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 위치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아시아에 존재하는 중소규모 창작 공간들 간의 직접적 교류를 도모하고자 마련된 “아시아 쿨라 쿨라링(Asia Kula Kula-ring)”전(2016. 9. 1~10. 20)이 열렸다. 이 전시는 뉴기니섬 원주민들의 물물교환 형식인 ‘쿨라’에 착안하여, 어떠한 실용적 이득도 추구하지 않는 증여·교환의 순환을 통해 상호호혜적 관계를 형성한다는 새로운 교류의 방향을 제안했다. 국내 14개 공간, 국외 23개 공간이 부스를 꾸린 3층의 원형 전시장은 전시 공간이자 교류의 장이 되었다. 필자는 이 전시를 통해 이미 문화예술계에 남용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네트워크의 개념에 대해 재고하고, 실효성 있는 네트워크의 활성화를 위해 필요한 조건은 무엇일지 이야기한다.
아시아창작공간네트워크(AASN)에서는 문화체육관광부와 아시아문화중심도시추진단의 주관 하에 2012년부터 아시의 창작공간들과 함께 매년 국제교류 행사를 개최해왔다. 동남, 동북, 서아시아까지 매년 지역을 확장해가며 아시아를 기반으로 공통의 의제를 설정하고 이와 관련한 전시, 포럼, 세미나, 출판 업무가 주된 내용이었다. ASSN의 이러한 활동이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의 사업 취지와 맞아 지속적으로 광주에서 이루어졌지만 올해 5회째를 맞이하면서 이 네트워크 행사는 아시아문화전당의 ‘ACC네트워크 플랫폼’이라는 명칭의 자체사업으로 전환되었다. 그간의 성과도 물론 있었겠지만 으레 이러한 형식은 일시적 만남과 일회적 공론장 형성에 그친다는 아쉬움을 갖게 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아쉬움의 발로로 이번 기획을 담당한 백용성 감독과 안대웅 큐레이터는 “아시아 쿨라 쿨라링(Asia Kula Kula-ring): 자기조직하는 우주”라는 주제로 전시와 세미나를 진행했다.
기획의도에서 밝혔듯 ‘쿨라링’은 인류학자 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Bronislaw Kasper Malinowski)가 발견한 뉴기니섬의 ‘쿨라 교역’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쿨라 교역은 인접하는 섬 간의 의례적 증여-교환 체계로 조개 목걸이나 조개 팔찌 등의 장신구를 바통 돌리듯 계속 주고받는 행위를 말한다. 여기에는 어떠한 실용적 이익도 없으며 다만 ‘쿨라 동료’가 됨으로써 신용이라는 인간적 가치가 생겨나고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역할을 상호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또 장신구가 교환되는 사이에 그에 얽힌 이야기들이 대를 이어 전해지는 역사 전승이 더해진다. 어쩌면 이 쿨라는 우리가 네트워크를 통해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티끌 없는 상태, 일종의 네트워크의 이데아 같은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번 “아시아 쿨라 쿨라링: 자기조직하는 우주”라는 동시대 현상계의 네트워크는 어땠는지 들여다보기로 하자.
전시가 이루어진 아시아문화전당 복합 2관은 다소 독특한 형태를 갖고 있다. 기본적으로 파놉티콘(panopticon)을 연상시키는 원형의 3층 구조인 이곳은 여러 개의 반투명 부스로 나누어져 ‘따로 또 같이’라는 네트워크의 기본적 성질을 드러내기엔 제법 적합한 모습이다. 국내 14개 공간, 국외 23개 공간은 각각의 부스에 자리를 마련했다. 좁은 길에 공방과 상점이 늘어선 바자르(bazaar)의 형태를 지향하는 이번 전시 구성에는 간판과 시장이라는 두 요소가 크게 작용했다. 각 참여 공간은 기존의 공간에서 사용하는 간판 혹은 새롭게 제작한 간판을 시장의 상점처럼 설치하고, 공간의 운영자는 상인이 되어 매대 위에 교류할 만한 물품들을 올려놓았다. 그간 공간에서 전시된 작품, 영상, 도록, 기념품, 마른 벌레가 들어있는 명함, 에코백 등 저마다 고유한 물건들이 ‘쿨라 동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각 공간이 일궈온 시간만 더하더라도 1세기는 되는 분량이니 사실상 제법 방대한 자료들이 파놉티콘 하나에 모여 있던 셈이다. 이미 전승에 전승을 거쳐 왔을 각각의 ‘상품’들에 얽혀있는 계보와 역사는 또 얼마나 다양하겠는가.
쿨라 방식도 제각각이다. 증여, 교환, 판매는 물론이고 같이 춤을 춘다거나 음식을 나눠 먹는 등의 다소 의례적 방식도 공존했다. 경기도 안산에 있는 커뮤니티스페이스 리트머스와 함께 작업을 진행한 안민욱 작가는 부스 하나를 클럽으로 꾸며 ‘알스비안 나이트(arsvian night)’를 열었다. 메인 게스트인 클레어 북숍(클레어 비숍), 수잔 레이싱(수잔 레이시), 타냐 브러쉬(타냐 브루게라)는 못 온다는 전언이 실린 포스터가 전시장 곳곳에 붙어있었다. 참여자들의 ‘부킹’을 유도하는 네트워킹 속의 네트워킹인 셈이다. 아니면 우연한 만남으로 발생한 ‘원나잇’의 관계형성이 과연 우리가 그토록 찬양해마지 않는 관계미학적 가치를 지닌 행위일 수 있는지에 대한 반문일 수도 있겠다. 우리 모두 이미 경험했다시피 ‘뜨거운 하룻밤’으로 실용적 섹스파트너는 되기 쉬워도 우정과 연대라는 장기적 파트너쉽을 구축하기엔 무리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쿨라는 어느 지점에서 유효해질 수 있을까?
한병철은 신자유주의의 통치술에 대해 언급하며 “우리는 정말로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것일까? 우리는 자유롭지 않아도 되려고 신을 발명하지 않았던가? 신 앞에서 우리는 모두 빚(schuld, 이 단어는 죄를 의미하기도 함)을 진 존재다. 그런데 빚은 자유를 파괴한다.”고 했다.1)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역시 자본주의를 종교로 파악한다. 자본은 우리를 채무자로 만드는 신이다. “죄를 씻을 길을 알지 못하는 엄청난 부채의식은 빚을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빚을 보편화하기 위해서 제의에 의존한다.”2) 이러한 부채의식은 책임지지 않을 자유, 시스템에 복무할 자유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어쩌면 현대인에 내재된 이 깊은 신앙심에 맞설 수 있는 의례는 증여와 교환을 기반으로 하는 쿨라일 수도 있다. 물론 이는 감성적 지성에 기댄 구름 속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해와 실현은 다른 문제니까.
자본이 부여한 위계질서에 저촉되지 않는 것이 없는 사회다. 이때 예술은 쿨라가 작동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믿음과 함께 또다시 소환된다. 그러나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는 우리의 절대적 구원자가 아니다. 돌파구를 찾기 위해 마련한 메타모델로써, 동료를 발굴하고 상호호혜적 관계를 맺는 우정의 정치학으로써, 예술이 과연 쿨라가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예술가라는 한 개인을 통해 가능할 수 있는 일일까? 예술가 개인의 인간성에 기대어 쿨라를 구현할 바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예술을 하는 편이 빠를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이 관계 맺는 방식은 과연 쿨라에 적합한 메타모델이라고 볼 수 있는가? 쿨라링, 즉 네트워크는 정말 가능한 일일까?
1) 한병철, 「심리정치」, 문학과지성사, 2015, p.18.
2)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Kapitalisumus asl Religion”, Gesammelte Schriften, 6권, Frankfurt a. M. 1992, pp.100~103 중 p.100.
이제 네트워킹은 더 이상 낭만적이지 않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문화예술계에서 네트워킹에 대한 요청은 끊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늘어나는 추세다. 이렇게 늘어나는 형태들은 공통적인 구석이 있다. 그중 한 가지의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사업비를 받아 네트워크를 도모하는 주체가 있다. 알음알음으로 공간을 섭외한다. 설정된 아젠다는 섭외의 기준이 아니라 데코레이션이다. 무장소성의 장소성을 느낄 수 있는, 맥락을 상실한 장소에서 섭외된 공간들이 일정 기간 아카이빙 방식의 전시를 하고 종료된다. 최근 들어 일 년에만 적게는 한 번, 많게는 네 번 정도 이런 ‘네트워크’를 빙자한 백화점식 사업 제안이 들어온다. 왜 하는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물론 참여하게 된다면 타 지역에 있던 공간 운영자들과 안부도 묻고, 오프닝 뒤풀이에서 술 한 잔하며 세태나 흐름을 논할 수도 있다. 좋게는 다음 작업을 같이 해보자는 제안도 오고 갈 수 있겠다. 그러나 교류가 단지 그러한 네트워크 사업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면 그런 식의 교류가 대체 무슨 소용인가?
물론 네트워크를 요할 때의 명분들은 다양하다. 상호 교류는 기본이거니와 ‘더 큰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연대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경우다. 문화예술계에 빈번한 어떤 불의의 상황이 발생하면 이 문제를 집단지성을 통해 발언하고 해결하자는 목소리들이 나온다. 이는 비단 네트워크를 도모하는 주최 측에게만 윤리적 잣대나 진정성 논리를 들이밀 일은 아니다. 그러한 행사의 취지에 공감하지도 않은 채 행사 참여 이력, 네트워크에 참여했다는 사회적 자본을 얻을 수 있다는 판단으로 눈동자를 굴리며 참여하는 공간들도 문제가 된다. 필자가 소속된 공간 역시 이번 “아시아 쿨라 쿨라링: 자기조직하는 우주”에 참여했다. 돌이켜보면 ‘쿨라’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거칠게 이해한 채 참여했다. 현장 특유의 어수선함,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의 반가움, 새로운 이들과의 술잔 부딪히기로 어영부영 넘겨버린 것이다. 실용보다는 공생의 사이클을 만들려고 했던 ‘쿨라’는 여기 없다.
2012년 ‘아시아 창작공간 네트워크 추진체 구성을 위한 방법론 모색’, 2013년 ‘21세기 포스트 예술 매개 공간, 포스트 국제 미술 프로젝트’, 2014년 ‘아시아 창작공간 네트워크 협의체 강화 및 발전 방안’, 2015년 ‘아시아 미술 관계 기관의 협력과 정보 교환을 위한 조직화된 연합체의 필요성’과 같이 아시아창작공간네트워크에서 마련한 그간의 네트워크 세미나 주제들을 살펴보면 아젠다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체를 꾸려야 한다는 욕망만이 보일 뿐이다. 의제 없이 단체를 꾸리려니 매년 똑같은 이야기를 하다 푸념과 하소연에 그치고 말았을 세미나 모습이 연상되는데, ‘내가 이러려고 네트워크 했나’하는 자괴감만이 가득하지 않았을지. 쿨라교역이 했다던 장신구 바통 돌리기가 ‘쓸데없는 일’이라고 해서 아젠다를 상실한 친목 도모 네트워킹과 같은 ‘쓸데없는 일’이 무마되는 것은 아니다. 쓸데없는 일에도 레벨이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네트워크의 이데아에 가까운 관계, 즉 쿨라링이 가능할 수 있는 배경이란 무엇일까?
“아시아 쿨라 쿨라링” 전시의 부제인 ‘자기조직하는 우주’는 에리히 얀치(Erich Jantsch)의 저서 제목이기도 하다. 이때의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는 생물적, 생태적, 사회적, 문화적 구조들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들의 출현을 밑받침하는 역동적 원리다. 고길섶은 소수문화들의 정치학을 분석하며 그 전략으로 자기조직화, 우발성, 소수성의 역능화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제시하기도 했다.3) 다분히 들뢰즈와 가타리의 논의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이는 ‘아시아의 비영리 창작공간’이라는 일종의 소수문화가 네트워크를 구축할 때도 충분히 적용 가능한 전략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중심성과 주변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별에 주로 사용되곤 하는 지리, 자본, 계급, 정보 등의 잣대를 통해 다시 주변성을 획득하려는 마음가짐으로 네트워크를 조직해서는 곤란하다. 이미 그 잣대나 경계를 만들어내는 권력을 허물고자 하는 내부적 동력이 있는 소수주체-창작공간-들임에도 어째서인지 ‘네트워크 사업’ 아래서는 주변성만이 강조된다. 사실 이번 “아시아 쿨라 쿨라링: 자기조직하는 우주”가 추구했던 것이 이 소수주체들의 연결-횡단의 역능을 발견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활동과잉으로 인해 소진된 상태로 ‘지속가능성’을 외치는 이 업무 과다의 소수문화들이 쿨라링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사실 절대적으로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닐까. 감히 단언해보자면 이때의 시간이란 생각할 시간이다. 한국이라는 장소 특정적인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지원사업을 신청하고 진행하고 결과보고하며 정산하는 노동은 생각할 시간을 없애버리기 일쑤다.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정산을 위한 것인지, 내년의 지원금 수령을 위한 것인지, 회의감의 늪으로 빠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네트워킹을 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일이 되어버릴 뿐이다. ‘바빠 죽겠는데 네트워크는 무슨 네트워크!’ 지속가능성을 외치면서도 더욱더 고립되어 목소리가 잦아드는 일반적인 메커니즘이 바로 이것 아니던가. 자기조직화의 동력을 발견하는 일에, 소수성의 역능에 더 초점을 맞출 수 있을 때 네트워크는 씨실과 날실의 견고한 직조를 일궈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3) 고길섶, 「소수문화들의 정치학」, 문화과학사, 1998, p.132.
네트워크가 에피소드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 실패한 네트워크라는 것은 없다. 목적 없는 조악한 방식의 네트워크가 있을 뿐이다. 올해 “아시아 쿨라 쿨라링: 자기조직하는 우주”가 구축한 자발적 파놉티콘이 노출하는 정보들은 어디로 가 닿을 수 있었던 것일까? 이 네트워크 파놉티콘은 서로를 비판적으로 견제하면서도 증여와 교환이라는 비실용적 매개방식으로 신용을 구축하는 쿨라 동료가 될 수 있는 장소였을까? 오프닝이라는 ‘비범한’ 시간과 장소에 모인 각 주체의 얽힘과 겹침은 충분했을까?
추신: 글의 내용과 관련해 개인적인 혹은 사적인 온/오프라인 네트워크 요청은 언제나 환영이다.
현 <비아트> 에디터, 전 ‘대안문화행동 재미난 복수’ 큐레이터이자 독립큐레이터. ‘아지트집 문화예술특구프로젝트Ⅰ/Ⅱ’(2013, 아지트X 외), ‘전방위예술프로젝트: 환대’(2014, B-Gallery), ‘경매프로젝트:호가’(2014, B-Gallery), ‘비아트마켓2015’(2015, 구 해운대역), ‘민중미술2015 잠수함 속의 토끼’ (2015, 대청갤러리) 등 전시 기획 참여. 음주가무 좋아하면 조르바 되는 줄 알았다가 그저 필요조건임을 깨달은 사랑장땡주의자. 피로사회에서 소진되지 않은 인간으로 살기 위해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