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티스트와 마찬가지로 글로벌 큐레이터 역시 국제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큐레이터를 의미한다고 본다. 꼭 해외에 나가서 활동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국내외에서 국제적 수준의 전시를 만들 수 있는 역량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글로벌 아티스트의 작품이 국제미술계에서 인정을 받는 것 처럼, 큐레이팅의 방향과 질이 국제적 담론을 만들어낼 수 있을 때 글로벌 큐레이터로 이름 붙여질 수 있을 것이다. 즉 국제적인 미술담론을 뒤따라가거나 누구 전시의 아류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담론을 동시에 만들어낼 수 있는 조각의 하나가 되어야 하는 뜻이다."
동시대 현대미술 작가와 작품에 대한 열정과 관심, 시대를 읽어내는 끊임없는 연구, 테이트 미술관을 통해 아시아 현대미술을 학술적으로 담론화 시키고자 하는 지적 열의, 유쾌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유머와 낙관적인 삶의 태도는 테이트가 그녀를 원하는 이유이자 큐레이터로서 세상과 마주 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2013년 5월 그녀를 만나 테이트 큐레이터로서의 활동과 비전, 한국현대미술계에 대한 바램을 들어보았다.
이숙경(이하 이): 한국에서 예술학을 전공 한 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로 5년간 일하면서 큐레이팅을 현장에서 배웠다. yBa가 현대미술의 주요한 흐름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던 1990년대 중 후반, 영국으로 연수를 다녀오고 영국현대미술전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하게 되면서 영국현대미술의 에너지를 가까이에서 접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영국에서 공부를 더 해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1998년 영국으로 건너가 시티대(City University London)에서 석사, 에섹스대(University of Essex)에서 <저자 종말의 시대 예술가 개념의 변화(The changing conceptions of the artist in the age of authorial demise)>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Art Council England 큐레이터 펠로우 쉽으로 1여 년간 일하다 2007년 10월 테이트에 입성하였다.
이: 테이트 모던(Tate Modern)이 건립되던 2000년은 현대미술에서 글로벌리즘이나 인터내셔널리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테이트는 그러한 움직임을 일찍이 감지한 미술관이다. 테이트 컬렉션(Tate Collection)의 범위도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태평양, 중동, 북아프리카 등으로 점차 확장되었다. 테이트 컬렉션의 지역적인 영역이 확장되는 가운데 내가 테이트 컬렉션의 아시아 태평양 소장품 구입 위원회 책임 큐레이터를 맡게 되었고, 아시아 현대미술에 대한 보다 학술적인 연구의 필요성에 따라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미국의 앤드류 멜론 재단(Andrew W. Mellon Foundation)의 후원으로 설립되었는데, 미국의 학술과 미술 분야를 주로 후원하는 재단이 예외적으로 영국의 테이트 리서치 센터(아시아-태평양)를 후원한다는 것은 테이트의 국제적인 연구 활동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시아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연구소의 설립은 “테이트가 원하는 국제화의 중심지역 중의 하나가 아시아”임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시아-태평양 테이트 리서치 센터”의 지향점은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시아 현대미술에 대한 연구가 테이트라는 장을 통해 하나의 틀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즉 아시아, 미국, 서유럽 등 전 세계 아카데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아시아 현대미술에 대한 각기 다른 학술적인 담화들을 연결시키고 논의의 장을 열어 두는 것이 테이트의 역할이다. 이때 테이트는 지식의 ‘생산자’가 아닌 ‘매개자’가 된다. 서구 현대미술사가 그랬듯이 미술사의 주류가 되는 것은 이러한 학술적인 논의의 양과 질이 확보되어야만 가능하다. 이제는 백남준, 아이 웨이웨이, 야요이 쿠사마 등 아시아 현대 미술가들의 전시와 작품들을 학술적으로 담론화 시켜야 하는 시기가 왔다. 아시아 작가들의 예술행위가 지속적인 학술적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리버풀 비엔날레는 예술감독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리버풀 내 각기 다른 미술기관의 협력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테이트 리버풀관의 큐레이팅에 참여하였다. 2012년 리버풀 비엔날레의 주제는 '예상치 못한 손님(The Unexpected Guest)' 이었고, 이를 풀어내는 주요개념은 '환대(Hospitality)'였다. 주인과 손님이라는 일상적인 관계를 사회 정치적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권력 관계나 경계의 문제로 확장시킨 개념이었다. 나는 테이트의 소장품을 기반으로 다문화, 투어리즘, 문화적 정체성, 혼성, 이주, 글로벌리즘 등의 국제적인 이슈에 접근하였다. 최근 테이트의 성과는 소장품 자체가 국제화되었다는 것인데, 소장품 구입 위원회 책임 큐레이터로서 테이트 소장품에 대한 방대한 정보와 연구는 이 전시기획의 토대가 되었다. 특히 비엔날레를 위해 테이트 리버풀관이 새로이 커미션한 더그 에이트킨(Doug Aitken)의 <원천(Source)>은 작가와 큐레이터, 건축가들의 지속적인 논의와 협업을 통해 완성된 테이트 리버풀 전시의 주요 프로젝트였다. 영국의 건축가 데이비드 아제이(David Adjaye)와 더그 에이트킨이 공동 디자인한 파빌리온을 통해 미술관 바깥 공간에 의도적으로 설치되었다. 여섯 개의 스크린 프로젝션이 낮과 밤에 동시에 보여지면서 안과 밖의 경계가 무너진, 투명하고 열린 건축적 작업을 선보였다. 건축가, 미술가, 음악가, 사진작가 등 예술 각계 인사들과 작가가 나눈 인터뷰를 바탕으로 모든 예술작품의 ‘원천’인 창조성에 질문을 던진 작업이었다.
이: 전시를 기획하는 과정은 큐레이터가 전시 기획서를 내놓는 것에서 출발한다. 테이트에서는 3주에 한번 프로그램 회의가 있는데 이때 자신의 전시 프로젝트에 대해 발언한다. 전시개최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이 되면 논의가 지속된다. 여기서 큐레이터의 개인적 연구는 매우 중요하다. 큐레이터가 전시 기획서를 내놓는다는 것은 그만큼 연구가 축적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전시는 보통 2-3년의 준비기간을 통해 개최되는데, 그 동안 전시와 작품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가 진행된다.
전시는 큐레이터 개인의 연구를 바탕으로 동시대 미술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보여주는 장이지만, 전시의 취지와 기획 의도는 테이트의 미션(mission)에 부합해야 한다. 테이트의 미션은 ‘영국미술과 국제미술의 근·현대, 동시대 미술을 대중이 가장 잘 향유하고 즐기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다. 동시대 현대미술의 이슈를 다루는 전시를 해야 하지만 왜 테이트가 이 전시를 해야 하는지, 어떤 전시가 테이트의 관객을 위한 전시인지를 항상 염두해 두어야 한다. 즉 테이트에서 기획되는 모든 전시의 궁극적인 목적은 대중이 현대미술을 즐기게 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값지게 하는데 있다.
이: 전시기획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항상 작가이다. 전시는 작가의 작품에서 출발한다. 결국 전시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미술 그 자체이다. 주제를 미리 상정하고 거기에 맞는 작가들을 끼워 맞추는 방식으로 전시기획을 하지 않는다. 전시는 미술가와 미술 작품이 하는 이야기를 나의 해석을 통해 대중에게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 현재 미술계에서 실제로 무엇이 이슈가 되고 있는지에 항상 주목한다. 예를 들어 최근 몇 년간 정치적인 이슈를 다룬 미술이 많이 등장하였는데, 왜 정치적인 미술이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여러 시점에서 통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정치에 관심이 있어서 정치적인 미술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현재 시점에서 미술계의 주요한 현상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정치적 성향의 현대미술을 전시라는 형식을 통해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는 큐레이터의 몫이다.
이: ‘글로벌 큐레이터’의 명확한 의미는 알 수 없으나 중요한 건 큐레이터의 역량도 ‘글로벌 아티스트’만큼 높아 져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글로벌 아티스트와 마찬가지로 글로벌 큐레이터 역시 국제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큐레이터를 의미한다고 본다. 꼭 해외에 나가서 활동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국내외에서 국제적 수준의 전시를 만들 수 있는 역량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글로벌 아티스트의 작품이 국제미술계에서 인정을 받는 것처럼, 큐레이팅의 방향과 질이 국제적 담론을 만들어낼 수 있을 때 글로벌 큐레이터로 이름 붙여질 수 있을 것이다. 즉 국제적인 미술담론을 뒤따라가거나 누구 전시의 아류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담론을 동시에 만들어낼 수 있는 조각의 하나가 되어야 하는 뜻이다. 글로벌 큐레이터를 키우기 위한 제도란 바로,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담론 생산이 가능한 좋은 전시를 만들어 낼 수 있게 최적의 여건을 부여하는 것이다. 즉 큐레이팅 실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을 최대한 많이 부여하는 것이다.
이: ‘한국’이라는 국가 개념을 넘어 다시 미술가 중심으로, 개별 작가의 작품 중심으로 가는 것이다. 해외미술관에서 ‘한국’이라는 국가를 강조하거나 ‘한국 작가’라는 국적에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콜로니얼리즘(colonialism:식민지주의) 적인 시각에 기반한 것이다. 서구 미술계에서도 국가 브랜드 전시에 대한 반성의 기운이 있다. 이러한 형태의 전시는 1980~1990년대에 이미 지나간 유행이다. 테이트에서도 2000년대에 들어서 국가 중심의 전시를 한 적이 없다. 테이트에서 아시아 현대미술을 주목할 때 국가 차원의 전시가 아닌 백남준, 쿠사마 야요이, 아이 웨이웨이 등 작가 중심의 개인전 형태로 주목한다. 모든 전시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은 미술가 개인의 작품이다. yBa도 결국은 데미안 허스트이고 트레이시 에민이 아니던가.
이: 서울관 개관 기획전시인 《연결-전개》전 6명의 큐레이터 중 한 명으로 참여한다. 나를 포함하여, 미국의 러처드 플러드(뉴욕 뉴 뮤지엄), 영국의 앤 갤러거(런던 테이트 모던), 독일 베른하르트 제렉세(ZKM Media Museum), 일본의 유코 하세가와(도쿄 현대미술관), 인도의 푸자 수드(KHOJ) 등이 참여한다. 한 명의 큐레이터가 한 명의 작가를 선정, 서로 다른 관점에서 큐레이팅 할 예정이다. 독창적이면서도 관점이 분명한 전시가 될 것이다.
서울관에 절대적으로 기대하는 바는 한국 중견작가 개인전의 지속적인 개최이다. 개인전 개최는 한국 현대미술 작가들이 국제무대에서 활동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토대가 될 것이다. 한국 작가들의 경우, 비엔날레나 트리엔날레의 프로젝트성 경력은 많은데 미술관급 개인전 경력이 부족하다. 작가를 해외에 프로모션 한다는 것은 매우 추상적인 개념이다. 보다 실질적이고도 확실한 방법은 해외 미술계가 한국현대미술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보다 많은 기회를 주는 것이다. 담론을 창출할 수 있는 정교한 큐레이팅을 통해 한국현대미술 작가의 양질의 개인전을 개최하는 것, 그리고 미술관 네트워킹을 통해 그 전시를 해외에 소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프로모션 방법이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한국현대미술작가들의 개인전을 해외 순회전으로 연결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이 부분에서 해외 미술관과의 파트너쉽 영역도 넓어져야 한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재직 중이다. 코리아나미술관 책임 큐레이터를 역임했으며, 뉴미디어를 기반으로 퍼포먼스, 연극, 영화, 애니메이션 등 인접시각예술과 미술과의 소통을 통해 현대미술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국제기획전을 다년간 진행해온 바 있다. 책임 기획한 주요 전시로는, < 퍼포밍 필름 >(2013) < 마스커레이드 >(2012), < Featuring Cinema >(2011), < Artist's Body >(2010) 등이 있다. 2006년 기획한 < 이미지 극장 >은 현대미술가, 무대미술가, 연출가, 연극배우, 무용가 등이 참여한 프로젝트형 전시로, 200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수여하는 ‘올해의 예술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