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 글을 적어야만 한다. 글을 적는 일이 비평직에 종사하는 이의 당연한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서두에 지난한 소회로서 밝히는 까닭은 대략 이삼십만 원의 언저리에서 정체된 원고료는 지속적으로 의욕을 침잠시키는 원인으로서 매번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하기 때문이다. 여느 결과물과 마찬가지로 비평 형식의 원고 또한 완성하는 데에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된다. 전시의 주제 및 그에 따른 레퍼런스를 참조하며 해설에 머무르지 않는 글의 구조 및 작품에 대한 분석을 세밀하게 구축하기 위해서는 창작의욕과 엇비슷한 결의 정신적인 고충 또한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그에 따라서 자연히 의뢰도 적게 받는 편이지만 간간이 적어야만 하는 마감 순서는 항시 엄혹하게 다가온다. 세마 난지 레지던시에 입주 연구자로 거주하며 실을 이번 글은 이러한 마감의 압박에서 벗어나 비평직을 고수해온 길을 진단하며 나에게 적는 수기 형식의 편지처럼 담담하게 예외적으로 적어보고자 한다.
재작년 서울시립미술관의 집담 좌담회 자료집과 함께 미술세계에 기고했던 <잘라라 평론하는 그 손을: 미술과 글쓰기에 관한 다섯 해의 기록>에서 필자는 저널리스트와 기자 그리고 전문직의 학자 사이에 낀 어정쩡한 임시 정박지에서 비로소 빛날 수 있는 비평의 변별적인 특수함과 그에 따른 노고를 함께 논한 바 있다. 물론 당시에 밝힌 비평가로서의 소회는 아직도 유효하다. 하지만 비평이란 것을 지속하기 힘든 냉혹한 현실과 회의감에서 글을 적는다는 행위는 무엇인지 다시금 반문해볼 필요가 있으며 여기에는 당연히도 한 사람이 가용할 수 있는 노력과 시간에 한계가 있음이 대두된다. 이미 적지 않은 평론가들이 토로한 바대로 또 한 번의 푸념이 될 수 있음을 감안하자면 한 달 반에서 두 달 정도의 시간을 꼬박 원고 하나에 매달려서 정산되는 고작 이삼십만 원의 대가는 비평직에 종사하는 이들이 오랜 기간 자리하며 건재할 수 없게 만드는 구조적인 병폐이다. 실제 편의점 최저시급보다도 못한 원고료의 부당한 처우에서 자존감을 깎아먹으며 번식하는 회의감은 직함에 대한 긍지마저도 잃게 만들 때가 있다. 첨예하게 비평의 사유와 촉을 닦고 가공해야 하는 종사자들이 누구보다도 먼저 컨베이어 벨트 위의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며 한도가 다하면 폐기처분되고 다음 타자에게 순서를 넘겨줘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직을 연명하더라도 또 다른 수익구조를 창출했거나 교직에 안정적인 자리를 얻었을 경우로서 비평직의 전문성을 별도로 말하는 것은 여전히 낭만적인 담화로 포장되고는 한다.
기존의 리뷰에 적용했던 분석 방법론이 다음 글에 동일하게 복제되지 않도록 양을 조절할 필요성도 있기 때문에 일을 많이 받으면 되지 않느냐는 반문 또한 유효성을 잃는다. 저비용 고노동의 열악한 측면에서 지나치게 왕성한 리뷰 활동을 하는 이들의 글로부터 한 작가에게 적용한 비평적 관점과 연구 형식이 자가 재생산의 대용품으로 전락되는 비윤리적인 모습을 종종 목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처럼 신체와 정신을 크게 소모하는 비평직은 일감이 많이 들어올 때 노를 힘차게 저을 활력을 제공하지 못할뿐더러 적게 들어오는 경우 또한 비평가로서의 이름이 잊혔다는 여러 구설수를 야기하는 만큼 여러모로 난처한 문제에 언제든 직면케 한다. 집담 좌담회의 기고 글에서 비평가의 박쥐와 같은 형편을 논했다면 경제적인 대목에서도 늘 이율배반적인 상황이 따라붙으며 해 비칠 날이 없는 처지로 저자를 몰아버리는 것이다. 가령 한 권의 도록이 제작되어서 나오는 절차도 마찬가지다. 작품 촬영 비용과 도록 및 팜플렛 디자인, 그리고 번역 비용에 이어서 가장 낮은 최소한의 단가가 바로 비평가의 몫으로 책정되기 때문이다. 작품 분석에 대한 원 글보다도 오히려 그 글을 번역한 비용이 월등히 높게 책정되는 것은 번역가의 노동 또한 주요한 하나의 창의적 작업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분명 한 번쯤은 공론의 의제로 다루어볼 필요가 있다. 거듭 말하자면 편집 디자이너와 번역 비용에 순차적으로 밀린 최하위층의 자리에 비평의 몫과 자리가 초라하게 주어져있는 구조적 병폐는 비평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현장 신과 너무나도 모순적으로 괴리한다는 점에서 또한 징후적인 것이다.
물론 미술 신의 현장뿐만 아니라 예체능계 구성원 누구나 오랜 기간 무명의 설움과 가난을 겪어야만 함은 주지의 사실이며 설사 이름이 알려지더라도 곧장 수익구조로 창출되는 것 또한 아니다. 하지만 글을 적는 비평가의 위치만큼은 세상에 작별을 고하는 순간까지 별다를 바가 없을 테다. 몇 백만 부의 판매 서적으로 경제적인 이득을 획득할 수 있는 소설가와 달리 비평은 글을 팔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자 수단 또한 주어져 있지 않다. 즉 도박을 걸 판돈이 없는 유일한 직종에 가까운 것이다. 슬픈 일인지 혹은 후련해할 일인지 혼동되지만 연례적으로 나오는 기관 레지던시 등의 도록에 실린 작가와의 매칭글에서 시답잖은 수다나 잡담을 나열해 놓은 일련의 원고에 더 이상 화가 나지 않는 이유 또한 이러한 부분으로부터 기인한다.
가끔은 엉뚱한 생각을 해볼 때도 있다. 미술 경매시장에 작품이 출품되어서 낙찰될 경우마다 해당 작품을 평한 비평 글의 필진에게도 수익의 1~3%를 떼어주는 방안이 합리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망상도 그 중의 하나다. 물론 해당 작품에 대한 비평글의 횟수와 분량에 대한 세세한 측정부터 어디까지를 비평가의 몫으로 책정해야 하는지 법률적으로 적확하게 따지기 어려운 정성적(定性的) 평가이니만큼 현실적인 타당성은 없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한 번쯤 호기롭게 제의해볼 수도 있는 미술계 일원으로서의 적합한 요구이기도 하다. 도록 한 권이 제작되는 경우 비평 글의 품앗이 가장 낮게 책정되는 처지와 마찬가지로 작품 가치가 상승하고 고가에 거래되더라도 갤러리와 경매시장 및 미술 관계자들이 모두 수익을 배분하는 것과 달리 그 어느 주체보다도 미학적인 여정을 끈질기고 고독하게 작가와 나눈 비평가만은 철저하게 수익 구조에서 배제되는 모순을 직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망상에서 이내 깨어나 돌아오면 그 어느 분야보다도 월등한 시기와 견제 그리고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장에서 때때로 동종업계 관계자들과 마주할 경우 수시로 힘들다는 말을 거듭하며 저들의 엄숙한 척하는 표정 속에 남의 불행을 즐기며 차마 감추지 못하는 입꼬리 안으로 썩은 먹이도 한 번씩 던져주어야 한다. 이처럼 궁핍한 사정에서 단연코 연구와 공부도 게을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꾸준히 현장 신이 돌아가는 현황을 파악함은 물론 당장 연구에 녹여 넣지는 않더라도 최근의 이론적 경향과 발간되는 주요 서적들 역시 대체로 빠지지 않고 정독하며 나름의 비평적 사유를 견지하고 있어야만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도 적지 않은 시간과 폼을 투자해야만 하며 이 또한 무보수 노동의 대가와 다름없다. 본인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것 아니냐고 자연스레 따라붙는 빈정거림은 별다른 월급이 없는 이 신에서 개인적 비용으로 서적들을 모두 구입해야 하는 만큼 타당한 비판이라 할 수 없으며 다시금 정산되는 이삼십만 원 정도의 원고료는 악순환을 무한으로 야기한다. 즉 야근수당이나 마감 뒤의 한적한 주일들도 모두 월급으로 정산되는 회사와 달리 무형의 가치가 조금도 회계장부에 타산되지 못하는 마이너스의 유일한 직종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관계로 비평 글을 작성하는 노트북의 창 한 편에 취업 공지 사이트를 띄워놓는 것이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물론 글과 공부를 병행하며 재깍재깍 시계추가 초조하게 흔들림에 따라 한 살 한 살 나이가 참을 문득 깨닫고 나면 취업의 문은 이미 닫힌 지 오래임을 덤덤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흡사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와 같은 이러한 고질적인 고민은 글을 적는 동력을 더욱 울적하게 감속시킨다.
이런 나의 모양새는 서서히 침몰하는 난파선에 발 한 짝을 위태롭게 걸친 범죄자이자 불효자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젊은 기력과 시간을 바쳐서 봉사하는 무언의 대상이 점차 헷갈려지고 피폐해지는 회로 속에 방치되는 비평가들은 비유하자면 아마도 뿔 달린 악마 같은 얼굴로 어딘가를 무섭게 응시하고 있을 것이다. 그 무엇도 없는 산등성에 마치 반짝반짝 흩뿌려진 신기루가 잔존하는 것처럼 무리하게 고개를 들고 올려다볼수록 허리는 꺾여나가는 듯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화가 잔뜩 난 유기견처럼 왈왈거려야만 하는 비평가에게 구름이 넘실대는 푸른 한낮의 30도 가까이 치솟는 온도는 너무나도 불쾌하게 의욕을 재차 꺾어버린다.
미술 비평가. 「슬기와 민의 단명 자료 분석: This is not a Poster」로 제2회 SeMA 하나 평론상을 수상했다. 아트인컬처 ‘2014 뉴비전 미술평론상’ 파이널리스트 3인에 선정된 바 있으며 경향 아티클과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서 기자와 위촉 연구원으로 근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