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도시(浪漫都市)>전(5.27~9.17)은 베이징의 중간미술간(Inside-Out Art Museum)에서 열린 <자아비판>전을 구성하는 한 전시로 한국의 기획자 4인이 참여했다. 한국과 중국이 사드(THAAD)문제로 대립의 각을 세우고 있는 상황에서 열린 전시라 그 의미가 남다르다. '낭만'이라는 단어가 주는 비현실적인 뉘앙스가 지금의 중국과의 관계를 바라보는데 적절치 않을 수도 있겠지만, 상호비교를 통한 동시대의 조망이라는 훌륭한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긴다.
(재)예술경영지원센터의 프로젝트 비아 '큐레이토리얼 워크숍 프로그램' 참여자들이 기획한 이 전시는 2년동안 진행되는 국제협력 프로젝트로, 베이징에 이어 자카르타에서 후속 전시가 예정되어 있다.
베이징 중간미술관(Inside-Out Art Museum)에서 열린 전시 ‘자아비판’ (중국명 ‘자아비평’)은 1966년부터 마오쩌둥이 사망한 1976년까지 300만 명 이상의 당원을 숙청하고 수천만에 달하는 희생자를 내며 중국을 공포와 폭력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문화혁명’을 다시 끌어낸 전시다. 특히 문화혁명의 광풍 속에서 억압적인 정치 슬로건으로 이용된 ‘자아비판’을 키워드로 전쟁, 부패, 차별로 얼룩진 정치적 위기의 시대 속에서 ‘자아비판’이 함축하는 비평적 현재성을 다시 읽어내고자 시도하고 있다.
오른쪽) 전시개막식에 열린 일레인 W.Ho, 에드워드 샌더슨의 퍼포먼스
3명의 중국 큐레이터(캐롤 잉화루, 뤄샤오밍, 쑤웨이)가 공동으로 기획한 이 전시는 다시 7팀의 작가 혹은 기획자들에게 큐레이팅을 의뢰하고 그렇게 이루어진 서브-프로젝트들을 모아 한자리에서 전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특기할 점은 큐레이터들을 ‘의장’이라고 부르는 한편, 초빙 큐레이터와 작가들을 ‘피고’라고 표기해 놓은 것이다. 홍위병들 앞에서 부르주아와 결탁하고 인민을 배신한 자신의 표리부동을 고백해야 했던 반동당원들처럼 초빙 큐레이터와 작가들 역시 자신들이 겪는 자아의 분리를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다만 그 뉘앙스는 문화혁명의 그것과는 좀 다르다. “자아비판은 본질적으로 ‘자아의 개념’과 ‘자아의 상태’ 사이의 관계를 구축하는 데 대한 것이다. 그것은 자아로 회귀하는 방식뿐 아니라 타자에 동화되지 않는 방법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기도 하다.”(기획자 공동서문에서 발췌)
이 전시는 세계의 정치적 위기라는 맥락을 중심으로 하지만, 동시에 오늘날 중국의 지식인들이 겪고 있는 심각한 분열에 대해 우회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개막식 뒤풀이에서 한 중국 교수가 한 말은 매우 함축적이다. 그는 “마오쩌둥은 수 천만을 죽였지만 시진핑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는 자위적 표현을 사용했다. 그다음 날 798의 ‘UBS 미술관’에서 본 Chen Chen-Chen의 영상작품 <죽이지 않는 관용(The Mercy of Not Killing)>이 그의 말과 겹쳐졌다. 이 전시의 주제는 바로 이러한 동시대 중국 지식인들의 ‘불가피하게’ 유보적이고 회피적인, 억압과 긴장으로 채워진 사유와 맞물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중국의 정치적 분위기에서 이런 주제의 전시가 열린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평가를 할만하다. 게다가 한중 간 외교적 난국 상황에서 한국 팀의 참여를 수용한 것도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이번 전시에는 한국작가로 김재범, 김월식, 안데스, 오석근, 이동욱, 차재, 백승우, 윤한수가 참여하였으며, 중국 측 ‘피고’들로는 Hsu Chia-Wei, Han Lei, Dong Xing, Rong Guang Rong, Wong Mei Ling, Fiona Lee, Nicole Wong, Zhang Liming, Salt Project, Simon Leung 등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한국의 기획자들이 팀을 이룬 ‘낭만도시’가 바로 이러한 맥락 속에 유닛으로 참여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이미 오래전에 별도의 연구 및 전시기획으로 출발한 ‘낭만도시’는 4인의 큐레이터(강유미, 김수정, 김정은, 임종은)가 지난 2년 동안 아시아 권역에서 수행한 리서치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또한 이 프로젝트는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지원으로 이루어지는 프로젝트 비아의 첫 장기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는 “한국 미술의 해외 프로모션과 큐레이터 네트워크 향상 및 역량 강화”라는 두 가지 미션을 충족시켜야 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이들은 일단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지원사유를 잘 충족한 것으로 보인다. 베이징 전시에 이어 후속 전시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릴 예정이며, 여기서는 ‘자아비판’과는 다른 주제와 접합될 것이다.
‘낭만도시’의 애초의 기획 의도는 “도시에서의 삶과 열정을 낭만주의와 현대미술을 통해 재구성하고 성찰해보는 현장으로서의 전시공간”을 구성하는 것이다. 기획자들이 낭만주의라는 주제어를 왜 선택했는지는 궁금한 부분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낭만주의는 역사적으로 실패한 패러다임(필자가 기획한 ‘슈퍼 로맨티시즘’ 전 세미나에서 김수기, 우정아 등은 낭만주의라는 주제에 대해 동시대의 사태를 바라보는 참조로서 적절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내린 바 있다.)이라는 관점이 지배적이고, ‘낭만’이라는 단어 자체가 진지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지 못하는 듯한 현실에서 ‘낭만주의’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낭만주의는 무려 한 세기 반 넘게 유럽의 근대를 규정하는 시대적 틀거리로 자리 잡고 있다. 치기어린 감상주의적 인용을 넘어 낭만주의의 함의를 제대로 풀어본다면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말에 이르는 복잡한 서구의 역사적 층위들이 동시대의 현상들과 맞물려 상호비교와 해석의 틀거리를 획득할 수 있게 해주는 흥미로운 담론들이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전시 주제 안에서 ‘낭만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은 낭만주의 패러다임의 핵심을 가로지르는 ‘혁명’(프랑스 혁명과 문화혁명, 그리고 그 외의 많은 혁명)에 대한 상호 비교적 반추로 이어질 수 있다. 그 밖에도 혁명의 실패 이후에 나타난 대안적 서사들, 탈-현실과 초월적 관념에의 몰두와 같은 19세기 낭만주의의 핵심적 이슈들 역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오른쪽)김월식 <딜리버리 캐리어(배달가방)> 가방, 마분지, 모니터 2017
식민주의와 오리엔탈리즘, 상징주의 및 대중적, 집단적 기호의 등장, 기술만능주의와 미래에 대한 투사는 동시대 대중문화와 잠재적인 정치성에 대한 예시처럼 읽힐 수 있다. 낭만주의는 넓은 의미에서 20세기의 산업화, 도시화, 기계화, 과학적 진보에 대한 열정으로 이어져 예술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모더니즘과 대중문화의 신화를 구축하는 데 기여하였다. 예컨대, 인상주의의 낙관적 소재들과 표현주의, 미래주의의 환각에 가까운 역동성은 출발에서부터 낭만주의적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나아가 현대적 ‘도시’의 등장은 모든 면에서 삶과 세계의 유리 혹은 새로운 관계성의 정립이라고 부를 수 있을, 동시대 세계의 핵심적 쟁점들과 다르지 않은 이슈들을 창출해냈다. 즉 ‘도시-낭만주의-아시아의 동시대성’으로 이어지는 표제어들의 관계항으로부터 기획자들이 아시아를 새롭게 해석하고자 하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격변하는 기술혁명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새로운 ‘낭만’의 회귀를 목도하고 있는가? ‘낭만도시’는 아시아에서 글로벌리즘과 자유주의가 빠르게 구축해낸 신기루 같은 도시들의 풍경과 그 안에서 벌어진 이주, 해체, 접합, 망각, 소멸의 장면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묵시적 장면들은 19세기가 ‘다크 로맨티시즘’을 통해 보여준 세계의 아이러니하고 비극적인 본질에 대한 직관과 일맥상통한다. 백승우, 김재범이 보여주는 도시의 사실적인 동시에 파편적인 기록들 / 오석근, 안데스의 희극-비극이 교차하는 주변적 공간의 연극적 기록 / 김월식과 이동욱의 서사를 촉발하는 불완전한 오브제들 / 차재, 윤한수의 비-건축적인 건축의 대체물 등은 기획자들이 공동으로 떠올리는 아시아성에 대한 독자적 시선이 어떤 것인지를 예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전시가 ‘자아비판’이라는 또 다른 주제와 결합하면서 해석의 레이어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전시의 예기치 못한 쓰임새와 운동성에 대해 생각할 점을 제공했다.
※ 이 글은 월간미술 2017년 8월호(391호)에 먼저 수록되었으며,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주)월간미술과 콘텐츠 협약을 맺고 게재하는 글입니다.
계원디자인예술대 프로젝트아트 책임교수로 재직중이며, 서울대 서양화과, 파리 국립장식미술학교, 파리 국립1대학 조형예술과 D.E.A를 졸업했다. 제1회 아시아프(2008)과 2012년 서울국제미디어비엔날레 총감독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