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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한수지 작가 작품의) 한 관람객에게 보내는 메시지

posted 2022.11.10


한수지 작가는 2019년, 핀란드의 레지던시에서 만난 브라질 작가 다니엘라 아베라(Daniela Avelar)와 끝말잇기를 하듯 글을 주고받기 시작했습니다. 한수지 작가는 언어를 통한 소통의 한계와 가능성을 탐색하는 일련의 작품들을 만들고 있던 차였습니다. 놀이처럼 시작된 교신은 진지한 생각의 공유로 이어졌고, 각자 본국으로 돌아가서도 영감의 교환은 온라인으로 계속되었습니다. 영상작품 〈오늘 나는 단어 아마도로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II〉(2020)는 아마도 이 언어적 왕래가 궁극적으로 이르게 된 잠정적 결론을 요약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 영상에서 두 화자는 각자의 문장을 각자의 언어로 읽습니다. 두 언어가 서로를 번역하고 있는지는, 두 언어를 모두 아는 사람에게가 아니라면 미지의 영역으로 남습니다. (아마도 포르투갈어로 말하는 아베라의 문장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어로 전달되는 한수지 작가의 문장들은 번역 그 자체에 관한 질문들로 펼쳐집니다. 서로의 문장들은 번역을 거치는 대신 번역을 전경화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는 단어 아마도로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hoje vou experimentar a palavra talvez (Part2) 〉,2020, 단채널영상, 사운드, 컬러, 3분31초, 다니엘라 아베라(Daniela Avelar)와의 협업.

〈오늘 나는 단어 아마도로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hoje vou experimentar a palavra talvez (Part2) 〉,2020, 단채널영상, 사운드, 컬러, 3분31초, 다니엘라 아베라(Daniela Avelar)와의 협업. 이미지: 작가 제공.

그에 따르면 ‘번역’은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과정”이 아닙니다. 한 형태의 데이터를 다른 형태의 데이터로 변환하는 모든 행위가 ‘번역’입니다. 번역의 문제는 곧 데이터의 형태에 관한 기본적인 질문을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한수지 작가는 석사 논문에서 데이터를 “3차원 공간에 놓인 현상, 기억, 사실 또는 감정들이 납작하게 변환되어 저장되는 것”으로 파악합니다. ‘원형의 의미’를 충실하게 옮기는 행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신자의 뉴런에 도착하기까지 본래의 형태는 무수한 개념적, 물리적 변형과 왜곡을 거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마치 디지털 세계의 모든 데이터들이 그러한 것처럼 말입니다. 번역은 그리하여 무수한 “새로운 길”들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화자는 말합니다.그런 점에서 번역은 유기체적입니다. 새로운 사고들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성장하고 변형되고 사멸하기 때문입니다. 메시지는 수신자에게 ‘도착’하지 않고 새로운 번역의 경로를 ‘개척’합니다.


영상 속 화자의 이러한 발언이 영상을 관람하는 관람객의 뉴런에 도착하는 과정 역시 ‘번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로 말해진 문장을 한국어에 익숙한 수신자가 청취한다 하더라도 변형으로부터 자유로운 ‘원형 그대로’의 전달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같은 언어로 이뤄지는 대화라 할지라도 각자가 지닌 단어의 의미들은 불안정하게 진동하며, 소통은 다차원적으로 겹치는 진동의 폭의 안과 바깥을 넘나들며 발생합니다. 그 진동은 이미 발신자가 지닌 의미체계 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기에는 “관습, 제도, 권력, 패권이 스며들어 있다”고 화자는 말합니다.당신은 지금 한국어로 작성된 이 메시지를 당신의 감각과 세계관에 따라 ‘번역’하고 계신 것입니다.


데이터의 물리적 형태 역시 과격한 변형을 거칩니다. 한수지 작가가 만드는 신체적 신호는 공기의 파장을 통해 마이크에 도달하여 전기 신호로 변형되고 이는 다시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됨과 동시에 이분법적 체계로 파편화된 채 수치로 저장되며 이 일련의 수치를 ‘재생’하는 장치 및 스피커에 의해 다시 공기 파장으로 전환되어 수신자의 청각을 자극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기술적, 물리적 절차를 곧 ‘번역’이라고 말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개념적인 확장을 이룰 것입니다. 이 확장적 사유 속에서 ‘본질’을 ‘있는 그대로’ 접하려는 의도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한수지 작가의 작품을 설명하는 이 글 역시 한수지 작가의 의도를 번안하기보다는 새로운 사고를 생성하는 과정입니다.) 메시지는 “메타몽처럼” 외형을 바꿉니다.****(그런 면에서 언어는 자연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끊임없는 변종이 발생하는 유기적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인 것입니다. 코로나에 감염되거나 면역 체계를 작동시키는 생리현상 역시 ‘번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어는 자연의 질서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납작하고도 납작한 공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018-2019, 단채널영상, 컬러, 사운드, 13분 31초. 이미지 제공: 한수지.

〈납작하고도 납작한 공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018-2019, 단채널영상, 컬러, 사운드, 13분 31초. 이미지: 작가 제공.

모든 데이터가 변형을 거칠 수밖에 없는 거라면, 외형의 변형은 곧 ‘본질’의 변형이기도 한 걸까요? 아니, 변하지 않는 ‘본질’이란 게 있는 걸까요? 언어가 달라지면 ‘메시지’도 달라지는 걸까요? 그러한 변형 속에서 어떻게 소통은 가능한 걸까요?


인문학이 ‘탈구조주의’라 일컫는 사유 속에서 언어는 제한된 의미의 망을 조직하는 대신 무한하고 유기적인 결들을 펼쳐냅니다. 그것이 20세기 후반의 사유의 방식입니다. 여기서 의미가 “흐려지거나, 모호해지거나, 애매해”지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사실 변형/가공/왜곡되지 않은 ‘원래의 의미’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늘리기, 삭제하기, 붙여넣기, 복사하기, 합성하기, 왜곡하기, 뒤틀기, 자르기 등등”**** 무수한 재편집과 변형이 발생하는 것이 곧 ‘번역’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곧 모든 소통의 형태이기도 합니다. 그 원리는 ‘오역’에 가깝게 작동합니다. 오차범위 안에서 진동하는 오역의 폭에 따라 우리는 그럭저럭 ‘메시지가 전달된다’고 짐작할 뿐입니다. 당신이 지금 이 글을 통해 전달받는 메시지는 ‘아마도’ 저의 의도일 거라고 파악되는 바에 대충 접근할 따름입니다. 물론 정확한 메시지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안개로 이뤄진 가능성들의 조합에 불과할 것입니다.


물론 변형/가공/왜곡을 거치면서까지 이 구태의연한 메시지를 여러분에게 전달하려는 것은 20세기 인문학을 거들어주자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매체나 물질을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작동하는 소통의 방식, 그에 대한 사유의 도래가 흥미로운 이유는 바로 디지털이라고 하는 기술의 발전과 시기적으로 거의 중복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탈구조주의는 마치 디지털 기술의 원리를 예시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기술이 작동하는 방식은 인간의 사유 방식을 닮을 수밖에 없는 거죠. 디지털 데이터는 끊임없는 재편집과 재가공을 거칩니다. 사실, 위에 인용한 한수지 작가의 작품 중 한 구절은 ‘번역’에 관한 말이 아니라, 디지털 환경에 관한 말이었습니다. “늘리기, 삭제하기, 붙여넣기, 복사하기, 합성하기, 왜곡하기, 뒤틀기, 자르기 등등”의 기술은 디지털의 보편적인 기능인 것입니다. 이러한 재편집과 재가공으로부터 자유로운 ‘원형’을 전제하는 것은 디지털 세계에 있어서나 탈구조주의에 있어서나 불가능합니다. “번역의 시작점과 끝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디지털 역시 마찬가지겠습니다. 디지털은 곧 언어인 것입니다. 그것은 방대한 ‘오역’의 지평을 펼칩니다. (그런 면에서 디지털은 자연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끊임없는 변종이 발생하는 유기적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인 것입니다. 디지털은 자연의 질서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디지털은 인간의 사고를 구조적으로 재구성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디지털이 나아가 인간의 사유 방식 및 ‘번역’에 대한 관점을 역제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디지털 시대에 번안하는 번역의 의미란, 곧 데이터의 형태를 바꾸는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모든 디지털 재현은 곧 번역 과정이며 모든 번역되는 표상은 디지털의 형태를 닮습니다. 둘은 모두 인간 지능의 거울이자 연장인 것입니다.


여기서 중대한 문제는 언어와 디지털 모두 가시적인 표상의 차원 이면에서 거대한 조직과 규칙을 따라 작동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한수지 작가는 그 거대한 패턴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체계화된 포괄적 지식에 이르는 것보다 작은 단절과 연결점들, 새로운 경로들을 관찰하는 것이 더 흥미롭다고 말합니다.제게 있어서 그것은 아마도 작은 연결점들에 구조적인 비밀이 숨어있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그것을 관찰하는 것은 아마도 ‘오역’이 발생하는 실질적인 현장에서의 과학수사와 같은 행위일 것입니다. 그 현장에는 디지털의 속성에 대한, 언어의 작동 원리에 대한 단서들이 해독/오독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3차원 공간에 놓인 현상, 기억, 사실 또는 감정들이 납작하게 변환되어 저장되는” 현장인 것입니다. (‘저장’의 의미에는 물론 변형의 가능성이 내재합니다.) 그것은 3차원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에서 어떻게 ‘의미’라는 비물질적인 현상이 전달되는가의 문제입니다. 실로 인간의 정신이나 내면과 같은 비가시적인 현상이 3차원 공간의 물성과 인터페이스를 이룰 수 있는 걸까요?


저는 이 비밀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대신 이를 통찰한 한 위대한 물리학자를 어렴풋이 떠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에르빈 슈레딩거는 의식의 문제를 물질적인 차원과 비물질적 세계 사이의 인터페이스로 파악했습니다. 물질적으로 전달되는 신호들이 어떻게 의식이라는 비물질적인 영역과 상호작용할 수 있을까? 공기의 파장이 어떻게 뉴런을 거쳐 비물질적인 의식에 도달하는가? 작은 입자들의 세계를 들여다본 이 물리학자는 비물질적 세계에 대한 단단한 벽을 직시했습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물질과 비물질이 만나는 접점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수는 없을 거라고 그는 단언했습니다.


21세기의 인간 각자는 각자의 단절된 세계 속에서 ‘아마도 그럼직한’ 대충의 의미 작용에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소통’이란 아마도 그러한 필연적 고립에 대한 개념적 방어기제일지도 모릅니다.


〈플랑크톤과 비트플랑크톤〉, 2019-2020, 2채널 비디오, 9분10초, 컬러, 사운드, 투명튜브의자, RGB조명. 이미지 제공: 한수지.

〈플랑크톤과 비트플랑크톤〉, 2019-2020, 2채널 비디오, 9분10초, 컬러, 사운드, 투명튜브의자, RGB조명. 이미지: 작가 제공.

〈잊혀지는 법: 디지털 파놉티콘에서 해방되기〉, 2020, 단채널영상, 컬러, 사운드, 12분6초. 이미지 제공: 한수지.

〈잊혀지는 법: 디지털 파놉티콘에서 해방되기〉, 2020, 단채널영상, 컬러, 사운드, 12분6초. 이미지: 작가 제공.

한수지 작가는 번역의 영역이기도 한 디지털 세계 속에서 단절이 발생하는 현장들로 들어가 ‘새로운 경로’들이 발생하는 방식을 주시합니다. 한수지 작가는 디지털 세계 속에서 유영하면서도 그것의 정치성이나 유희적 기능에 함몰하는 대신 그에 대한 사유의 틀을 끊임없이 모색합니다. 그의 작품 세계가 단지 디지털과 온라인 환경 속의 권력 관계에 대한 어렴풋한 관찰이나 어설픈 저항으로 머물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상응하는 다른 체계들을 통해 질문하기 때문입니다. 물리학, 해양생물학, 신경과학을 통해 디지털 세계를 바라보기도 합니다. 물론 이들을 통해 디지털이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한수지 작가는 디지털의 원리와 기능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의도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디지털을 통해 현상의 미시적 차원이나 뇌의 작용을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디지털 세계로 ‘번역’되는 아날로그 세계들은 통찰과 오해를 동시에 제공합니다. 모든 번역이 그러하듯 말입니다. 새로운 경로들은 오역을 통해 생성됩니다. 4차원 시공간을 확장하는 또 다른 차원으로서의 디지털 평면****, 방대한 데이터 바다에서 부유하는 비트플랑크톤***, 뇌 속의 기억처럼 소거되지 않고 생존하는 좀비쿠키** 등은 아마도 오역의 단상들입니다. 오역은 팽창하는 세계 속의 처세술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물질과 비물질을 가르는 단단한 벽과 타협하는 방식일 것입니다. 오역은 또한 상상의 날개이기도 합니다. 오역은 고립된 세계들을 연결하는 방식인 것입니다.(그런 면에서 오역은 자연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끊임없는 변종이 발생하는 유기적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인 것입니다. 오역은 자연의 질서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각주]

〈오늘 나는 단어 아마도로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II〉(2020)
**〈잊혀지는 법〉(2020)
***〈플랑크톤과 비트 플랑크톤〉(2019)
****〈납작하고도 납작한 공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2019)


※ 이 원고는 『2021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레지던시 도록』에 수록된 것으로, 저작권자의 동의 아래 게재하는 글입니다.

서현석

서현석은 영상과 퍼포먼스 그리고 글쓰기를 통해 공간과 감각에 관한 탐구를 진행하고 있다.장소기반의 퍼포먼스 및 전시를 통해 ‘작품’ 및 체험의 경계를 질문하는 형식을 실험하는 한편, 아시아에서의 국가 형성과 모더니즘 건축의 관계를 탐색하는 영상 작품들을 만들고 있다.〈헤테로토피아〉(2010-11), 〈매정하게도 가을바람〉(요코하마, 2013), 〈바다로부터〉(2014, 도쿄) 등 관람객의 체험을 구조화하는 장소 기반의 퍼포먼스 작품에 이어〈천사 – 유보된 제목〉(남산아트센터, 2017), 〈먼지극장〉(북서울미술관, 2019), 〈이탈 1-10〉(서울시립미술관, 2020), 〈X(무심한 연극)〉(국립현대미술관, 2021), 〈코오피와 최면약〉(국립극단, 2021) 등 VR을 활용하는 작품을 발표했다. 『미래 예술』 (2016)과 『Horror to the Extreme: Changing Boundaries in Asian Cinema』 (2009)을 공동으로 썼고, 비정기 간행물 『옵.신』을 내고 있다.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영화를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