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은 국내 대표 미술상인 올해의 작가상과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후보들의 전시와 수상 소식이 단연 미술계의 이목을 끌었다. 한국 미술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이 두 미술상은 국내 미술현장에서 가장 큰 연례행사로 꼽히기도 한다. 올해 전시를 살펴보며 미술상이 현재까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돌아보고, 2013 미술상전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의구심을 던져주는지 전문가들의 크리틱으로 들어보고자 한다.
작년부터 달라진 ‘올해의 작가상’은 바깥으로 열려 있으려는 미술의 의지를 보여준다. 그동안 미술관 내부에서만 이루어지던 추천과 심의를 10명의 외부 전문가들의 추천을 받아 후보들을 결정하고, 최종 결정에 앞서 후보자들의 진면목을 검증할 수 있는 전시를 통과하게 된다. 누군가 한 명은 수상자로 결정되겠지만, 진행 과정을 다수와 공유함으로써 객관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진행 과정을 외부로 열어놓은 것은 주최 측으로서는 더 번거롭고 수고로운 일이겠지만, 상이 상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필요조건, 즉 대중적 관심을 끌어 모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바뀐 선정 방식의 백미는 후보 작가의 역량이 총집결된 작품이라는 실체를 실시간으로 비교해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미술계 대중들은 물론, 주요 사안의 결정권자들도 피하기 힘든 편향된 정보나 선입견을 배제하고, 원점에서 맨눈으로 후보작들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이다. 미술계의 지배적 제도 및 담론은 작가가 온 힘을 쏟아 생산해온 작품이라는 제1의 참조대상을 정작 소중히 여기지 않았으며, 편견과 대세론, 기싸움 등의 통속적 휩쓸림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자유나 자율과는 다른 이러한 자의성은 대중의 외면과 무관심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평가의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 되어야 할 구체적 생산물에 대한 객관적 분석은 먼 미래 미술사가의 몫으로 남겨놓을 수밖에 없는 요원한 일인가. 작품이 생산, 소통되는 지금 여기에서 객관성에 다가갈 수 있는 합리적인 방식은 없는 것인가.
객관성은 제도와 담론이 있어야만 하는 가장 큰 당위와 명분이다. 미술이 객관보다는 주관, 이성보다는 감성의 영역인 것은 분명하지만, ‘주관’과 ‘감성’이 권력이나 권위의 자의성에 점철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물론 이전과 달리 외부의 위원들이 추천했다고 해서, 최종 선정에 외국 인사들이 2명 참여한다고 해서 객관성이 자동적으로 담보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시장에 가보니 우연찮게도 4명의 후보 작가들에게서 어떤 공통적 흐름이 감지되었는데, 그것은 작품의 진실 및 현실성의 무게중심이 바깥으로 이동한 점이다. 그것은 전대미문의 것을 창조하겠다는 과도한 자의식으로 가득 찬 부담스러운 예술가상과 거리가 있는 긍정적 흐름이다. 온통 주관으로부터 시작해서 주관으로 끝나는 폐쇄적 세계가 아니라 투명했으며, 이 중성적 투명성이 역설적으로 그들의 작품은 물론 개성을 더 돋보이게 한다. 이 중성적 투명함은 일상적 진부함이나 과학적인 건조함과도 다른 것이다. 이를테면 작가의 입김에 흐릿해지지 않아야 할 창, 또는 향수 제조자 및 감식자가 그 스스로는 무취여야 한다는 조건의 충족을 말한다. ‘올해의 작가’를 계기로 살펴본 현대의 예술가는 투명인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영상, 오브제, 회화, 조각 등 매체는 다양했으나 그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 역사, 자연에 대한 관심, 그리고 예술보다 더 진기하고 다양한, 나 이전에 존재하고 있는 그 세상을 전유하기 위한 각자의 방식들이 집요하고 치밀하다. 그들의 세계는 관념적인 도식이나 밑도 끝도 없는 정념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세상을 상영하는 극장처럼 연출된 함양아의 전시실은 다양한 세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공장처럼 제시한다. 전시장에 다양한 접면을 만들어 펼쳐보인 세계, 특히 어떠한 강조점도 없는 무채색 픽셀 하나에는 각각의 논리와 방법이 있는 세계들이 담겨 있다. 펼쳐진 세계는 그 다음에 펼쳐질 세계를 위해 접혀진다. 해부학적 정밀함을 통해 포착하고 분석적으로 드러낸 일상의 이면들은 특이하다. 자연으로부터 떨어져나와 그 자신만의 왕국을 형성한 인간사회는 다시금 자연을 닮아간다. 거기에는 사회가 설정한 합리적인 목표나 전망은 없다. 각 세계를 작동시키는 생산원리들은 맹목과 부조리로 가득하지만 그것은 비극도 희극도 아니다. 그러한 세계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신비한 것이고, 예술은 이 칸막이 처진 사회를 횡단하며 그 세계들을 탐구할 수 있는 주요 수단이 된다. 만물상처럼 펼쳐지는 무대 옆 작은 책상이 고독한 탐구자의 자리이다.
조해준은 현대 미술가로서 받은 훈련과 세련된 어법을 거의 포기한다. 동원된 매체는 영상부터 오브제까지 다양했지만, 하나같이 소박하다. 소박함으로 회귀하는 것이 꼭 현대미술의 관례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현대미술은 원초적 타자와의 교감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말과 글이 작품의 주요 부분을 이루는 작품에서, 복귀된 타자는 미술에서 억압되어온 서사를 추동한다. 그것은 의미의 중심으로 가정된 주체를 끝없이 늘어놓는 그림일기 같은 스타일이 아니고, 아버지를 비롯한 작가 주변의 작은 목소리와 다양한 관점들이 섞여 있다. 그의 작품은 단성적 독백이 아니라, 다성적 대화이다. 나무 액자로 마무리 지은 작품의 틀 거리는 세상을 보는 창으로서의 역할을 자임한다.
신미경에게 세계는 상상의 박물관으로 축약된다. 예술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룰 수 있고 그렇게 예술은 내용으로나 형식으로 대우주를 반향하는 소우주가 된다. 예술이라는 창을 통해 세계를 보고, 세계는 예술을 통해 결정적 표현을 얻는다. 작가는 여러 지역과 시대의 여러 재료로 만들어진 인공물을 비누 조각으로 번역한다. 번역은 완전히 투명할 수 없어도, 최소한 투명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번역, 즉 비누로 다양한 상징적 우주들을 다시 쓰는 작업은 창조자로서의 야심보다는 재창조자로서의 역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태양 아래 새로움은 없다는 것은 예술사를 살펴보면 확인된다. 그러나 번역이라는 과정을 통해 예술을 보다 큰 시공간의 주기 속에 놓으면 변형은 불가피하다. 이러한 변형을 통해 각기 다른 문화와 예술, 그리고 주체가 형성되어왔다. 영원불변해 보이는 원형이나 전형은 무른 비누처럼 가변적이다.
다양한 매체를 섭렵해왔던 공성훈은 1990년대 말부터 회화를 작업의 밀도와 강도를 유지, 확장할 수 있는 가장 진보된 형식, 요컨대 첨단 매체로 삼는다. 인간의 지각과 기억, 운동의 담지체인 몸이 코드화를 통해 전면적으로 길들여지고 관리되는 시점에서 이러한 역행은 무모하면서도 용감하다. 회화로 전향할 무렵 그려진 <자화상>(2001)은 로마가 불타거나 말거나 그림에만 몰두하는 황제 같은 면모를 보여주지만, 이후에 그는 사회와 역사의 무대를 가치중립적인 대자연으로 옮긴다. 크고 작은 사건의 무대에서 자신은 슬쩍 빠진다. 작가는 주체가 아니라, 세계를 분석적으로 조망하는 프리즘의 역할로 한정된다. 자연주의적 정밀함은 세계의 표면을 무한히 확장하였으며, 그 안에 인간의 이야기를 접어 넣는다. 그의 그림에서 자연은 욕망의 회로로부터 자유롭지 않지만, 결코 코드화, 식민화될 수 없는 원초적 힘을 발산하면서 역사와 예술이 놓여야 할 보편적인 맥락을 예시한다.
[사진출처] 국립현대미술관