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역할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뒤바뀌는 릴레이 인터뷰는 정용국→이대범→현시원→주재환→김남수 등이 참가하였다. 마지막 인터뷰이였던 김남수 안무비평가는 본인의 관심사에 따라 양아치 작가를 선정하여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인터뷰이와 인터뷰어간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나오는 진솔한 이야기들을 따라가 보자.
이번 릴레이 인터뷰는 양아치 작가이다. 개인적으로는 백남준아트센터 기획전시 《신화의 전시- 전자 테크놀로지》, 국립극단 기획전시 《고래-시간의 잠수자》 등에서 양아치 작가의 작품에 주목하거나 작업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했다. 이들 전시는 미술계에서 관심 폭발되진 않은 미완의 프로젝트들이었는데, 그럴수록 깨물면 안 아픈 손가락 없는 심정이 된다. 각설하고, 양아치 작가의 오리지날 생각이 재미있어서 그의 고유한 육성의 리듬과 쫀득한 육질의 뉘앙스로 전달할 방법을 애써 찾아봤다. 다시 깨달은 것은 역시 글로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양아치(이하 양): 그 작업이 [미들코리아]였어요. 창작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겪을 것 같은데, 되게 상투적인 질문들 있잖아요. 너는 누구고, 지금 어디 서 있느냐, 이런 질문을 하잖아요. 생각을 해보니까, 제가 있는 곳이 북극과 남극 사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다시 말해, 북극과 남극이 있는데 극과 극에서 너무 치열하게 사는 형태들이죠. 그런데 그걸 남한과 북한으로 넓혀도 되고. 계속 극점에서 사람들이 살더라구요.
양: 〈미들 코리아〉 이후로는 어디론가 도망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다음부터는 제가 항상... 이런 이야기 전체가... 3자를 데려오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데, 데리다의 이야기를 빌어서 전해보면, 백인은 백인이 아니라, 집단이 백인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집단 안에 백인이... 아, 백인이 집단이기 때문에 집단은 가짜 집단을 만들어내기를 원하잖아요. 식민지화해야 되니까. 그런 것은 한국 안에서도 존재하고, 저는 한국 안에서 가짜 백인이 많다고 보거든요. 그러면 가짜 백인 안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저도 그 백인 안에 있기 때문에... 이걸 이제... 제가... 말이... 김남수씨도 그렇지만, 저도 참 주어와 동사가 많다니까요. 이런 상태를... 여하튼 이런 상태를 부정할 수 없을 것 같고, 결국 데리다처럼 백인 따위는 어딨어? 말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데는 그럴 수 없잖아요. 그럼 이 키워드를 적절히 조응(?)을 시켜야할 텐데, 그러다보니까 모든 걸 인정을 해야 되겠다. 원근법을, 이데올로기를 다 인정해야 되겠고, 기대어 살아야겠다, 기생해서 살아야겠다...
양: 그러니까 삶을 살아간다는 게 아니라 작업을 살아간다는 거죠. 그게 다음 스텝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하튼 그렇게 저렇게 엮어낸 키워드가, 탈출구가 빙의(憑依)를 찾은 거죠. 그러니까 병적인 빙의가 아니라, 새로운 주체, 주체 파괴... 예를 들면, 제가 오늘 만나서 이렇게 제 모습을 보는 것, 가족들 보는 것이나 친구들 보는 것, 제가 혼자 있는 모습, 다 일회성 주체를 소비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수많은, 스펙트럼이 넓은 일회성 주체를 가지고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때마침 그 시기에 CCTV를 매체적으로 잘 부각시킬 수 있죠. 당시의 13개의 화면은 제게 13개의 시점을 확보할 수 있게 하였고, 13개 화면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시점이 확보할 수 있었죠. 관객이라는 시선. 그래서 기존의 시선과 관객이라는 시선과 작가의 시선이 오버랩 되면서 경험할 수 있는 과정이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양: 대학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고려하고 갔죠. 선생님이 계셨는데, 너 여기 와서 있어라, 해서... 그래서 갔다가 선생님 스튜디오에서 좀 놀았죠. 그러다가 선생님이 너 학교 좀 준비해보면 어떠냐, 하신 거죠. 그런데 IMF 때문에 실패를 하고 들어오게 됐죠. 남들처럼 겪은 IMF... 저희 부모님도 그랬고 저 역시도 살 궁리를 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그냥 집을 떠났어요. 그래서 전국을 다니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양: 그런 셈이에요. 가방 두 개 가지고 집을 나왔어요. 그래서 뭐 했냐면요. 인터뷰 했어요. 처음 보는 사람들... 그때의 PC방에서, 지금은 게임방처럼 됐지만 그땐 인터넷 위주였잖아요. 되게 웃겨요. 게이머들이 가득한 PC방에서 가지고 다니던 CD에서 웹 관련한 프로그램을 깔아요. 그리고 인터뷰한 내용을 사이트로 만들어요. 예를 들면, 홍길동이란 사람을 만나서 인터뷰를 했어요. 그 내용을 가지고 주변 PC방에서 업데이트 하는 거죠. 그때는 블로그가 없을 때잖아요. html 만들어서 올리고 또 이메일 해요. 당신을 이러이러한 이유로 만나고 싶은데 인터뷰를 하고 싶다. 그러면 답변이 오죠. 만약에 강원도에 있다고 하면 강원도로 가요. 가서 인터뷰를 해요. 그리고 잘 데가 없으면 내가 당신 스튜디오에서 자도 되겠느냐, 그러면 대개는 자라고 하거든요. 그렇게 다녔던 거죠. 그게 1년 2, 3개월... 그렇게 웹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는 웹아트라는 말이 없었을 때인데,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웹아트라는 말을 쓰게 됐죠. 사실 그게 일반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말이고 대신 넷아트라고 하는데.. 어쨌든 그러면서 웹아트 창작자를 미술계에서 급하게 찾았어요. 필요에 의해서...
양: 당시 미술계는 급작스럽게 이제 모든 체제는 웹으로 간다는 흐름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갑자기 제가 웹아티스트가 됐어요. 어느날 사람들이... 그때 처음 느꼈어요. 시대라는 게 이렇게 변하는구나. 작가들과 만나서 얘기도 하고. 그렇게 저렇게 하다가 일주아트하우스라는 곳에서 개인전을 통해서 데뷔하게 되죠.
양: 세 가지 이름이 있었어요. 양아치, 김씨, 철수라는 이름들이 있었죠. 지금은 가수 김C가 있는데, 그 전에 저는 세 가지 아이콘을 생각했거든요. 있잖아요. 우리 막연하게 부르는 이름들... 철수도 좀 재미있었는데, 우리가 책에서 본 철수는 되게 이상적이잖아요. 기존 세대가 봤을 때 철수는 반듯하고 딴 짓 안하는... 그죠? 이런 존재들을 계속 연장시키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양아치는 그런 정서를 가진 사람이고 미디어를 하는 사람이었어요.
양: 네. 그런데 이 사람이..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대로, 갑자기 미술계에서 웹 미디어의 관심이 폭발적이었는데, 저는 몇 안 되는 웹 작업을 하고 있던 케이스였죠. 그리고 더 흥미로운 건 거의 90퍼센트가 플래시 기반의 작업을 할 때 저는 php와 데이터베이스 기반의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당시 웹에서는 클릭하면 뭔가 뿅 하고 나오는 시절이었는데, 제 작업에는 클릭해도 뭔가 안 나와요. 그냥 값이 나오죠. 입력하고 값이 나오는... 그래서 그런 계열을 좋아하셨던 분들이 전시를 제안했고 작가로서 활동하는 케이스가 되었죠.
양: 선택은 오히려 뭐가 정해질 수 없을 때 이루어지잖아요. 그런 알 수 없는 시절이 작가로 만들어지는 시기였고요. 그리고 이제 스스로 작가로서 이렇게 재조합해서 전해야겠다. 그렇게 해서 그 즈음에 [미들코리아]를 하게 된 거죠. 여담으로 그때 제가 생각했던 게, 미디어 아트는 미디어 아티스트가 망친다고 생각했어요.
양: 그때 이후에 나왔던 게, 전기 전자가 배제된 미디어아트가 가능한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되고.
양: 전기 전자가 배제된 미디어 아트와 관련한 질문과 작업을 진행하면서 사람들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얼마 전에 티에리 라파일(Thierry Raspail)이라는 사람을 만났어요. 리옹비엔날레(Lyon Biennial) 디렉터인데, 만나서 관련한 질문과 작업을 설명했더니, 그럼 네가 하려는 게 ‘리빙 필름’이냐, 그러더라구요. 음.. 기존의 필름이 아니라 ‘리빙’이라는 말을 붙여서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구나. 그래서 제가 어느 정도 답을 얻어서 정리가 됐고, 이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죠.
양: 일주아트하우스 때 개인전을 하고, 그때 놀랐어요. 그러니까 한국 사회가 소실점이 되게... 관심들이 없나 봐요. 뭐 하나 꽂히면 온 관심이 거기로 깔때기처럼 몰리는데, 그때의 소실점은 웹이어서, 웹 전시 한 번 하고나니까,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만나길 원했는데, 미디어는 물론 정치인들까지 만나길 원했죠. 당시 새로운 정치는 웹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본 정치인들이 있었죠. 당시 국회의원 미디어 비서관 제안도 있었으니깐요. 그때 이런 경우도 있구나.. 그래서 만나자라는 사람들 모두 만나보자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 이상한 시대.. 충격적이었죠.
양: 당시 사람들에게 웹이라는 건 기술, 테크닉으로만 이해했던 시절인데, 국가적으로는 국민 웹 미디어를 새로운 국가 정치, 경제의 구심점으로 삼으려고 했었죠. 그래서 많은 예산이 투입된 것으로 압니다. 당시의 시절의 에피소드를 전하자면, 당시 큐레이터들한테 웹아트란 말은 적절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말이 아니라고 했어요. 웹아트가 뭐냐고 질문해보면 설명을 못 합니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것은 당시에 웹아트 전문 갤러리가 생겼었고, 미디어 페스티벌, 비엔날레에서는 웹아트 장르를 사회적 분위기 걸맞게 미술계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삼으려 했었다는 거죠.
양: 네, 촌스러운 웹아트.. 좋아요. 설득력이 있다면 좋아요. 다른 이야기를 해보면 저번에 언급하신 『반딧불의 잔존』, 그 책이 개인적으로 재미있다고 보는 게, 지혜나 지식이 태양처럼 뜨겁고 빛나는 등대처럼 있다면, 그 등대의 빛이 꺼지면 사람들은 길을 잃잖아요. 대신 사람들이 등대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반딧불의 작은 빛을 이렇게 저렇게 쫓아가면서... 언어를 이해하면 좋을 듯합니다. 본래 그런 빛들이 많았고... 본래가 그랬고...
양: 시간이 없는 것 같아요. 그건 다른 언어로 풀어내는 시간이 없는 것 같다. 예를 들면, 다원예술의 시대를 보면서 관련한 피드백을 할 필요가 있겠다. 다원예술이라는 키워드, 혹은 영화, 미디어란 키워드 안에서 이해하고 작업을 대입해보는 거죠. 물론, 최근의 제 작업은 공연처럼 보이고 있지만, 관련한 피드백을 전제로 작업을 대입해보는 거죠. 그 결과물로 확인해보면 관객, 무대, 공간을 전제하는 작업이죠. 그리고 제가 거기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관객은 늘 존재한다는 거예요. 무대가 어떻게 변하든, 블랙이든 화이트든, 아니면 스트리트가 되던, 제3, 제4의 공간이든, 그런데 관객은 늘 존재하는데, 이 다원예술이 궁극적인 모습으로 가려면 관객을 불태워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양: 네, 객석에 있는 관객을 불태우면 그게 최고의 공연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폭소) 완전히... 생각해보면, 객석이 발생되면 무대는 낡은 것이 되고 그것으로 앞서 언급한 언어는 스스로 한계를 지우게 되는데 그 문제의 근원을 없애려면 객석을 불태우면, 관객은 자유로울 수 있기에 무대는 유효한 것이 될 수 있겠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관객과 무대를 모임으로 전환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모임이란 건, 그러니까 모임에서의 관객은 관객일 수도 있지만 무대의 당사자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게 ‘고환암 환자를 위한 모임’이라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양: 그러니까 관객이 실제 고환암 환자를 확인 할 길이 없는 가상의 무대에 오르며, 거세된 존재로서 그 역할을 자처하며 등장하기에 이미 객석은 필요 없는 것이죠.
양: 그렇다기보다, 뭐랄까, 호기심이 있더라구요. 그 말 자체를 두고... 해체되면서 다시 조립되는 말로서 무대, 관객, 객석을 생각해보면 흥미로운 접근이 가능하더라구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엉망진창이에요. (웃음)
양: 저는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가 싫은 게, 그 사람은 그러잖아요. 과거를 툴로 삼아 현재화한다, 자기는 미래에 대해 얘기하지 않겠다, 그러면서 자기 하는 행동은 미래를 식민지화하잖아요. 그러니까 나쁜 사람이에요(하하). 그 태도가... 그런 무대라면 불태우는 것이 옳습니다.
양: 그래서 셸파가 안내하는 길을 완전히 벗어나 그간에 볼 수 없었던 무대를 떠나보면 어떻겠냐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브리스트 같은 셸파와는 헤어져야 하는 거죠. 백남준도 그랬다잖아요. 문을 열면 길이 있는 게 아니라 길이 없는 산을 만나고 싶다고 그 말을 했죠. 그런데 사실 저도 어떻게 갈지 모르겠어요. 엉뚱한 데 가 있을지도 모르겠어요.(웃음)
양: 그렇게 보시는군요. 궁금한 것은 계속 추적해보는데, 그 정도가 미비하면 관심이 없어져서 미워하거나, 싫어하거나 하는 감정이 없어집니다. 그런 정도의 것인 것 같습니다.
양: 이렇게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 듯합니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보면, 전 그 사람이 바보 같은 거예요. 우주를 이해한다는 건 결국 신을 찾는 노력일 텐데, 그런 것을 몇 가지 법칙을 세워서 그 진리에 도달하겠다는 생각. 정말 바보 같죠. (하하) 그리고 그 법칙들 중에서 4법칙이 있는데 정말 무모합니다. 정말 무모해서 좋아요. 당시의 사람들은 우주를 이해하려고 하는 방식을 과학으로 보잖아요. 제가 보기엔 철저히 신을 찾겠다고 하는 노력 같은데, 그렇게 보이지 않나요?
양: 저는 전파망원경도 그렇게 봐요. 정말 저기 우주는 가스 덩어리처럼 생겼다잖아요. 과학자들이. 지금도 우주는 팽창하고 분출한다는데, 정말 우주를 이해하겠다고 그랬다가 우주의 시작점에 정말로 신이 있으면 어떻게 할 거야.(하하하)
양: 신과 같은 존재가 없다고 했던 게 오히려 거짓이고 존재한다면, 이 일을 어떻게...(웃음) 데카르트도 대단한 게 그런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시각 피라미드를 만들고 별짓을 다했더라구요. 그런 그를 보고 있으니까 장난이 생각이 나는 거예요. 저러다가 신 찾으면 어쩌려고...(폭소) 그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저번에 관련 자료 찾다가 핀홀 카메라도 찾은 거고... 너무 웃긴 거죠. 궁금하지 않으세요? 제가 보기엔, 과학의 모든 노력은 신을 부정하기 위한 게 아니라 신을 찾기 위한 것 같아요. 반대로.
양: 그 사람은 그가 발견한 세계를 언어로 표현할 길이 없으니까, 신의 얼굴을 찾은 것 같다고 이야기했죠. 그런 것과 연계해서 제가 말씀드리는 건, 아까 나노까지 들어갔는데, 정말 나노 안에 신이 있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신이 저기 큰 존재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정말 여기 요만한 작은 신일 수도 있다. 물론 지금 말하는 신이 어떤 상징으로 버무려진 이상한 덩어리가 아니라, 정말 이 우주를 만들어낸 신이라고 하면 정말 어떻게 생겼는지... 그런 신의 존재를 어떻게 묘사를 해요. 그러니까 뭘 정의한다, 묘사한다는 게 바보 같은 노력들인 거죠. 그런데 저는 그런 바보 같은 노력을 사랑합니다.
양: 특별히 없는 것 같은데요?
양: 2010년 에르메스상을 받고 나니까 후유증이 되게 심하게 오는 게, 제가 그동안 했던 작업이 별 볼일이 없었던 거죠. 뭘 이런 걸 했니? 미치겠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뭘 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할 만큼 괴롭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 여러 제안을 받았어요. 어떤 콜렉터는 네 작품 다 살 테니까 다오. 그래서 얼마나 사시려고 그러세요, 하니까 다 사겠대요. 가치는 잘 모르겠지만, 단위가 클 거 아니에요. 그런데 내가 이런 걸 수확하려고 작업한 건 아닌 것 같고,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작업을 계속하는 것은 무리더라고요.
양: 당연히 판매 가능한 작업은 판매해서, 다음 작업을 할 수 있다면 좋잖아요. 그런데 파는 게 미안하더라고요.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식사를 만들었는데 조미료 범벅인 식사를 내놓으면... 미안하잖아요. 그런데 돈을 받는다? 이런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한테 보이기 전에 일단 모든 것을 정지 시켜놓고 생각 좀 하자. 그래서 그때 조언을 많이 구했어요. 선생님들, 선배 작가, 여쭤보고 그러는데, 어떤 분이 그러더라구요.
양: “야, 나중에 결국 너 사랑하게 된다.” 이러더라구요.(웃음) 너를 사랑하게 된다, 그 말 되게 와닿더라구요. 처음에는 이해를 못 하다가 어느 순간 그 말을 이해하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앞으로 뭐 할 거니, 생각했더니, 앞서 말씀드린 제 선택이 남은 건데, 나는 지금 원하는 무대가 있는데, 지금 당장 눈 앞에는 없어요. 그리고 길을 가는데 지금까지는 셸파와 함께 있었는데, 지금은 셸파가 없는 길을 가려고 하니 어려웠던 거죠. 그리고 이제 셸파와 헤어진 길을 주저하지 않게 되었고 내가 어디로 가야된다는 방향을 모른다는 게 이렇게 흥미로울 수가 없던 거죠. 이제 그 단계로 갔고, 여기서 남은 건 과감히 그 길을 가야 된다.
양: 관련한 이야기를 전한다면, 박문호 박사님이라고 과학 하시는 분이 있어요. 그 분이 호주 여행을 가는데 반경 100킬로 안에 아무 것도 없대요. 들도 없고 산도 없고, 옛날에 지구가 가지고 있던 토양 그대로 있고, 심지어 날씨도 구름 한 점 없대요. 한 달 동안 그냥 파란. 그런데 왜 거기 가세요, 했더니, 자기가 가는 이유는 그곳에서는 인간의 감정이 하나도 안 느껴진대요. 그분 말씀이 일리가 있는 게, 산이 높고 강이 푸르고 바다가 깊으면 감정이 너무 폭발한다는 거죠.
양: 작가들이 그렇잖아요. 뭘 보면, 우와, 저 산을 내가 어떻게 묘사를 하나, 그죠? 산이 없더라도 정말 아름다운 산들을 사고 안에서 만들어내잖아요. 그리고 하나 인상적인 게, 그분이 그 땅의 100킬로 반경의 가운데 어디로 가게 되면 작은 굴 같은 게 있대요. 거기 가면 벽화가 있대요. 그 벽화 보러 갔대요. 너무 동감이 되는 거예요. 그 벽화 어땠는지 질문해보니, 그러니까, 이건 말로 설명이 안 된다고... 우주 자체라고... 너무 부러웠어요. 그리고 작가로서 그런 굴을 찾아가는 길, 그리고 그 찾아가는 길에 나에게도 행운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정도...
2001년 제9회 무용예술상 무용평론 부문 당선과 함께 무용평론 활동 시작. 2003년 무용월간지 [몸] 편집위원을 거쳐, 2006년 퍼포밍 아트지 [판] 창간 작업과 함께 편집위원으로 현재까지 활동. 2008년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연구원(3년), 2011년 국립극단 선임연구원(1년)으로 『백남준: 말에서 크리스토까지』『백남준의 귀환』 등을 편저 및 출간 했고, [계간 연극]을 창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