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래하는 기술실험에 켜켜이 쌓여가는 백남준의 상징적 코드들
빛으로 대상을 그리던 카메라 옵스큐라의 깜깜한 방은 오늘날 미디어작품이 설치되는 공간이다. 초기 영상을 상영하던 방은 빛이 완벽히 차단된 공간이었다. 미디어 전시를 기획하기 위해서는 깜깜한 방에서 전기배선과 온오프 스위치를 먼저 챙긴다. 공간의 천장과 벽 점검은 필수 과정이다. 수십 대의 장비 구동으로 전력량도 확인한다. 백남준의 초기 TV아트는 ‘랜덤액세스’ 개념이 강조된 인터랙티브 퍼포먼스였다. 지금처럼 실시간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가 실행되기 이전이다. 텔레비전은 일방적인 소통체계이다. 웹을 기반으로 하는 네트워크 커뮤니케이션이 등장하면서 쌍방향 소통이 가능했다. 백남준의 TV예술은 일방적 수신체계 질서를 전복시키고, 비디오테이프에 담긴 영상을 합성, 조작, 변형시켜 추상적 형태로 코드화한다. 고급예술과 하위문화, 느린 장면과 빠른 장면을 무수히 교차시킨다. 여러 장면은 빠른 속도로 겹겹이 겹쳐지고 혼합된다. 수천, 수만 장이 보존된 백남준 영상 푸티지는 핵심적 연구유산이다. 백남준의 TV모니터는 점차 대형스크린으로 탈바꿈했다. 현재 이 영상은 3D 매핑과 가상현실로 재현 가능하다. 백남준의 기술적 실험은 끝이 없었다. 현실에서 불가능할 것 같은 상상을 현실 가능한 것으로 설계한다. 최첨단 기술이 세상 밖에 출시되기 전 그 실행을 기획한다. 마치 인공지능 데이터(음악, 퍼포먼스, 로봇, 비디오, 레이저, TV, 몽골, 칭기즈 칸, 샤머니즘, 철학, 경제, 정치, 사회적 문제 등)의 딥러닝이 수많은 지식체계를 창발적으로 조합시키고 진화시키듯이 말이다. 백남준에게 기술은 그 과정을 가시화하는 장치이다.
수많은 층위의 데이터 체계를 조직하기 위해 백남준은 항상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업했다. 기술적 상상을 같이 토론하고, 타협하고, 중재하는 집단적 활동을 지향했다. 결코 쉽지 않은 길이다. 백남준이 상상했던 아이디어 스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기술이 계속 출시되니 백남준은 계속 새로운 기술을 가진 젊은 엔지니어들과 함께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불프 헤르조겐라트 역시 “백남준은 항상 그의 스튜디오에 새로운 협업자가 계속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언급했다.1) 그 결과 전례 없던 역사가 써지고, 도착할 것 같지만 아직 도래한 적 없던 미래가 강렬하게 나타난다. 실시간 웹 기반 기술이 실현된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 작업 역시 1989년 팀 버너스 리(Tim Berners-Lee)가 고안한 인터넷 정보체계(WWW)가 전 세계 유저에게 퍼지기 전에 공유되었다. 백남준에게 비디오아트는 과학기술보다 한발 앞서 있고, 고도로 산업화된 기술이 실패된 형태로 쓰이지 않았다. 백남준이 사용했던 장비는 현재 빈티지로 분류되지만 그의 작업은 항상 최고의 기술을 담보했다. 백남준에게 기술은 항상 도래하지 않는 미래였다. 백남준의 한국 측 엔지니어 이정성 역시 “백남준 선생이 살아 있다면 아마 계속 새로운 기술을 연구했을 것”이라 했다. 로봇, 레이저, 인공지능에 이어 미래에 기약된 새로운 기술 말이다.
관객은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것처럼 시청각이 마비되는 듯한 충격으로 공간 속에서 느닷없이 압도된다. 설치작업은 작가 스튜디오 공간에서 완성될 수 없다. 전시공간에 설치 재료가 도착하는 순간부터 상상이 현실로 구축된다. 그렇다고 오랜 시간 상상했던 모든 기술을 한자리에서 펼칠 수도 없다. 한 작품이 전체를 관통할 수 있고, 그의 작업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작품 한 작품에 숨어있는 단서가 중요할 수 있다. 분절되어 있으면서 연결되어 있고, 각각 흩어져 있지만 결국 하나의 ‘코드’를 이룬다.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처음 선보인 〈메가트론〉은 여러 실험을 거쳐 진행되었다.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150대의 TV모니터가 마치 하나의 스크린처럼 형상이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한층 집약된 기술로 세상에 나왔다. 계속 변형되어 스미소니언미술관과 워싱턴미술관에 설치되었다. 이처럼 한 장소에서 실현되지 못한 소스들은 다음 작업으로 연결된다. 기술적 상상에서 펼쳐진 개념은 항상 도래하지 않은 미래였다. 기술발전 속도와 보완 상황도 작업을 완성하는 중요한 변수로 작동한다. 백남준은 오랫동안 고민했던 기술적 상상력을 기술이 발달하면 바로 적용했으며, 관객의 시청각은 마비되는 듯한 충격으로 백남준 세계에 압도된다. 1993년 제작된 〈시스틴 성당〉에 들어서는 관객은 빠른 속도로 반복되고 교차하는 이미지에 둘러싸인다. 로봇, 전자-TV, 레이저, 빔프로젝션 등으로 현실의 공간은 점차 가상의 디지털이미지에 감싸이고, 백남준의 디지털 세계로 전복된다.
초현실적 네트워크를 실천한 레이저 유토피아
에디트 데커(Edith Decker)에 따르면 백남준이 레이저 기술을 처음 사용한 작품은 1980년과 그 이듬해 호르스트 바우만(Horst H. Baumann)과 협업한 〈레이저 비디오 공간1〉, 〈레이저 비디오 공간 2〉이다. 1982년 휘트니미술관 전시에 공개한 〈레이저 비디오 공간 2〉는 텔레비전에서 해방되었다. 비물질의 전자 빛이 전시공간의 천장과 벽면에 투사되면서 미디어로 구축된 건축 환경이 펼쳐졌고, 관객은 빛 이미지 안에서 작품을 경험한다.
백남준이 세상을 떠난 지 정확히 16년이 흘렀다. 그가 살아 있다면, 올해로 딱 90세다. 백남준아트센터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바로크 백남준전》을 기획했다. 백남준 탄생 90주년 기념 전시로 기획된 이 전시에서 1995년 작품 〈바로크레이저(Baroque Laser)〉가 다시 설치되었다.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에서 선보인 작품 중 하나인 〈시스틴 성당〉(1993/2019)도 볼 수 있다(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에 비스듬히 겹쳐진 4개의 영상이미지가 전시공간의 사면과 벽 전체를 가득 채운다). 1995년 실행된 ‘바로크 레이저’ 프로젝트는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을 책임졌던 클라우스 부스만(Klaus Bussman)에 의해 기획되었다. 백남준의 엔지니어 이정성의 〈바로크 레이저〉 작품 기록영상은 이 작업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자료이다. 영상설치는 러닝 타임과 이미지 출력 해상도에 따라 육안으로 인식한 것처럼 기록하기 어렵다. 깜깜한 공간 안에 빛을 인식하는 몸의 감각 또한 중요하다.
백남준 작업세계를 더 면밀하게 연구하려면 그의 작품 속 영상 스틸 컷의 복합적 연구가 중요하다. 또한 다시 그의 작업을 설계하여 설치해야 한다면 높은 이미지 해상도를 구현해야 한다. 백남준이 그 당시 최고의 장비를 사용했듯이 말이다. 앤틱 빈티지가 된 해상도 낮은 기계로는 이미지 해독이 불가능 하다. 대형스크린, 고화질 이미지로 관객의 시선을 압도하고 충격적 유희를 주려고 했던 작가의 의도마저 증발한다. 이정성의 기록 영상 속의 〈바로크 레이저〉(1995)와 〈시스틴 성당〉(1993) 작업도 해상도가 높아 굉장히 선명하다. 백남준은 전시에 최고의 장비를 사용했고, 관객도 그 이미지에 압도되었다. 백남준 작품 이미지는 빠른 속도로 변하기 때문에 관객이 처음 그의 작업을 인지할 때 이미지 내용보다 온몸에 감각적 충격을 먼저 체험한다. 이러한 경험 부여가 중요하다.
백남준의 기술적 형상은 원초적 아이디어, 엔트로피적인 에너지, 최첨단 기술, 고가의 장비, 기술엔지니어 등의 자원으로 프로그램화된다. 관객은 최대한 백남준의 방식으로 코드화된 세계를 기술적 상상(Technoimagination)을 통해 해독해야 한다. 기술의 언어로 구현될 수 있는 예술형상 실험은 끝이 없다. 백남준은 아트와 테크놀로지의 간극을 간파하고 그 두 학문 사이에서 발생하는 간극을 줄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기술이 발달할 때마다 그 해독 장치는 변형된다. 백남준 연구는 어쩌면 스스로 증식하는 데이터를 해독하여 코드화하는 행위이다. 백남준의 커뮤니케이션 코드는 되돌아갈 길 없이 겹겹이 엉켜있는 시공간 속에 암호화되어 있다. 암호 해독을 위한 기술 장치를 습득해도 그 효력은 굉장히 짧다. 바로 또 다른 새로운 기술이 우리의 감각을 덮친다.
백남준 연구는 기술뿐 아니라 그가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 상상했던 예술개념에 대한 연구이다. 새로운 기술에의 몰두는 이미지 해석을 삼킨다. 혹은 그 반대일 수 있다. 백남준이 생전에 고민했던 예술과 기술(아트와 테크놀로지)의 치밀하고 섬세한 차이에 대한 연구는 이제 우리의 몫이다. 그의 사유 궤적을 물려받아야 한다. 백남준은 고고학을 치밀하게 연구했고 항상 최전선에서 기술실험에 몰두했으며, 혁신적인 기술을 사용했던 미래학자였다. 따라서 항상 새롭게 발생하는 사건이다. 비디오아트, 텔레비전아트, 인터넷아트 맥락에서만 그를 바라볼 수 없다. 미래를 위해 도래하고 있는 기술적 상황과 환경도 연구의 중요한 요소이다. 백남준 스튜디오에서 항상 젊은 엔지니어를 필요로 했듯 새로운 관점을 가진 연구도 계속 필요하다.
20세기 매체이론을 선도한 이론가로 맥루한이 있었다면, 백남준은 21세기 전자-미디어 커뮤니케이션 세계를 활짝 열어낸 사상가이다. 그의 작품해석은 코드화된 데이터(암호)를 해독하는 것과 같다. 앞으로 이 데이터들은 자가증식도 가능하다. 백남준 코드(열린 회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백남준은 사람들이 비선형적 사고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을 다음과 같이 인식할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화면에서 끊임없이 깜박이는 불빛을 보게 될 것이다(붉은색… 기다리고 생각하라, 파란색… 빨리하라, 초록색…정상속도로 하라, 오렌지색…개인적인 속도, 하얀색…음악 없이, 검은색…음악 아주 세게, 노란색…음악 천천히)”2) 그의 영상 채널 속의 빛이 끊임없이 이 주문을 걸며 관객을 마주한다. 각 세대의 TV모니터부터 도심 속 전광판에서 흘러나오는 비물질을 통해 그의 영혼이 마치 유령처럼 계속 떠돌고 있다.
[각주]
1) 《백남준아트센터 인터뷰 프로젝트: 볼프 헤르조겐라트》, 백남준아트센터, 2012, p. 25.
2) 백남준, 《백남준: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백남준아트센터, 2010, p. 193.
이은주는 홍익대학교에서 「매체변화에 따른 한국현대미술 연구: 한국미디어아트 (1960-1970) 연구」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홍익대학교 외래교수로 일하고 있다. 판화, 사진, 미디어아트, 실험미술 등을 주로 연구해왔으며, 원로작가 디지털 사업을 통해 김구림, 이강소, 강국진을 연구하면서 1960-1970년대 한국 초기 실험미술로 확장시켜 연구를 진행했다. 대안공간 갤러리 정미소와 아트스페이스 와트 디렉터를 역임했다. 《네덜란드사진전》(2009),《미디어극장전》(2011), 《타임리얼리티: 단절, 흔적, 망각》(코리아나미술관, 2019) 등의 전시를 기획했으며, 『백남준 이후: 미디어 아티스트와의 인터뷰』 (UP출판, 2016)를 집필했다. 주요논문으로는 「1960-1970년대 실험미술과 매체예술에 관한 연구」, 「1970년대 이강소의 실험미술연구」, 「포스트 디지털 매체 시대에서 판화의 동시대성 연구」등이 있다. 주로 장르 융합적인 현상에 주목하여 전시기획 및 저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