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바느질과 정동

posted 2022.11.10


가정과 공공 사이의 예술
오늘날 예술과 취미를 특정 젠더과 연결하여 해석한다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82년생 김지영 세대로 불리는 신세대의 젠더 감수성은 급진적일만큼 빠르게 이분법적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무너지는 즈음이다. 하지만 의식의 전환이 지나치게 빠르게 전개되자 이에 따른 부작용도 적지 않아 보인다. 젠더 간 갈등이란 쟁점이 대두되는 걸 보면 말이다. 과거 1970년대 서구의 여성주의 미술에서는 젠더 특정적인 요소를 작업의 일부로 전유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프랑스의 조형예술가 아네트 메사제(Annette Messager)도 그런 경우의 작가다. 그의 남편 크리스티앙 볼탄스키(Christian Boltanski)는 1990년대 아트파워 상위권을 차지하는 설치미술가였다. 남편의 유명세에 비해서는 비교적 소박하게 활동하던 메사제는 주로 주방에서 작업을 한다고 밝혔다. 그녀는 일상 공간 중 가장 노동 강도가 높은 곳을 작업실로 사용했다. 바느질, 뜨개질과 같은 수공예 기술을 활용한 당시의 작업은 공간과 젠더 사이의 불평등을 보여주려는 의도보다 오히려 사회가 여성을 특정 공간, 직업, 역할로 고정하는 관습의 전유를 시도하는 장으로 삼았다. 그곳에서 작가는 사회가 허락하지 않는 여성의 욕망을 가시화할 뿐만 아니라 가사활동을 예술활동으로 이동시킴으로써 공예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의 위계에 혼란을 일으킨다. 따라서 그녀에게 주방은 자유를 되찾는 창작의 공간이자 사회적 장으로의 전복이 일어나는 전유의 장과 다름없었다. 그녀의 작업이 이처럼 비전문적인 결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정신장애인과 어린이 그리고 아마추어의 미술을 포함한 ‘아웃사이더 아트’(장애인 예술)에 대한 오랜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2005년 메사제는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베니스비엔날레 프랑스 국가관 작가로 선정되었고 그해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당시 작업은 피노키오를 카사노바의 메타포로 상정하여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욕망과 끝없이 여성을 탐닉하는 두 존재의 결핍이 모성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한다.


배움과 나눔의 과정
윤가림은 주로 제례음식, 베이킹, 자수 등 주로 여성에 집중된 동서양의 가사 활동을 기반으로 한 퍼포먼스와 조형작업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언뜻 ‘관계의 미학’과의 접점을 떠올리게 한다. 동시대 미술에 있어서 관계의 미학은 기존의 작가중심주의적 지형도로 이뤄진 미술현장의 관습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하는 역학을 일으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관계의 미학이 다소 낙관적이고 낭만적으로 각색된 사회참여미술처럼 보인다는 비평적 견해도 적지 않았다. 사실 관계의 미학의 저자 니콜라 부리요가 제시한 ‘관계’라는 개념은 일상과 미술, 삶과 예술의 공간을 분할시킨 모더니티 미학을 재배열하자는 의미에 더 가까웠다. 단순히 예술을 무너진 공동체의 공백을 일시적으로 봉합하는 수단이나 이렇게 맺어지는 여러 관계항을 낭만적인 서사로 풀어내는 것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모더니티 미학은 과거와 현재를 분리시켰고, 이를 통하여 모더니즘 미술을 새로운 것, 진화된 형태의 예술이라는 또 다른 관념과 신화를 산출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 이면에는 유럽의 형식주의 미술이 오랫동안 현실이 아닌 이상을 재현하는 데에 열중했던 역사를 향한 불만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부리요는 관계의 미학을 통하여 선형적인 역사관이 마치 예술을 진화론과 마찬가지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전환하고자 했다. 따라서 관계라는 개념은 특정 시대를 구분 짓거나 분리하기보다 각 시대의 예술을 당시의 에토스와 연결하여 관측하자는 하나의 제안으로 볼 수 있다. 윤가림의 작업은 전술한 바와 같이 관계의 미학을 상당히 연상시키는데, 유독 인상적인 부분은 일련의 과정이 작업을 위한 목적 이전에 배움의 과정에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윤가림의 작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창작의 밑바탕을 형성한다.


〈Dr.Bernett’s Useful Plants-Garlic〉, 2019, 실크 위에 자수,19x28cm. 이미지 제공: 윤가림

〈Dr.Bernett’s Useful Plants-Garlic〉, 2019, 실크 위에 자수,19x28cm. 이미지 제공: 윤가림

그에게 배움이란 학문적 차원이 아니다. 그가 꾸준히 배우고 있는 바느질과 수예의 경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유학 시절 덴마크 출신의 한 관계자가 그의 작업을 두고 덴마크와 잘 맞을 것 같다며 레지던시를 제안하는데, 이 덕분에 윤가림은 덴마크에 머물면서 그곳의 수예를 배우게 된다. 서양 자수를 배우면서 자연스레 덴마크 문화에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배움의 과정이 어떤 목적을 지향하기보다 배움 자체가 곧 목적이 된 셈이다. 즉 윤가림의 배움이란 자수를 기반으로 이루어진 관계에 더 가깝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 전통자수를 배우면서 동서양 자수의 차이를 알게 된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서양 자수에 비하여 한국 자수는 대상과 형식이 고정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정기적으로 공방에 한데 모여 자수를 배우는 시간은 개인의 작업을 제작하는 일이라기보다 하나를 위하여 모두가 힘을 보태어 완성하는 공동작업에 더 가깝다고 한다. 이처럼 배움의 과정은 단순한 기술 전수의 과정에 그치지 않고 마음의 나눔이 뒤따르게 된다. 이 점이야말로 윤가림의 조형 세계가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리키고 있다. 21세기를 앞두고 전 지구적으로 관계의 미학이 하나의 예술 실천 방식으로 회자된 적이 있었다. 저자인 부리요의 의도와는 달리 이 개념은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공공적 목적을 위한 예술 활동으로 과장되거나 왜곡된 경향이 없지 않다. 한편 윤가림은 정치적 태도나 사회참여라는 목적성보다 예술과 공예, 창작과 기술의 위계를 지우고 특정한 표현 방식을 매개로 소박한 공동체, 일상의 즐거움, 나눔의 기쁨에 더 큰 의미를 두는 듯하다.


《Goymsang Installation》. 〈Burnett’s Plants〉, 2019, 실크에 자수, 구리 프레임, 40x170cm 4pcs. 〈고임상〉, 2019, 한국전통다과, 놋그릇, 가변설치. 이미지 제공: 윤가림

《Goymsang Installation》. 〈Burnett’s Plants〉, 2019, 실크에 자수, 구리 프레임, 40x170cm 4pcs. 〈고임상〉, 2019, 한국전통다과, 놋그릇, 가변설치. 이미지 제공: 윤가림

마음을 보여주기
윤가림의 근작들은 서로 다른 문화의 교차를 통한 혼성적 성격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통과의례를 위한 차림음식과 한국 전통 수예 병풍을 설치한 〈고임상〉(2019)은 덴마크의 니콜라이 쿤스탈에서 소개되었다. 니콜라이 쿤스탈은 13세기에 지어진 성 니콜라이 성당의 교회 건축의 양식적 특성을 살려 개조한 아트센터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적 공간은 인간의 생애주기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개인, 가족, 지역과 사회를 이어주는 매듭으로 비유할 수 있다. 종교가 곧 삶의 밑바탕이었던 시대에는 개인의 통과의례가 신앙의 테두리를 넘어서 사회적 차원의 의미를 갖는 하나의 실천이었을 것이다. 윤가림은 단순히 조형적 방법이나 문화적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전통’을 방법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모두에게 공통으로 주어진 일상을 하나의 담론으로 제시한다. 전통사회에서 의례화된 통과의례의 가치가 희미해지면서 동시대의 통과의례는 소비주의와 결탁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 문화 양식으로서의 전통적 의례는 여성의 가사노동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윤가림은 여성성과 가사 활동을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위치시키지 않고 마음과 의미를 담는 과정으로 대하는 듯하다. 따라서 그가 작업을 통하여 질문하는 것은 전통의 의미와 그 문화적 원형성이 아니라 시간을 기념하고 이를 통하여 마음을 보여준다.


《Tactile Hours》 전시 전경. (시계방향으로)〈Chryseus:Greyhound Dhole〉, 〈Hybrid ass and Zebra〉, 〈The Grim〉, 〈Dhole〉, 2021. Embroidery on steel engraving Plate, from 『The Naturalist’s Library』 by Sir William Jardine c.1843, 42x45cm each. 이미지 제공: 윤가림

《Tactile Hours》 전시 전경. (시계방향으로)〈Chryseus:Greyhound Dhole〉, 〈Hybrid ass and Zebra〉, 〈The Grim〉, 〈Dhole〉, 2021. Embroidery on steel engraving Plate, from 『The Naturalist’s Library』 by Sir William Jardine c.1843, 42x45cm each. 이미지 제공: 윤가림

〈Felis Nepalensis:Nepaul Cat〉, 2021, Embroidery on steel engraving Plate 23, from 『The Naturalist’s Library』 by Sir William Jardine c.1843, 42x45cm. 이미지 제공: 윤가림.

〈Felis Nepalensis:Nepaul Cat〉, 2021, Embroidery on steel engraving Plate 23, from 『The Naturalist’s Library』 by Sir William Jardine c.1843, 42x45cm. 이미지 제공: 윤가림.

2021년 개인전 《Tactile Hours》 (접촉의 시간들,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의 작업은 낡은 일러스트 화집에서 발견한 동물의 형상 위에 자수를 얹히는 작업을 선보였다. 2008년부터 자수 콜라주는 지속되었는데, 이번에는 동물의 형상이라는 도상을 통하여 실재와 상상의 경계에서 발현된 인간의 상상력이 어떻게 동물의 이미지를 재현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작가는 화집 속에 등장하는 동물의 형상을 보면서 어딘지 모르게 헐벗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꾸준히 배워온 서양 자수 방식을 활용하되 한국자수에서 자주 사용하는 금은색사를 이용하여 간략하게 묘사된 드로잉 위에 털을 이식하듯 정성스레 형상에 부피와 질감을 더한다. 마치 몸을 쓰다듬듯이. 접촉의 시간이란 전시 표제는 문화적 혼성성, 교차의 미학과 같은 학술적 개념 이전에 작가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어린 시절 인형을 만지면서 사물에 마음을 전달하던 경험과 자수로 시구(詩句)를 바느질로 쓰는 과정은 손으로 글을 읽고 매만지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윤가림의 예술은 손안에 들어오는 문고판 도서처럼 소박하고 일상적인 스케일에서 조율된다. 바느질은 만짐의 미학이다. 뾰족한 바늘이 천을 뚫고 지나간 후 난 상처는 조만간 새로운 형태나 글자 또는 무언가를 덧대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손끝의 감각만으로 이루어지는 이 담백한 행위는 단지 물건의 생명을 연장하거나 보기 좋은 문양을 새기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사물을 하나의 존재로 소중히 아끼는 마음을 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사물 위에 자신과의 관계를 알려준 작은 흔적을 남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이 원고는 『2021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레지던시 도록』에 수록된 것으로, 저작권자의 동의 아래 게재하는 글입니다.

정현

정현은 프랑스 파리 1대학에서 「예술가의 정체성과 작업의 상관성」이란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미술평론가, 독립 전시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문화연구를 접목한 미술비평을 통해 비평 활동을 배움의 방법으로 활용하며, 전시기획을 새로운 방식의 지식 생산이자 주요한 연구 활동으로 여긴다. 주요 저서로는 『글로벌 아트마켓 크리틱』(파주: 미메시스, 2016, 공저), 『레디메이드 리얼리티: 박준범의 비디오 활용법』(서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5), 『큐레토리얼 담론 실천』(서울: 현실문화, 2014, 공저) 등이 있으며, 주요 전시기획으로는 《그 다음 몸_담론, 실천, 재현으로서의 예술》(소마미술관, 서울, 2016), 《시간의 밑줄_중앙일보 이미지로 본 한국의 50년: 1965-2015》(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서울, 2015)이 있다. 현재 인하대학교 예술체육학부 조형예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