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아트로 릴레이 인터뷰는 정용국 작가를 시작으로 이대범 독립큐레이터, 미술평론가, 현시원 독립큐레이터, 주재환 작가까지 진행하였다. 인터뷰어가 된 주재환 작가는 무용계와 미술계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김남수 안무비평가를 인터뷰이로 선정하고 그의 활동과 시각을 알아보는 인터뷰를 마련했다.
김남수(이하 김): 창무예술원은 고전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안무의 혁신을 이루려는 정신이 있었습니다. 그 단체와 함께 한 것은 2004년까지이고, 6년 가량입니다. 창무예술원에서 무용월간지 [몸]을 만드는 일을 했어요. 먼저 처음 무용 입문한 계기부터 말씀드려야겠네요. 대학 2학년 때까지는 평범했는데, 제대 후 친구들이 어디 갔나 찾아봤더니 모두 선불교 동아리에 들어가 있었어요. 친구 따라 강남 간 것이죠. 그런데 가부좌 수행을 하다보니 다리가 너무 아팠어요. 그래서 인도철학이라든가 요가 등에 심취해서 학교를 거의 안 나가기 시작했죠. 완전히 일탈하게 된 거죠. 그렇게 2년여를 지내다 보니까, 이번에는 너무 정적으로 느껴지는 거예요. 반대로 재미있는 것을 해보자 해서 고전 영화를 보기 시작했어요. 당시 사당동에 있는 '문화학교 서울'이라는 시네마테크를 들락거렸어요. 다른 것은 작파하고 영화만 봤어요. 편벽된 생활이었는데, 아마 제 안에 오타쿠 기질 같은 게 있었나 봐요.
김: 영화는 비디오 대여해서도 보고, 영화제에 가서 보기도 했지요. 가장 크게 남아있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 '문화학교 서울'에서 본 고전영화들이었어요. 프랑스의 시네마 프랑세즈를 지향하는 젊은 영화인들이 의기투합해서 만든 것인데, 사실 열악했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었어요. 고전영화를 보다가, 프랑스영화 동호회를 결성하게 됐어요. 그 때는 영화를 보고 나머지 시간에는 그냥 아르바이트나 하는 소위 '알바족'이었죠. 그렇게 해서 영화를 몇 천 편을 보고 나니까, 영화로 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슬슬 들었어요. 그렇게 또 영화만 보고 있던 제가 한심했던지, 당시 무용월간지 [몸]의 박성혜 편집장이 제 손을 잡아 이끌어서 무용 공연을 보도록 했어요. 고마운 일이지요.
김: 무용에 입문하면, 보통 발레라든가 고전무용 같이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진행되지요. 저의 경우는 달랐어요. 처음에 보게 된 작품이
씨가 1998년 뉴욕대를 졸업한 귀국 기념 공연 <다섯 개의 무덤> 시리즈였어요. 그 중에서 '토마토 무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무대 전체를 보니, 붉은 토마토가 바닥 가득히 깔려 있었어요. 도저히 춤을 출 수가 없는 상태였어요. 뭘 하려고 저러나. 그런데 안은미 씨가 무대 뒤편에서 등장하다가 넘어졌어요. 사람들이 아! 하고 짧은 비명을 토하는 찰나에 일어나려다 다시 또 넘어졌어요. 그리고 넘어지고 또 넘어졌어요. 그렇게 끝까지 계속 넘어지니까, 무대 전체가 으깨진 토마토밭이 됐겠지요. 그것이 저에게 존재론적 충격을 줬던가 봐요. 저는 그런 공연을 처음 봤거든요. 한 방에 뭔가가 왔어요. 사실 인간은 이렇게 살고 있구나, 묘사한다든지 스토리텔링을 하지 않고 너 자신을 말해봐라 라고 했을 때의 몸으로 하는 답변이랄까? 그런 느낌이 온 거죠. 그게 계기가 되어 무용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김: 그 분이 이화여대 무용과 신화를 일군 3인방의 한 분이셨어요. 김매자 선생은 여장부로서 스케일이 크고 배포가 남다른 분이셨죠. 2003년, 큰 결단을 내리셨어요. [몸] 잡지를 독립채산제로 전환해서 저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 맡기신 거죠. 그렇게 해서 2년 가까이 한국 무용계의 담론시장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고 자평해요. 도전적인 쟁점이 있는 리뷰, 인문학적 베이스를 가진 비평을 쓰고, 무엇보다도 비평에 대한 메타비평, 즉 관성적인 감상 방식을 옹호하는 평론가의 글쓰기에 대해 실명 비판을 했습니다.
김: 2006년입니다. [판]은 2006년부터 부정기 간행물로 5권 나왔어요. 아까 말씀드린 잡지 [몸]을 독립채산제로 편집 독립권을 지키면서 만들자, 이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어요. 그러자 김매자 선생이 다시 회수하고자 하셨죠. 잘 되고 있으니까 다시 [몸]지를 조직 내부로 소유권을 이전하는 게 어떠냐. 저희는 할 수 없다고 정중히 말씀드리고 그만뒀습니다. 저하고 박성혜 씨, 허명진 씨 그리고 연극평론가 노이정 씨, 이렇게 넷이서 이참에 장르를 넘어서서 통합할 수 있는 '퍼포먼스'라는 공동의 장을 열자는 얘기를 하게 됐습니다. 미술이냐, 연극이냐, 무용이냐를 별로 안 따지는 독립 성향의 잡지를 한 번 해보자. 젊은 혈기로 사회에 부딪히는 방식으로 무기도 만들고, 과연 이 창으로 제도의 단단한 벽을 뚫을 수 있을까, 바위치기를 해보자.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판]입니다.
김: 윤정섭 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이미 2006년 이전에 한국 예술계는 연극을 연극이라 하면 왠지 좀 이상하고, 무용을 무용이라 하면 또 왠지 뉘앙스가 이상한 상황이었어요. 장르의 흐름으로 접근한다면 뭔가 유동화되었다, 혹은 액체화되었다는 거죠. 왜냐하면 춤인가 하면 몸이 있는 연극이고, 연극인가 하면 이미 규정할 수 없는 무명의 예술로 변신하는 거예요. 프로테우스처럼 끊임없이 장르가 몸체를 뒤채면서 변신하기 때문에 포획할 수 없는 이상한 경험이랄까요. 한 시간 공연이라고 하면 한 시간 내내. 근데 저희는 당시까지 어느 정도는 장르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떤 임계점에 이르니, 더 이상 무용과 연극과 미술과 미디어가 명확하게 구분이 안 되는 거예요. 예술은 암죽 상태로 쑤어지기 시작했던 거죠.
김: 네. 그래서 [판]을 만들 때는 그런 '다원적이고 통합적인 흐름'을 타고 가자고 했죠. 그래서 [판]을 보면 사회학자도, 영화평론가도, 미술평론가도 글을 쓰고, 전체적으로 보면 몽타주적 글쓰기가 된 거죠. 일부 독자들은 정신없다고 했어요. 하지만 무용 쪽에서 몽타주적인, 꼴라주적인 글쓰기를 첫 번째로 시도한 거죠. 문학에서는 조이스나 버로스 같은 이들이 20세기 초에 이미 시도했던 것이고, 미술로 봐서는 너무 당연한 상투적인 기법에 불과했는데 말이죠.
김: 처음 창간호가 나왔을 때 일부 사람들이 신선하다는 신호를 보내줬어요. 대다수는 디자인이 괜찮다는 반응 정도였죠. 당시 디자이너 '슬기와 민'의 디자인 작업은 [판]이 한국 디자인 대상 경쟁 부문에 출품되고 좋은 잡지로 뽑히기도 하면서 인정받았죠. 그러니까 잘 읽혀서 뽑힌 게 아니라 잡지 디자인이 좋아서(웃음). 좌우간 '슬기와 민'이 이런 실험적인 스탠스와 관점을 가진 잡지에 기꺼이 함께 동행한 것으로 이해했어요. 냉철하게 봐서 시각과 디자인으로 어필한 잡지였지, 가독성이 좋은 잡지는 아니었어요.
김: 당시 한겨레신문에 무용 리뷰를 쓰고 있었는데, 보통 일간지와 무용전문지의 악평은 각각 영향력이 다릅니다. 한번은 안무가 국수호의 <사도>라는 공연을 작심하고 악평했었죠. 어떤 내용이냐면 한국 창작춤이라는 것은 고전무용을 재창작하는데, 고전무용의 고정된 관습에서 아무래도 자유롭지 않은 거죠. 그런 고루한 방식이라면 낡은 틀만 반복되는 거죠. 저는 그 점에 대해 파국적인 진단을 했어요. 당시 저는 무용에 속해 있었지만, 또 바깥에 속해 있기도 했지요. 이에 대해서 무용평론가 김태원 씨가 국수호 씨를 옹호하는 글을 [공연과 리뷰] 말미에 후기처럼 썼어요. 근데 그 옹호론이 저에 대해 매우 인신공격적이었어요. 그래서 재반론을 저는 [판]에 실었어요. 다시 메타비평을 시도한 것이죠. 반응은 없었습니다. 사실 [판]이 기묘한 위상에 있어요. 사람들을 간지럽게 만들거나 애매하게 만드는 거죠. 반응 안 하면 그냥 지나가는 거죠. 좌우간 인문학 베이스로 예술에 다리를 만드는 그런 잡지로서는 이 퍼포밍아트 쪽의 입장이 애매합니다. 그래서 반응을 보이기가 힘들지 않을까란 생각도 하죠. 그래서 에피소드가 별로 없어요. 잡지와 관련해서는.
김: 감각의 혼돈이 있어요. 그 혼돈이 결국은 바로 역사의 단절이죠. 우리 선조가 만든 수많은 저작과 문헌들에 접근할 경로가 없지요. 동아시아 한자 문명권이 새로운 사상의 보고인데, 우리는 접근 능력이 없어요. 마찬가지로 과거 민화라던가, 백자라던가, 중국풍이 아닌 우리의 유니크하고 독특한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에 관심 두고 바깥의 관점으로 재평가하지는 않지요.
김: 제 관심은 현재 문화복제유전자 '밈 meme' 같은 것입니다. '밈'은 문화적 재창조라는 기나긴 프로세스 안에서 살아남아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밈'의 기원과 내력을 잘 모르죠. 예를 들면, 김소월의 [산유화]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시가 원래는 백제 유민들이 부르던 망국가라고 합니다. 나라가 망해도 봄꽃은 핀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 노래가 엄청나게 불리워지다가 어디로 번지냐 하면 경북 선산으로 갑니다. 거기서 정절을 지키며 죽은 향랑이라는 여인의 [산유화가]로 변주됩니다. 슬픔의 정조를 노래하는 차원이 국가도 있고, 개인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산유화'로 검색해보니, 대중가수 남인수가 [산유화]라는 노래를 부르는데 처음 듣는 가사였습니다. 역시 자기 나름의 [산유화]를 부르는 것이죠. 그리고 해방공간으로 이동합니다. 1948년 11월 12일 귀국한 성악가 박은영이 가곡 발표회를 합니다. 이때 조선 최대의 작곡가 김순남의 [진달래꽃]과 [산유화]가 발표됩니다. 우리나라 굿과 상여의 장단을 사용한 현대음악으로 평가됩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산유화에 대한 계보학적 충동을 불러일으키는데, 이게 바로 '밈'의 계보학이 되겠지요.
김: 현재 국립극단은 <삼국유사 프로젝트>라는 연극 시리즈가 진행 중인데, 학술출판팀의 연구원으로서 저도 어느 정도 개입했습니다. 계간 [연극]이라는 잡지 창간과 함께 신화적 상상력을 어떻게 예술 실행의 장으로 끌어들일 것인가 라는 문제도 제기되었죠. 연극은 오태석, 이윤택, 손진책 등의 연출가들이 연극의 철학이자 메소드북으로 『삼국유사』를 사용한다는 입장입니다. 그것도 '굿'이라는 연희 양식으로 재해석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저도 이의가 없습니다. 단지 『삼국유사』 독해에서 필요한 것은 연극화하는 소재나 모티브 개발이 아니라 그 신화적 세계가 가능한 감각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신이한 변신' 혹은 '괴력난신'은 판타지로서 좋은 것이지만, 어떻게 미학화할 수 있는가입니다. 서양에서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라는 것이 있고, 중국은 『산해경』, 『박물지』 등이 있습니다. 우리의 『삼국유사』도 이런 신화적 판타지북과 마찬가지로 변신담으로 가득합니다. 인간과 동물의 호환이 자유롭습니다.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쓰면 호랑이가 되고, 곰이 쑥과 마늘을 먹으면 인간이 됩니다. 변신은 인간과 자연이 행복한 동시에 비극적인 연관 관계를 맺는 마스터키입니다. 그것이 현재 서구 공연예술로 한참 진행하고 있는 모티프에요. 그런 모티프가 『삼국유사』를 통해서 우리에게도 재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 단초로 『삼국유사』의 한자를 읽어야 해요. 가령, 단군신화 부분에서 '웅득여신熊得女身'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득신得身' 즉 몸을 얻는다는 뜻이죠. 또 '현신現身'이란 표현도 있습니다. 김유신이 자신을 구해준 세 여신에게 제사를 지내자 여신들이 현신하지요. 또 '작신作身'이란 표현도 있습니다. 관음보살의 시험을 당하는 두 스님이 자신의 몸들을 미륵보살의 금빛 몸으로 만들죠. 만든다는 것은 이뤄낸다는 것이죠. 변신에 관한 코드들이 『삼국유사』에 풍부합니다. '변신變身'이란 말도 등장합니다. 한자는 그림이 있는 언어이고, 그 그림의 계보는 갑골문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김: 약 2년 6개월 있었죠. 처음 이영철 관장이 전화했을 때 제 느낌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어요. 시각 베이스의 미술관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는 힘들었기 때문에 처음 6개월은 지옥 같았고요. 다만, 번역되어 있던 백남준 작가의 몇몇 텍스트를 읽기 시작했는데, 그러다가 문리가 좀 터졌던가 봐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지식생산을 위한 프로그램에 가담하게 됐습니다. 백남준 작가의 사고방식은 대칭적입니다. 음악을 퍼포먼스로 표현할 때도 그 댓구적인 배치가 흥미롭습니다. 첫 번째 착안은 쇤베르크의 12음 기법과 이상의 <오감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온음 8개과 검은 건반의 반음 4개, 이렇게 총 12음을 한 번씩 다 사용해야 한다는 음의 평등주의가 어떻게 이상의 시와 만날까요. 오감도에서 '제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2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 이렇게 해서 '제13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로 끝나는 전개방식과 포개지는 것입니다. 동서의 합류이자 합덕입니다. 동서의 만남이죠.
김: 개관 과정에서 백남준 공부를 하면서 이영철 관장의 큐레이팅을 체험했습니다. 리서치와 함께 공간의 맥락을 접고 확장해서 시각화하는 과정들은 저처럼 비주얼 베이스가 아닌 사람에게는 색달랐습니다. 그 후, 『백남준의 귀환』이란 리소스북을 만들면서 이번에는 책의 편집 자체가 큐레이팅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게 됐습니다. 즉 전시는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감각으로 만들고, 책은 전시 도록의 시각 논리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 관장과 대략 10개월가량 우여곡절 끝에 그 책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백남준 작가가 직접 쓴 글들을 편집한 『백남준: 말에서 크리스토까지』를 편집 출간할 수 있어서 더욱 고무적이었습니다. 국내의 백남준 연구 붐을 기대했는데, 이 관장은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것이란 쪽에 한 표 던졌습니다. 실제로 그랬지요.
김: 서구의 미술관 역할은 반 이상 교육기관으로 변신한 지 오래라고 들었습니다. 백남준아트센터 개관 당시에도 교육의 몫, 공공의 개방 공간의 몫은 차츰 전면에 내세워졌습니다. 지금도 그 기조는 크게 바뀐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는 주 선생님이 말씀하신 아이디어를 거론하고 싶어요. 가령, 미술관의 도슨트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면, 가장 민감한 '손끝'에 해당합니다. '손끝'의 감각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터치하는 안테나입니다. 미술관에서는 그 '손끝'을 홀대합니다. 학예연구원 같은 이들은 미술관 건물 높은 곳에 앉아 있고, 대중과의 접촉은 제한적입니다. 그럼 도슨트야말로 관객들과의 직접 접촉을 하고 신경 자극으로서 떨림을 느끼는 이들입니다.
김: 광주에서 벌어지는 흐름은 한국이 난생 처음 '아시아'를 타자화하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동일화하려는 움직임으로 보여요. 일본은 거의 '탈아입구'라는 식으로 환상의 프로그램을 추구해온 역사가 있는데, 우리도 묘하게 그런 면이 있었습니다. 지리적으로 아시아면서 심정적으로 아시아가 아니었다고 할까요. 이제 아시아문화전당을 만든다는 것은 그런 분열을 없애는 것입니다. 이제 아시아라는 말이 진짜 예술실행으로, 지식생산으로, 그리고 헤게모니의 쟁탈로 존재하는 것이죠. 이건 실제로 벌어지는 거예요. 진짜 게임입니다. 어떤 의미인가 하면 유럽에 대해서 아시아라는 얘기예요. 아시아라고 하는 것은 대륙이기도 하고, 문명이기도 하고, 어떤 의식과 무의식의 공동체이기도 해요. 그건 서구에 대해서 대응적인 입장을 취하는 거죠. 그렇다면 지식의 문제가 어떤 식으로든지 정리가 필요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 관심은 한 가지입니다. 민중미술에 대한 재접근이 필요해요.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백수남 작가, 오윤 작가 같은 분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특히 백수남 작가의 회화가 대범하고 활달해서 흥미롭습니다. 그 배포라든가 무의식이라든가 하는 면이 엿보입니다. “청탁병탄(淸濁竝呑)하는 배짱”이란 것이 있죠. 과거 80년대 예술가들이 가졌던 스케일, 청탁 즉 깨끗함과 탁함을 하나로 아우르는 뱃심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사는 복잡성의 질서는 사회과학적 비판 정신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죠. 양자의 장점을 취하고, 대범하게 관용할 수 있는 큰 마음이 필요합니다. 호랑이와 곰이 춤추고, 사람들이 춤추는 한반도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신시의 무(巫)죠. 그런 감각을 파급할 만한 연구자들이 나와야 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