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스마트 세상 속 가전, 예술이 되다

posted 2022.10.20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한 정재희는 애니메이션과 퍼포먼스 비디오 같은 비물성적 영상 작업이 실재 공간에서 물리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다. 〈마음벌레〉(2006)에서 나비의 날개와 모기의 침을 가진 ‘마음 벌레’가 날아다니는 디지털 애니메이션이, 빈 공간의 모퉁이를 실사 촬영한 영상에 병치된다. 〈몸〉(2007)과 〈몸2〉(2007)로 상호작용이 있는 ‘영상 조각’이라 말한다.


〈마음벌레〉, 모니터, 디빅스 플레이어, 스피커, 가변크기, 2006. 이미지 제공: 정재희

〈마음벌레〉, 모니터, 디빅스 플레이어, 스피커, 가변크기, 2006. 이미지 제공: 정재희

이후 독일 브라운슈바이크(Braunschweig)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전자 제품을 소재로 한 작업을 시작한다. 브라운슈바이크 공대는 1745년 독일 최초의 공대로 알려져 있다. 주말이면 작가는 이 도시의 전자기기 가게에서 브라운 같은 독일의 가전제품을 관찰한다. 〈라디오타워〉(2012)에서 필립스 라디오 10개가 포장 박스 채 탑을 만들며 쌓여 있다. 불규칙한 리듬에 맞춰 박스 안 라디오는 저마다의 소리를 낸다. 〈옐로 무브먼츠〉(2013)에서 소형 안마기 9개가 포장 박스를 뜯지 않은 채 바닥에 놓인다. 상자 속 안마기는 진동하며 바닥을 이리저리 불규칙하게 움직인다. 〈아침의 풍경〉(2012)에서 브라운 전기 면도기, 브라운 헤어 드라이기, 브라운 오랄비 전동 칫솔을 박스 채 흰 좌대에 놓는다. 아침에 사용하기 마련인 전자기기들이 저마다의 리듬에 진동한다.


〈Radio Tower〉, 포장박스 안의 라디오, 85 x 27 x 27 cm, 2012. 이미지 제공: 정재희

〈Radio Tower〉, 포장박스 안의 라디오, 85 x 27 x 27 cm, 2012. 이미지 제공: 정재희

정재희는 전자기기라는 상품을 포장 박스 그대로 배열하고, 그것이 전시장에서 우연히 함께 놓인 것처럼 가장해 진열한다. 조각의 고전적 방식이나 문법을 의도적으로 폐기하며, 진부한 형태일 수밖에 없는 정육면체와 그 표면을 장식한 상품 디자인을 전면에 배치한다. 제프 쿤스의 유명한 작업 〈새 후버 컨버터블 그린, 블루, 더블데커〉(1981-87)는 플렉스글래스 안에 4개의 진공청소기가 상품 자체의 형태를 자랑하며, 빛을 발한다. 관객은 일상에서 쓰던 가전 기기의 형태가 갖는 미감을 자세히 관찰하게 된다. 그러나 정재희의 전자 제품 상자는 제품의 형태가 갖는 시각적 조형성마저 배제한다.


스스로 작동하는 전자기기 박스 작업은 농담처럼 다가온다. 농담은 늘 그 대상을 갖는다. 정재희 작업에서 농담의 대상은 조각의 전통이기도 하며, 상자에 갇혀 떨고 있는 상품으로 비유되듯 전자 기기 없이는 일상 유지가 어려운 관객이기도 하다. 정재희의 작업이 미술관을 찾는 중산층 관객에게 다른 맥락으로 기능한다. 안온한 삶을 유지할 목적으로 백색 가전을 구매하고 사용하는 이들에게, 제 일상 속 상품을 다시 조망하는 구조를 갖는다.


〈Unsmart Phone Orchestra〉, 스마트폰, 숫자들이 적힌 악보, 보면대, 보면대 조명, 280 x 280 x 100 cm, 2016. 이미지 제공: 정재희

〈Unsmart Phone Orchestra〉, 스마트폰, 숫자들이 적힌 악보, 보면대, 보면대 조명, 280 x 280 x 100 cm, 2016. 이미지 제공: 정재희

〈Present〉, DSLR 카메라, 삼각대, 아두이노 보드, 185 x 150 x 150 cm, 2017. 이미지 제공: 정재희

〈Present〉, DSLR 카메라, 삼각대, 아두이노 보드, 185 x 150 x 150 cm, 2017. 이미지 제공: 정재희

스마트 기기들이 일상화되면서, 정재희의 전자기기 작업 또한 관객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변화한다. 〈언스마트폰 오케스트라〉(2016)에서 스마트폰 10개가 앞면을 전시장 벽에 마주한 채 매달려 있다. 작가는 터치할 수 없어 제어가 불가능한 스마트폰을 ‘언스마트폰’이라 부른다. 보면대 위에 악보처럼 놓인 종이에는 숫자들이 적혀 있다. 관객은 이를 기반으로 각기 다른 벨소리를 내는 언스마트폰을 연주해 본다. 전시장 한 가운데에는 각기 다른 높이의 트라이팟 위에 DSLR 카메라 5개가 서있다. 어두운 전시 공간에서 전시장의 빈 벽과 관객을 향해 무작위로 플래시가 터지며 카메라가 자동으로 셔터를 누르는 〈프레젠트〉 (2017)다. 관객은 플래시 속도에 맞춰 등장하는 제 그림자를 순간적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전자기기를 애초 고안된 상황과는 다르게 기기를 작동하여 만들어지는 새로운 사운드 또한, 우리의 일상적 순간을 흔들어 보는 작업의 주요 요소가 된다.


〈Home Void〉, 스마트 텐트, 스마트폰, 태블릿 컴퓨터, 랩톱, 진짜와 가짜 다육식물, 여러 사적물품, 150 x 255 x 345 cm, 2018. 이미지 제공: 정재희

〈Home Void〉, 스마트 텐트, 스마트폰, 태블릿 컴퓨터, 랩톱, 진짜와 가짜 다육식물, 여러 사적물품, 150 x 255 x 345 cm, 2018. 이미지 제공: 정재희

스마트폰과 DSLR 카메라로 상징되는 포스트 디지털 시대의 생활 양식에 대한 작가적 관심은 〈홈보이드〉(2016)에서 다시 한번 담긴다. 전시장에는 텐트 하나가 설치되는데, 관객이 몸을 수그려 텐트 안으로 들어가면, 녹음된 숲 속 빗소리를 듣거나 인공의 산림향을 맡는다. 좌탁 위 태블릿 컴퓨터에선 한 개인의 인스타그램 페이지가 접속되어 있다. 그 계정이 팔로우 중인 이들이 업로드한 이미지들이 실시간으로 스크롤링되어 나타난다. 침낭에 놓인 스마트폰을 통해, 관객은 자신과 텐트 안의 상황이 ‘숲 속의 텐트’라는 이름으로 인터넷 상에서 생중계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홈보이드〉(2018)의 관객은 작품을 감상하는 위치에서, 익명의 사용자에 의해 바라보여지는 대상으로 전이한다 이때 정재희는 잦은 이주를 강요당해 전통적 의미에서 안식처로서 ‘홈’이 부재하게 된 ‘보이드’ 상황이라 말한다. 한편 스마트 기기가 상용화되고 소셜미디어가 일상화되면서, 일상의 모든 순간이 상품이 되어 가는 중이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상품의 개발로 바라보며, 작가는 레디메이드 전자 기기를 구매하고 배치하여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실험을 이어간다.


〈이상한 계절〉, 에어컨, 공기청정기, 히터, 선풍기, 가습기, 제습기, 에어컨 실외기, 진짜와 가짜 식물, 인조잔디, 화분, 선반, 벤치, 콘크리트 좌대, 가변크기, 2019. 이미지 제공: 정재희

〈이상한 계절〉, 에어컨, 공기청정기, 히터, 선풍기, 가습기, 제습기, 에어컨 실외기, 진짜와 가짜 식물, 인조잔디, 화분, 선반, 벤치, 콘크리트 좌대, 가변크기, 2019. 이미지 제공: 정재희

설치 작업 〈이상한 계절〉 (2019)에는 에어컨, 공기청정기, 히터, 선풍기, 가습기, 제습기 그리고 ‘진짜’와 ‘가짜’ 식물이 등장한다. 한 곳에서 히터가 온도를 올리면 다른 곳에서 에어컨은 온도를 내린다. 가습기가 작동하여 습도를 올리면 제습기는 일정한 습도를 유지하려 한다. 선풍기가 실내의 공기를 순환시키면, 공기청정기는 공기를 깨끗하게 유지하려 한다. 전시공간 외부에 놓인 에어컨 실외기는 뜨거운 바람을 내뿜는다. 작가는 말한다. “변덕스럽거나 가혹한 날씨가 내겐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합리적으로 느껴진다. 되레 이상한 건 외부의 사태와는 별개로 늘 일정한 온도와 습도, 그리고 깨끗한 공기질을 유지하는 내부의 환경이다.”


2019년 4월 한국 정부는 한국에서 5G가 세계 최초로 시작했다고 광고하며, 삼성전자와 LG전자로 대표되는 ‘K-가전’이 국제 시장에서 맹활약 중이라 선전한다. K-가전이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한 이유는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와 같은 빠른 경제 성장이 진행 중인 곳에서 늘어나는 중산층 삶의 양식 때문이다. 세계화가 가리키는 것은 완전히 전 지구적인 것이 되어 버린 상품의 분배이다. 지역적 차이나 개성 있는 삶의 양식은 사라지고, 중산층 삶의 균질한 미감 만이 남은 것이다. 정재희가 소재로 사용하는 가전제품은 전세계 중산층이라면 누구나 쓰는 상품이다. 포스트 식민주의를 마감하고, 글로벌한 시장주의가 전면화된 세계가 작업에 담긴다.


※ 이 원고는 『2021 국립현대미술관 고양 레지던시 입주작가 비평모음집』에 수록된 것으로, 저작권자의 동의 아래 게재하는 글입니다.

양지윤

양지윤은 현재 대안공간 루프의 디렉터이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의 수석큐레이터, 코너아트 스페이스의 디렉터로 활동했고, 암스테르담 데아펠 아트센터에서 큐레이터 과정에 참여했다. 기존 현대미술의 범주를 확장한 시각문화의 쟁점들에 천착하며, 이를 라디오, 인터넷,소셜 미디어를 활용한 공공적 소통으로 구현하는 작업에도 꾸준한 관심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