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로맨스: 예술과 포스트휴먼”전(2016. 6. 30~9. 4)이 호주 현대미술관((the Museum of Contemporary Art, Australia)에서 개최 중이다. 이 전시는 한-호간 국제교류전으로 기획되어, 지난해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2015. 9. 22~2016. 1. 24)에서 먼저 선보인 바 있다. 공동 큐레이터인 최흥철과 안나 데이비스(Anna Davis)는 뉴미디어아트 전문 큐레이터로서, 주로 ‘기술’과 관련된 실험적 작품들로 전시를 구성했다. 양국 작가들은 자국의 참조물들을 포함하면서도 인류가 당면한 공통의 문제를 다룬다. 특히 과학적, 정치적, 사회적, 기술적 혁신을 통해 빠르게 변화하는 이 세계에서 인간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를 탐색한다.
훌륭한 예술은 이 땅의 삶에 대한 굵직한 문제들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 준다. 예술은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들에 대해 생각을 집중할 수 있도록 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예술은 또한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줄 수도 있다.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급속한 변화들은 우리 자신과 몸, 두뇌,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 인간과 비인간이 생물권 안에서공존하는 방식에 대해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를 통해 동물이나 박테리아, 바이러스 같은 다른 생명체들이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점점 더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인간의 장(腸) 속 세계, 그 속에서 싸움을 벌이는 일당들의 위계와 경쟁, 우리 몸에 해를 끼치려는 세력에 대항해 면역체계를 보호하려는 집단을 그린 다큐멘터리를 본다면 누구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오래 전부터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것이라고 예측된 인공지능(AI)의 도래는 또 어떻게 되었는가.
예술가들이 이런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이미지 메이킹과 스토리 텔링을 통해 탐구할 수 있도록 할 때, 그리고 대중이 미술관의 널찍한 공간에서 이를 살펴볼 수 있도록 예술가들의 창의성을 허용하고 장려할 때, 과학 정치 사회 기술의 혁신은 선순환에 들어서게 된다. 한국과 호주는 최근 주목할 만한 철학/예술적 모험에 나섰으며, 이 모험에 양국 큐레이터가 참여해 혼종성, 무작위적이거나 고의적인 돌연변이, 생물/생태계의 붕괴, 감정상태, 쓰레기, 인공지능, 슬픔, 초현실적 모습으로 변형된 신체 등의 주제를, 약간의 해학적 요소와 함께 풀어내는 작가들을 불러 모았다.
“뉴 로맨스: 예술과 포스트휴먼(New Romance: art and the posthuman)”이라는 전시 제목은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의 소설 『뉴로맨서(Neuromancer)』(1984)에서 착안하였다. 철저한 기획을 통해 양국에서 개최된 이 전시는 각국이 집중하는 관점의 차이를 드러내면서도 관점의 융합을 보여주기도 했다.1) 한국과 호주는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 아니라 지정학적 위치도 유사하다. 그러나 1950년대에 일어난 한국전쟁을 기억하지 못할 만큼 나이가 많지 않은 대다수의 평범한 시민들은 상대국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서로를 상당히 낯설게 여긴다. 1990년대 호주에서 이웃 국가들과의 친교를 위한 외교적 교육적 노력이 강화되면서, 선구적인 교환 전시들이 열리고 호주 작가들이 한국 레지던시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새로운 세기에 접어들어 정책 방향이 바뀌면서 이러한 노력은 교류 초기에 형성된 개인적 친분 정도로 축소되고 말았다.
한-호 우정의 해였던 2011년이 되자 2차에 걸친 교환미술전 중 첫 번째 전시회가 열렸다. 당시에도 이번 전시와 마찬가지로 주관기관은 한국 국립현대미술관과 호주 현대미술관(the Museum of Contemporary Art, Australia, MCA)이었다. 양국 간의 관념적 격차가 큰 만큼이나 수도인 서울과 시드니도 매우 다르다. 2천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서울에는 줄줄이 늘어선 아파트와 빌딩숲 사이로 고궁들이 점점이 자리한 반면, 역사가 225년에 불과한 도심지인 시드니는 사무실 밀집지역과 영국 식민지 시절 건물들이 무질서하게 뻗어나간 교외 지역과 해변, 숲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인구도 서울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한국과 호주는 민족 구성에 있어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특정한 고대의 유전적 혈통이 이어져 오고 있는 한국과는 달리, 호주는 역사적 혈통에 다수의 이민까지 더해져 지금의 다문화주의에 이르렀다.
1) 나는 한-호 결연과 “뉴 로맨스”전에 대한 기획 논의가 이루어지던 때 여기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별개로 나는 호주의 미술계간지 《아트링크》에서 발간 예정이던 2015년 특집호 ‘한국: 오늘의 현대미술(KOREA: contemporary art now)’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이 기획 역시 양국 간의 정부기관인 호한재단(Austria Korea Foundation)으로부터 일부 지원을 받았다).
이러한 면은 첫 번째 협력 전시인 “텔미텔미: 한국-호주 현대미술 1976-2011” 전의 큐레이터 김인혜와 글렌 바클리(Glen Barkly)에게, 그리고 두 번째 협력전을 맡은 최흥철과 애나 데이비스(Anna Davis)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호주 현대미술관 홈페이지에서는 미국과 유럽에서 30년이 넘도록 이어졌던 공동의 예술사적 운동들에 빗대어 첫 번째 전시의 역사적 근간을 언급한다.
“텔미텔미”전은 백남준이 호주를 방문한 해이자 한국의 중요 작가들이 참여한 제 2회 시드니 비엔날레가 개최된 1976년을 출발점으로 삼고, 이들의 작품을 1970년대에서 2011년까지 한국과 호주 양국에서 이루어진 개념미술, 포스트오브젝트아트, 테크놀로지컬 아트의 맥락 안에 구성한다. “텔미텔미”전의 핵심은 양국의 중요한 작가들이 창작한 역사적 작품들을 의미 있게 한 자리에 모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의 작품을 플럭서스나 개념주의 등 최신 예술사조에의 참조, 혹은 그에 대한 영향으로서 탐색하는 것이었다.”2)
2년 뒤, 새 큐레이터 최흥철과 애나 데이비스가 시드니와 서울을 최초로 교차 방문하면서 “뉴 로맨스”전의 작업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 모두 그때까지 상대국에 가보거나 상대국 작가들과 작업해 본 경험이 전혀 없었다. 이 전시는 실험적인 시도로 유명한 현존 화가들의 새 작품이나 근작들의 소개를 전제로 했다. 출품작은 모두 기존의 컬렉션에서 가져온 것은 아니며, 일부는 작업실에서 곧바로 옮겨 왔다. 공공연히 드러내지는 않지만 미술을 한–호 관계 증진의 계기로 삼으려는 외교 전략에서 마련된 이 전시는 적극적이면서도 상상력이 풍부한 두 큐레이터를 양국의 미술관에서 선발하여 마음껏 꿈을 펼치도록 하는 등 기획 단계에서의 능력과 비전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다. 최흥철의 뉴미디어와 예술/과학, 바이오아트에 대한 경험과 애나 데이비스의 뉴미디어 전반에 걸친 폭넓은 경험은 서로 잘 어우러졌다. 언어 장벽과 두 미술관의 상이한 구조 및 정책, 너무 바빠서 자주 가질 수 없었던 큐레이터 간의 대면회의, 서울에서 2015년 9월로 예정된 첫 번째 전시회 날짜를 향해 성큼성큼 흘러가는 시간 등의 문제로 작년 3월에서야 이번 전시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화려하게 새 단장한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이곳의 광대한 복도는 호주 미술관들의 전시 공간만큼이나 넓었다)에서 최흥철과 만났는데, 그가 진행 중인 일은 흥미진진하면서도 한편으론 매우 버거워 보였다. 선정 작품 중 상당수가 기술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희한하게도, 정전이 됐을 때 볼 수 있는 작품은 전시 주제인 ‘예술과 포스트휴먼’과 가장 관련이 깊은 패트리샤 피치니니(Patricia Piccinini)의 조각 작품들과 같이 극히 일부였다.
“뉴 로맨스”전의 출품작 대부분은(서울과 시드니에서 조금 차이가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오늘날 인간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와 연관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책이 더 이상 진짜 책이 아닌 디지털 문자로 구현되고(예:강애란), 춤이 무용수의 팔다리에 부착된 LED 전구들의 움직임으로 보여지며(예: 진시연), 컴퓨터가 우리 생활의 상당 부분을 통제하고(예: 레베카 바우만[Rebecca Baumann], 이기봉 외), 화면에 나타난 우는 남자의 얼굴로 억눌린 슬픔이 표현되는 세상(예: 정승)에 살고 있다. 이 각각의 작품들은 다른 작품들과 연계되어 전체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의미들을 지니고 하나의 문맥을 창출한다. 이소요는 자연계를 바라보면서, 탐욕스러운 시장의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 선인장을 새빨갛고 샛노란 색깔을 띠도록 개량한 거대 한국 산업의 실상을 폭로한다. 비자연적인 방법으로 색깔이 입혀진 이 선인장은 광합성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구식 원예기술을 사용해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초록식물에 접붙여야만 한다. 전시 기간 중 접목 과정을 보여주는 워크숍이 함께 열렸다.
지난해 9월 열린 서울 전시는 스텔락(Stelarc)의 ‘확장된 팔(Extended Arm)’이라는 작품의 퍼포먼스와 워크숍 프로그램과 함께 시작되었다. ‘확장된 팔’은 스텔락이 1980년 ‘세 번째 손(Third Hand)’을 발표한 이후 다양한 버전으로 발전시켜 온 작품 중 하나다. 팔과 관련된 그의 퍼포먼스와 해설은, 보철물을 보기가 그리 어렵지 않은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관객들의 시선을 잡아끌며 전율을 일으킨다. 그의 작품은 예술과 과학이 결합된 작품의 성공이 꼭 기괴하거나 충격적이어서가 아니라 거기에 또 다른 의미가 있기 때문에 가능함을 증명해 보인다. “ 보철물은 결핍의 증거가 아니라 과잉의 상징”인 것이다. 니나 셀러스(Nina Sellars)와 공동 창작한 스텔락의 최신작 ‘블렌더(Blender)’는 두 화가의 몸에서 피하지방을 뽑아내 인큐베이터와 대형 우유통의 중간쯤 되어 보이는 커다란 투명 플라스틱 용기에 함께 담은 작품이다. 가스 실린더와 투박한 하드웨어, 흉측한 노란 물질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스팀펑크적(역자주: steampunk-역사적 배경에 공상과학적 요소를 더하는 것) 느낌은 ‘원치 않는’ 지방을 점점 더 역겨운 방식으로 제거하는 요즘의 행태들을 상기시킨다.
웨이드 메리노우스키(Wade Marynowsky)가 제작한 두 로봇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부르주아 로봇 2의 참한 매력(The Discreet Charm of the Bourgeois Robot 2)’에서는 과도한 크기의 벨벳 후프 스커트가 남근 모양을 형성하는 기다란 목을 자랑스레 내보인다. 이 로봇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대사인 듯한 말을 내뱉으며 공간을 휘젓고 다닌다. ‘문워커(Moonwalker)’에서는 한 쌍의 다리뼈가 커다랗고 붉은 벨벳 공 아래 매달려 흐느적거리고, 이따금 뼈만 앙상한 발이 발끝으로 서곤 한다. 마이클 잭슨이 썩 좋아하지 않았을 모양새다. 정신 나간 모양새를 한 이안 번스(Ian Burns)의 ‘블렌더(Blender)’는 구식 필라멘트 전구가 딸린 설치작품으로, 지글거리는 글씨가 벽에 비춰지며, ‘oh so pretty’라는 문구를 완성한다. 한 무더기의 돋보기가 달린 이 조잡한 기계장치에는 전선이 잔뜩 늘어져 있고, 전자 키보드가 아바(ABBA)의 노래 한 소절을 연주하는데, 물론 주방용 블렌더도 가끔씩 이에 합세한다. 이 모든 것들로 어떻게 이처럼 훌륭한 시적 이미지를 연출해 내는지 번즈의 천재성이 엿보인다.
특히 당혹감을 안겨주는 것은 양원빈의 작품이다. 얼룩지고 구겨진 종잇조각이나 처량하게 망가진 우산처럼 거리에 나뒹구는 도시의 쓰레기가 전시장 안에 등장해, 보이지 않는 로봇공학에 의해 마치 돌풍에 휩싸인 듯 부르르 떨면서 움직인다. 기술과 데이터가 우리로 하여금 자연의 힘-여기서는 눈(snow)-을 이해하도록 돕는다는 이기봉의 반복적 주제는 실리콘으로 만든 팔뚝과 손이 흰색 마커펜을 들고 거대한 유리판 한쪽 면에 반복해서 그려 넣는 작은 동그라미로 표현된다. 몇 주가 지나면 유리판 전체가 다 하얗게 뒤덮이게 된다.
다음으론 포스트 종말론적(post-apocalyptic) 시나리오들이 있다. 헤이든 파울러(Hayden Fowler)는 회색 톤의 테마파크를 배경으로 짐승 가죽 옷을 입은 미래의 혈거인(穴居人, the cave-man)이 하얀 구체(球體)들과 죽은 나무들에 둘러싸인 동굴에서 기어 나오는 모습을 표현한다. 영상으로는 어둡고 생기 없는 수풀 속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 새들이 보인다. 문경원과 전준호의 2채널 비디오는 남녀가 각기 자신에게 운명 지워진 특정한 지옥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여자는 불임 실험실 같은 공간에서 분류 작업을 수행하고 있고, 부스스한 차림의 남자는 폐허가 된 풍경 속에서 근근이 생존하고 있다.
특별히 포스트휴먼적 관점을 보여주는 작가는 패트리샤 피치니니다. 서울 전시에서는 인간과 동물을 교잡한 괴기스러운 초현실적 실리콘 조각 다수가 유전공학의 산물이거나 알 수 없는 미래에 진화할 모습으로 전시됐다. 이 괴상한 생명체들은 때로 평범한 사람과 함께 있는 모습으로 제시되며, 종종 아이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시드니에서 피치니니는 피터 헤네시(Peter Hennessey)와 함께, 한 가족 전체 혹은 일군의 생물들을 위한 환경을 만들었다. 이 생물들은 말랑한 장난감을 닮은 폭신폭신하고 둥그런 몸통에 여러 개의 젖가슴과 입 또는 다른 기관들이 달린 것과 같이 다소 비현실적이고 보다 단순하게 변이되어 있다. 이들은 자체 제작 실험실이자 지저분한 집안으로 설정된 장소에 산다. 주방 개수대엔 이 생물이 탄생했음직한 곳인 플라스틱 비커가 놓여 있다. 이들은 피치니니가 초창기에 제작했던 더 괴기스러운 잡종생물을 가축의 크기로 전환한 버전으로, 창조자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잘 들을 것 같아 보인다.
이 전시를 통해 대단히 뛰어난 작가들의 작품과, 세계의 문화이슈에 한마음으로 동참하고자 하는 큐레이터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소요의 접목선인장이나, 이상현의 레이디 가가가 북한에 있는 모습을 표현한 작품, 지젤 스탠버로우(Giselle Stanborough)의 스크린데이트 비디오, 저스틴 숄더(Justin Shoulder)의 퀴어(queer) 퍼포먼스 작품 등 일부 작품에는 특정 국가와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또 이안 번즈와 웨이드 메리노우스키의 작품 속에는 호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소품들과 웃음을 자아내는 요소들이 담겨 있다. 뉴미디어 아티스트들 모두가 다른 나라를 여행하고 현지에서 작업할 만큼 경제적으로 여유롭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이 활동하는 글로벌한 환경을 고려할 때 서로 다른 나라들 사이에 특정 주제를 가지고 마련된 전시회에서는 개별적인 전시회에서보다 공통요소들이 더 많이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개인적 차원의 아이디어 교환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속한 지역에서는 특히나 더 그렇다. 많은 나라에서 최근 표출되고 있는 외국인 혐오 정서가 계속해서 증가한다면, 예술가와 과학자들의 활동이 그 같은 유감스러운 상황에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호주와 아시아를 기반으로 하는 다음 예술 프로젝트는 어떤 모습일까? 작가들이 직접 전시장에 가서 작품을 설치할 수 있도록 지원받았을 만큼 “뉴 로맨스”전을 통해 저돌적으로 추진된 한국과의 인연이, 공식적인 외교통상 부처들의 지원을 받거나 받지 않고, 호주 기관들을 통해서도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을까? 한국 기관들도 꾸준히 의욕적으로 나서서 호주에서 전시회를 열거나 파트너십을 맺을까?
스테파니브리튼 AM(Stephanie Britton AM): 《아트링크》 매거진의 창립 책임 에디터이며 아시아 현대미술과 문화에 대한 다수의 특별호를 제작했다. 최근작은 2015년 《아트링크》의 ‘한국: 오늘의 현대미술(Korea: contemporary art now)’호. 현재 뉴사우스웨일즈의 바이런베이에 거주하며 아시아-호주의 출판 프로젝트를 수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