈굴러온 길〉, 2020-2021, 철제 분체도장, 가변 크기.

〈굴러온 길〉, 2020-2021, 철제 분체도장, 가변 크기.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창동 레지던시.

실제로 정소영의 작업은 꽤나 직접적인 보행, 혹은 배회를 통해 배타적 관념을 무너뜨리길 시도한다. 〈돌〉(2016)과 〈지평선〉(2016)은 DMZ라는 특수한 장소의 인지에서 출발한 일종의 퍼포먼스 기록 영상으로 무거움과 가벼움, 밝음과 어두움, 수직과 수평 사이에서 옮기고 이동하는 행위를 통해 피상적으로 존재하는 경계를 지극히 신체적이고 심리적인 상태로 전달한다. 〈Tectonic Memories〉(2017~) 시리즈의 몇몇 작업은 작가가 직접 방문한 도시의 지표면을 시작으로 지정학적 영토의 경계를 포함한 여러 사회 정치적 층위를 침투 초월하는 움직임을 떠올리게 한다. 또 땅의 관심을 바다로 이동 확장시킨 최근 개인전 《해삼 망간 그리고 귀》(2021)에 포함된 〈시차〉(2021)는 관객들이 직접 밀고 움직일 수 있는 두 개의 회전 구조물을 어긋나게 설치하며 동기화되지 않는 세계로의 입장을 유도한다. 이 밖에도 망망대해에 얇을 선을 그리는 배의 이동을 반복 재생하는 〈섬 그리기〉(2020), 한-중 배타 수역에서 떠내려 온 부표로 만들어진 〈어부의 섬〉(2021),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일제의 검거를 피해 독일로 망명한, 〈압록강은 흐른다〉(1946)의 저자이기도 한 이미륵의 생애에서 영감을 받은 〈이미륵의 거울〉(2021~) 등 정소영의 작업은 다양한 이동과 속도를 경유하며, 또 그것의 잔상을 포개며 마주한 조각을 미지의 시공에 다다르는 매개로 제안한다.


〈시차〉, 2021, 철 파이프, 메쉬, 베어링, 어망, 분체도장, LED 조명, 합판, 160 × 270 × 300 cm.

〈시차〉, 2021, 철 파이프, 메쉬, 베어링, 어망, 분체도장, LED 조명, 합판, 160 × 270 × 300 cm.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창동 레지던시.

〈이미륵의 거울〉, 질산은, 수산화칼륨, 포도당, 암모니아수, 정제수, 강화백유리, 스테인리스 스틸, (개별) 80 × 120 × 6 cm.

〈이미륵의 거울〉, 질산은, 수산화칼륨, 포도당, 암모니아수, 정제수, 강화백유리, 스테인리스 스틸, (개별) 80 × 120 × 6 cm.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창동 레지던시.

그렇다면 조각과 함께 땅에 직립한 인간은 작가의 작업에서 어떤 존재로 나타나게 될까. 앞서 설명했듯, 〈ISA(International Seabed Authority)〉(2021), 〈Tectonic Memories Chapter V. Words〉(2020), 〈Tectonic Memories Chapter I. A Romance〉(2017) 등의 작업에서 작가(인간)의 활동은 생물과 무생물, 물질과 비물질, 어제와 내일이 동시에 존재하며 맞물리는 상태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는 다시 무한과 비경계의 집합으로 연결된다. 같은 맥락에서, 작업의 출발이라고 말해 볼 수 있는 인간(의 경험)은 세계를 앞지르는 특별한 존재가 되기보다 다른 생물/종/물질과 함께하는 생물학적 혹은 지질학적 종(species)이 된다고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존재와 공생하는 종의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조르조 아감벤까지 지속적으로 구분되어 온 비오스(bíos)와 조에(zoé)로 연결 가능할 것이다. 정소영의 작업 속 인간은 약속된 체계 안에 자리 잡은 인종, 문화, 젠더 같은 사회적 존재-비오스(bíos)라기보다 다른 모든 생물들과 동일한 존재-조에(zoé)에 가까워 보인다. 흔히 말하는 사회-문화적 생물인 ‘homo’가 아니라 주변 생물과의 등가적 존재로 인간의 움직임이 나타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보편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의 무효화를 상상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분명한 선언이나 비판을 드러내지 않지만 작업에서 인간은 외부와 타자로 이해되는 세계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사고의 범주를 자연스럽게 확장 재설정하게 된다. 이는 ‘런던 클레이’의 여정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물에 다다르고 도심 속 건물 외벽과 겹쳐질 때, 그리고 다시 집 안 창문의 격자와 포개질 때 보다 분명하게 포착된다. 또 〈이미륵의 거울〉에서처럼 완벽히 통제되지 않은 이미지/잔상의 발생을 마주하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투영과 반영을 오갈 때 경험 가능해진다.


결국 관객은 전시장의 구조물을 밀고, 거울과 유리, 이미지와 잔상 사이를 거닐며 작업에 나타나는 인간/종에 동화된다. 작가의 이동과 움직임, 속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관객 역시 무엇이든 실현하는 절대적 주체가 아니라 동등한 생물, 지질학적 존재로서의 조에(zoé)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속도의 경제가 지배하는, 과도하게 치장된 디오라마의 세상에서 잠시 떨어져 나와 자기 일부로서의 세계 자체를, 그것의 미시적 속도와 시간, 관계를 재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얼핏 과거와 죽음에 닿아있는 듯한 정소영 작업은 그렇게 소비주의적 환영과 정체성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배회와 응시를 만들어 낸다.


〈섬 그리기〉, 2020, 단채널 영상, 사운드, 5분 33초(반복재생).

〈섬 그리기〉, 2020, 단채널 영상, 사운드, 5분 33초(반복재생).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창동 레지던시.

그럼 스스로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물질과 이미지의 움직임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그 움직임은 다시 발 딛고 있는 땅과 미지의 세계-바다의 심층부로 향한다. 지표면/해수면과 지하/심해는 쉽게 포착되지 않는 역동성을 지속하며 종결을 무효화하는 공간이 된다. 마치 도나 해러웨이가 『해러웨이 선언문, 인간과 동물과 사이보그에 관한 전복적 사유』(2019)에서 ‘지하의’(chthonic)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생명력을 강조하고 그들과의 친족형성을 통해 대안적 사유를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처럼, 정소영의 작업은 땅과 바닷속 알 수 없는 (비)존재들과 하나의 집합을 형성하며 인간 아닌 인간을, 인간 이상의 인간을 역설한다. 작업의 망간과 갯벌, 유리해변 등이 드러내는 무한의 시공은 흔히 말하는 포스트의 개념을 넘어 기존 범례와 범주를 해체하는 활동과 상상력을 촉발시킨다. 그렇게 정소영의 조각은 지속 불가능한 분절과 파편이 아니라 경계 지어진 시간과 역사 그리고 인간을 서로 충돌시키고 또 이어붙이는 움직임의 잠재태로 출현한다.


유년시절 다양한 문화권에서 생활한, 주로 물질을 다루는 작가에게 스스로 점유하고 있는 공간에 대한 관심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정소영은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통제하는 대신 다양한 관계의 층위를 생각하며 고정된 개념이 아닌 불확정성으로 발 딛고 있는 곳에 대해 질문한다. “지금 이곳은 어떻게 나에게 왔는가, 나는 이곳에 무엇을 투영해왔는가.” 작업에서 지질학적 탐구와 상상은 기존 질서와 경계의 소멸과 연동된다. 여기서 소멸은 예술의 형식과 내용이 되고, 그 물질은 다시 매체, 조각이 된다. 작업의 대상이자 배경이 되는 땅과 바다는 주어진 기호와 물질의 안과 밖을 뒤집고 이접시키며 관습적으로 구분하고 규정해온 영역들을 상호 작용시키는 하나의 전체를 드러낸다. 모든 생물의 등가물로서 조각(가)을 사고하며 경계와 한계를 타파하는 미술/조각/물질의 확장성과 유연성을 실험하는 것이다. 그렇게 정소영의 조각은 흔히 말하는 물질과 비물질, 가공품과 자연물, 과거와 미래 등의 이분법적 대립항에 대한 질문이자 회의로 곳곳에 나타난다.


〈어부의 섬〉, 2021, 한-중 배타적 경계 수역에서 떠내려 온 것으로 추정되는 부표, 구리, 가변 크기.

〈어부의 섬〉, 2021, 한-중 배타적 경계 수역에서 떠내려 온 것으로 추정되는 부표, 구리, 가변 크기.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창동 레지던시.

※ 이 원고는 『2021 국립현대미술관 창동 레지던시 입주작가 비평모음집』에 수록된 것으로, 저작권자의 동의 아래 게재하는 글입니다.

권혁규

전시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