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비전은 포스트 뮤지엄이지만 경영철학은 양손잡이 철학이에요. 기존 공무원 조직의 안정성과 미술관의 역사를 존중하고, 동시에 수장의 혁신성을 합치는 양손잡이여야 혁신성이 실현되지, 아무리 애써도 이 혁신성에 지지를 받지 못하면 일이 진행되지 않아요. 공무원의 행정력, 안정을 기하는 측면과 예술의 혁신적인 양면을 수렴하여 그 충돌을 조정하는 것이죠. 양손잡이, 글로컬(Glocal), 정통성과 대안성을 아우르기 등 공공기관의 전시기획은 이러한 양면성의 조율과 관계가 깊어요."
김홍희: 외국 생활 13년 만인 1992년에 귀국을 했어요. 그간 해외 생활하면서 백남준 선생님을 통해 플럭서스를 알게 됐고, 덴마크 플럭서스 페스티벌에 함께 다니면서 관객 이상의 관객으로 참여했어요. 그때 플럭서스 작가들과 많이 친해졌고, 그 온도가 식기 전에 일을 벌이게 된 거죠. 당시 예술의전당에서 1천만 원을 지원해주는 전시 기획 공모가 있었어요. 그리고 계원의 모체인 파라다이스 우경문화재단에서 4천만 원이라는 거액을 지원 받았죠. 그렇게 예술의전당, 계원, 갤러리 현대, 국립현대미술관 등에서 전시와 퍼포먼스를 벌이며 당시에는 없던 굿판을 벌인 거예요. 백 선생은 바빠서 서면으로만 참가하셨지만, “플럭서스는 무궁화 꽃”이라는 타이틀을 만들어주셨어요. ‘플럭서스는 무궁화보다 질기다’는 의미였는데, 이것을 구호로 딕 히긴스, 앨리슨 놀즈, 존 핸드릭스 등 오리지널 멤버 15명이 참여했죠. 프로그램을 맡은 르네 블록까지요.
김홍희: 나라마다 비슷한 접근을 하는 작가들이 있었어요. 일본에는 구타이가 있었고, 한국에는 김구림, 성능경, 정찬승과 같은 아방가르드 그룹이 있었죠. 그들이 시대정신을 꽃피우는 촉매와 같은 역할을 했죠. 우선 플럭서스와 한국 아방가르드의 연결은 백남준이었어요. 《피아노 위의 정사》라는 스코어를 정찬승 씨와 공연한 것이 백남준 작품을 한국에 최초로 소개한 계기가 되었죠. 또한 홍신자 씨가 뉴욕에서 활동하던 시기 플럭서스 작가들과 교류가 있었어요. 필립 코너와 홍신자 씨는 작업 동료기도 했고요. 한국에 해프닝을 하던 작가들은 자신들의 활동이 확고히 뒷받침되는 행사였기 때문에 굉장한 지원을 보내줬죠. 직접적인 관계라기보다 시대정신으로 엮인 관계였어요.
김홍희: 1994년 《여성, 그 다름과 힘》이라는 전시를 혼자 기획했어요. 페미니즘 이론들은 소개됐지만 예술과의 관계는 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한 첫 여성 미술 전시였어요. 전시 제목이 실은 조금 진지하죠. 당시 미국에서는 《배드 걸즈 Bad Girls》라는 전시가 있었는데, 우리가 아직 초심자적 접근이었다면, 《배드 걸즈》는 페미니즘 이론의 역사와 실행 기간을 거친 후 나타난 유머러스한 접근이었죠. 1994년의 심각한 접근이 1999년 《팥쥐들의 행진》이라는 코믹한 제목을 통해 비로소 ‘배드 걸즈’의 태도로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때 ‘여성영화제’를 맡았던 이혜경 씨의 여성문화예술기획이 함께 했는데, 아무래도 혼자보다는 집단으로 할 때 여성적 정치성이 강해질 것 같아 백지숙, 임정희, 오혜주, 김선희와 함께 5명의 큐레이터들이 섹션을 나누어 전시했어요. 페미니즘과 여성의 감각, 그리고 근대 여성의 역사적 작업들을 다루는 섹션이 있었어요. 페미니즘과 직접적 관련은 없지만 한국 현대미술을 살찌운 공로가 있는 작가들의 작업을 한 편에 보여주었죠. ‘여성영화제’는 많은 기관들이 영화라는 매체의 힘을 생각해 지원해주었지만 미술은 대중성이 없어 직접 재원을 마련해야 했어요. 당시 전시에 참여하는 7명의 여성 작가들이 판화를 만들었고, 이혜경 씨와 제가 직접 그 작품들을 들고 가가호호 갤러리를 다니며 팔아 전시 행사비를 충당했어요. 대부분 화랑의 여성 대표들이 사줬어요. 지금 생각하면 현실 같지 않은 일이었죠. ‘팥쥐들의 행진’이라는 제목의 대중성과 다섯 명의 큐레이터들이 심혈을 기울인 전시라 반응이 좋았어요. 페미니즘 미술에 대한 아이디어도 갖게 되었고, 이후 페미니즘 미술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사라진 것 같아요.
김홍희: 여성들 간의 연대감이 페미니즘 초기 단계에서는 꽤 중요한데, 그것이 한국에서는 처음 발생했던 거죠. 이 행사가 연장되어 2회, 3회는 아시아 여성 미술제로 진행하게 되었어요. 그때 아시아 작가들이 많이 몰렸는데, 《팥쥐들의 행진》과 같은 임팩트는 주지 못했죠. 경기도 미술관에 있을 때 《언니가 돌아왔다》라는 전시를 한 것도 다시 한 번 페미니즘을 부흥하고 싶은 의도가 있어서예요. 언젠가는 제도권을 벗어나 다시 아시아 여성 미술제를 해보고 싶은 열망이 남아있어요. 시립미술관에서 작년에 남성 작가들만으로 중견작가 전시를 했는데, 내년에는 여성 작가로 《SeMA Gold(중진 작가 기획전 시리즈)》를 기획해요. 특히 디아스포라(diaspora)를 주제로 민영순, 윤진미, 조숙진 등 해외로 이주한 이산작가를 모아 작업하게 되죠. 직접적으로 페미니즘 노선을 강조하지는 않지만 기획에 의도를 내포하는 거죠.
김홍희: 제가 늙마에 공부한 가정주부로 출발했다는 마이너리티의 의식 때문인지 항상 주변부를 바라보고 그것을 중심에 올려놓고자 하는 작업을 했던 것 같아요. 제도적인 측면에서 그런 역할을 맡은 것이 대안공간이었는데, 당시는 대안공간이라는 말이 아직 회자되지 않던 때였어요. IMF를 맞은 90년대 말은 작가들의 작업 환경이 정말 어려웠어요. 외국에서 돌아와 갈 곳도 없는데다 환율 때문에 더 이상 공부를 끝내지 못하고 돌아온 작가들도 많았죠. 그런 상황에서 쌈지가 신사옥을 사면서 구사옥이 남게 되자 그것을 레지던시로 사용한 것이 1998년, 암사동의 쌈지 아트 프로젝트였죠. 당시 암사동에 거주한 작가가 김홍석, 박찬경, 정서영, 이주요, 홍순명, 고낙범 등 지금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에요. 그 1, 2회를 암사동에서 하다가 쌈지의 사업이 흥해서 홍대 앞에 빌딩을 하나 사게 되고, 본격적으로 쌈지 스페이스라는 복합문화공간을 열었어요. 언더그라운드 록 밴드, 레지던시, 전시장 등 대안공간을 내걸게 되었죠. “대안문화가 사회를 변화시킨다”라는 구호하에 기존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해 대안적인 것을 옹호했지요. 쌈지가 유명해지면서 입주 경쟁률이 10대 1이 되기도 했어요. 입주 심사를 큐레이터와 기존 참여 작가들이 함께 했는데 그 효과가 너무 좋았어요. 내가 살던 곳에 좋은 작가들이 들어와서 그 분위기가 유지되게 돕는 것이죠. 대안이라는 모토가 홍대앞 문화를 흡수하면서 그 변화로 아웃풋을 내는 역할을 했고, 많은 작가들을 배출하게 되었죠.
김홍희: 2년에 한 번씩 하던 ‘타이틀 매치’라는 프로젝트로 아방가르드 작가와 젊은 작가를 연계한 전시였어요. 쌈지를 닫으면서 그만두게 되어 아쉬웠는데, 이번에 북서울 미술관에서 여성 작가들과 함께 다시 시작해요. 이번에는 미술사에서 중요한 여성 작가와 거기에 맞는 신세대를 엮는 작업을 구상하고 있어요.
김홍희: 70대의 강은엽 작가가 전시를 하기로 했어요. 굉장한 감각의 소유자고 미학적 아방가디즘을 보여주는 작가죠. 함께할 젊은 작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요. 같은 시기 북서울 미술관 다른 층에서는 민중 계열 작가들의 전시가 있어요.
김홍희: 당시 모호하게 시도했던 것들에서 미술관 성격에 맞게 다시 의역 작업을 하는 거죠. 미술관에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미술관을 변화시키는 기폭제로 부분부분 사용해 내가 생각하는 포스트 뮤지엄을 성취하는 기제로 활용하는 것이죠.
김해주는 전시 기획자이며 2022년 부산비엔날레 전시감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