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회화라는 또 하나의 자연

posted 2022.10.24


〈숲〉, 2015, oil on canvas, 227x 580cm

〈숲〉, 2015, oil on canvas, 227x 58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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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진용의 작업은 주로 그가 직접 경험한 주변 풍경을 대상으로 한다. 이러한 그의 작업 경향은 2015년의 작품 〈숲〉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작품에서 그는 꿈에서 본 장면을 그리곤 했던 이전의 작업 경향에서 벗어나 현실의 풍경에 천착한다. 여기에는 과거의 작업으로부터의 일종의 단절과 연속성이 동시에 있다. 꿈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와 내러티브가 완전하게 제거되는 변화가 곧 단절이라면, 꿈속에서 경험한 복잡하고 비선형적인 사건들과 감정적 동요를 회화 캔버스라는 단일한 프레임 안에 압축시키는 태도는 자신의 경험을 회화 평면이라는 특수한 공간으로 전이시키는 현재의 작업과도 이어지는 것이다. 시작도 끝도, 입구도 출구도 없는 꿈속의 공간이 하나의 캔버스 평면으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제기될 수밖에 없는 회화적 구성과 선택의 문제는 결국 현실의 풍경이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심층적 사고와 감정을 통과하여 회화 작품으로 안착하는 과정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2015년 이래 범진용의 작업에서 나타난 변화는 그가 회화라는, 현실과 이어지면서도 떨어져 있는 창으로서의 특정성, 즉 물리적인 평면인 동시에 가상적인 세계로서의 특정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경험한 리얼리티를 어떻게 재구조화하여 회화 평면 안에 영구히 살아있을 맥락으로 재창조할지의 문제가 된다.


〈풍경〉,2016, oil on canvas, 227x870cm

〈풍경〉,2016, oil on canvas, 227x87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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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2017, oil on canvas, 97x193.9cm

〈풍경〉,2017, oil on canvas, 97x193.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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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에 그려진 〈풍경〉 연작들에서 범진용은 버려진 공원이나 들판, 야산처럼 그의 일상과 완전히 밀착되어 있지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은 장소들을 주로 선택하였다. 이와 같은 설정값을 통해 필자가 느끼게 되는 것은 진부한 일상적 틀이나 노동의 무게로부터 약간 벗어남으로써 얻게 되는, 현실과 이어져 있으면서도 정신적 자유로움을 담보해주는 거리이다. 범진용은 이러한 거리를 통해서, 작가로서 바라보는 세계에 대한 감각을 되살아나게 하고 자신이 발견할 것들에 집중할 수 있는 위치를 찾는 것으로 보인다. 상상과 현실이 위태롭지 않은 균형을 지닌 채 긴장감 있게 지탱되는 그 위치에서, 그는 자신이 채택한 현실의 풍경을 회화적 풍경으로 전환시킨다. 범진용의 작업들 대부분은 사진으로 포착한 장면에서 시작하지만, 결국은 사진에 담긴 사실로부터 독립적인 위상을 가진 또 하나의 자연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범진용이 선택한 장면들은 대부분 어디에서나 볼 수 있기에 장소의 특수함을 느끼기 어려운 평범한 풍경들이며, 극적인 사건이 배제되어 있다. 이러한 특성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린 풍경들에는 일련의 풍부한 생동감이 있다. 애초의 대상이 갖는 평범성은 그것이 그려진 결과의 감각적 풍성함에 더욱 집중하게 만든다. 대상에 담긴 극적 내러티브가 부재하기에 대상 안에서 작가가 발견하고 증폭시키며 때로는 새롭게 창조한 특질들이 더욱 생생하게 부각되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러한 특질은 관람자의 시선을 다시금 작가가 선택한 애초의 대상으로 돌아오게 만든다. 예컨대 도시 하천의 잡풀들을 그린 〈풍경〉(2017)에서 찐득한 유화물감의 질감을 드러내면서도 예민하게 얼키설키 얽힌 붓질들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으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평범한 잡초의 야생적이고 질긴 생명력을 사진적 기록보다 더 강하게 전달한다. 이러한 붓질들은 사진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대상의 폐부를 파고들면서, 평면 위에 영구히 현재진행형으로 존재할 새로운 자연을 펼쳐내는 것이다.


〈눈 오는 날〉,2019, oil on canvas, 193x97cm

〈눈 오는 날〉,2019, oil on canvas, 193x9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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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진용의 작업에서 이와 같은 생동감을 만들어내는데 가장 크게 기여하는 요인은 바로 그의 필치이다. 2019년~2020년에 그려진 〈눈 오는 날〉 연작에서 볼 수 있듯이, 범진용은 때로는 안으로 예리하게 파고드는 듯, 때로는 표면을 미끄럽게 스치듯 다양한 강약의 리듬을 가진 선묘들을 축적하여 형태를 만들어간다. 선을 수없이 쌓아 형태를 구축함으로써 대상의 밀도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배경과 형상을 모호하게 만들고 상호침투하게 함으로써 형태의 단단한 덩어리감 대신에 화면 전체에 흐르는 생기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다. 정체된 상태의 형태감보다도 살아있는 듯한 자유로운 활기를 포착하는 것은 그의 회화에서 중요한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까마귀 꽃밭〉,2020, oil on canvas,130x163cm

〈까마귀 꽃밭〉,2020, oil on canvas,130x16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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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진용은 최근 그림 속에 가족이나 지인들과 같은 인물을 등장시키기 시작했는데, 인물 역시 개별적 형태나 개성에 천착하기보다 전체적 풍경의 일부로서 다루고 있다. 인물들이 비교적 전면에 드러난 작품인 〈까마귀 꽃밭〉(2020)에서도 검은 옷을 입은 인물들의 뒷모습은 다양한 색의 선들로 뒤엉킨 꽃과 풀의 배경과 이어져서 제목 그대로 꽃밭의 일부처럼 보인다. 범진용은 흰색부터 붉은색, 초록색, 검은 색조에 이르는 다양한 색감의 선묘들을 통해 크고 작은 덩어리들을 치밀하게 구축하면서도, 때로는 의도적으로 느슨한 붓질로 만들어낸 여백으로 숨 쉴 공간을 부여함으로써 전체 화면 안에 유려한 균형을 만들어냈다. 덧칠이 가능하면서 필치에 따른 질감을 다양하게 구현할 수 있는 유화물감의 속성은 이러한 그의 작업방식과 필연적으로 연동되고 있다.


범진용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몸을 많이 쓸수록 그림이 잘 풀리는 느낌”이라고 언급하였다. 신체적 리듬을 실어내는 필치는 애초의 풍경에서 작가가 느꼈던 감정을 몸과 동기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곧 다듬어지지 않는 자연 상태의 풍경에 담긴 활력을 포착하는 화가의 눈이자 손이며 기질이다. 이러한 필치에서 우리는 애초의 대상에 담긴 생명력을 회화 평면 위의 진실로서 수렴시키려는 화가의 추구과정을 느끼며, 그 과정에서 감지되는 치열함을 완성된 작품 안에 성취된 대상의 밀도와 분리시킬 수 없는 상태로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회화가 갖는 묘미이다. 범진용이 보여줄 앞으로의 회화 작업에 대해 기대를 갖게 되는 이유이다.


※ 이 원고는 『2021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레지던시 도록』에 수록된 것으로, 저작권자의 동의 아래 게재하는 글입니다.

이은주

이은주는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와 동대학원 미술사학과 석박사를 졸업했다. 비영리전시공간 브레인팩토리의 운영자이자 독립기획자로 활동하면서 인사미술공간 신진작가 지원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현재 현대미술사 연구와 강의, 독립 기획을 병행하고 있다. 연구 논문으로 "1930년대 초현실주의 전시를 통해 본 초현실의 사회적 의미”(2017, 미술사와 시각문화), 공저로 『현대미술 현실을 말하다』(고흐, 2016)를 발표했으며, 최근 전시 기획으로 《비탈길을 좋아했지》(아트센터화이트블럭, 2021), 《정보의 하늘에 가상의 그림자가 비추다》(아트스페이스3, 2020),《Follow, Flow, Feed 내가 사는 피드》(아르코미술관, 2020), 《DMZ 평화정거장 2019》(파주 민통선 내 캠프그리브스, 201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